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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테스트
□ 본문 : 창세기 44장 1-34절 (봉독은 14-17, 32-34)
요셉은 형제들의 자루에 곡식을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동생 베냐민의 자루에 자신의 은잔을 넣습니다. 베냐민을 통해 형제들을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형들이 진정으로 회개했는지, 그래서 애굽 땅에 내려올 준비가 되어있는지 말입니다. 왜 베냐민입니까? 베냐민은 한마디로 작은 요셉이기 때문입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는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미워했습니다. 그러던 형들에게 요셉을 죽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아비지의 보호를 벗어나 홀로 형들에게 온 것입니다. 10대 1입니다. 어린 요셉은 힘으로 형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요셉을 죽여도 아무도 모릅니다. 물론 유다의 제안으로 요셉을 죽이지 않고 노예를 팔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형들은 악한 짐승이 요셉을 잡아먹은 것처럼 꾸몄습니다. 요셉의 옷을 찢고 숫염소의 피를 적시고 아버지 야곱에게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했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37:32) 자신들의 눈에 가시와 같았던 요셉을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형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그렇게 아파할 줄 몰랐습니다.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잡아 먹혔다고 생각한 야곱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했습니다.(37:34) 아버지 야곱이 그렇게 애통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야곱의 애통을 보면서 자기들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형들의 마음을 힘들게 했던 것은 죄책감이었습니다. 요셉이 사라지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죄책감은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할 때보다 자신들의 마음을 더 괴롭게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요셉의 일을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이자 서로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42:21) 형제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괴로움이 요셉에게 지은 죄로 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애굽에만 곡식이 있고 주변 나라들은 기근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애굽 총리가 곡식을 사러오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형들이 정탐꾼으로 오해받는 상황에서 요셉의 일을 떠올렸던 것은 그들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들은 괴로운 일을 당할 때마다 제일 먼저 요셉에게 지은 죄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행한 악한 일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20년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떨쳐버리려고 하면 더욱 달라붙었습니다. 이것이 죄책감입니다. 회개만이 모든 죄책감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요셉을 잃어버리고 야곱은 라헬이 낳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에 더욱 집착했습니다. 편애정도가 아닙니다. 형들이 보기에 아버지 야곱의 생명과 베냐민의 생명은 하나로 묶여 있었습니다.(30) 그렇다면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것처럼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베냐민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을까요?
상황은 20년 전과 똑같습니다. 형들은 베냐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베냐민을 생명처럼 붙잡고 있던 아버지 야곱도 없습니다. 게다가 애굽 총리의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왔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거짓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그대로를 말하면 됩니다. ‘아버지, 베냐민이 겁도 없이 애굽 총리의 은잔을 훔쳤습니다. 물론 우리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결국 베냐민은 애굽 총리의 종이 되었습니다.’ 요셉에서 베냐민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형들이 똑같이 행동한다면 형들은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에 내려올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요셉의 청지기가 왜 주인의 은잔을 훔쳤느냐고 말하자 자신들은 절대로 훔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9) 그러자 청지기가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10) 훔친 사람만 종이 되면 된다는 것입니다. 훔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종이 될 필요가 없으니 나머지는 가나안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인 르우벤부터 자루를 풀었습니다. 열 번째 스불론의 자루까지 풀었지만 은잔은 없었습니다. 형제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겠지요. 자신들이 훔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요셉의 은잔이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요셉이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숨겨 놓은 것을 형제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예전의 형들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일제히 베냐민을 째려볼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하겠지요. ‘저게 미쳤나? 아니 어쩌려고 총리의 은잔을 훔쳐? 죽고 싶어 안달이 났나?’ 그러나 한 편으로는 다행입니다. 은잔을 훔친 베냐민만 종이 되고 자신들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근히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편애하는데 이 일을 통해서 요셉이 사라진 것처럼 베냐민까지 사라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자신들의 손을 대지 않고 베냐민을 처리할 수 있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자 형들은 옷을 찢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슬픔과 분노 등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생각했던 야곱은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슬펐기 때문입니다. 물론 형들은 옷을 찢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없어져서 좋은데 왜 옷을 찢겠습니까?
그런데 베냐민에게 재앙이 닥치자 형들이 옷을 찢습니다. 베냐민으로 인하여 분노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베냐민과 함께 성으로 돌아갈 일이 없습니다. 은잔을 훔친 사람만 종이 되고 다른 사람은 그냥 돌아가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베냐민과 함께 성으로 돌아갑니다. 아마도 형들은 베냐민이 은잔을 훔쳤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자신들의 자루에 곡식 값으로 지불했던 돈이 그대로 들어있었던 것처럼 이번 일에도 자신들이 모르는 손길이 움직이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설령 베냐민이 은잔을 훔쳤을 지라도 베냐민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베냐민, 아버지에게 생명과 같은 베냐민은 더 이상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떠난 베냐민은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동생입니다. 무엇보다도 베냐민에게 일어난 일은 바로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옷을 찢었습니다. 베냐민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형들은 말로 다할 수 없이 슬펐던 것입니다. 형들을 통해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 정죄하지 않고 슬퍼합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베냐민이 훔쳤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베냐민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옷을 찢습니다. 함께 슬퍼합니다. 이것이 회개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은잔을 훔친 것은 분명 죄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애굽 총리의 은잔을 훔쳤으니 보통 심각한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형제들 가운데 누가 베냐민을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들은 은잔을 훔친 정도가 아니라 동생의 생명을 훔치려고 했습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동생의 인생을 훔쳤습니다.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아가도록 말입니다. 이런 죄인이 누구를 정죄하겠습니까?
회개하기 전에는 자신의 죄는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만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도 얼마나 크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자신은 옳고 모두가 틀렸습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3,4)
그러나 회개하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티를 보고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 안에 들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회개한 사람은 그 사람의 죄를 보고 슬퍼합니다. 베냐민의 죄가 곧 나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죄가 곧 나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죄가, 공동체의 죄가 곧 나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죄가 곧 나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은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슬퍼하며 회개했습니다. 다니엘이 그랬고, 느헤미야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정죄하지 않고 함께 슬퍼한다면 당신은 회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2. 징계를 달게 받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유다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자신들이 훔치지 않았다고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된 이상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냐민이 은잔을 훔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신들은 죄인입니다. 베냐민이 훔쳤다 해도 베냐민만 죄인이 아닙니다. 자신들도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악을 찾아내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악입니까? 요셉을 종으로 팔았던 바로 그 죄악입니다. 그래서 총리가 이 잔이 발견된 자만 종이 된다고 말했을 때, 유다는 총리에게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지금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냐민이 아니라 요셉을 종으로 판 자신들의 죄를 징계하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고백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죄로 인하여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징계도 달게 받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합당한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제가 회개했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징계를 주십니까?’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유다와 형제들은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악을 찾아내신 것에 마음이 놓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죄책감입니다. 정신병의 가장 큰 원인이 죄책감입니다.
형들은 20년 넘게 요셉을 판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습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베냐민만 아니라 우리도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죄 없는 요셉을 종으로 팔았으니, 죄 많은 자신들이 종이 되는 것은 당연한 징계라고 생각했습니다. 형들이 진정으로 회개한 것입니다.
징계를 받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①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12:6)
②징계를 받을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12:9)
③물론 징계는 아프고 슬픕니다. 그러나 징계를 통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 징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자가 되고, 징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징계를 잘 받으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 됩니다.
3. 타하트의 사람이 됩니다.
베냐민만 아니라 자신들도 총리의 노예가 되겠다는 유다의 말에 요셉이 말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형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요셉의 말은 지금의 상황에서 구원의 소식입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으니 어떤 설명도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베냐민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평안히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결과는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만 평안히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이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생긴 것인데 어떻게 자신들만 평안히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었는데 말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은잔을 훔친 베냐민을 자신의 노예로 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심판, 정의로운 심판인데 말입니다.
이때 유다가 나섭니다. 18절부터 34절까지가 유다의 말입니다. 성경기자는 유다의 말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요?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말은 형들이 회개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 아니라, 유다의 말을 통하여 형들과 요셉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형들은 죄책감을 씻어내고, 형들로 인하여 상했던 요셉의 마음은 치유됩니다.
45장에는 요셉의 통곡이 나옵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래서 므낫세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용서했다고 마음의 상처까지 온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나누겠지만, 요셉의 상한 마음이 치유되면서 형들과 요셉의 관계는 온전히 회복됩니다. 야곱의 12아들이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애굽에 내려올 영적인 준비를 마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테스트를 통과하게 한 유다의 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33절 말씀입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베냐민만 종이 되고 나머지 사람은 평안히 가나안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유다는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대신하여’의 원어가 ‘타하트’입니다.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베냐민은 무죄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베냐민은 애굽 총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은 자신이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베냐민이 풀려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베냐민이 받아야 할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베냐민을 대신하여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하트입니다. 타하트외에는 베냐민을 살릴 방법이 없습니다. 이 순간에 유다가 자신이 타하트가 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만약 애굽의 총리가 베냐민을 죽이고 너희들은 평안히 가나안으로 돌아가라고 했다면 유다는 어떻게 했을까요? 유다는 주저하지 않고 베냐민 대신에 자신이 죽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이미 자신이 베냐민을 위한 타하트가 되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다는 은잔을 훔친 심판을 받아야 하는 베냐민의 타하트가 될 수 있었을까요? 먼저 유다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7장은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파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39장은 노예로 팔린 요셉이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종이 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들어갑니다. 그것이 창세기 38장입니다.
유다는 요셉을 판 것으로 인해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안으로 요셉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만약 자신이 가만히 있었다면 장자 르우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아버지 야곱에게 돌려보냈을 것입니다. 결과로 보면 요셉을 노예로 판 주동자는 유다였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유다는 형제들을 떠났습니다. 영적으로는 신앙공동체를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두 아들이 죽고 나중에는, 물론 본인은 몰랐지만,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부끄러운 자리까지 떨어집니다. 그 후에 유다는 다시 형제들에게 돌아옵니다. 신앙공동체로 돌아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유다는 자신이 얼마나 타락한 죄인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신앙공동체가 받아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보면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유다를 용서하셨습니다. 유다는 이 은혜를 알았습니다. 유다가 타하트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유다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유다는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아픔과 슬픔을 알았습니다. 왜요? 자신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유다도 다른 형제들처럼 요셉을 잃어버린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저렇게까지 슬플까, 저렇게까지 아플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두 아들이 죽고 나서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아픔과 슬픔을 알았기에 타하트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타하트 하면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타하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타하트의 사람 유다를 통하여 야곱의 12아들이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타하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자의 축복은 요셉이 받았지만,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영광스럽고 영원한 축복은 유다가 받았습니다. 유다가 타하트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타하트의 사람이 되면 마지막 테스트를 통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타하트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타하트의 사람만이 깨어지고 갈라진 관계를 하나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위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계획하셨습니다. 70명의 가족을 한 민족으로 세우실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시작될 수 없습니다.
죄와 상처로 깨어진 관계는 저절로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상처는 더욱 깊어질 뿐입니다.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유다와 같은 타하트의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하트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을 통해 가정을, 교회를, 민족을 하나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하나가 된 공동체를 통해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 모두는 타하트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타하트가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타하트가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하트가 되시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타하트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날마다 타하트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타하트의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하트의 사람이 되면 마지막 테스트를 통과한 것입니다. 타하트의 사람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기대하십시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로운 역사,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