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행복을 이야기하는 미야모토 문학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최신작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때론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준다.”
- 「산케이신문」 저자 인터뷰에서
일본 현지 신문에서 호평 속에 연재된 후 바로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 작품은 죽은 고모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 남자가 감추어져 있던 비밀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 소설 또한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의 복잡한 마음과 삶의 의미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한층 새로운 작품이 되었다. 기존 작품들과 같이 군더더기 없는 유려한 문장에서 아름다움과 서정성을 느낄 수 있고, 작품 속의 수수께끼를 따라가는 여정은 인생의 불가사의한 진리와 함께 깊은 전율을 선사한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한 남자와 사라진 소녀
겐야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홀로 살던 고모 기쿠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고, 그곳에서 변호사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가 자신에게 400억 원이 넘는 유산을 남겼다는 것. 그러나 고모의 유언장에 적힌 마지막 문장은 겐야를 더욱 큰 충격에 빠뜨린다. 여섯 살 때 백혈병으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던 그녀의 딸이 사실은 유괴를 당해 행방불명된 것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겐야는 사립탐정을 고용해 진실을 추적하기로 마음먹는다.
겐야는 기쿠에가 홀로 생활했던 저택에서 겐야는 작은 단서들을 발견한다. 비밀 상자에 숨겨져 있는 의문의 편지와 노트북의 비밀번호, 창에 달린 무수한 화분 등. 마치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처럼 교묘히 숨겨진 단서들을 바탕으로 그는 비극적인 비밀을 감춘 채 생을 마감한 고모의 일생을 되짚어가기 시작한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생의 선택
그 고독하지만 고고한 삶과 희망에 관하여
이야기의 배경은 대부호들이 모여 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팔로스버디반도이다. 겐야가 머무르는 기쿠에의 저택에는 수십 가지의 꽃과 커다란 나무들이 가득하고, 넓디넓은 정원 바로 앞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을 것만 같은 이 아름다운 땅에서 누군가는 비극적인 인생을 감내해왔다. 잔혹하게 느껴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따뜻하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들 선택을 한 이의 마음과,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선한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풀꽃들은 이러한 간절한 바람의 매개체다. 어머니는 딸을 생각하며 꽃을 가꾸고, 주인공은 그 꽃을 보며 소녀의 안녕을 기원한다.
북쪽 동의 긴 차양이 거베라를 오후의 강한 햇빛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다.
레일라도 서른세 살. 거베라 화분도 서른세 개.
겐야는 마음속으로 이건 억지로 같다 붙인 것도, 우연도 아니라고 확신했다.
_본문 중에서
미야모토 테루는 작품 속에서 완벽하지 않은 인간 생의 고요하고도 쓸쓸한 풍경을 아련한 필치로 그려낸다. 누군가에게는 완벽해 보이는 기쿠에의 삶이 어두운 사연으로 얼룩져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삶은 신의 장난 같은 불가해한 운명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이는 작가가 계속해서 다뤄왔던 삶과 죽음, 행복에 관한 메시지와도 같다. 기쿠에의 말처럼 정말 꽃들에게 마음이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삶 속에서 불현듯 알 수 없는 불행을 만났을 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는 희망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수목의 가지와 잎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겐야의 청각에 닿는 것은 좀 더 부드러운, 속삭이는 목소리인 듯한, 마음을 가진 생물의 말이었다. 조금 전부터 겐야 안에서 조용히 계속되던 공포는 사라졌다.
겐야는 중정을 걸어가 꽃들을 바라보며,
“예쁘구나. 정말 예뻐.”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 p.62
한 번만 더 레일라 요코 올컷을 찾아보자고 겐야는 결심했다. 헛수고에 헛돈을 쓸 뿐이겠지만 기쿠에 고모의 확신을 믿어보자. 레일라가 살아 있다는 어머니의 감이다.
나는 과학적인 분석이나 이론적인 데이터보다는 인간의 감을 믿는다.
겐야는 이렇게 생각했다.
--- p.106
겐야는 젖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의자에서 일어나 짙은 오렌지색 거베라의 꽃잎을 만졌다. 도라지의 줄기에 가까운 부푼 부분도 살짝 만졌다.
만지면서 예쁘다, 아름다워, 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 겐야가 할머니에게 배운 비밀 의식이었다.
-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올 거야.
--- p.158
북쪽 동의 긴 차양이 거베라를 오후의 강한 햇빛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다. 레일라도 서른세 살. 거베라 화분도 서른세 개. 겐야는 마음속으로 이건 억지로 같다 붙인 것도, 우연도 아니라고 확신했다.
--- p.273
편지의 맨 마지막 부분에 추신으로, 레일라는 4월 5일에 죽는다, 나는 레일라 묘의 묘석으로 살겠다, 라고 쓰여 있었거든요. 그 의미를 저는 조금 전 겐야 씨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았어요.
--- p.377
교코는 잠에 취한 들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건물 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빈은 눈앞 발코니의 난간을 보고 있는지, 태평양 위에 걸린 달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묵직한 금속제 의자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 p.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