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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에 이어>
서석대(1100미터)~~
우측 정상은 군사지역이라 이곳이 실제적인 정상.
재밋는 것은 같은 방향에 100미터 밖에 표고 차이가 나지않치만 서석대와 입석대의 분수령이 다르다는.
서석대의 물은 영산강(榮山江)을 거쳐 서해로,
입석대의 물은 동쪽 동복호와 주암호에 담겼다가 보성강(寶城江),섬진강(蟾津江)을 거쳐 남해로.
정상이 보이고~~~
육당이 정상에 올라 이르길,
/주봉 서편으로 커다랗게 널브러진 반석은 수백 명이나 앉음직하고, 그 곁으로 마치 무대의 관람석같이 바위가
기다랗게 층단을 이룬 것도 기이하다. 그 아래로 반월형의 무더기 돌담이 둘린 가운데 땅딸이나무 4,5주가 섰는 것은
분명한 제터이다. 전체로나 부분으로나 해금강(海金剛)을 산 위에 떠다 놓은 것이 무등산의 상봉이다.
대로(大路)로 좇아 서(西)로 내려오면서 한참 상봉을 돌아다보매, 금강산을 쪽구슬 같은 소년의 치아라하면,
늙은이의 빠지고 이지러진 이빨이 무등산이라 하고 싶었다/
제봉도 정상에 올라 이르길,
/정상 봉우리에는 잡목이 없고 다만 진달래와 철쭉이 돌 틈에 무더기로 피어 있다.
낭떠러지 위에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니 과연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기분이다/
이들은 악공을 대동했는데 악공은 좀 떨어진 바위 위(인왕봉이나 지왕봉)에 앉아 퉁소를 불게 했다는.
그곳에서 들려오는 퉁소 음은 천상의 음(音)이였을 것이고 자신들은 이미 신선이.
허나~~~
허나~~~~
<아래 정상 사진은 가져온 것으로 1966년 정상이 통제된 이후 3번째로 열린 지난 4월 28일>
우측이 정상 천왕봉~~
정상이 완전 완전히 망가졌다는. 좀 분하다.
정상은 이리 삼봉(三峰)으로 이뤄졌고.
우측 등산객이 모여있는 전망대 자리가 최초 인왕봉 자리리만 다 파괴되었고.
정상 천왕봉(1187m) ~~
정상은 삼봉(三峰)으로 되어있는 데 天旺峰(천왕봉), 地旺峰(지왕봉),人旺峰(인왕봉) 이리.
정상에 서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광주시는 지리적으로 전남의 정중앙.
쾌청하면 남해,거제도,서해,동남쪽으로 지리산, 제주도 한라산까지 조망되다 보니 군사(공군)요충지가.
지왕봉(地旺峰)~~~
무등산은 광주시, 화순군 이서면,담양군에 걸쳐.
지명에는 시대가 조영되기 마련인데
옛이름은 무진악(武珍岳),서석산(瑞石山),무당산 등등.최초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데 무진악(武珍岳)이라. 조선초에 발간된 '고려사'에는 '무등산은 무진악 또는
서석산으로 불린다' 했으니, 무등산이란 이름은 조선조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얘기.
최남선은 무등산 전체가 당산(堂山)으로 당산에서 무당산이 나왔다고 추론하기도.
또한 많은 사찰과 고승의 전설로 비추어볼 때 '부처님은 견줄수 없이 높다'는 뜻의 '무등등(無等等)'에서 왔다고 보았고.
그래서인지 무등산엔 많은 사찰 흔적에 원효 의상 도선 지공 나옹 무학 보조국사 등 고승과 관련된 전설이 유독 많아.
멀마나 많은 사찰이 있었는지에 대해 육당이 말하길,
/내려오는 길에 깨진 기왓조각이 많이 밟힘을 보아 여기도 전에는 사당이나 절이나 무슨 건물이 있었던 것을 짐작하였다.
영감님(동행한 길잡이)의 가리키는 절터란 것과 고기(古記)에 적힌 것을 합하여 보면 가위 다섯 걸음에 한 원(院),
열 걸음에 한 절(寺)이라 하겠다/
저 지왕봉 바위 사이가 뜀바위로 이곳서 의병장 김덕령이 담력 시험을 했다는 전설이.
또 바로 아래 쪽 '지공너덜'은 김장군이 정상 바위를 깨 던진 것들이라는.
또 광주시에 있는 말바위시장은 김덕령이 정상서 활을 써며 애마와 시합을 했는데 살이 떨어진 곳.
육당의 정상 진입 코스는 장불재~입석대~서석대~정상으로 이어졌던 제봉 코스와는 달랐으니,
규봉암에서 직선 가파른 경사길로 올랐기에 힘들었을 터.
육당이 이르길,
/광석(廣石)은 여기저기 뙈기뙈기 벌려 있으며 응달에는 아직도 봄 온줄 모르는 눈이 지난 겨울 꿈을 그대로 꾸고 있다.
마주 보이는 저기가 상봉이지 하고 올라가 보면, 그 위에 또 봉우리가 있기를 몇 번만에 비로소
앞뒤가 활짝 내다보이는 한 돌 봉우리에 오르니, 이로부터 조금씩 높아 가는 석봉 셋이 놓이고,
다시는 높기를 겨루는 놈이 이 산에서는 고사하고 백리 사방의 동안에는 하나도 있지 아니한 것을 보매,
이제는 의심없이 무등산 정상에 올라선 것을 알았다./
좌가 광주시,우가 광주호,둘 사이에 5,18국립묘지,광주호 아래로 담양읍~~
정상서 육당은 제봉의 상투적인 우와등선 운운과는 차원이 다르게 소회를 풀어내는데,
/토끼만 있는 곳에서는 범 노릇도할 만한 높이다. 만질 듯 하늘에 손은 닿지 아니할망정,
높다 크다 하는 모든 것들이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모두가 눈 아래 깔리고 발 아래 엎드렸다.
자랑하는 것 있는 놈은 자랑하는 그것을 가진 채, 큰 체하는 놈은 큰 체하는 제 몸을 어울러서
나볏이 납작하게 내 앞에 절하는 것을 보면 쾌미가 아니 날 수 없다.
다 깔렸구나,디디고 올라섰구나 함에서 느끼는 정복미(征服味)는 산정에 올라서는 족족 새록새록 취하는
제호탕(醍筺湯: 전통 청량음료 )이다. 높은 산, 큰 산이 무엇으로 빚은 술인지는 모르지마는, 아무 잔에서도
나지 아니하는 맛이 거기서만 퐁퐁 솟아나옴에는 감빨고 연빨고 잔입술까지도 잘근잘근 씹고 싶음을 억제할 수 없다.
어디가 어떠하다느니, 무슨 산 무슨 들이 어떻게 보인다느니 하는 따위는 이루 말하지 말자.
다만 한 가지 실뱀 같은 영산강(榮山江)이 솜씨 있는 상침처럼 해끗희끗 굼트러진 몸을 길게 끌어감이나 적고 말자/
그러고는 詩 한수!
오르고 또 오르고 높다 하지 아니키는,
다닫는 거기가 곧 하늘일 줄 여겼더니,
구름은 발아래 언마는 해가 위에 있더라.
펴다만 손바닥이 금만경(金萬頃) 한뜰이요,
빨아 널은 허리띠가 영산강(榮山江) 흐름인데,
저 앞에 두텁이집은 송광(松廣)이라 하더라.
눈에 언 진달래가 온산을 덮었도다.
봄이 분명 뿌리에서 불과 같이 타건마는,
속에서 벌써 핀 꽃을 알 리 없어하노라.
정상서 펼쳐지는 육당 시야에는
1)금강평야,김제평야가 손바닥만 했고 2)영산강 물줄기는 허리띠같이 보였으며
3)전각들이 즐비한 당대 조선 최고 사찰 송광사가 두껍이집처럼 보였던 것.
정상 주변 철쭉들~~
서석대를 재대로 감상하려면 서석대 정상을 우회해 아래 전망대로 내려와야한다.
앞은 철쭉 군락지로 서석대 최고 장관은 바로 저 철쭉이 피여날 때.
서석대 전망대~~
높이가 10~16미터,길이는 200여미터.
서석대는 광주라는 이름을 만들어냈는데 光州의 '光'은 瑞石의 상서로운 '瑞'에서.
입석대와 더불어 천연기념물로 세계문화유산 등록 추진중이고.
제봉 고경명은 저 형상을 참빗살로 보았으니,
/서석대 낭떠러지의 서쪽에 참빗살처럼 서있는 돌무더기는 높이가 모두 백 척이 넘게 보인다/
최남선은, /진실하고 거짓 없이 말하면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서석이다/라며 감탄을.
춘설헌에 자주 들렀던 노산 이은상도 ' 무등산 기행'을 썼는데 무등산 기행에서 서석대와 해금강을 동격으로 보았다는.
/금강산 해금강을 바다의 서석산이라고 하고 서석산을 육지의 해금강이라 한다면 해금강을 본 사람은 짐작할 것이다/
제봉 표현대로 정말 참빗살이네.수정바위고.
그리고 저게 지질학적으로 더 풍화가 진행되면 입석대 형태가 된다. 결국 무너지면서 너덜지대로.
그래서 육당은 정상의 입석도 서석도 아닌 어정쩡한 정상 바위를 보면서
/얼른 말하면 무등산 상봉은 되다가 그만 둔 서석(瑞石)이요, 언제든지 되고야 말 입석/이라.
실제로 보면 그리스 신전 기둥보다 훨 굵고 크다.
육당은 입석대,서석대를 곧 무등산으로 보았는데,
/서석(瑞石)이니 입석(立石)이니 하는 것처럼 무등산의 무등산 되는 소이(所以)는
깎아 만든 듯한 돌벽 돌기둥을 산 위에 많이 가짐이다/
서석대 바로 아래 쪽에도 다각형을 이룬 입석들이 많고. 육각형이 주류인 가운데 5각형,8각형 등 다양.
이젠 난 제봉 일행과 헤어져야할 때~~~
제봉은 서석대를 들른 후 다시 입석대 쪽으로 내려간 후 남동사면 허리를 돌아 규봉암 거쳐 적벽으로.
이어 마지막으로 동사면을 돌아 끝자락에 자리한 소쇄원(瀟灑園), 식영정(息影亭), 환벽당(環碧堂)을 끝으로
5일간의 대단원을 마쳤고. 지금부턴 나만의 길로 하산!!
반면, 육당은 아래 원효사에서 일박 후 저 산자락을 타고 서석대에 올랐고~~
첫날 원효사 가는 길은 고행,,,당시를 묘사한 것을 읽다보면 절로 미소가.
/발을 내놓으면 물구덩이 얼굴을 긁혀 베는 것은 가시덤불, 올라가 보면 바위 낭떠러지, 내려서 보면 조약돌 너덜.
갈팡질팡 업벅집벅하는 동안에 옷이 갈갈이 나고,신이 쪽쪽이 찢어져 이야기로 듣던 도깨비에 흘린 놈이 되었다.
홰를 만들어 켜가면서 겨우 길 같은 것을 찾았을 때의 기꺼움은 로빈스의 물줄 찾았을 때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하였다.
원효암으로 들어가매 때는 이미 10시가 지났는데 아무 것보다도 깔깔깔하여 웃음이 복받쳐 나온다.
그제서야 산너머로 살그머니 올라오는 달이 얄밉고 말고 손이 자라면 뺨이라도 치고 싶었다./
험난함을 이리도 표현했으니,
/무릎·궁둥이·손·어깨가 그대로 다리 아닌 것이 없다/
다음날 아침 원효사를 출발 서석대 오르는 길에 김덕령의 전설이 깃든 '주검동'이란 데를 지나는데,
/칼등같이 내려온 것을 '주검(鑄劍)등'이라 함은 그 바위 아래 김충장(金忠莊)이 칼 만들던 점(店)이 있었던 까닭이라.
무등산의 설화적 주인은 무론 김장군이라 이런저런 이야기가 퍽 많은데,
이 영감은 말끝마다 덕령이! 덕령이!! 하며 어린 손자 이름이나 부르듯 함이 우습기도 하고 탐탐하기도 하다.
덕령의 생명이 이만큼 허물없이 초동과 농군의 구설에 살아 내려옴이 못내 반가왔다/
그리고는 산 아래 풍광 에 동했는지,
/마당바위란 데를 오르니 창평(昌平)·담양(潭陽)의 송강(松江:정철)일세, 추월산(秋月山)일세,
내지 백양(白羊)까지도 조르르 눈 아래 엎드려 있어 미상불 일컬을 만하며,
봄 새 꽃이나 훨쩍 피면 화전(花煎)터로 사람이 삐지 아니한다 함이 과장한 말이 아닐 듯하다/
저 광주호 아래가 담양,우측이 창평이며 저 멀리 추월산이 보이고.
서석대서 바라본 무등산 북사면~~
늙으막엔 별서(別墅) 하나 짓고 서석대나 오르내리고 싶은데 어떠신지?
광주호 이쪽으론 광주시 충효동이요,건너는 죽향(竹鄕) 담양.(읍내가 멀리 멀리고) 왼쪽 멀리가 5.18 국립묘지.
먼저 아래 계곡은 원효계곡으로 원효사가 있어서 불린 이름. 계곡 왼쪽으로 무등산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원효사가 있고
무등산장도. 원효사 뒷 봉우리가 원효봉,맞은편이 의상봉인데 설정이 북한산의 의상봉,원효봉과 흡사하고.
계곡 아래쪽은 충효동, 애초엔 성안마을( 城內) 이라. 마을이 성처럼 무등산 소능선들로 둘려싸여 안온해서.
바로 성안마을서 의병장 김덕령이 태어났고 자랐고 29세에 옥사로 묻혔고. 신원 후에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와 함께
충효사가 이곳에(광주 충장로의 유래). 2백년 후 정조는 충효리라는 이름을 하사하니 지금은 충효동으로.
무등산은 김덕령의 앞마당으로 얽힌 설화,전설,구전이 즐비한데 바로 원효계곡의 주검동.
(위에서 최남선이 얘기한)그 鑄劍洞으로 전쟁을 대비 김충장공이 무기를 제조했다는 전설이.
원효계곡 물은 잠시 저 광주호에 담근 후 영산강으로. 예전엔 광주호를 흐르던 하천을 자미탄이라.
자미란 배롱나무로 자미탄( 紫薇灘)이란 옛날엔 배롱나무가 냇가에 많았기에 붙혀진 이름.
저 자미탄 주변이 조선 중기 호남가단의 주 활동지로 가사문학의 모태가 된 곳.
정리하면,
1)송순(1493~1582)의 면앙정이 저 광주호 아래에, 대밭에 둘러쌓인채 무등산을 향해. 그는 77세 낙향 후 면앙정(俛仰亭)
을 짓고 그곳서 면앙정가(歌)를. 면양정은 송순의 호로 퇴계가 '하늘이 내린 완인(完人)'라 칭송했던 인물.
그가 1553년 결성한 ' 면앙정 가단'은 당대 호남 제일의 가단.
그의 문하로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고봉 기대승, 백호 임제,송강 정철 등 쟁쟁한 문인들이 찾아들었고.
그의 철학이 닮긴 시 한 수!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한칸은 청풍이요 한칸은 명월이라/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2)광주호 우측 산이 성산(星山)인데 정철이 어려서 자란 곳.
그는 성산 중턱에 자리잡은 식영정(息影亭)에서 성산별곡을 썼고. 식영정은 바로 성산 자락으로 툇마루에 서면 광주호,
무등산이 한눈에. 권주가의 지존 '장진주사(將進酒辭)'도 성산 만수동계곡서. 이 기회에 한번 읇지않을 수없으니~~~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세어가며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여 줄에 매어 가나, 호화로운 관 앞에 만 사람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때야 뉘우친들 어쩌리/
3)식영정 바로 아래엔 부용당(芙蓉堂)과 서하당(棲霞堂)이.
4)광주호 아래 쪽으로 면앙정과 인근해 송강정(松江亭)이,,,바로 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의 탄생처.
성산삼귀(星山三歸)라,,, 정 철은 정치적 패배후 고향 성산에 3번 귀거래로 그때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썼다는.
5)그러면 원림(園林)의 본좌 소쇄원(瀟灑園)은??
광주호 상류 위 자미탄 건너편으로 이또한 성산 부근. 소쇄원 주인은 양산보(梁山甫).
그는 조광조 문하로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귀향되자 화순 학포 양팽손과 함께 스승 따라 이곳 고향에 낙향.
이후 소쇄원을 세우고 평생을 처사로 산 인물.
학포 양팽손은 <산수도>가 유명한데 그는 공재 윤두서,허련으로 이어지는 남종화단의 종조,비조같은 인물.
다음은 제봉이 '유서석록'에서 묘사한 소쇄원의 초기 모습.
소쇄원의 최초 설계도면이라 할수있는 귀중한 자료!
/이곳은 양산보가 지은 것이다. 비단결 같은 물줄기가 집 동쪽에서 담장을 꿰뚫고 흐르는데 그 소리는
구슬을 굴리는 듯 시원스럽게 아래쪽으로 돌아 흐른다. 그 위에는 외나무다리가 걸려 있고 다리 밑 물 속에는
큰 돌이 깔려 있는데 그 바닥에 천연의 절구통이 패어 있어 이를 조담(槽潭)이라 하는데 이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그 물 떨어지는 소리가 거문고를 켜는 소리처럼 맑고 시원하다. 구유통 못 위로는 노송이
걸쳐 있어서 마치 그 위에 덮개를 덮어놓은 것만 같고 폭포의 서쪽에 있는 자그마한 집은 그림배(畵舫)같으며
그 남쪽에는 돌을 포개어 높이 쌓아 올렸고 그 곁에 있는 작은 정자는 마치 양산을 펴놓은 것만 같다.
정자의 처마 앞에 해묵은 큰 벽오동이 서 있고 반쯤 허물어진 정자 밑에도 못(池)이 패어 있는데 통나무에 홈통을 파서
골짜기 물을 끌어들이고 있다.못 서쪽에는 큰 대(竹)가 백여 그루나 옥돌을 꼿꼿이 세워놓은듯 서있어 참으로 아름답다.
이 대밭 서쪽에 있는 연못은 돌벽돌로 된 수로를 통해서 물이 대밭 아래를 돌아 연못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여기에다 물레방아를 장치하여 움직이게 해 놓았으니 이 모두가 소쇄원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절경이다/
6)정철 8세 때 전직 나주목사 김연제 눈에 띄여 지금의 정철이 있게한 환벽당(環碧堂,김연제 별서)은 무등산 끝자락 에.
7)환벽당 옆으로는 김덕령을 기리며 후손이 세운 취가정(醉歌亭)이 있고, 8)취가정 옆으로 독수정(獨守亭 )원림이.
9)수십 그루 배롱나무 고목이 8월이면 더 없이 아름다운 명옥헌(鳴玉軒)은??
광주호 바로 아래 우측 산자락에. 이곳에 1980년 말 시인 황지우는 낙향해 작업실을 꾸미고 '화엄광주'를 썼다는.
이리 무등산 북사면 광주호 일대는,
1)가사(歌辭)문학의 모태요, 2)함양 안의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2대 누정(樓亭)문화의 산실이며,
3)조선 중기 호남사림(士林)의 근거지라는.
퇴계가 '하늘이 내린 완인(完人)'라 칭송했던 송순,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
13년간 논쟁사에 빛나는 퇴계와 사단칠정론의 기대승, 최경창,이달과 함께 삼당시인 (三唐詩人)이라 불린 백광훈,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자 함께 낙향한 소쇄원 주인 영원한 처사 양산보,
의병장 김덕령 & 고경명, 식영정 주인 임억령,서하당 주인 김성원, 송강정 주인 정철,환벽당 주인 김윤제,송익필,임제 등.
이들은 하나같이 누정에 거하며 무등산을 정원처럼 여겼다는.
송순의 면앙정가단,임억령의 식영정가단 등을 통해 이들은 수많은 시문을.
임억령,송강,고경명,김성원은 식영정사선(息影亭 四仙)으로 불렸고.
息影亭 四仙들은 성산의 절경 20곳을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 息 影 亭 二 十 詠 )을.
이는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그러니 정철의 성상별곡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집단창작물!!
저들 간 쉼없는 교감이 가능할 수밖에 없었던게,
1)소쇄원 양산보와 김인후는 사돈간. 2)김덕령과 환벽당 김윤제도 혼인으로 이뤄진 인척.
3)윗동네 식영정 임억령과 아랫동네 서하당 김성원은 사위 장인간.
4)송강 정철은 환벽당 김윤제 눈에 띄여 28세 관직에 나깔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결국 김윤제 외손녀와 혼인.
5)김윤제와 김성원도 먼 사돈으로 인척. 6)송강과 김성원은 환벽당서 동문 수학
7)송강은 이곳서 김인후 스승으로 모셨고 8)양산보의 소쇄원 조성도 면양정의 송순 가이드에 힘입었고.
결국 누정문화,가사문화도,호남사림도 무등산에 귀결!!
사실 우린 주어진 동선에 따라 획일적으로 소쇄원,식영정등을 들르지만 늘 2%가 부족,,,아니 98%일지도.
무등산에 올라 누정문화권 일대를 조망하면 전체 그림이 확~~
그래야 양산보가 성산 자락에 소쇄원을 개원한 이유를 이해할수있다는.
앞 내인 자미탄도 모천은 무등산 북사면 & 동사면 계곡.
식영정 누마루에 앉으면 정면으로 무등산 정상과 서석대가 들어오고,,, 명옥헌,송강정,면앙정도.
아에 송순은 면앙정가 의 첫 소절을 '무등산~~~~'으로 시작.
정철은 성산별곡에서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곳은 성산,자미탄 , 노자암,조대(釣 臺 ) 그리고 서석대 였다는.
환벽당,독수정,취가정의 배산(背山)은 무등이요,내(川)는 바로 자미천.
식영정사선(息影亭 四仙) 고경명이 5일간에 걸친 무등산 등정 마무리를 소쇄원,식영정,환벽당에서 한 이유는??
유서석록 말미를 보면 고경명에 무등이 무었인지를 잘 보여준다는.
/나는 김성원이 만류하기에 식영정에 올라 다시 술을 들면서 한담을 하였다.
이윽고 술에 취해 소나무 밑에서 한잠 깊이 자고 문득 깨어보니 한바탕 남가일몽(南柯一夢)을 꾼 것 같다.
빈 산은 고요하고 솔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는 가늘게 울려와서 꼭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이 허전하다.
돌아보니 서석(瑞石)의 영봉(靈峯)은 의연히 푸른빛을 띠고 우뚝 솟아있다./
송순, 김인후, 기대승, 백광훈, 양산보, 김덕령,고경명, 임억령,김성원, 정철,김윤제,송익필,임제 등등.
분명 저들도 무등산에 올랐을 터. 옛길도 바로 저 원효계곡~서석대~정상삼봉이였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거구.
1571년 3월 21일 고봉 기대승은 제자들과 같이 무등산 규봉에 올랐는데, 그날은 퇴계 이황의 장례날.
그리고 추모시 한수를.
선생은 세상이 싫어 백운향에 가셨는데 / 先生厭世白雲鄕
천한 제자 슬픔 머금고 이곳에 있네 / 賤子含哀在一方
멀리 생각하니 오늘도 무덤에 묻히시어 / 遙想佳城今日掩
사산의 궂은 안개 점점 망망하리라 / 四山氛霧轉茫茫
그런데 의문점 하나.
무등산을 온통 자기 집 안마당으로 살았던 김덕령은 왜 등정기가 없을까?.
형도 같이 전장에 나갔는데 형은 금산전투서 고경명,그리고 고경명 둘째 아들과 함께 전사.
결국 김덕령은 찌질이 선조의 질투심에 29세에 옥사했으니. 이를 목격한 곽재우는 전쟁후 산속으로 들어가버렸고.
그가 영면한 유택과 사당 충장사는 저 아래에. 고경명이 유서석록을 쓴 때는 불혹에 들어선 40세.
서석대로 바라본 중봉,그리고 너머로 광주시~~
우측길은 군사도로. 난 저 능선 타고 하산.
되돌아보니 정상 아래로 철쭉들~~
무등산은 울울창창하고는 거리가 머니 정상 부근은 키작은 관목들과 억새가 주인.
좌로 정상,우로 서석대~~
되돌아 보니 군차량 서석대가 보이고~~
군사도로는 정상까지.
일대가 2008년 까진 군주둔지였으니 최근 이전.
제봉의 말이 생각나네.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요 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은 인간이다./
중봉~~
우측으로 장불재,왼쪽으로 서석대가. 군사도로는 장불재까지 이어지고.
중봉서 바라보 정상~~
앞 억새밭은 몇년 전만해도 군주둔지로 통제구간.
중봉 능선은 저 mbc송신소로 이어지고~~
되돌아 보니 중봉이~~
mbc송신소 지나 다시 되돌아보니~~
왜 그리도 자꾸 되돌아보는 거지???? 이유는 아래에.
무등산이 멀마나 포근하고 안온한지를 보여주는 사진 네장!
오늘 산행 중 가장 멋스러운 순간.
정상쪽~
정상 아래~~~
그 아래 원효계곡~
저 아래 광주호~~
난 중봉에서 한참을 놀았지,와이드 스크린으로 펼쳐진 전 풍광들에 취해.
우러르니 두루뭉실 정상이 포근하고. 굽어보니 비단을 주욱 펴놓은듯,초동되어 나뒹굴고 싶어.
실눈 뜨면 멀리 아늑하고. 자,사진들을 다시 봐. 저기에 等級이 差別 어디 있겠어??
참으로 맞춤한 이름, 너 無等山! 몇시간 전 입을 떡 벌리게 했던 입석,서석대도 지금의 포만감엔 미치지 못해.
설악산은 시도 때도 없이 날 긴장시키지. 허나 입석 서석대의 파문을 제외하면 무등산은 시종일관 안온케.
1100미터를 어떻게 올라왔는지,토끼몰이 온 뒷동산 처럼 신났으니.
철쭉의 붉은 카펫에도, 연두빛 새순에도, 신록에도, 만산홍엽에도, 설경에서도 늘 이러하겠지.
'勝處傷心自哀'라~~~
경치 좋은 곳에 오니 마음이 저절로 슬퍼진다는. 중봉에 텐트치고 1년에 네번만 묵었으면.
근데 근데말이야,,,왜 천하의 육당은 저 풍광을 놓친거야?? 육당 당시 나이 35세, 불혹에 못미쳐서??
1년을 3년으로 살 사람이였으니 연륜의 근수야 장난이 아닐터인데.
여하튼 나의 이번 무등산 최고 감동처,승경처는 중봉서 바라본 저 풍정들. 저러니 무등산은 사람들을 불러모았겠지.
정리하자면, 중봉서 바라본 정상&원효계곡 >>>>>>서석대>>입석대.
음악은 베토벤 전원 교향곡 2악장 Andante molto mosso. 자연이 베토벤에 속삭이는 선률이지.
내겐 무등산이 들려주는 대자연의 찬가이고.
미학 이론에 '오브제'란게. 길가에 돌 하나도 예술가가 혼백을 불어놓으면 그 돌은 예술이 된다는.
돌 하나도 예술이 되는데 하물며 저 무등임에야.
빠진게 하나 있으니 먼저 익숙한 그림 ~~
사과밭, 1937, 73×91cm
인상주의 화풍의 오지호(吳之湖)의 대표작~~~
저 위 광주호 상류로 난 길을 따라 굽이 굽이 넘으면 화순군 이서면~동복댐(적벽)~동복면에.
이는 무등산 북사면~동사면~남사면을 걸치는 길이고.
제봉 일행의 무등산 답사 마지막 길(역순)이기도 한데 제봉은 적벽에서 저 길을 따라 소쇄원,식영정에 왔고.
바로 적벽이 있는 동복이 인상주의 화풍을 토착화시킨 오지호(吳之湖,1905~1982)가 태어난 곳.
그는 도쿄 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근대 유화 1세대 고희동, 나혜석 영향을 받은 근대유화 제2기.
김주경(월북)과 함께 최초로 원색 화집을 제작, 어두운 화폭에 갇혔던 민족의 빛과 영혼을 밝은 빛으로 채색하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1928년 김주경 등과 서양화가 단체인 녹향회(綠鄕會)를 결성하고 일제의 감시 아래 전시회도.
그런 그가 1948년 광주로 낙향 조선대 교수로 재직(홍대의 김환기라면 조선대 미대는 오지호).
82년 교통사고로 죽을 때까지 1960년 부터 무등산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는. 무등산 그림을 많이 그렸고.
세간에선 '무등산 주인은 둘이니 하나는 남종화 의재 허백련이요,또하나는 서양화 오지호'라.
본격 하산길에 동화사 옛터~~
덕산너덜~~~ 저 위서 내려왔고.
동화사터 바로 아래로 보통 덕산 너덜겅이라.
너덜겅은 암석 무너진 것이 산비탈에 덮인 것을 이르는 이 지역 방언
무등산엔 너덜 지대가 몇 있는데 규봉암 인근 지공(指空)너덜(길이만 2키로)과 바로 이곳의 덕산(德山) 너덜이 대표적.
그런데 특이하게도 둘의 이미지가 하나는 '聖'으로 하나는 '俗'으로 상반된다는.
덕산너덜에 대해 제봉이 이르길,
/덕산너덜은 소나기가 갤 때면 몰래 숨어 있던 이무기가 나와 햇볕을 쬐는데 몸을 칭칭 감고 도사리고 있어서
사람이 접근할 수가 없다고 한다. 또 어느 스님이 보았더니 지나는 노루 한 마리를 어떤 괴물이 잡아채어
돌 사이로 들어가는데 햇빛에 번쩍거려 놀란 적이 있다고 한다./
반면에 지공너덜에 대해서는 청정하게 전하는데,
/지공너덜은 벌레나 뱀 따위의 기어 다니는 짐승이 없다.
가을날 나뭇잎이 산에 가득해도 언제나 청소한 것처럼 나뭇잎 하나 없고.
이는 스님들 사이에 전해지기를 고승 지공이 그 제자들에게 설법하던 곳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비스럽게도 묘사하는데,
/지공너덜은 난석(亂石)이 서로 괴어 산처럼 쌓였고 그 속은 깊게 비어 있어 바닥이 없다.
어떤 사람이 나무하던 도끼를 잘못하여 빠뜨렸더니 그 쇳소리가 한식경 만에 들렸다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는.
정상,입석,서석대와 가까운 지공너덜 주변은 무등산 최다 사찰 지역임에 반해 덕산너덜 쪽은 빈약하다는.
지공(指空)이 누구이던가??
인도서 온 지공은 나옹화상의 스승이요,나옹은 무학으로 이어지니 고려말 불교계의 최고 선승.
나말선초 이 시기 불교계는 3인의 시대라 봐도 무관.
그런 지공선사와 나옹선사(1326~1383)가 수도를 했으니.
지공석굴 외에도 보조국사가 송광사에 가기 직전 수도했다는 보조석굴도 있고.
또 지공너덜의 돌들은 김덕령이 하루 아침에 정상의 돌을 내던져진 것이라는 전설까지.
이리저리 덕산은 지공너덜의 상대가 안된다는.
토끼등에서 수선화~~
덕산너덜에서 한참을 내려오니 5부 능선에 토끼등이. 토끼등엔 원효사 쪽에서 이어지는 임도가 나있고 중간엔 '늦재'가.
늦재는 광주시와 원효사 계곡을 잇는 중간으로 옛날 나무꾼들의 주요 루트.
해방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무등산은 광주시민의 주 연료 공급원.(그래서 무등산이 고목이 없는건가??)
매일 수백 나무꾼들이 몰려들어 땔나무를 해다가 대인시장,양동시장에 내다 팔았고.
그래서 '초동들이 부는 늦재의 풀피리 소리'라는 '만치초적(晩峙草笛)'이 생겼고.
늦재에서 들려오는 나무꾼들의 풀피리 소리가 아름다워 이는 ' 원효 8경'으로.
육당은 최남선은 이런 나무꾼들을 직접 목격하는데,
/ 광주쪽으로서 나무꾼들이 열씩 스물씩 떼를 지어 방고(方鼓:지게)를 울리며 <저건너>를 부르며 들어온다.
하루에도 천명 이상씩 빈 지게를 지고 들어와서는 허리가 척척 휘어지게 지고 나간다./
물론 <저건너>라는 노래는 창가일 것이고.
남도 무덤가엔 유독 동백이 많아. 옛 사람들은 목백일홍을 많이 심었고.
무덤 주위로 빙둘러 겨울이면 푸르게,봄이면 붉게 타는게 영역 표시로 분명해서려나.
증심사 뒷편으로 하산~~
증심사 뒷편의 삼애다원~~
왼쪽 부터 살구,매화, 자두
좌측이 매화,우가 자두~~
살구~~
명자꽃~~~
다시 증심사~~~
&&&....
유서석록 말미에는 제봉이 무등산 답사기를 쓰게된 이유를 밝히는데,
/나는 김성원(서하당 주인)이 만류하기에 식영정에 올라 다시 숲을 들면서 한담을 하였다. 이윽고 술에 취해
소나무 밑에서 한잠 깊이 자고 문득 깨어보니 한바탕 남가일몽(南柯一夢)을 꾼 것 같다. 빈 산은 고요하고
솔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는 가늘게 울려와서 꼭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이 허전하기만 하다.
돌아보니 서석(瑞石)의 영봉(靈峯)은 의연히 푸른빛을 띠고 우뚝 솟아 있다. 임 선생(광주목사)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나 후일에 다시 선생을 모실 기회가 없을지라도 이 기록을 펴봄으로써 선생과 함께 친히 이야기하고
즐기던 그 날을 회상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컨대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며 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은 인간이다. 뵈올 날이 많지 않을 것이니 이 산에 오르면 그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참으로 산은 인간에게 말없는 교훈을 준다. 그러나 산에 오르려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내가 서석에서 느낀 감상을 알아줄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석양에 평상복 짚신 그대로 임 선생댁을 찾아 작별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서 친구들과도 헤어져 돌아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니 며칠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린 것만 같다/
-선조7년(1574년) 갑술 5월 초일에 장택산인 고경명은 기록한다-
요약하면,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며 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은 인간이다.
다음에 무등산에 오르면 광주목사와 일행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참으로 산은 인간에게 말없는 교훈을 준다.
다시 문빈정사~~~
등산화 씻는 세탁조(槽)도~~~
***별책부록***
지난 토요일 백화점에서 무등양말을 찾은 이유는??
창업자가 금산전투서 전사한 제봉의 둘째 학봉 후손.
조선 시대 최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제봉 고경명(1533-1592)
본관은 장흥. 그는 중앙서 홍문과 교리등을 역임하다 60세 낙향. 낙향 직후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았고 그해 생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둘다 대과 급제한 두 아들 종후(從厚),인후(因厚)를 이끌고 전장에. 초기엔 김덕령도 제봉 휘하에.
무등산 출진에 앞선 마상격문(馬上檄文)은 식자층에 명문으로 통하는데,
/옷소매를 떨치며 단상에 올라 눈물뿌리고 군중과 맹서하니, 곰을 잡고 범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처럼 바람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 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한다/
의병 6000을 이끌고 북상 중 금산전투에서 제봉은 둘째 아들 학봉(鶴峯) 인후(因厚) 와 함께 전사.
당시 제봉 60세,인후 32세. 충장공 김덕령의 형도 이때 전사.
다음해 첫째 종후 (從厚) 는 숙부 경형(敬兄)과 함께 김시진 휘하의 진주성 전투서 전사,,,당시 종후 40세.
또 동생 경신(敬身)은 제 주도로 군마를 조달하러 갔다 풍량에 익사. 그러니 제봉 3형제에다 제봉의 두아들 총 5명이 전사.
그래도 당시16세 막내아들 청사(晴沙) 용후는 살아남았으니 집안을 건사하라는 아버지 제봉의 당부에 따라.
임란 후에 대과에 급제한 용후는 모든 기록들을 정리하여 세상에 남겼고.
그래서 '無晴沙 無霽峯'라는 말이,,,청사가 없었더라면 제봉 집안의 행적도 남아있지 않았을 거라는.
제봉의 아들 가운데 후손이 번창한 이는 둘째 학봉.
학봉의 후손들은 담양 옆의 창평(昌平)에 대대로 거주했는데 학봉의 처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
원래 본관은 장흥이지만 학봉의 후손들이 창평에 많이 살았던 탓으로, 흔히 '창평 고씨'라.
창평(昌平)은 담양읍 바로옆 성산 바로 뒷쪽이니 당연 정자문화권에 속하고.
지난 3월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 있는 의병장 고광순(高光洵:1848~1907)순절비~
구례 연곡사서 전사한 한말 의병장 고광순(高光洵)도 학봉 11대손.
그는 연곡사에서 광양만을 통해 들어온 일본군과 전투 중 순국. 당시 나이 60세로 제봉도 60세.
당시 12명 전사자도 거의가 고씨 집안 사람들. 구례 사람 매천 황현은 고광순의 행적을 '매천야록'에 사실을 남겼고.
의병장 고광순을 도와 일체의 경비를 댄 사람이 있었으니 천석꾼 고광수.
고광수 역시 '창평 고씨'로 고광순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며 천석의 재산을 군자금에.
담양 창평에 있는 호남 최초 근대학교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운 사람도 학봉의 후손.
여기서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가인 김병노가 어린시절에 배웠고.
여담으로 무등양말 창업자 고일석. 학봉 후손인 고씨는 선대의 인재양성 전통에 창평고등학교와 창평중학교를 설립.
광주시에 포충사(褒忠祠)가 있으니, 고경명(高敬命)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 유팽로, 안영을 모시는 사당.
유팽로,안영은 당시 제봉 부장들. 대원군 사원 철폐 때도 하서 김인후의 장성 필암서원과 함게 살아남았고.
삼부자 불천위(三父子 不遷位) 집안으론 전국 유일. <조용헌의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참고>
........................wrtour 님의 글
첫댓글 우와~
들꽃님이 누구인지 몰라도
대단한 산악인가 봐요
어머니품같은 무등산(1,187m)은 참으로 좋은 한국의100대 명산중의 명산입니다
저도 얼마전에 알았어요
서석대는 광주광역시 관내이고
입석대는 전남 화순군쪽이라는걸
얼마전 청하님과 산장- 꼬막재 - 규봉암 - 바람재 - 중머리 - 증심사쪽으로
하산한적이 있습니다
좋은산 소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풀록스님 제가 올린 글이 절대 아니고,
무등산에 관해 너무나 자세히 올려놓으신 글이 있기에
허락하에 가져왔답니다.
우리가 늘 찾는 어머니같은 무등산에 대해
너무 무지했었다는 제 생각에서 말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도움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넉넉한 산세에 화려한 풍광, 기암괴석, 풍부한 문화유산, 게다가 학문과 예술, 애국충혼까지 두루 갖춘
호남의 명산 무등산에 대해 많은것을 알려주셔서 감사~~~
이글만 다 읽으면 무등산 안가도 되겠다. ㅋㅋ
참 자상하게 잘 설명되어진 글 잘 보고 갑니다~~~
옛 선조들의 충혼과 발자취가 고스란히 무등의품안에서,....
우리의 문화유산 아끼고 사랑하여 대대손손 자랑스럽게 여겨지기를~~~
국립 광주박물관 입구 카페 이름이 자미탄 이더이다..
잘 보고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