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生誰是我(전생수시아):전생에 누가 나였나
鶴鳴禪師(학명선사) 悟道頌. 1867~1929.
前生誰是我 (전생수시아) 전생에 누가 나였고,
來生我爲誰 (래생아위수) 내생엔 누가 나일까?
今生始知我 (금생시지아) 이제 나를 알기 시작했으니,
還迷我外我 (환미아외아) 나 밖에서 나를 찾은 샘이구나.
근대의 고승인 학명의 성은 백씨(白氏)이며, 법호가 학명이다.
법명은 계종(啓宗)이며, 자호는 백농(白農)이다.
1867년(고종 4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서 아버지 낙채(彩)와 어머니 박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특한 자질을 보였고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했으나, 15세가 될 무렵부터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닦지 못하였다.
이후 학명은 모필(毛筆) 제조기술을 익혀 부모와 두 동생을 정성껏 보살피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나갔다.
학명이 20세 되던 해 갑자기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다.
이에 그는 인생의 무상을 느끼고, 집안 일을 동생들에게 맡기고는 붓 상자를 메고 명산 유람길에 올랐다.
각지를 두루 방랑하던 어느 날,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는 구암사(龜岩寺)에 이르러 당대의 강백(講伯)인 설두(雪竇) 화상의 설법을 듣고 40여명 학인들의 여법하게 묵좌하고 가르침을 받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 받았다.
이에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까운 불갑사(佛甲岬寺)에 가서 환송(幻松) 장로에게 출가를 허락받고, 금화(錦華)화상에게서 법명을 받고 득도(得度)했다.
몇 달 후 금화화상의 상좌가 되었다. 1890년 봄부터 구암사를 찾아가 내전(內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어 귀산사(龜山寺)의 설유(雪乳) 강백(講佰)을 계사(戒師)로 삼아 구족대계(具足大戒)를 받았다.
그 후 귀산사를 비롯하여 지리산 영원사와 벽송사, 조계산 선암사와 송광사 등지에서 이름있는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기를 10여년 하면서, 경-율-론 삼장(三藏)을 널리 통달하였다.
30세 되던 해인 1900년 3월 귀산사의 강단(講壇)에 올라 은사인 금화에게 판향(瓣香)하여 법통을 이었으니,
백파(白坡)선사의 7대 법손이 되고, 설두(雪竇)스님의 증손(曾孫)이 된다.
이때 법호를 받았다.
이후 구암사, 운문사 등 여러 사찰에서 강석(講席)을 열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으니 많은 대중들이 모였다.
그러나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생사해탈에 있는데 이를 얻기 위해서는 경전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32세 되던 1902년 가을에 홀연히 학인들을 모두 해산시킨 다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였다.
이후 그는 십수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학명은 깨달음의 세계를 ‘전생에는 누가 나였으며(前生誰是我) 내세에는 내가 그 누가 될 것인고(世我爲誰) 현재에 내가 누구인지를 알면(現在是知我) 미혹에 빠진 나를 돌이켜 참 나를 찾으리라(還迷我我)’고 말했다.
학명은 1914년 봄 백양사(白羊寺) 산내 암자인 물외암(物外庵)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백양산가’를 지었다.
그해 봄에는 중국 소주와 절강지방을 여행했고, 소주에서 당대의 선지식으로 유명했던 비은(費隱)선사와 수시(垂示)문답을 나눠 선지를 인정받았다.
이윽고 학명은 일본으로 건너가 이름난 사찰들을 살폈는데, 이때 일본의 선학(禪學)을 세계에 널리 선양한 스즈끼 다이세스의 스승인 임제종 본산인 원각사의 관장 석종연(釋宗演) 선사와 만나 필담으로 선문답을 나눴다.
이때 석종연 선사가 학명을 가리켜 “조선의 고불(古佛) 출현”이라고 칭송했다.
1년간의 여행을 마치고 학명은 1915년 고향으로 돌아와 부안 내소사(來蘇寺) 주지로 잠시 있다가, 변산 월명암(月明庵)의 선원(禪院) 조실(祖室)로 있으면서 만허(滿虛) 등과 함께 폐허로 방치되었던 월명선원을 중흥했다.
특히 그는 월명암의 제4대 중창주로서 십여년동안 머물며 후학들에게 깊은 선지를 가르쳤다.
1919년 3월에는 훗날 원불교를 창교한 소태산 박중빈이 월명암을 찾아와 10여일을 머물렀다.
이때 학명이 소태산의 물음에 답하며 불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7월에는 소태산이 자신의 제자이자 훗날 2대 종법사가 되는 정산 송규를 수개월간 학명의 상좌로 맡겼다.
그후 소태산은 월명암 근처 실상사 옆에 두어칸 초막을 짓고 봉래정사라 이름짓고 창교 준비에 몰두했다.
한편 1923년 만해 한용운이 월명암 근처에 있는 양진암(養眞庵)에 잠시 머물다 떠나면서 학명에게 이제 세간에 나오셔서 중생을 제도하시라는 의미의 시를 바쳤다.
이에 학명은 이틀 밤낮을 주장자를 짚고 선원뜨락에 서서 지새우며 고민했다.
마침내 그는 하산하여 퇴락한 정읍 내장사(內藏寺)를 일으켜 세워달라는 당시 백양사 주지 만암(曼庵) 선사의 청으로 주지로 전임했다.
학명은 내장사 중창불사에 앞장서 3년 만에 극락보전(極寶殿)을 중건하고 선원(禪院)을 새로 짓고, 흩어져 있던 부도(浮屠)를 모아 부도전에 안치했다.
참선하는 대중들을 받아들였고, 절 살림을 유지하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해 전답이 80두락에 이르렀다.
그 후 선원을 유지할 경제적 토대로 벼 40여석을 추수할만한 농토를 확보했다.
학명은 항상 수좌들에게 “농사를 지으면서 참선을 해야한다”는 반농반선(半農半禪)을 주창하여, 놀고 먹는 중이라는 비난을 듣지 않도록 당부했다.
특히 학명은 스스로 호미를 들고 일하면서 조사들의 화두(話頭)를 드는 모범을 보였다.
또한 그는 학인들에게 범패(梵唄)와 창가(唱歌)를 부르며 선리(禪理)를 연구하도록 했다.
학명은 내장선원의 규칙으로
“첫째, 선원의 목표는 반농반선(半農半禪)으로 변경한다.
둘째, 선회(禪會)의 주의는 자선자수(自禪自修)하면서 자력자식(自力自食) 하기로 한다”고 정했다.
나아가 아침에는 글을 읽고, 오후에는 노동하고, 야간에는 좌선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이외에도 그는 인근의 어린 학동들을 모아 ‘천수경’과 ‘발원문’을 가르쳐 교화에 힘썼다.
한편 학명은 달마도를 잘 그렸다고 전하는데, 스스로 “나를 보고 혹 달마와 흡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그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나도 그 말이 진실인가 여겨진다”고 찬(贊)을 붙였을 정도였다.
1929년 3월 통도사 극락암에서 수행하던 경봉(鏡峰)과 선문답을 나눈 편지를 주고받았다.
청정과 수행으로써 평생을 살던 학명은 1929년 3월 27일 시자를 불러 양치질과 목용을 마치고 나서, 달마도 좌상(坐像) 6장을 그렸다.
그리고 제자 운곡(雲谷)을 불러 ‘원각경(圓覺經)’의 보안장(普眼章)을 독송하게 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미소지으며 입적하니 세수 63세, 법랍 43세였다.
그가 입적하던 날 저녁 한 줄기의 흰 광채가 하늘 서쪽까지 3일동안 뻗혔다고 전한다.
3일후 다비를 마치니 손가락 세개 넓이의 백색 영골(骨) 한 조각과 오색 사리 70과(顆)를 얻었다.
1934년 12월 학명의 제자 고벽(古碧), 매곡(梅谷), 다천(茶泉) 등이 주도하여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이 찬한 비명(碑銘)을 받아 사리탑을 세웠다.
현재 내장사 부도전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는 ‘백농유고(白農遺稿)’가 있었는데 책 출간을 위해 준비하다 전량 소실되었고 전한다.
이외에도 인생무상과 불교의 자비를 노래한 ‘원적가’ ‘왕생가’ ‘신년가’ ‘해탈곡’ ‘선원곡(禪園曲)’ ‘참선곡’ ‘망월가’ 등이 있다.
학명은 당대에 중국과 일본 불교계까지 조선의 선지를 널리 휘날렸던 인물이고, 특히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선지식이다.
훼손된 월명암과 내장사를 중창하여 지역의 불교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쉬운 글과 말로 불법의 정수를 알리고자 노력했던 선각자였다.
달마도 그리기를 즐겼던 학명은 직접 노동하고 노래부르면서도 치열하게 정진한 수행자이자, 한국 근대불교의 혁신을 위해 평생을 바친 운동가였다.
나아가 그의 이러한 생활불교의 주창은 원불교의 창교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