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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YELLOW WAVE, 한번 더 OK?
'챔피언' 김세진 감독과 경기대 3인방, 그리고 시몬을 만나다
배구 팬들이 흔히 주고받는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남자 배구는 정규리그에서 서로 지지고 볶다 결국 삼성화재가 챔프전에서 우승하는 스포츠다” 스포츠를 ‘극본 없는 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는 대전제인 예측 불가능성을 뒤집는 우스갯소리지만, 이는 적어도 남자 배구에서는 그저 농담으로만 넘길 수 없는 절대명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배구가 2005년 출범한 이래 지난 시즌까지 열 시즌 동안 삼성화재는 무려 8번이나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렸다.(2005~06, 2007~07 V-리그 현대캐피탈 우승) 프로배구의 전신인 슈퍼리그의 역사를 되짚어 봐도 마찬가지. 1995년 창단한 삼성화재는 1997년 겨울리그에 처음 배구사에 등장해 2004년 V-Tour(세미프로)까지 챔프전 8연패를 달성했다. 즉 1997년 겨울리그부터 2013~14 V-리그까지 치러진 18번의 챔피언 결정전에 모두 올라 무려 16번이나 이겨낸 ‘제국’이 바로 삼성화재다.
삼성화재의 우승만으로 점철됐던 한국 배구사가 올해 새로 쓰여 지게 됐다. 아울러 절대명제의 세 번째 ‘반례’가 기록됐다. 바로 창단 2년차의 ‘다윗’ OK저축은행이 팀 역사상 19번째 챔프전에서 17번째 우승 및 V-리그 8연패에 도전하던 ‘골리앗’ 삼성화재를 쓰러뜨렸기 때문.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3승 무패, 아홉 세트를 따내는 동안 단 한 세트만 내주는 완벽한 경기력으로 시쳇말로 ‘발라버렸다’. 그간 현대캐피탈이 4번, 대한항공이 3번 도전했다 모두 수포로 돌아갔던 ‘쿠데타’를 ‘막내’ OK저축은행이 단 일격에 해낸 것이다. 마침 우승을 확정지었던 챔피언 결정전 3차전은 만우절인 4월1일이었다. OK저축은행의 V-리그 정복은 그야말로 만우절의 거짓말 같은 ‘일대 파란’이었다. 어쩌면 OK저축은행이 지난해 10월21일 올 시즌 첫 경기에서 삼성화재를 3-1로 이겼던 것은 이런 결말을 암시하는 서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9일, 기자가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OK저축은행 훈련장을 찾았을 땐 우승의 감격과 흥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상태였다. ‘김세진과 아이들’은 12일 예정된 한·일 탑매치 준비에 한창이었다. 감독 2년차 만에 ‘스승’을 꺾어낸 김세진 감독과 일등공신 로버트랜디 시몬(쿠바), ‘경기대 3인방’ 이민규-송명근-송희채를 만나 우승의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청출어람은 어불성설”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은 지난달 18일 열린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에서 “나도 언젠가는 질 텐데 이왕이면 나와 오래 배구한 사람에게 지면 기분 좋게 물러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번 챔프전은 마음 편하게 임할 수 있겠다”며 특유의 ‘앓는 소리’를 했다. 그 자리에 배석한 OK저축은행 김세진 감독과 한국전력 신영철 감독이 자신과 오랜 기간 사제지간을 맺었음을 의식한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신 감독은 “OK저축은행과 한국전력이 첫 술에 너무 배부르면 안 된다. 올해엔 이 정도만 하고 우리에게 양보해줬으면 좋겠다”며 우승에 대한 의욕을 내보였다.
신 감독의 바람은 반만 이뤄졌다. 언젠가 지면 자신과 오래한 이에게 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말이다. 공교롭게도 패배를 안긴 이가 삼성화재 왕조의 시작을 함께한 김세진 감독이란 점은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김 감독을 만나자마자 가장 먼저 물은 말은 역시 우승 소감이었다. 그간 몇 십번, 몇 백번이나 우승 소감을 밝혔던 김 감독은 “그야말로 기적이죠.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그저 어려운 일을 해낸 우리 선수들이 대견하죠”라며 짧게 대답했다.
OK저축은행의 우승 이후 가장 많이 나온 단어 중 하나가 ‘청출어람’이다. 아무래도 절대 패배를 모를 것 같았던 ‘스승’ 신치용 감독을 ‘제자’인 김세진 감독이 꺾어냈기 때문. 그러나 김 감독은 딱 잘라 부인했다. “청출어람이라니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죠. 아직은 아니에요. 신 감독님은 20년 동안 맨 위에 계셨던 분입니다. 한 번 이겼다고 청출어람이란 말을 하기엔 너무 부끄럽죠. 미디어들은 저와 신 감독님의 관계가 있으니 청출어람이란 말로 포장하려 하지만, 아직 멀었어요. 아직 더 배울 게 많아요”
김세진 감독 스스로 '청출어람'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
청출어람뿐만이 아니다. 이번 OK저축은행의 우승을 두고 ‘기적’, ‘혁명’, ‘유쾌한 반란’ 등등의 수식어가 쏟아졌다. 그만큼 충격적인 결과였던 탓이다. 하나 고백하자면 기자도 3차전서 OK저축은행이 세트스코어 2-0으로 앞서다 3세트를 11-25로 삼성화재에게 내줬을 때 ‘아! 5일 대전 출장 준비해야 하나. 내일 회사 가서 출장신청서 미리 제출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5일은 대전에서 5차전이 열리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1,2차전서 삼성화재가 한 세트도 따내지 못하고 완패했음에도 딱 한 세트만 따내면 반격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른 팀이 상대였다면 OK저축은행의 우승을 확신했겠지만, ‘삼성화재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믿음’이었다.
김 감독도 3차전 3세트를 내주고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김 감독은 웃으며 “불안한 마음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삼성화재가 어떤 팀입니까. 지난 시즌 챔프전에서도 현대캐피탈에 1차전 0-3 완패하고, 2차전 1세트도 내줬지만, 2세트를 역전해 따내더니 그대로 여덟 세트를 내리 이기고 우승한 팀이잖아요. 그래도 우리 선수들을 믿는 마음이 좀 더 컸던 것 같아요. 3세트를 크게 질 조짐이 보이자마자 시몬이랑 주축 선수들을 뺐어요. 괜히 끝까지 뛰게 하면 리듬도 꼬이고 분위기에 휘말릴까봐. 다행히 제 믿음대로 4세트를 이겨내더군요. 배구란 스포츠가 아무리 세트를 크게 져도 다음 세트에 다시 0-0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참 좋은 점이죠”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챔프전 3경기에서 따낸 포인트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겠지만, 김 감독이 꼽는 딱 1점은 무엇일까. 김 감독은 2차전 1세트 23-22에서 따낸 1점을 꼽았다. 당시 OK저축은행은 세트 중반만 해도 18-14로 앞서며 1차전 완승의 기세를 이어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삼성화재의 맹추격에 결국 21-21 동점을 허용했다. 그 세트를 내준다면 삼성화재도 1차전 패배의 충격을 털어내고 대반격이 가능했을 터. 23-22에서 삼성화재 세터 유광우는 이선규의 속공을 택했다. 그러나 OK저축은행 리베로 정성현이 이를 몸을 날려 받아냈고, 송명근이 퀵 오픈을 성공시키며 24-22로 점수차를 벌렸다. 이선규의 넷터치가 이어지며 1세트를 OK저축은행이 25-22로 따냈다. 분위기를 탄 OK저축은행은 2,3세트도 삼성화재를 압도하며 1차전에 이어 또 한 번 3-0 완승을 거뒀다. 챔프전의 판세가 OK저축은행에게 확 기우는 순간이었다.
남자 프로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OK저축은행이 우승컵을 들어올린 날 김세진 감독의 우승 소감 중 눈에 띄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바로 패러다임(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당시 김 감독은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전 선수시절부터 배구의 패러다임을 바꿔왔습니다. 오른손을 쓰다 왼손을 썼고, 세터에서 공격수로도 전향했죠.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최연소 국가대표도 기록도 제가 보유하고 있죠. 선수 은퇴 이후 지도자 코스를 밟지 않고 해설위원을 하다 곧바로 사령탑에 올랐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진성성, 신뢰를 갖고 지도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흡수되려고 노력했습니다”고 말했다.
김 감독에게 ‘패러다임’이란 단어를 꺼낸 의미를 물었다. “그때 말씀 드린 그대로에요.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꾸고, 세터에서 공격수로의 전향 등 개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배구적인 부분도 포함하는 의미였어요. 센터인 시몬을 라이트로 전향시킨 것도. 그간 남자 프로배구를 지배해왔던 삼성화재식의 외국인 선수 위주의 공격배구로 맞선 게 아니라 용병과 토종 공격수가 조화를 이루는 짜임새 있는 배구로 삼성화재를 이긴 것도 마찬가지죠. 아마 7개 구단 중 우리가 가장 빠른 플레이를 하는 팀일걸요”
김세진 감독은 선수 시절부터 꾸준히 배구계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었다 |
개인적으로 이번 김세진 감독의 우승에 의미를 하나 더 부여하자면 그간 V-리그 10년을 지배해왔던 신치용-김호철 체제를 깨뜨렸다는 점이다. 올 시즌 김세진 감독에게 신치용 감독의 챔프전 파트너 자리를 빼앗긴 김호철 감독은 다시 ‘야인’이 됐고, 신 감독은 김호철 감독이 아닌 다른 이에게 최초의 패배를 허용했다. 아울러 김 감독이 드디어 세 번째 우승 감독이자 V-리그 최초로 선수와 감독으로 우승을 모두 경험한 이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기자의 분석을 들은 김 감독은 “너무 거창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고맙죠. 제겐 이번 우승이 OK저축은행만의 배구를 좀 더 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것뿐이에요. 주변에선 젊은 감독이 트렌드라며 제가 그 선봉자라고 얘기하는 데 그것도 역시 과분해요. 다만 프로배구 10년사에 삼성과 현대만 우승했던 것을 깬 것은 큰 의미겠다. 그러나 아직 삼성-현대의 틀을 깬 것은 아니에요. 약자를 응원하게 되는 사람들의 기본 심리에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삼성화재 이외의 우승을 보고 싶었던 팬들의 목마름을 적셔준 정도라고 말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OK저축은행의 창단은 ‘야인’ 김세진의 운명을 바꿨다
시계를 약 2년 전으로 돌려보자. 2013년 5월 OK저축은행(당시 러시앤캐시)는 초대 사령탑으로 당시 KBSN 해설위원을 맡고 있던 김세진 위원을 선임했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김세진 감독은 2006년 은퇴 뒤 2007년부터 해설위원을 맡아 프로팀 코치는 물론 아마추어 지도자조차 하지 않은 철저한 ‘야인’이었기 때문. OK저축은행은 물론 김 감독에게도 상당한 모험이었다. 김 감독은 “창단팀이고 어린 선수 위주의 팀이기 때문에 그 제의를 수락할 수 있었죠. 아마 기존 팀에서 감독 제의가 왔다면 고사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불과 2년 만에 이런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을까. “상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잘 하면 포스트시즌엔 간신히 진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약 7년간의 해설 위원 경험은 감독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김 감독은 “해설 위원을 하면서 ‘내가 만약 지도자가 되면 이런 배구를 해야지’ 같은 특별한 청사진은 없었다. 다만 양 팀의 상황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플레이 패턴이나 흐름을 분석하는 습관이 몸에 뱄다” 삼성화재에서 선수생활을 한 것도 이번 챔프전에서 큰 도움이 됐다고. 삼성화재에서 항상 이겨왔으니까 멘탈 관리나 큰 경기에 대한 노하우 등등.
김 감독이 젊은 사령탑이라 선수들과 나이 차이가 얼마나지 않기 때문에 혹자들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형님 리더십’을 이번 우승의 한 요인으로 설명한다. 실제로 김 감독은 경기 중 작전 타임 때 꾸짖기 보다는 나긋한 말투로 조리 있게 설명하는 장면이 많이 보여왔다. 그러나 김 감독은 ‘형님리더십’도 부인했다. 김 감독은 “프로팀은 특수집단이자 작은 사회다. 규율이나 체계가 없으면 절대 유지되지 않는다. 평소 훈련 땐 화도 많이 내고 다그치기도 많이 한다. 다만 무의미하게 꼬투리 잡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해야 하는 지와 돌아오는 효과를 설명해주며 지적한다. 시합 때 화를 잘 내지 않는 이유는 훈련 때 되지 않던 것이 시합 때 나올 리 없으니까 그런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선수들에게 ‘너 정말 못한다’ 식의 독설은 이민규나 송명근 같은 주축 선수들을 상대로 하는 농담이다. 백업 선수들에겐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며 특유의 소통 비결을 덧붙였다.
감독 2년차를 마친 김 감독에게 ‘감독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한참을 주저하다 “정말 어렵고 긴 싸움의 길이다. 당장 성적이 안 나와 경질되는 한이 있어도 감독을 맡은 이유 중 하나는 제대로 된 싸움꾼을 만들기 위함이다. 정말 외롭고도 힘든 싸움의 길이다”고 답했다. 그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몬은 정말 고맙고 애틋한 선수”
김세진 감독이 우승이 확정되던 순간 가장 먼저 달려가 안긴 선수는 시몬이었다. 창단 첫 해였던 지난 시즌과 2년차 올 시즌 OK저축은행이 달라진 것은 딱 하나. 외국인 선수가 바로티에서 시몬으로 바뀐 것뿐이다. 시몬의 가세로 OK저축은행은 6위에서 우승팀으로 변모했다. 김 감독은 시즌 중에도 시몬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시몬을 ‘난놈’, ‘된 놈’이라며 치켜세웠다.
시몬은 V-리그에 입성하기 전 세계 최고의 센터로 군림하던 선수였다. 김 감독은 “비 시즌간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전문 라이트 공격수들은 몸값도 비싼데다 데려올 만한 자원이 별로 없었다. 그러던 중 시몬을 보게 됐고, 서브 치는 모습에 라이트도 가능하겠다 싶더라”며 센터였던 시몬을 라이트로 전향시켜 데려온 계기를 설명했다.
김 감독이 시몬에게 반한 것은 기량보다도 인성이었다. 시몬은 시즌 내내 무릎 통증을 안고 뛰었다. 그럼에도 불평보다는 솔선수범의 자세로 어린 동료들을 이끌었다. 김 감독이 시몬의 영입에 마음을 굳힌 것도 그의 진정성이었다. 김 감독은 “내가 이탈리아 출장을 가서 시몬의 에이전트를 만난 뒤 석진욱 수석코치와 분석관을 한 번 더 이탈리아로 보냈다. 기량보다 인성을 보라고 주문했는데, 시몬도 아무래도 자신에게 연봉을 줄 사람들이니 석 코치와 분석관에게 잘 했겠죠. 마지막 날 석 코치와 분석관이 시몬과 호텔 라운지에서 작별인사를 한 뒤 체크아웃 처리하다 문제가 생겨 호텔 직원과 실랑이를 했나 봐요. 근데 시몬이 아무래도 이탈리아가 익숙하지 않은 두 사람이 걱정이 됐는지 가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도와줬다더라. 그 얘기를 듣자마자 최윤 회장님의 인가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당장 계약서 받아오라고 명령했다”고 시몬 영입의 후일담을 들려줬다.
만약 시몬이 없었다면 OK저축은행의 우승이 가능했을까? |
시몬의 곧은 심성은 팀을 위한 헌신으로 이어졌다. OK저축은행은 정규리그 중간 중간 삼성화재를 제치고 선두로 올라갈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삼성화재와의 맞대결에서 0-3 완패를 당하며 동력을 잃었다. 바로 지난해 11월20일 2라운드, 그리고 올해 2월10일 5라운드였다. 그러나 특히 5라운드 패배는 챔프전서 삼성화재를 꺾을 수 있는 큰 자양분이 됐다. 바로 시몬이 삼성화재 레오와의 정면승부를 포기하고 팀을 위해 맞추기로 한 것. 김 감독은 “이전까진 시몬이 레오를 만나면 정면승부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5라운드 맞대결서 완벽하게 눌린 뒤 자신보다 레오가 나음을 인정하더라. 이후 많은 대화를 하면서 시몬에게 ‘네가 레오를 완벽하게 누를 수 있다면 정면 승부하자. 그게 안 되면 이민규의 토스대로 가운데로 파고드는 등의 세트 플레이에 집중하자’고 설득했다. 시몬으로선 자존심이 상할 법 한데 팀을 위해 따라준 것에 너무나 고맙다. 이번 챔프전에서도 레오와 신경전이 있었는데도 평정심을 유지하더라. 정말 대단한 선수다”라며 시몬을 치켜세웠다.
시몬은 올 시즌 강서브와 속공, 백어택 등에서 강점을 보였지만, 외국인 선수의 제 1의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오픈 공격에서만큼은 42.86%로 전체 10위에 그쳤다. 시몬의 공격 성공률이 55.38%로 3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무려 71.90%의 어마무시한 성공률을 보인 속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 감독도 이 점에 대해 쿨(?)하게 인정했다. “시몬에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차피 센터였던 선수기 때문에 오픈엔 약점이 있다. 비 시즌간 가르친다고 더 나아지진 않을 것이다. 세터 이민규와 레프트 송명근이 있으니 토종 선수들로 시몬의 약점을 보완해 나갈 것이다”
시몬에 대해 한창 이야기를 나누다 마지막쯤 김 감독은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놨다. “시몬의 무릎이 좋지 않다. 시몬이 아파서 더 이상 라이트 공격수를 못하겠다고 하면 2년 계약이 되어 있지만, 놔줄 수도 있다. 시몬의 선택을 존중할 생각이다. 설사 부상이 더 심해져 내년 시즌 뛰지 못하게 되더라도 바로 내치진 않는다. 수술과 재활 등 모든 방법을 강구해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 다른 리그로 보내줄 것이다. 그만큼 나는 시몬에게 애틋하다”
김세진과 아이들 그리고 석진욱
김 감독은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토종 선수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먼저 팀의 주축인 ‘경기대 3인방’ 이민규-송명근-송희채에 대해 “정말 좋은 선수들이고, 향후 우리나라 배구를 책임질 녀석들이다. 다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셋의 공통점이 뭔가 보여주려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스타일”이라 웃으며 말했다. 먼저 코트 위의 사령관인 세터 이민규에 대해선 “민규의 플레이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머리가 좋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세터 치고는 큰 키(1m91)라 높이도 좋고, 스피드도 좋다. 우리 팀이 빠른 배구를 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민규의 존재 덕분”이라고 칭찬했다. 이번 챔프전 MVP에 오른 토종 주포 송명근에겐 “겁이 없고 공격수로선 큰 장점인 빠른 팔 스윙이 좋다. 게다가 아직도 성장 가능성이 풍부하다. 더욱 좋은 공격수로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고 격려했다. 서브 리시브를 전담하는 ‘살림꾼’ 송희채에 대해선 “희채는 상당히 감각이 좋은 친구다. 그런 감각이 있기에 가장 민감한 작업인 리시브에서 돋보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비교적 단신임에도 블로킹 타이밍이 정말 좋다”고 치켜세웠다.
김세진의 아이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더 궁금하다 |
3인방을 제외하고 가장 고마운 선수로 지목한 이는 주장 강영준. “영준이가 최고참으로써 정말 노력을 많이 했다. 이번 챔프전에서 다른 선수들은 자기 몫을 해줬다면, 영준이는 자기 몫 이상을 해준 선수다. 주장으로서 항상 팀을 위해 희생하면서도 항상 어려운 상황에 코트에 투입돼 분위기를 반전시켜줬다” 강영준이 올 시즌을 마치고 FA자격을 획득했다고 말하자 김 감독은 “당연히 잡아야죠. 영준이 같은 선수 없어요”라며 강한 신뢰를 보냈다.
김 감독이 마지막으로 언급한 이는 석진욱 수석코치였다. 김 감독이 야인 시절 “내가 만약 감독을 하게 된다면 석진욱과 최태웅 둘만 있으면 된다”고 말할 정도로 한양대-삼성화재 후배인 석진욱 수석코치를 아꼈다. “석 코치는 아무리 칭찬해도 아깝지 않죠. 다들 시몬을 데려온 것을 ‘신의 한수’라고들 평하는 데, 우리 팀의 진짜 ‘신의 한수’는 석 코치를 창단할 때 데려온 것이다. 그가 있었기에 OK저축은행이 팀다워졌어요. 참 꼼꼼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한 친구다. 나는 팀을 뒤에서 서포트하고 이끌어가는 ‘아버지’라면 석 코치가 기술적인 부분이나 살림을 챙기는 ‘어머니’다”
최근 현대캐피탈 선수에서 감독이 된 후배 최태웅에게도 당부의 말을 전했다. “소신껏 해라. 갑자기 된 인사건 임시방편이건 감독은 감독이다”라며 “삼성화재 시절 쉬는 날에도 해외 배구를 보며 연구를 많이 하던 후배다. 잘 해낼 것”이라며 확신했다.
무릎이 아파도 시몬은 ‘몬스터’
누가 뭐래도 올 시즌 OK저축은행 돌풍의 주역은 시몬이다. 세계 최고의 미들 블로커라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폭발적인 타점과 블로킹을 앞세워 V-리그 코트에 충격을 불러일으킨 시몬이 있었기에 OK저축은행의 젊은 선수들도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었다.
사실 시몬의 무릎은 시즌 내내 성치 않았다. 김세진 감독이 한국전력과의 플레이오프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도 시몬의 무릎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던 것이 컸다. 어쩌면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에서 김 감독이 “우승한다면 레깅스를 입고 걸그룹 EXID의 ‘위아래’를 추겠다”고 충격적인 공약을 내세운 것도 ‘설마 우승하겠어’라는 마음이 반영된 게 컸다. 실제로 한국전력과의 플레이오프를 2경기 모두 3-2 접전으로 승리한 뒤 김 감독은 “사실 난 우리가 질 줄 알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성치 않은 무릎에도 시몬은 ‘몬스터’였다. 시몬은 플레이오프 2경기서 77점(공격 성공률 56.67%), 챔프전 3경기서 70점(50.45%)를 기록하며 쥬리치, 레오와의 외국인 선수 맞대결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압도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놀라운 파괴력을 선보였다. 시몬에게 이를 묻자 “항상 아팠고, 정말 많이 아팠다. 경기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감독님께 뛰겠다고 했다. 내가 아픈 것보다 우리 팀의 우승이 먼저였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이어 “이런 상태에서 해낸 우승이라 더욱 기뻤다. 우승하는 순간 여태까지 해왔던 훈련이나 고생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더라”며 우승 소감을 밝혔다.
시몬이 더욱 대단한 것은 외국인 선수임에도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냈다는 점이다. 포스트시즌 때는 물론 정규리그 때도 OK저축은행 토종 선수들은 “시몬이 코트에서 분위기를 다 잡아준다”고 고마워했다. 언어가 다른데도 그런 역할이 가능한 게 신기했다. 시몬은 “꼭 말로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에겐 공통어인 사인이 있다. 사인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쉬운 영어로라도 파이팅을 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세계적인 선수로서 다수의 해외 리그 경험이 있는 시몬에게 팀 동료 중 해외 무대에서도 통할 선수가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시몬은 “민규와 명근이가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단 한국과 유럽은 시스템이 많이 다르다. 한국은 어렸을 때부터 숙소생활을 하지만, 유럽에선 대부분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 독립심을 키워야 한다”며 애정 어린 조언을 보냈다. 타 팀엔 누가 있냐고 묻자 시몬은 한참을 고민하다 한국전력의 전광인, 현대캐피탈의 문성민과 여오현, LIG손해보험의 부용찬을 꼽았다.
시몬의 포효, 내년에는 더 많이 볼 수 있을까? |
시몬이 한국에서 센터에서 라이트로 전향했음에도 통할 수 있었던 것은 파트너가 이민규였다는 점도 컸다. 이민규는 국내 최고의 빠른 토스를 보유한데다 속공 토스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세터이기 때문. 시몬도 “해외 리그를 여러 군데 다니며 여러 명의 세터를 만나봤기에 민규와 호흡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경험이 부족한 민규에게 경험을 불어넣어주려 애썼다. 서로가 돕는 최고의 파트너였다”고 인정했다. 이민규의 기량을 수치화하면 몇 점을 주고 싶냐 묻자 “10점 만점에 7점을 주고 싶다. 젊고 빠른데다 터치감이 상당히 좋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 자기 색깔이 부족하지만, 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답했다.
시몬과 한국 프로배구에 대해 논했다. 센터인 시몬이 라이트로 전향해도 통하고, 쿠바에서 그리 큰 이름이 없던 레오가 최고의 선수로 군림하는 게 한국 V-리그다. 게다가 용병이 팀 공격의 50% 이상을 책임지는, 어떻게 보면 약간은 기형적인 배구다. 시몬은 자신이 라이트로서 한국 무대에 올 수 있던 배경부터 설명했다. “이탈리아의 피아첸차에서 뛸 때 팀의 라이트 두 명이 모두 부상당해 우연히 라이트로 뛰게 됐는데, 괜찮았다. 그래서 한국의 OK저축은행에서 오퍼가 들어왔을 때 좋은 경험이 되겠다 싶어 결정했다” 이어 한국과 유럽 리그의 차이에 대해 “공격 배분이 활발한 유럽에선 라이트 공격수가 많이 때려야 20개지만, 한국에선 기본이 50개 정도다. 그렇다보니 유럽리그에선 팀 패배 시 여러 사람이 책임감을 통감하지만, 한국에는 외국인 선수에게 너무 많은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 같다. 나 또한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다”라고 설명했다.
시몬은 ‘딸 바보’다. 시즌을 마치고 휴가를 얻으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바로 딸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시몬은 “하루 빨리 집에 가서 딸과 놀고 싶다”면서 “내년 시즌에도 우승할 수 있도록 열심히 훈련하겠다. 기술적인 면에서 아직 배울 게 많다”고 내년 시즌의 각오를 밝히며 인터뷰를 마쳤다.
OK저축은행의 현재이자 미래 ‘경기대 3인방’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OK저축은행의 ‘경기대 3인방’이라 불리는 이민규, 송희채, 송명근이 불과 프로 2년차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릴 수 있을지 말이다.
2013년 3월 드림식스(現 우리카드) 인수전에서 패퇴했던 OK저축은행(당시 러시앤캐시)는 물러서지 않고 새 구단 창단에 나섰다. 그런 과감한 행보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경기대 3학년으로 대학 배구를 평정하고 있었던 이민규, 송희채, 송명근의 존재 덕분이었다. 2013~14 신인 드래프트에서 2순위부터 9순위까지 우선 지명권을 갖고 있던 OK저축행은 예상대로 세 선수를 나란히 2,3,4순위를 행사해 데려와 팀의 초석을 다졌다. 수비형 레프트로서 서브 리시브를 전담하는 송희채가 리시브를 받고, 빠른 토스워크를 자랑하는 이민규가 공을 올리고, 토종 주포 역할의 송명근이 이를 때리는 그림이 그려지게 된 것이다.
이번 OK저축은행의 우승은 팀 창단의 계기가 됐던 이들 3인방의 잠재력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 한 번 보여준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들 3인방은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네 시즌 더 OK저축은행에서 함께 하게 된다. 2010년 김희진과 박정아라는 초고교급 대어를 바탕으로 창단해 최근 3년간 두 번의 정규리그 우승과 챔프전 우승을 해낸 IBK기업은행처럼 OK저축은행에도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세 선수를 만나 가장 먼저 물은 말은 ‘경기대 3인방’이란 수식어에 대한 생각이었다. 송명근은 “듣기 좋아요. 대학 때 우리 셋밖에 동기가 없어서 대학 시절부터 3인방이라고 불렸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3인방이라 불리면 괜히 어깨가 으쓱하기도 하구요”라고 답했다. 이민규도 “저도 동감이에요. ‘경기대 3인방’이란 수식어에 자부심을 느껴요”라고 말했다.
'지고는 못사는' 송명근 선수에게 '경기대 3인방' 타이틀은 큰 힘이다. |
만약 OK저축은행이 창단하지 않았다면, 셋은 각기 다른 팀에서 뛰었을 운명이었다. OK저축은행의 창단은 이들 셋의 배구 인생을 바꿔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희채는 “행운이죠. 선배들 얘기 들어보면 프로에 가자마자 자리 잡는 게 쉽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프로에선 나를 보여주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것은 곧 출전 기회가 많아야 한다는 뜻인데 우리 셋이 주축이 되어 새 팀이 창단돼 정말 다행이에요”라며 웃었다. 이민규도 “희채 말대로 운이 좋았죠. 얼리(4학년 졸업하지 않고 이전에 드래프트에 나오는 것)로 안 나왔으면 우리 셋은 무조건 흩어지고, 모두 하위권 팀에 가서 적응에 애먹었을 거에요. 다행히 팀이 창단되고 투자도 많이 해줬고, 감독님이 우리 셋을 믿고 써주셨어요. 시몬이 와서 우승도 하고...우리 셋은 운이 정말 좋은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얼리로 프로에 데뷔해 2년 만에 이런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은 했을까. 송명근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만, 언젠가 한번은 할 수 있겠다 싶었죠”라고 막연하게 얘기하자 송희채가 구체적으로 답했다. “시즌 시작 전에 민규랑 명근이는 국가대표로 차출됐으니 제가 말할게요. 시몬이 오고 첫 연습 경기를 하는데, 굉장히 잘 맞는 느낌이었어요. 쟤네 둘이 없어서 최상의 팀도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내심 ‘아 올해 잘 하면 일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이렇게 진짜로 이뤄질 줄은 몰랐죠”
김세진 감독이 젊은 사령탑이라 선수들과 편하게 지내는 ‘형님 리더십’을 연상하곤 한다. 직접 지도를 받는 선수들의 생각은 어떨까. 송희채는 “아무래도 감독님은 어렵죠. 확실히 쉴 때나 식사할 땐 장난도 많이 치시고 편하게 대해주세요. 근데 훈련만 들어가면 얄짤 없어요. 무서워요”라고 답했다. 이민규는 “시합이나 연습 때나 굉장히 냉정하세요. 열정과 차분이 있다면 그 중간 정도랄까”라고 말했다.
김세진 감독은 자기 선수들에게 쓴 소리를 많이 날리기로도 유명하다. 세 선수 모두 팀의 주축이다 보니 칭찬과 함께 독설도 많이 들었다. 각자가 들은 말 중 기억나는 한마디는 무엇이었을까. 송희채는 “딱 두 개가 떠오르네요. 제가 서브 리시브가 흔들릴 때 ‘야! 안 뺄테니까 믿고 해’, 그리고 제가 공을 피하는 모습을 보이니까 ‘왜 피해. 피하지마’”라고 답했다. 이민규는 좀 더 구체적이었다. “제가 시즌 초반에 많이 흔들리면서 (곽)명우 형이랑 자주 교체됐거든요.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트레이드 얘기도 나오고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그때 감독님이 하루는 술 한 잔하고 제 방에 오셔서는 ‘나 너 안 버린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정말 감사했죠” 송명근은 간단했다. “제게 ‘너 배구 진짜 못한다’라고 독설을...근데 저도 제가 못하는 거 아니까 인정 했어요”
송희채 선수의 안정적인 리시브가 OK저축은행 우승에 숨은 힘이었다 |
세 선수와 인터뷰한 9일은 프로배구 시상식이 있었던 다음날이었다. KOVO는 올 시즌부터 각 포지션 최고의 선수들에게 베스트7을 수상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세 선수 모두 수상에 실패했다. 혹 내년엔 저 자리에 서고 싶단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송희채는 “제 포지션인 레프트 두 자리(레오, 전광인)가 모두 공격 위주의 선수들이었어요. 개인적으로 나처럼 리시브와 수비를 전담하는 수비형 레프트인 대한항공의 (곽)승석이형이나 한국전력의 (서)재덕이형이 있었으면 했죠. 아마 제겐 그 상은 먼 꿈일 것 같아요”고 답했다. 이민규는 “제겐 상이 딱히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선수들에게 인정받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경기하다 보면 명성은 뛰어난데 막상 같이 뛰어보면 별로인 선수가 있고, 평범해 보이는 데 ‘정말 잘한다’ 생각이 절로 드는 선수가 있다. 저는 후자 같은 선수가 되고 싶은 게 꿈”이라고 밝혔다.
올 시즌엔 도전하는 입장이었던 3인방은 내년엔 정상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다. 좀 이른 질문이지만, 수성이 가능할지 물었다. 송명근은 “아마 감독님이 더 많은 훈련을 시키실 것 같아요. 훈련만 잘 버텨낸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라고 되물었다. 이민규는 코트의 사령관답게 냉정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은 당연히 있을거에요. 다만 좋았을 때와 내리막을 탈 때의 차이가 적은 팀을 만들고 싶어요. 언제나 상위권과 우승을 바라볼 수 있는 팀으로요”
너무 배구 얘기만 한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세 선수 모두 우월한 기럭지와 준수한 외모로 소녀 팬들의 사랑을 한 몸을 받고 있다. 세 선수가 생각하기에 누가 소녀팬이 가장 많냐고 묻자 세 선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윽고 송희채가 먼저 “팬은 민규가 제일 많아요. 그 다음이 명근이, 그리고 제가 제일 적어요”라고 답했다. 이를 들은 이민규는 “명근이는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공개했으니까 그렇죠”라며 쑥스러워하면서 “그래도 선물은 희채가 가장 많이 받아요”라고 반격했다. 송희채는 “확실히 작년 시즌에 비해서 선물이 늘긴 했어요”라며 씩 웃었다.
이민규 이야기- “세터는 혼자 빛날 수 없다”
배구에서 세터는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지만, 빛이 잘 나지 않는다.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득점을 올리는 공격수에게 집중되기 마련이기 때문. 그러나 OK저축은행의 경기는 다르다. ‘아! 이민규’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때가 많다. 동급 최강의 빠른 토스를 보유한 이민규는 생각지도 않은 타이밍에 속공이나 시간차, 중앙 백어택 등 다양한 공격루트로 상대 수비를 유린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민규 스스로도 “내가 돋보이고 싶어 이리저리 공을 배분하려 할때도 있었다”고 할 정도.
빠른토스가 강점인 이민규 선수. 힘들었던 시즌 초반을 잘 극복해냈다 |
그랬던 이민규가 이번 챔프전에선 확실히 변했다. 공격수가 때리기 편하게 공격수 위주의 토스워크를 보여준 것이다. 이민규는 “이번 챔프전 때 감독님이 무릎이 좋지 않은 시몬 하나로는 이길 수 없으니 명근이와 센터진까지 함께 살려야 이길 수 있다고 하셨다. 이기기 위해 나를 버리고 공격수에게 맞췄다. 우선 이기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라고 설명했다. 흡사 만화 ‘슬램덩크’의 채치수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포지션 경쟁자인 신현철을 이겨야만 북산이 최강팀 산왕에게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채치수. 그러나 코트에 난입한 라이벌 변덕규로부터 “채치수, 넌 진흙투성이 가자미가 되어라”라는 말을 듣고 채치수는 자신을 버리고 팀 동료들을 살리는 플레이로 북산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민규도 채치수처럼 승리를 위해 팀 동료를 살리는 ‘가자미’가 된 셈이다.
사실 올 시즌은 이민규에게 ‘성장통’ 같은 한 해였다. 비시즌간 국가대표팀에 다녀오느라 정작 팀에 합류한 시즌 초반 동료들과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이민규의 부재 때 동료들과 많이 맞춰본 백업 세터 곽명우와 자주 교체되며 소위 ‘닭장’이라 불리는 웜업존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민규는 “올 시즌을 치르며 스타일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그렇다보니 토스가 언제는 높게 붕 떠서 가기도 하고, 하루는 빠르게도 갔다. 그럴 때 감독님이 빠르게 가는 게 우리 팀 컬러와 맞다고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고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이민규의 빠른 토스는 챔프전에서 빛을 발했다. 삼성화재 블로커들은 이민규의 날카로운 토스에 고생하며 OK저축은행 공격수들을 따라다니기에 급급했다.
갑자기 든 의문점 하나. 이민규의 토스가 빠르다고 하는데, 대체 어떤 면이 다른 세터들과 다른 걸까. 이민규의 토스를 받아 공격하는 송명근이 대신 대답해줬다. “세터가 공을 토스하기 위해선 자신의 손 안에 공을 잡는 작업이 필요해요. 근데 민규는 공이 손에 머무는 시간이 굉장히 짧아요. 게다가 세터치고는 키(1m91)도 크다보니 더욱 빠르게 공이 정점에 도달하는거죠”
송명근 이야기 - “나를 자극하면 큰 코 다친다”
송명근은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이를 악물고 싸웠다. 투지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한국전력 신영철 감독의 말 한마디였다. 신 감독은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에서 “플레이오프 상대인 OK저축은행에 모든 포지션에서 밀리는 게 사실이다. 다만 전광인이 있는 토종 레프트 주포 자리는 앞선다”고 말했다. 이 한 마디가 송명근의 투지에 불을 댕겼다. “훈련장에 나가기 전 TV로 미디어데이를 지켜보고 있었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운동선수라면 그런 말 듣고 가만있을 수가 없죠. 훈련장에 나왔을 때 누군가 말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상길이 형이 그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속으로 ‘나를 보여주마’ 하고 굳게 다짐했죠”
'가치'를 보여주고 싶어했던 송명근 선수, 챔피언 결정전에서 제대로 보여주었다 |
송명근은 플레이오프서 43점(50.67%)을 올리며 전광인(41점, 54.84%)과 대등하게 싸우며 OK저축은행의 2연승을 이끌었다. 챔프전은 그야말로 송명근을 위한 무대. 무릎 통증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시몬의 몫까지 더 열심히 뛰었다. 3경기서 올린 득점은 49점. 공격 성공률은 무려 62.86%였다. 정규리그에서 다소 기복 있는 모습을 보였던 송명근은 포스트시즌 5경기에서 꾸준했다. 송명근은 “정규리그 때보다 민규가 공을 많이 올려주다 보니 감을 찾은 것 같아요. 그리고 평소에 오픈 공격에 약점이 있었는데, 포스트시즌에선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때려댔더니 통한 것 같아요”라며 맹활약의 비결을 설명했다.
송명근은 어느덧 문성민(현대캐피탈), 전광인(한국전력)과 더불어 국가대표팀의 왼쪽을 책임지는 공격수로 성장했다. 두 형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냐는 질문에 “팔 스윙 하나는 제가 제일 빠르지 않나요. 저는 세트 플레이 된 공을 빠르게 때리는 스타일이라 2단 연결 된 공은 아직 형들에 비해 부족하죠. 좀 더 보완해서 형들을 뛰어 넘어야죠”라며 각오를 굳게 다졌다. 송명근의 성장은 현재진행형이다.
송희채 이야기 - “나만 잘하면 삼성화재를 이길 수 있다”
송희채는 3인방 중 가장 빛이 나지 않는 포지션에서 뛰고 있다. 수비형 레프트 포지션의 송희채는 코트 후방에서 서브 리시브와 디그 등 궂은 일을 도맡는다. 그렇기에 한 경기에 두 자릿수 득점을 넘기긴 쉽지 않다. 이번 포스트시즌에서도 플레이오프 2경기 16점, 챔프전 3경기 16점으로 경기당 10점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송희채의 진가는 득점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리시브와 디그 등 비득점 부문을 살펴봐야 그의 비범함을 알 수 있다.
V-리그에선 수비형 레프트가 강해야 팀이 강해진다. 삼성화재의 올 시즌 전까지 챔프전 7연패의 뒤에는 ‘돌도사’ 석진욱(OK저축은행 수석코치)이 있었다. 대한항공은 2010~11시즌부터 3년 연속 챔프전에 오르며 ‘만년 3등’ 꼬리표를 떼어냈다. 2010~11시즌 신인으로 합류해 코트 후방을 든든히 지켜낸 것이 곽승석이었다. 곽승석의 합류 이후 대한항공은 강호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OK저축은행의 이번 우승도 배구의 시작인 리시브에서 압도적인 성공률을 보인 송희채의 존재 덕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세진 감독도 정규리그 때 틈만 나면 “우리 팀의 중심은 송희채다. 희채가 흔들리면 팀 전체가 무너진다”라며 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곤 했다.
OK저축은행의 빠른 배구의 원동력은 송희채 선수의 안정적인 리시브에서 시작되었다 |
송희채는 한국전력과의 플레이오프가 끝난 뒤 야심찬 한 마디를 날렸다. “나만 잘하면 삼성화재를 이길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기자를 비롯한 미디어 관계자들은 신예 선수의 호기로 넘겼다. 그러나 송희채의 말은 진심이었다. 송희채에게 당시의 호언장담이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물었다. 송희채는 “정규리그에서 삼성화재와 맞붙어 패배했을 때 보면 내가 흔들려서 진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한국전력과의 플레이오프 때 팀 동료들의 플레이를 보니 다들 잘 하더라. 그래서 나만 잘 하면 삼성화재도 이길 수 있겠다 싶더라”고 답했다.
송희채의 챔프전 3경기 리시브 성공률은 72.41%(63/87). 보통 50% 중후반대의 성공률만 기록해도 높은 평가를 받는데, 무려 70%를 넘긴 것이다. 특히 2차전의 리시브 성공률은 무려 91.43%(32/35). 기자가 배구 기자 5년째 하면서 처음 보는 수치였다. 송희채가 챔프전 3경기 내내 안정된 리시브를 보여주면서 OK저축은행 특유의 ‘스피드 배구’와 ‘토털 배구’가 완벽히 구현될 수 있었다. 송희채는 “원래 정규 시즌 땐 원정경기에 노트북을 챙겨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챔프전 1,2차전 원정엔 노트북을 챙기고 가서 좋았을 때의 리듬이나 자세를 꼼꼼히 분석했다. 1차전 3-0 완승 덕에 2차전에도 자신감이 생기더라. 마음이 편해지니 공도 느려보였고, 레오 빼고는 삼성화재의 서브가 약했다”며 맹활약의 비결을 공개했다.
올 시즌 시작 전 이민규와 송희채가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반면 송희채는 함께 하지 못했다. 두 친구가 부럽지 않았냐고 묻자 송희채는 “아뇨. 아직 부족하니까요. 다만 딱 하나. 비시즌 동안 팀 훈련이 정말 힘들었거든요. 민규랑 명근이는 그 훈련에 빠졌던 게 부럽더라구요”라며 웃었다. 이어 “아직은 대표팀엔 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포지션 경쟁자인 승석이형이나 재덕이형에 비해 리시브 성공률 조금 높다는 것과 블로킹에 자신있다는 것 빼곤 없어요”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3일 발표된 남녀 대표팀 엔트리에 송희채는 이민규, 송명근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이제 국가대표팀에서도 전술의 핵심으로 거듭날 일만 남은 셈이다.
송명근-송희채-이민규 그리고 시몬은 내년에도 기적같은 드라마를 쓸 수 있을까? |
창단 2년 만에 V-리그 우승이란 기적을 써낸 OK저축은행. 내년 시즌에도 우승컵을 지켜내며 새로운 왕조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을까. 물론 쉽지 않다.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이 레오를 앞세워 이제는 도전자 입장에서 제자 김세진 감독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있다. 전통의 강호 현대캐피탈은 최태웅 감독을 사령탑에 앉히며 체질개선에 나섰다. 대한항공은 국가대표 주전 세터 한선수가 돌아온다. 만년 꼴찌에서 강호로 올라선 한국전력도 전광인-서재덕이라는 ‘사기급’의 레프트 라인이 버티고 있다. 김세진 감독도 내년 시즌에 대해 “마음이 무겁다. 올해보다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개고생’의 시작”이라며 전망했다.
그러나 ‘우승의 달콤함’을 맛본 OK저축은행이기에 내년에도 또 한 번의 기적을 써낼 가능성은 충분하다. 라이트 전향 2년차를 맞는 시몬의 공격력은 더욱 무르익을 것이고, 프로 3년차를 맡는 경기대 3인방을 비롯한 토종 선수들도 더욱 성숙한 플레이로 중무장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 벌써부터 2015~16 V-리그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에필로그 | YELLOW WAVE, 남자 배구 패러다임을 바꾸다 |
※ 이 주의 매거진S 표지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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