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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중부 베트남
여행일 : ‘19. 12. 17(화)-21(토)
세부 일정 : 다낭(1)→마블 마운틴→호이안→다낭(1)→후에→다낭(1)→바나산 국립공원→다낭 시내투어
베트남의 옛 수도, 후에(Hue)
특징 : 다낭에서 110㎞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 ‘트어티엔후에성(Thừa Thiên-Huế)’의 성도(省都)이다.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1802-1945)의 수도가 되면서 정치·경제·문화적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후에가 문화유산으로 가득한 역사적 도시가 된 이유이다. 반면에 이 도시는 베트남 전쟁의 참화가 깊이 새겨진 곳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집중적인 폭격으로 1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부터 적극적인 복구 작업이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폐허인 곳이 많다.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베트남에서 가장 길고 높은 고갯길이자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National Geographic Traveler)’가 완벽한 여행자가 꼭 가봐야 할 50곳 중 하나로 꼽은 ‘하이반 고개(Deo Hai Van)‘를 넘어 도착한 ‘후에’. 첫 방문지는 베트남의 옛 수도(首都)라는 명성에 걸맞는 유적인 ‘왕릉(王陵)’이다. 정확히는 응우엔 왕조의 12대 황제인 카이딘(啓定帝)의 무덤이다. 차에서 내려 잠시 걸으면 계단과 삼문(三門)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 네 개의 난간이 있고 그 위에 용(龍) 부조가 자리 잡고 있다. 계단을 올라 철문을 들어가면 이번에는 양쪽에 재실(齋室)이 있는 널찍한 마당이다. 여기서 다시 계단을 올라가야 석상(石像) 영역에 이를 수 있다. 참고로 ‘후에’에는 이곳 말고도 ‘자롱 황릉(嘉隆帝, 1대)’과 ‘민망 황릉(明命帝, 2대)’, ‘티에우찌 황릉(紹治帝, 3대)’, ‘뜨득 황릉(嗣德帝, 4대)’, ‘동칸 황릉(同慶帝, 9대)’ 등의 황릉들이 더 있다.
▼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서면 계단과 그 끝에 있는 패방 형식의 문이 여행객을 맞는다. 그런데 대문과 함께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들이 동양에서는 흔치 않은 ‘바로크양식’이다.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꾸며진 동양식 능(陵)이 아닌 것이다. 카이딘 황릉의 특징이 ‘베트남양식과 유럽양식이 혼재’라고 하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보다. 당시 베트남을 통치하고 있던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선지 이 황릉은 후에를 소개하는 책자나 팜플렛에 거의 빠짐없이 메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 용(龍)이 새겨진 난간 사이로 계단을 오르자 황릉의 첫 번째 마당이 나타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회백색의 팔각형 정자(亭子). 내부에는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가 아버지인 카이딘 황제를 위해 세운 송덕비(頌德碑)인 응릉비(Bi đình Ứng Lăng, 應陵碑)가 있다. 응릉은 카이딘 황릉의 능호다. 비를 2층의 석조건물이 감싸고 있는 모양새인데 건축 양식은 서양식이다. 그렇지만 기와형식의 지붕과 조각 그리고 장식은 동양적이다. 그나저나 난간과 기둥을 수놓은 섬세한 조각들이 눈길을 끈다. 검게 그을린 세월을 입으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고나 할까.
▼ 마당의 양쪽 끝에는 유럽식의 높은 탑이 세워져 있다. 무덤은 유럽의 바로크 양식을 기본으로 삼고 중국과 베트남 양식을 혼합시켰다고 한다. 이는 응우옌 왕조에서는 유일무이하단다. 무덤 같지 않은 무덤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저렇게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기법의 반대편에는 전통문화가 지배자의 문화에 흡수되어 버리는 서글픈 현실도 전제한다. 참고로 1920년에 공사를 시작한 이 능은 11년 후인 1931년 완공되었다. 카이딘 황제의 재임기간이 1916년부터 1925년까지였으니 그의 생전과 사후를 거치며 무덤은 계속 만들어 지고 있었던 셈이다.
▼ 마당에는 문인석, 무인석, 시종석, 동물석상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 문인석은 도포를 입고 무인석은 칼을 들고 있다. 그 뒤에 있는 시종들은 뾰족 삿갓을 쓰고 있다. 이들 석상 옆에는 커다란 코끼리와 말이 서 있다. 사후 세계의 황제가 나들이할 때 타고 다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자들에게 기념사진의 포인트가 되어 주는 카이딘 황릉의 명물로 남아있다.
▼ 둘로 나누어진 계단을 연거푸 오르자 두 번째 마당과 함께 능의 하이라이트인 ‘천정궁(天定宮, Cung Thien Dinh)’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카이딘 황제의 유골을 모신 곳인데, 흰색이 주조를 이루는 바로크 양식의 콘크리트 건물이 마치 서양의 궁전을 보는 듯하다. 파리의 화려한 문화에 매료된 황제의 취향이 반영된 때문이란다. 참고로 카이딘 황릉은 외부가 거의 흑백이다. 섬세한 맛도 좀 덜하다. 당시 신공법이었던 '콘크리트'로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지금이야 건축자재 가운데 최하위지만 당시만 해도 그게 유행이었을 테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선현들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 앞에다 인생지사(人生之事)를 놓는 걸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 전체적으로 능(陵)은 화려했다. 말이 능이지 숫제 궁전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문득 서울 근교에서 만났던 여러 능들이 생각난다. 아담하고 단출하던 조선 임금들의 무덤 말이다. 어쩌면 지배 이데올로기(Ideologie)가 강했던 조선에서는 이런 허세가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가진바 철학이 빈곤하면 빈곤할수록 허세를 부리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 카이딘 황제의 사후 안식처인 계성전(啓成殿)은 건물의 외관보다 더욱 화려했다. 후에의 여러 황릉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던 지인의 귀띔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던가 보다. 도자기의 파편으로 모자이크 처리한 벽면과 기둥은 물론 금박으로 도배된 황제상까지, 시선이 향하는 어디나 번쩍번쩍함 일색인 것이다. 이 능은 백성의 원성 속에 지어졌다고 한다. 정사보다는 사치와 방탕함을 일삼던 카이딘 황제가 엄청난 국비를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복받지 못했던 능은 이제 베트남 관광산업의 효자가 되었다. 세월이 빚어낸 아이러니라 하겠다.
▼ 옥좌에는 청동에 금박을 입힌 1톤 무게의 카이딘 황제상가 앉아있다. 동상의 아래 지하 18m에는 그의 유체가 안치되어 있단다. ‘응우옌 왕조’의 12대 왕인 ‘카이딘 황제(1916~1925)’는 비운의 왕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꼭두각시였던 그는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치만을 일삼았다. 프랑스는 그런 왕을 위해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도록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단다. 그로인해 베트남인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다지만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었을까? 문득 자신의 무력함을 허세와 사치로 소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3개의 홀로 나누어진 계성전의 내부 벽과 천장은 서양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자기와 유리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바닥에는 대리석을 깔아 서양식 멋을 더했다. 하지만 장식된 문양이나 동식물은 동양적이다. 4계절, 8선녀, 8보물 등 나전 공예품을 진열해 놓은 듯하다.
▼ 황제가 사용하던 유럽풍의 집기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화려함 일색이다. 그는 베트남 사람들로부터 ‘월급 받는 프랑스 관리'라는 조롱을 듣기도 했다. 그만큼 친 프랑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덤도 프랑스를 방문하면서 감명 받았던 그곳의 건축양식을 적용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런 화려함을 위해 세금을 30%나 올리기도 했단다. 춘향전에 나오는 ’歌聲高處 怨聲高‘라는 싯귀에 딱 어울리는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집기의 뒤편에는 당시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소년처럼 빛나는 앳된 외모이다. 그렇다면 황릉은 화려한 그의 외모를 옮겨놓기라도 한 모양이다. 아무튼 그는 독특한 외모의 황릉을 짓기 원했다. 그리고는 유럽의 고성을 빼닮은 위압적인 검은빛의 외모에다, 형형색색 유리와 도자기로 안을 채워 넣었다. 그 결과 베트남 왕조의 가장 화려하고 예술적인 왕릉을 만들었다.
▼ 두 번째 방문지는 ’티엔무 사원(Chùa Thiên Mụ/ 天姥寺)‘이다. 후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불교 사원으로 1601년에 투안호아(현재의 후에)의 호족이던 ’응우옌 호앙(Nguyen Hoang)‘이 세웠다. 당시의 통치자였던 호잉이 이곳을 지나가던 중 빨간색과 파란색 옷을 입고 뺨을 문지르고 있는 천모(天姥)로 알려진 노파를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한 영주가 와서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언덕에 탑을 세울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 후 홀연히 사라졌단다. 그 예언대로 ’호잉‘이라는 영주가 세운 절이 곧 천모사(天姥寺)라는 것이다.
▼ 사원 앞에 이르자 네 개의 정문 기둥이 우릴 맞이한다. 기둥에는 불경 구절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불교 역시 중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 절의 중흥조(中興祖)격인 ’티치다이산(釋大汕)‘ 선사도 1695년 중국에서 왔다고 한다. 청나라의 유명한 학승(學僧)이었던 그는 응우옌씨 정권인 ’광남국(Quảng Nam Quốc/ 廣南國, 1558년 – 1777년)’의 6대 군주이던 ’푹 쭈(Nguyễn Phúc Chu/ 阮福淍/ 완복주)‘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서 법회를 열고 불교를 발전시켰다.
▼ 계단을 오르면 8각형의 7층 석탑이 나타난다. 이 탑의 이름은 복연보탑(福緣寶塔, Tháp Phước Duyên)이며 높이가 21.24m다. 응우옌왕조(1802-1945)의 ’티에우찌(Thiệu Trị/ 紹治)‘ 황제가 1844년에 세운 이 탑은 1904년 태풍으로 훼손되었다가 1907년 다시 지어졌다. 탑문 좌우에는 법을 담은 비(法雨)와 법신의 구름(身雲)에 대한 한문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또한 탑의 각 단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고 했으나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 탑의 오른쪽에 있는 비각(碑閣) 안에는 복연보탑비가 들어있다. 귀부(龜趺) 위에 탑신이 있고, 그 위에 이수(螭首) 형태의 덮개가 있다. 중국적이고 동양적인 양식이다. 이 탑비에는 탑의 유래에 대한 글이 적혀 있다. 그 맞은편에 보이는 전각은 종각(鐘閣)이다. 1884년 티에우찌 황제가 세웠다는 2톤이 넘는 이 거대한 범종은 그 소리가 ’후에‘ 시내까지 들린다고 한다.
▼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천왕문 앞에는 티엔무사원의 ’사적비(寺跡碑)‘가 세워져 있다. 밥상 형태의 기단 위에 비신과 이수를 일체형으로 만들어 얹었다. 비신의 사면에 날개 장식을 한 것이 특징이다. 이수의 한 가운데 태극문양이 보인다. 비면(碑面)에는 카이딘 황제(Khải Định/ 啓定/ Nguyễn Phúc Tuấn/ 阮福昶/ 완복창)가 티엔무사원을 방문하고 지은 시와 서문을 새겨 넣었다. 티엔무 사원의 유래와 이곳에 있는 불탑, 그리고 불탑에서 바라본 경치를 서술하고 이를 칠언율시(七言律詩)로 노래하고 있단다.
▼ 비석 뒤로는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천왕전이 있다. 그런데 그 사천왕이 우리나라처럼 크고 무섭지 않았다.
▼ 천왕전을 지나면 자연스럽게 본전인 대웅전으로 인도 된다. 대웅전에는 가운데 칸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바깥 칸에 두 분 부처님이 더 있다. 한 분은 신통지승(神通智勝)이라고 썼고, 다른 분은 광운자심(廣運慈心)이라고 썼다. 다른 공간에는 16나한이 있다. 이들은 모두 유리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 본전 앞의 유리 상자 속에도 금색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다. 미륵보살의 현신이라는 포대화상(布袋和尙)으로 보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처럼 사찰의 중심부에 모셔져 있는 걸로 보아 ’탁광득‘ 스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절 옆으로는 요사채 형태의 건물이 있는데, 그곳에 오스틴(Austin)이라는 구형 자동차 한 대가 전시되고 있었다. 베트남 불교계의 지도자이자 이 절의 주지였던 틱쾅득(Thích Quảng Đức, 釋廣德)스님이 고딘디엠(Ngô Đình Diệm) 정부의 불교 탄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 당시 사이공까지 타고 갔던 승용차라고 한다. 1963년 스님은 350명의 승려와 함께 시위를 벌이며 종교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틱쾅득 스님은 분신을 선택한다. 결국 이 사건은 현장에 있던 뉴욕타임스 특파원 할버스탐(David Halberstam)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그해 11월 쿠데타가 일어났고 고딘디엠 정부는 무너진다. 참! 스님의 심장이라는 사진도 눈에 띄었다. 스님이 분신한 후, 그 유해를 다시 화장하였는데도 심장이 멀쩡하게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지금은 호치민 국립은행에 보관중이란다.
▼ 절 뒤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며져 있고, 그 뒤에는 또 다른 석탑이 있었다. 역시 8각형이지만 이번에는 5층이다. ’틱동하우(Thích Đôn Hậu)‘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하는데 설명은 없었다.
▼ 절에는 또 다른 눈요깃거리도 있었다. 잘 다듬어진 분재와 예쁜 화분들이 꽤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수종이나 모양새가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 사원이 들어선 언덕의 아래로는 ‘흐엉강(Sông Hương/ 香江)이 흐른다. 가을이 되면 후에 상류의 난초에서 떨어진 꽃잎이 강으로 떨어져, 향수와 같은 방향(芳香)을 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착장에는 ’용(龍)‘의 머리로 치장된 용선(龍船)이 여러 척 정박되어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매너를 문제 삼아 한국인들의 탑승을 거절한다는 가이드의 귀띔이었으나 글쎄다. 같은 한국인에다 똑 같은 매너인데 다낭에서는 태워주고 후에에서는 안 태워준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응우엔 왕조‘의 황궁(皇宮)이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전동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시원스럽게 뚫린 대로를 따라 달리게 되는데, 너무 빨리 목적지에 이르는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눈앞에 펼쳐지는 주변 풍경이 고왔다. 거기다 가이드의 특별 배려로 리무진 모양의 최신형 전동차까지 타고 있었으니 어찌 내리고 싶었겠는가.
▼ 후에 황궁은 자금성을 본떠 만들었다. 자금성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궁전, 정원, 누각들이 들어서 있다. 다만 자금성이 완벽한 남향인 반면 후에 황궁은 그 축이 동남쪽을 향해 흐엉강을 바라보는 형태다. 응우옌 왕조가 존재하던 1945년까지만 해도 이곳은 수십 채의 건물과 수백 개의 방들이 있었다. 하지만 왕정제가 폐지되면서 약탈에 시달렸고, 대 프랑스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주요 전각과 행랑이 모두 불타버리는 참화를 겪었다. 그러다가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이루어졌으며 현재까지 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 기분 좋게 다다른 황궁.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코트코(Cot Co)‘, 즉 ’깃발탑‘이다. 1807년 자롱 황제가 처음 만들었을 때만 해도 나무로 만든 18m 높이의 탑에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 깃발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이후 전란을 거치면서 여러 번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1968년 콘크리트를 이용해 37m의 높이로 다시 만들었고, 지금은 베트남의 국기인 금성홍기(金星紅旗)가 게양되어 있다. 하노이 탕롱(Tang Long) 성채의 깃발탑과 함께 베트남에서 가장 유명한 깃발탑이란다.
▼ 해자를 지나면 ’응오문(Cua Ngo Mon, 午門)‘이 나온다. 1833년 민망 황제 때 완성된 황궁의 정문으로 태양이 정상에 오는 남문을 정문으로 삼았기 때문에 영어로 ’정오(noon) 문‘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석축(石築)한 성문의 위에 2층의 목조 누각(樓閣)을 올린 구조인데 이 누각은 황제가 과거에 급제한 자들에게 상을 내리던 장소였으며, 1945년에는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Bao Dai)‘가 이곳에서 왕국의 종말을 고하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총 다섯 개다. 가운데 노란색 문은 왕, 그 옆 양쪽 문은 대신, 외곽 쪽의 두 문은 일반 신하가 통행했다고 한다.
▼ 황궁의 정전(正殿)인 태화전(Dien Thai Hoa, 太和殿)으로 가기 위해서는 패방(牌坊) 두 개를 지나야 한다. 첫 번째 패방에는 정직탕평(正直蕩平)이라고 썼다. 두 번째 패방에는 고명유구(高明悠久)라고 썼다. 황제의 정직함에 치우침이 없고, 총명함이 영원하다는 뜻이란다.
▼ 패방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태화전(太和殿)‘으로 황성의 정전이자 국사를 논의하던 곳이다. 황제의 공식 접견과 대관식 등 중요한 행사가 모두 이곳에서 치러졌다. 정면이 9칸으로 된 건물은 1805년 자롱제가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전쟁으로 심하게 무너진 것을 1970년에 재건한 것이다. 태화전 내부에는 황제가 사용하던 황금 옥좌가 그대로 놓여있으며, 전시실에는 황제의 옥새와 고관대작들의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 태화전 마당 좌우에는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 궁전과 마찬가지로 1품부터 9품까지 9개가 서열대로 배치되어 있다.
▼ 태화전으로 오르는 계단의 밖에는 성을 지키는 동물 수호상이 세워져 있었다. 몸에 비늘이 있는가하면 얼굴은 호랑이상이다. 동쪽을 지키는 청룡과 서쪽을 지키는 백호를 결합해 놓지 않았나 싶다.
▼ 북쪽 마당에는 방화용 청동솥을 걸어놓았다. 중국의 자금성에서 보았던 것보다 크기만 달라졌을 뿐 생김새는 똑 같았다.
▼ 태화전은 중국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과 한자 이름까지 똑같다. 자금성 태화전을 모방해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화전 뿐 아니라 후에 황궁 전체가 자금성을 모방했단다. 그러나 규모나 내부 장식, 주변 환경 등에서 자금성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 후에 황궁을 자금성의 짝퉁이라고 하는 이유일 것이다. 태화전의 안은 붉은 기둥에 노란 금박으로 장식을 했다. 일반적으로 노란색은 황제의 색이다. 붉은색은 복을 주고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역할을 한단다. 옥좌를 감싸고 있는 닫집은 화려한 금박이다. 기둥 위 벽에는 '태평신제도(太平新制度) 춘풍만제도(春風滿帝都)' 등의 문구가 보인다. 제도를 새롭게 해 태평성대를 만들고, 봄바람이 제국의 수도에 가득하다는 뜻이다.
▼ 태화전 근처의 공간에는 황궁의 미니어처가 만들어져 있었다. 벽에는 베트남 전도도 매달아 놓았다. 여기에 가이드의 설명이 첨가되면서 투어의 열기가 한층 더 무르익는다. 하지만 가이드의 설명을 100%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한국인 가이드의 황궁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탓에 베트남인 가이드가 설명을 해주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한글이 외국어일 테니 어떻게 완벽하게 전달할 수 있겠는가.
▼ 태화전 뒤의 엄청나게 너른 공간은 텅 비어있었다. 황제의 집무공간인 자금성(紫禁城)이 있던 곳이니 옛날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이곳도 역시 전쟁의 참화를 피해가지 못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복구공사는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 태화전 뒷마당에는 두 채의 전각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지도에는 좌무, 우무로 표시하고 열시당, 태평루와 함께 자금성에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전각들 가운데 하나로 표시해 놓았다. 이 건물에는 황제를 보좌하는 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6조의 관리들이 근무하던 장소쯤 되겠다. 지금은 왕궁에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반대편 건물은 행사장으로 이용되는 듯했다.
▼ 두 전각은 회랑(回廊)으로 연결되는데 옛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 태화전을 둘러보고 난 뒤에 주어졌던 자유 시간 때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황실가족이 거주하던 공간인 자금성과 역대 황제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를 둘러보지도 않았는데 현지 여행사의 직원(한국어가 어설픈 베트남 처자)이 이동해줄 것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로컬 가이드(Local guide)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일어난 일인데다 황궁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밖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가 왜 이리 빨리 나오느냐고 묻는 것을 보고나서야 상황을 눈치 챘으니 그저 혀를 찰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지 않겠는가.
▼ 황궁을 빠져나오는 길, 주변은 정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 도중에 중세 유럽풍의 건물(혹자는 공예품박물관이라고 했다)과 문묘(Trieu Mieu Temple, 지도에는 조묘로 표시)가 눈에 띄었으나 이동 중이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참고로 조묘는 자롱황제가 ‘응우옌씨 정권(광남국 : 1558-1777)’의 초대 군주였던 ‘응우옌 호앙(Nguyễn Hoàng/ 阮潢)’의 아버지 ‘응우옌 킴(Nguyễn Kim/ 阮淦)’과 그의 아내를 위해 지은 사당이라고 한다.
▼ 몇 걸음 더 걷자 왕궁의 동쪽 문인 ‘현인문(顯仁門)’이 나온다. 그 자태가 너무 화려해서 후에를 찾은 여행자들의 인생샷 배경으로 꼭 등장하는 곳이다. 현인문뿐만이 아니다. ‘후에 왕궁’ 자체가 왕조의 도시 후에가 자랑하는 핫 플레이스(hot place)이자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만 하는 ‘Must visit place’다. 143년간 이어진 응우옌(Nguyen) 왕조와 흥망의 맥을 같이 해온 장소이기 때문이다.
▼ 현인문을 빠져나오면서 황궁 투어는 끝을 맺는다. 황궁은 초대 황제인 자롱(Gia Long)이 3만여 명을 동원해 쌓았다는 높이 5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높고 두터운 성벽은 요새 같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성곽 밖에 해자(연못)를 설치함으로써 외적의 접근을 막았다. 여기에 더해 도읍의 외곽에다 성벽을 다시 쌓았으니 가히 일국의 도읍다운 방어체계라 할 수 있겠다.
▼ 둘러보지 못한 전각들은 다른 분의 사진을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본다. 첫 번째 사진은 ‘’현임각(Hiển Lâm Các, 顯臨閣)‘으로 세조묘(Thế Tổ Miếu, 世祖廟)와 함께 응유엔 황제들을 기리는 태묘(Thế Miếu, 太廟)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각이다. 높이 17m의 3층 건물로 이곳에서 거행되던 ‘태묘 제례악’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현임각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우리의 종묘 정전에 해당하는 ‘세조묘’가 위치하는데, 응유엔 왕조 역대 황제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 두 번째 사진은 황제의 침전인 연수궁(延壽宮)이다. 정면 일곱 칸의 건물로 가운데 칸 안쪽에 연수궁이란 현판을 걸었다. 건물 앞쪽으로 거실 형태의 주랑이 있고, 그 안쪽으로 방이 마련되어 있다. 연수궁 주변에는 왕비와 후궁들이 사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이들 건물 옆으로 태평루(Thái Bình Lâu, 太平樓)와 연지(蓮池)가 있어 왕족들이 독서도 하고 풍류도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구중궁궐 내에서 그나마 물과 정자를 볼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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