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66]‘전각 달항아리’ 한번 감상해 보시라요?
‘달항아리’하면 불로 구워 만든 도기陶器를 맨먼저 떠올릴 것이다. 달항아리를 볼 때마다 나는 늘 동산 위에 떠오르는 정월 대보름날 저녁, 만월滿月이 생각난다. 한가위 보름달보다 몇 배 위다. 달은 희한하게도 친근하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고 편안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만들어준다. 하얀 색 달항아리는 백의白衣의 민족이라는 우리 조상님까지도 생각나게 만드는 매력과 마력이 있다. 속된 말로는 늙은호박보다 몇 배 더 ‘탐스럽고’ 서양 여성들의 비정상적인 힙도 떠오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전각篆刻 달항아리는 들어보셨는지요? 벼루돌 위에 그려서 칼로 새김잘한 뒤, 그 파인 부분에 천연안료인 석채(보석수준의 돌가루)나 호분(조개껍데기 가루) 등으로 상감처리한 달항아리. 사람들의 외면을 받거나 말거나 ‘돈도 안되는데도’ 변형까지 시켜가며 달항아리를 만드는 작가가 있어 화제이다. 일단 그의 4종류의 작품을 감상한 후 그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고고하면서도/엄숙하고/마음이 넉넉해지고/겸허해지며/선해지고/환해지고/따뜻해지는 달/착해서 온유한 달// 우리 모두는/달과 더불어/밤의 산물/우리는 달빛 아래 만들어졌고/달에게 소원을 빌면/다 이루어진다는 달”. 어떠한가. 한 편의 어리숙한 운문韻文같지 아니한가.
작가의 글을 또박또박 읽으니 곧바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동요童謠는 우리를 동심童心으로 이끈다.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어디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달달 무슨 달 낮과 같이 밝은 달/어디어디 비추나/우리 동네 비추지/달 달 무슨 달 거울같은 보름달/무엇무엇 비추나 우리 얼굴 비추지>. 달은 일찍이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천체天體가 아니던가. 소싯 적 밤길을 걸으면 언제까지나 우리를 따라오던 그 달은 세세년년 변함이 없거늘, 인심은 왜 그렇게 조석변朝夕變일까? 알지 못할 일이다.
아무튼, 한국의 피카소라 불리던 수화 김환기 화가는 말년에 ‘달항아리’에 심취해 많은 그림을 그렸다. 달항아리 그림을 그리는 변辯은 이렇다.“어쩌면 사람이 이러한 백자 항아리를 만들었을꼬…. 아름다운 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촉감이 동한다. 싸늘한 사기砂器로되 따사로운 김이 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 흙에다 체온을 불러넣으니 바로 조물주造物主가 아니던가. 달항아리 예찬론은 수필, 시 등 수없으나 그중에도 빼어난 평을 보자. 미술평론가 최순우 선생은 “잘 생긴 부잣집 맏며느리를 보는 듯한 흐뭇함이 있다”고 했고, 고고학자 김원용 선생은 아예 시로 썼다. 조금 길므로 부분인용한다. <조선백자의 美는/이론을 초월한 白衣의 미/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중략)/조선백자에는 허식이 없고/산수와 같은 자연이 있기에/보고 있으면 白雲이 날고/듣고 있으면 종달새 우오/(후략)>. 느끼지 못하면 아예 말을 말라고 오금을 박는다. 이렇게 ‘정곡正鵠’을 찔러대니 내가 어찌 반하지 않겠는가. 나같은 넘도 속으로 말한다. '백자를 보고 무슨 말을 하리. 어질 인仁자 한 마디인 걸'. 달항아리=어질 인, 멋진 걸.
어쨌거나 유홍준님이 “달항아리야말로 한국미의 영원한 아이콘”이라 했는데, 영국의 유명한 배우(주디 덴치)은 “하루종일 이것만 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답다. 보고 있자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러한가? 백자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과연 이 정도인가. 나는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도기든, 그림이든, 전각이든, 뭔지는 잘 모르지만 좋다. 김환기 화가의 말처럼 '뭔가 촉감이 동하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부족할수록 더 좋은 이유는 “圓은 둥글지 않고 面은 고르지 않으나/물레를 돌리다보니 그리 되었고/바닥이 좀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놓으면/넘어지지야 않을 게 아니오”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말로 끝없을 글을 끝맺는다. 달항아리 작품 옆에 ‘200’이라고 써놓았는데, 숫자 뒤에 단위가 ‘억’이 아니고 ‘만’이라면서 “작가 자신을 위한 지극히 온당한 가격”이라는 말하는 작가가 귀엽고 고맙다. 지극히 온당한 값이라는데, 할 말이 없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