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53
2월1일[연중 제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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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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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_haFIe_4Zxw
[인천교구 김훈경 요한보스코 신부(포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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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손에 잔뜩 들려있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읍시다!>
부끄럽게도 언제부턴가 소임 이동 때 짐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혈기 왕성하던 젊은 수도자 시절, 원칙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칠 때는 정말이지 이삿짐이 딸랑 가방 두개였습니다.
소임 이동하는 날, 양손에 가방 하나씩 들고, 정들었던 공동체를 뒤로하고 버스로 이동하던 시절의 그 홀가분함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모아놓으면 한 짐입니다. 아무리 줄이고 줄인다 해도, 가방이 대여섯 개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차량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이 살던 수도생활 초년병 시절, 행복지수가 훨씬 높았습니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보니, 잡 생각하지 않고, 딴 데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아이들만 바라봤습니다. 하느님만 생각했습니다. 가난이 가져다주는 은총인가 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마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을 껴입지 마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조금은 너무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장거리 도보 여행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길 텐데, 적어도 비상금이라든지 비상식량은 챙겨서 떠나야 되는 데, 한 마디로 ‘몸만 가라’, ‘맨땅에 헤딩’하라는 말씀입니다.
지팡이는 왜 들고 가라고 하시는가 봤더니 당시 여행객들에게 지팡이는 필수 품목이었답니다. 광야나 들길을 걷다 보면 뱀이라든지 전갈이라든지, 들짐승을 만나곤 했는데 비상시 호신용으로 다들 지팡이 하나씩을 들고 다녔답니다. 그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예수님 당부였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더 묵상해보니 예수님 말씀이 백번 천번 지당합니다. 수도자로 살아보니 최소한의 것만으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죽었다 깨어 나도 마트나 시장 한 번 안 가고 살수도 있었습니다.
더 높은 이상향을 추구하고, 더 영적인 삶을 갈구하다 보면 세상의 좋은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초월할 힘이 본인도 모르게 생겨났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 앞에서 수도자들의 증거 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돈 없이도, 최첨단 문명의 이기 없이도, 번쩍번쩍 빛나는 자동차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수도자들이 보여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몸에 지닌 것이 많을수록, 통장에 잔고가 많을수록 거기에 신경 쓰이기 마련입니다. 더불어 서로 비교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분노하고 실망하게 되고, 점점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것들에 마음이 쏠리고,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물질이, 돈이, 명예가, 건강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더군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리의 길이 있습니다. 형제들 사이에 오고 가는 끈끈한 우정이 있습니다.
우리 손에 잔뜩 들려있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우리 눈은 흐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 버리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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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욕구에 사로잡히면 상대의 욕구가 안 보인다>
제가 군대에서 읽었던 책 중에 ‘유태인의 상술’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책 내용 중에 여성의 주머니를 노려라, 현금을 가지고 있어라, 장기적인 투자가 이긴다 등의 소제목이 기억납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빵을 좋아하면 빵장사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빵을 좋아하면 다른 사람도 당연히 그것을 좋아할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사가 안 되면 ‘내가 먹으면 이렇게 맛있는데 사람들은 왜 안 사지?’ 라고 생각하며 개선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빵을 싫어하는 사람이 빵장사를 하면 빵을 싫어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파는 것을 바라보기에 이렇게 저렇게 개선하려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팔아야 더욱 사려고 하는 사람의 욕구를 더 잘 알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내 욕구에 집중하면 상대의 욕구에 무관심해지기 때문에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얻으려면 내 욕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하려면 내 욕구에서 자유로워야합니다. 신학생들에게 신자들이 가장 원하는 사제상에 대해 물었더니, “강론 잘 하는 신부”, “고해성사 잘 주는 신부” 등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사제들에게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1위가 ‘겸손한 신부’, 2위가 ‘기도하는 신부’였습니다. 신학생들조차도 자신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신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잘 모르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혼자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둘이 하면 더 큰 힘이 발휘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둘이 함께 다닌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저는 외국에 있으면서 둘이 여행 나와서 싸우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사실 마르코와 사이가 좋아지지 않아 복음을 전하다가 헤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둘이 서로 의지가 되라는 뜻도 있겠지만 관계를 잘 맺는 모범을 보여주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본당 주임신부와 보좌신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아무래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사제의 강론의 힘이 떨어질 것입니다. 본당 사제와 본당 수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보기에 우선 서로 관계를 잘 맺는 사목자들이 되고 그 이후에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발도, 옷도, 전대에 돈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돈에 대한 욕구,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은 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욕구들에 사로잡혀 있다면 내 욕구가 눈을 가려 신자들의 욕구를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미래에 대한 걱정, 돈에 대한 걱정, 명예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남의 진맥을 보려면 먼저 자신의 진맥부터 가라앉혀야 합니다. 잔잔한 물이 되어야 상대의 모습이 비춰져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들에게 신자들이 보기에 세상 재물에 애착이 없는 복음전파자가 되라는 뜻 같습니다. 또한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고 받아주는 집에 계속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이 좋아서 이 사람과 친하다가 또 저 사람이 좋으니 저 사람과 친해지는 사람은 선교를 위함이 아닌 자신과 어울릴 사람을 얻기 위한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욕구도 선교를 하는데 매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그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합니다.
사람의 애정이나 인정을 바라는 사람들 역시 복음을 순수하게 전해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본당의 신자들이 갈라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정에서도 자유로운 복음전파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무언가 부족하여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힌다면 이는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명목으로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자신 안에 복음이신 하느님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하시는 사람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기름을 바르면 병이 치유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전해주는 것에서 충분한 기쁨을 누려야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편안해하는 아기 얼굴을 보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것과 같습니다.
내 욕구에 가장 덜 집중하는 사람이 복음전파를 위해 가장 큰 효과를 내는 주님의 도구가 됩니다.주님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이라야 참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전파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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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월의 첫날입니다. 어제 서울대교구에서 사제 인사이동이 발표되었습니다. 저는 교구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짧은 것 같았는데 어느덧 5년이 지났습니다. 모건 프리먼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3개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걱정하는 감옥, 지난 과거에 집착하는 감옥, 변화를 두려워하는 감옥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바꾸십시오. 당신의 삶을 바꾸십시오.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돌아보면 지난 5년 동안 감사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팬데믹 어려움 중에도 자리를 지키면서 신문을 만들어 준 직원들에게 감사합니다. 낯선 뉴욕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함께 해 준 동료 사제들에게 감사합니다. 제가 가는 길에 기꺼이 동행해 준 봉사자들에게 감사합니다. 매주 미사에 함께 해 준 브루클린 한인 성당 공동체에게 감사합니다. 성지순례를 다닐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5년 동안 무탈하게,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이동하면 14번째 인사이동입니다. 8년은 보좌신부로, 8년은 본당신부로, 8년은 교구청에, 8년은 해외에 있었습니다. 이제 해외에서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게 주어지는 시간들을 걱정이라는 감옥에, 과거라는 감옥에, 두려움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새로운 만남을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다행히 전임 신부님들은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창신부님들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전임 신부님들이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느니, 저는 영적인 거름을 주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꽃피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신념이 있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자기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희망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곳으로 가는 제게도 같은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아픈 이들과 함께 하는 것,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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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7-13: 열두 제자의 파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채비에 대해 말씀하신다. 최상의 준비는 소박한 음식과 인간의 허약한 몸을 가리고 덮어줄 옷 한 벌처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사도들은 길을 떠나며 주님의 말씀대로 전대도 지니지 않았고 여벌 옷도 없이 떠났다.(8-9절) 또한, 배를 채울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마태 6,34 참조) 하느님의 섭리는 사도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통하여 완전해지려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그 말씀을 듣는 이의 의지에 맡겨 두셨다.
낯선 여행자에 대한 손님 접대는 그들의 의무였다. 여행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축복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고 여겼다.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거절하는 행위는 바로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가 되고, 그로 인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턴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고”(루카 10,16),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마르9,37) 이것은 사목하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우리 이웃들에게 하여야 할 바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으며, 그분께 진정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 자신이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며, 참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행복을 누려야 한다. 우리의 복된 삶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복된 삶이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말씀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나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태어나시도록 하는 삶이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주님께 의탁하며 순간을 살아내며, 이웃을 통하여 우리의 본 모습인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해가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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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려고 여행을 떠나는 열두 제자에게 여장을 꾸릴 때의 규칙을 일러 주십니다. 온갖 위험과 어려움이 예견되는 여행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신 까닭은 제자들이 이 길에서 하느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느님뿐이심을 기억하고 인간적인 모든 보장과 안전을 포기한 제자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다스림을 체험한 이들만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15)라는 복음을 누구보다 힘 있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길”은 보통 ‘제자 직분의 길’을 의미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예수님께서 “길을 떠날 때” 주신 규정은 곧 ‘제자로서 살아갈 때’ 요구되는 지침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 모두에게 청빈의 삶을 권고합니다. 청빈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의탁의 표현입니다. 이 신뢰는 세상의 것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주님의 뜻을 담대히 따를 수 있게 합니다.
교회가 주님께서 이르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수행하려면 불필요한 것들에서 가벼워져야 합니다. 움켜쥔 것이 많을수록 그 무게는 교회의 자유를 짓누르고, 그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두려움을 더욱 키울 것입니다. 교회의 이익과 안전을 보장할 듯한 헛된 것들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마련하신 더 좋은 것들을 얻을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하여 깃털처럼 한없이 가벼워진 교회, 그래서 주님의 숨이 부는 대로 자유롭게 길을 떠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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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지금 상태 그대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기 때문에(마태 8,20),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은, ‘빈손으로’ 그냥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또 ‘지금 상태 그대로’ 떠나라는 명령은 ‘미적거리지 말고 곧바로’ 떠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출발을 미루면서 시간을 끌지 말고,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순간 곧바로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에 대해서, “꼭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준비를 잘해서 복음 선포를 더 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준비’ 자체를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잘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준비는 ‘물적 준비’가 아니라 ‘영적 준비’이어야 합니다. <재물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악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재물 자체에 악한 속성이, 즉 마성(魔性)이 들어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하느님 섬기는 일을 막거나 방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모두 사탄의 작용입니다. 재물에는 하느님 섬기는 일을 방해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재물에는 마성(魔性)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재물에 관해서, 청빈과 무소유를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기 위한 일이 아니라면, 청빈과 무소유 자체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올바르게 섬길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청빈’을 실천하라는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사탄의 작용을 피하고 멀리하라는 명령입니다.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해서 한두 가지씩 더 챙기기 시작하면, 그것은 곧 재물(사탄) 쪽으로 기울어지는 일의 시작이 됩니다. 따라서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즉 예수님의 명령대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실천하기에는, 이 명령은 누구에게나 몹시 부담스럽고 불편한 명령인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과 생명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교회 역사를 보면, 이 명령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실천했다면, 중세 때의 그 위기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항상, 외부에서 오는 박해보다도, 신앙인들과 교회가 물욕에 빠질 때 더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의 뜻은, “어디에서나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마음 착한 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너희를 도와주시는 일이다. 그러니 그들의 도움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주는 대로 먹어라.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이집 저집으로 옮기지 마라.”입니다. 후원과 도움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은 민폐를 끼치는 일이 아닙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은, “어느 곳이든 너희가 선포하는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라는 말씀은,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자들은 심판 때에 먼지처럼 흩어져서 소멸될 것이라고 경고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믿고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믿지 않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처벌을 경고하는 ‘무서운 소식’이 됩니다.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실행했고, 임무를 완수했다는 증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실제로 어디로 가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 배반자 유다의 경우, 아직 배반을 생각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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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신종호 베네딕도 신부님]
<버리면 얻는다>
지금부터 딱 18년 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을 하였을 때 같이 입학을 한 형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10살은 더 많았으니 그 때 나이가 30살이었습니다.
한날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운동장 벤치에 앉아서 땀을 식히면서 집 떠나온 이야기를 나누는데 형이 문득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건넨 적이 있었습니다. 그 형님의 고향은 울릉도였습니다.
“분도야, 배타고 떠나는 것 하고 그냥 버스 타고 집을 나서는 것이랑은 느낌이 틀린단다”라고 말입니다.
지금은 화원에서 가까운 본당에 있지만 그전 저의 소임지는 울릉도였습니다. 울릉도에서 겨울에 거대한 눈보라와 함께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를 보면서, 그리고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떠나오면서 그 느낌이라는 것이 정말 버스나 기차를 타고 육지에서 헤어지는 것과는 감흥이 사뭇 달랐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어머니같은 경우에 말입니다. 선착장에 서서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배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곤 했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 멀리 건너편 육지 사이에 수백, 아니 수천미터의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고 말입니다. ㅖ심연을 가로질러 그 어딘가를 향해 떠나는 것, 분명 결연한 의지나 마음이 없이는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런데 문득 그 정도의 길을 떠날려면 무언가 단단히 준비를 해야 됨직합니다. 그것도 지금처럼 어디를 가나 편의점이나 가게가 있어서 필요한 것을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파견하시면서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식량도, 자루도, 돈도, 속옷도 한 벌만 입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런 물건들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라 광야를 가로질러 가야하는 여행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필수품인데 말입니다.
식당이 없을테니 식량도 준비해야 할테고, 돈도 좀 필요할테고요. 기온차이가 많이 나니 광야라면 속옷 여벌도 필요할텐데 말입니다. 어떻게 하라고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그 어떤 세상의 것에도 의존하지 말라,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의탁하라는 뜻이 아닌가요? 아무 것도 준비가 안되어 잇는 것 같지만 철저히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하는, 그리스도 외의 다른 어떤 가능성에도 눈을 돌리지 않는, 바로 이런 모습이 회개한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표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되 모든 것인 하느님을 얻게 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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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가난한 파견자>
길을 떠나는 사람은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가진 것에 애착을 느끼거나 간 곳에 애착을 느껴 갈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으면 주님의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지 못합니다.
착한 품성을 가지고 성인이라고 칭송을 받고 사목하던 신부가 본당에서 가진 것, 누리는 것에 애착을 느끼고 살다가 인사 발령이 나니 자기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주교에게 항의하고, 신자들을 동원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문을 봉쇄하고,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다고 불순종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제는 진정한 선교사가 못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집과 가족을 다 버리고 자기 자신마저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의 은총을 나누어 줄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어디나 매여 있으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리가 있고 가진 것이 있으며 능력을 갖고 삽니다. 그러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자리를 탐하거나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가지려 하거나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하려 하면 언제나 실망과 좌절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떠날 때 발밑의 먼지까지 떨고 떠나라는 말씀은 있던 자리에 매여 있지 말고 가난한 마음으로 떠나며 떠날 때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첫 사제품을 받을 때처럼 살면 일생 행복할 것이지만 이것저것 쓸모없는 것들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으면 주님의 사도로 순수성을 잃고 권력의 노예, 재물의 노예, 명예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며 주님이 주신 능력을 발휘하려면 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주님의 것이며 무엇을 이룬 것 같아도 한 일에 애착을 버리고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선교적 사명을 지니고 사는 이들이 더 겸손하고, 온유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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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강동진 알로이시오 신부님]
“그러나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고장이 있거든 그곳을 떠나면서 그들을 경고하는 표시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려라.” (마르코 6,7~13)
<당당한 복음 선포>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할 것을 명하십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의 가르침을 환영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면 그들과 함께 기쁘게 머물러 있어도 좋지만 만일 제자들을 환영하지 않고 그들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다면 그들을 설득하거나 애걸할 필요 없이 떠나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주저없이 경고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이 올바르게 선포됐다면 그렇게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당당하게 복음을,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복음 선포는 사람들이 나의 말을 받아들일까 걱정하거나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고, 제발 복음을 받아들여 달라고 사정하거나 애걸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진리를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당당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 있어서 너무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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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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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6,8~9)
세상을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기가 꺾이게 되고 의기소침해지는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과 고향 사람들의 거부와 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히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모처럼 찾아간 고향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을 뒤로한 채, 의연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하늘나라의 복음 선포를 위해서 당신이 직접 선택한 열두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6,7) 사실 위기라고 느낄 때가 적극적으로 투신하고 전력을 다해 일을 시작할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절망하지 않고 희망하며 살아가도록 복음 선포에 더욱 박차를 가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다는 표현에서 마음이 움직입니다. 어쩌면 고향 사람들은 물론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서도 내외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강건한 마음으로 배척하고 거부한 이면에는 사람들의 의식을 은밀하게 조종하고 지배하는 악령의 작용으로 예수님께서는 판단하셨기에 이런 권한을, 능력을 주신 듯싶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보내신 까닭은 제자들도 당신처럼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선포하고 더러운 악령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루카 복음과 오늘 마르코 복음의 전교 여행 규칙을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르코는 전교 여행 중에 지팡이와 신발을 허용하지만, 루카는 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루카는 마르코의 사료를 인용하면서 지팡이를 가지고 가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신발 이야기는 아예 삭제해 버렸습니다. 공통된 소지 품목은 마르코와 루카는 둘 다 전대(=돈지갑)와 먹을 빵, 그리고 옷 두 벌의 지참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현재에도 이런 것들은 선교사의 휴대 필수 품목인데도 이런 물품들을 휴대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즉 있는 그대로 빈손, 빈 가방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는 모름지기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의 선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온전히 하느님의 보살핌에 의탁하라는 뜻이라고 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감히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먹을 것도 보따리도 전대도 돈도 속옷 두 벌도 안 된다, 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선교 규칙이며 그렇게 세상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오로지 주님의 안배와 그리고 현지 혹은 파견된 지역 은인들의 도움에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선교는 여행이 아니라 파견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신앙 순례이며 체험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하느님께서는 선교사들을 더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을 끊임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의 빈 가방에 채워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빈 가방으로 족하고 그 빈 곳에 주님께서 부족하지 않도록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2022년 통계에 의하면 현재 해외 선교 파견 국가는 69개국으로 2021년도에 비해 11개국이 줄었다고 합니다. 대륙별 분포는 아시아 21개국, 남아메리카 16개국, 아프리카 12개국, 유럽 13개국, 오세아니아 4개국, 북아메리카 3개국이며, 아프리카의 경우 8개국(라이베리아, 말라위, 모로코, 앙골라, 이집트,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케냐, 코트디부아르)이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해외 선교사는 1,007명으로 전년 대비 108명 감소했으며. 신부 244명, 수사 55명, 수녀 700명이 활동하고 있으며, 평신도 선교사는 8명으로 전년 대비 2명 늘었다고 합니다. 저희 예수고난회 관구는 현재 중국에 선교 공동체가 있으며 저 또한 베트남에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선교사로 활동했었습니다. 2022년 11월 한국외방선교회 사제들의 연례 피정을 지도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인연으로 해외에 파견된 모든 선교사를 위해 그리고 해외 선교를 위해 <선교 성소를 위한 기도문>을 함께 바치고자 합니다.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 오늘도 당신 성령을 보내시어, 당신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이들을 도우소서. 주 성자 친히 사람이 되시어 모든 민족들의 구원을 목말라 하셨음 같이 저희 모두가 인류의 구원을 갈망하게 하시고, 오로지 주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전념하게 하소서. 또한 온 세상 어디서나 이 시대의 요청에 응하는 많은 성소들이 자라나게 하시며, 특히 선교성소를 많게 하시어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 모든 선교사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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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교통사고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독일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대형 사고이지만, 이탈리아의 도로에서 사고가 나면 그냥 사소한 교통사고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어디에 중심을 두고 있느냐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원칙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규칙을 어기면 큰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그에 반해 이탈리아는 원칙을 존중하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여유 있게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극심한 혼란 한가운데서도 사람 안전을 위한 일종의 거리를 둘 줄 알기에 그들은 혼란의 순간에 상황을 꿰뚫어 보고 지혜롭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줄 안다고 합니다.
원칙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사람이 중요할까요? 당연히 사람이 중요합니다. 원칙도 역시 사람을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원칙이 사람보다 위에 설 때가 많습니다. 원칙을 지켜야 사람을 편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원칙이 중심에 설 때 오히려 사람이 소외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원칙 중심이었습니다. 자기 원칙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는 것은 있어서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 병자의 고통은 전혀 보지 않으면서 원칙을 왜 지키지 않느냐며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할 대상을 보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되길 예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원칙이나 자기 사상보다 더 우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삶이 바로 사랑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뒤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회개하라고 선포하였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이 모두는 사람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했고, 마귀에 의해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해 마귀를 쫓아냅니다. 또 병에 의해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면서 사람의 어려움을 없애주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못하게 합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으며,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오로지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해야 하고, 이것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답답할 때가 참 많습니다. 특히 사람 중심이 되지 못하고, 원칙과 사상을 내세워서 오히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삶 안에서 예수님의 사람 중심의 사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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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파견>
2024. 02. 01.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마르코 6,7-13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파견>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보내시는 분
계시어
보내지는 이
있으니
보내시는 분
가리지 않게
보내지는 이
가벼이 떠나고
보내시는 분
스미시도록
보내지는 이
오롯이 머물고
보내시는 분
몸소 하시듯
보내지는 이
기꺼이 나누니
보내지는 이
있기에
보내시는 분
계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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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눈팔지 말라
여행하기 위해 짐을 챙길 때 이것, 저것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행의 목적에 따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꾸려야 합니다.
잘 챙긴다고 해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쓸모없는 것을,
잔뜩 싸 들고 다녔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다음부터 ‘짐을 줄여야지!’하고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엇인가 많이 소유해야만
안심이 되는가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교활동을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마르6,8-9).
이 말씀은 한마디로 ‘한눈팔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야지 인간적인 그럴듯한 수단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잔머리를 굴리지만 하느님의 일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일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일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의탁하면서 그분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지 내가 무엇을 해보겠다고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7,31) 고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근본에 충실하면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17).
하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면서 물질의 소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에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힘을 비워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그 자리를 채워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서 보이는 힘이 나오는 법입니다.
일반적으로 처음 여행을 떠날 때 보따리가 큽니다.
그런데 자주 여행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보따리가 작아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마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실천하면 할수록 행할 힘을 얻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인간적인 방법을 접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을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람에게서, 물질에서, 나 자신에게서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임의 뜻이
님이 나를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지만
님이 나를 부르시니 기뻐 따르오리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몸소 하소서.
나를 보내시니 뜻이 이루어지소서.
님이 나를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지만
님이 나를 부르시니 기쁘게 따르오리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 주옵소서.
주여 내게 말씀하소서. 말씀 전하오리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몸소 하소서.
나를 보내시는 뜻이 이루어지소서.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 주옵소서.
주여 내게 말씀하소서. 그 말씀 전하오리다. -임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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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
“소유가 아닌 존재론적(存在論的), 시적(詩的)인 복음 선포의 삶“
"날마다 새기는 다산 인생 문장 365일, 다산 어른의 하루"란 2월 주제와 2월1일 말씀입니다. 형창설안(螢窓雪案: 반딧불로, 눈빛으로 글을 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 공부란 환경에 굴하지 않는 꾸준함이다)이 2월 주제 말씀이고, “시는 시대의 진실한 울음이다.
우리는 시를 닮기 위해 시를 읽는다”와 <시경>의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삼백편의 시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생각에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2월1일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한결같은 공부의 자세와 시적인 삶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예전에 써놨던, 언젠가 인용했던 ‘시처럼 살고 싶다’란 글도 떠올랐습니다.
“시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의 종이위에 시처럼
침묵의 여백의 시공안에 시처럼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닌
시처럼 살고 싶다.”-1998.1.24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누구나의 갈망이요 소원이 “하느님의 시詩처럼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실 사람 내면을 잘 들여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시인詩人임을 발견합니다.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가 피정 마치고 떠난 이들의 남긴 글 세편도 시처럼 마음에 와 닿습니다.
“늘 하느님을 만나고 대화하고 위로와 힘을 얻고 갑니다. 새해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수도원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요셉수도원의 수사님들을 뵈면서 많은 사랑과 위안을 체험했음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곁에서 잘 머무르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아, 수도원은 하느님의 시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위로와 위안,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존재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수도원 곳곳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풍경 모두가 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은 2월 첫날, 2월4일은 입춘立春이네요. 봄이 성큼 가까웠음을 느낍니다. 아직은 겨울이지만 봄꿈을 꾸는 겨울나무들처럼 보입니다. 며칠 전 인용했던, 한동안 행복해 했던 “봄길”이란 시를 봄길 사진과 더불어 어제도 두 분과 나눴습니다.
“한겨울 봄꿈을 꾸고나니
봄길이 열렸어요.
봄향기 맡으며
봄님 에수님과 함께
봄빛을 받으며
봄길을 하늘길을 걷습니다”-2024.1.27.
이에 대한 두 편의 답글도 시적詩的입니다.
“예, 저도 봄꿈을 꾸고 봄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런 간절한 희망을 갖습니다. 아름다운 시, 감사합니다.”
“이 시를 읽으며 위로를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같은, 시같은 예수님입니다. 봄꿈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의 꿈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꿈이자 실현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바라보며 참으로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실현했습니다. 하느님의 무인武人이자 동시에 시인詩人이며 예인藝人이었던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죽음에 앞서 남긴 유언도 아름답기가 시적詩的입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성에 묻히니 죽음도 시적詩的이고, 솔로몬이 뒤를 이어 왕권이 튼튼해지니 끝까지 보속을 다하고 거룩한 시적詩的인 죽음을 맞이한 다윗을 통한 축복이 계속됨을 봅니다.
꿈중의 꿈이 하느님의 나라 꿈이고, 희망중의 희망이 하느님 나라의 희망입니다. 살아있다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꿈과 희망이, 하느님 나라의 꿈과 희망이 생생할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생생히 꿈꾸며 복음 선포를 통해 그 꿈과 희망을 실현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런면에서 예수님의 삶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꿈도 희망도 보고 배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꿈과 희망을 보고 배웠을 것이며,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인 예수님만으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과 함께 했기에 자발적 가난의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무소유의 단순한 모습으로 파견되는 다음 장면의 묘사가 참 아름답고 완벽하고 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예수님의 신뢰와 희망과 사랑을 가득 담고 파견되는 제자들은 부족한 것 같으나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텅 빈 충만의 느낌입니다. 소유로부터 완전 자유로워진 존재의 삶이요 본질적 가난의 삶입니다.
이런 무소유의 삶을 가능케 한 것은 곳곳에 자리잡은 착한 신자들의 환대 덕분이요 이런 환대 역시 참으로 아름다운 시적 자세에 속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복음 선포의 자세도 거칠 것이 없고 홀가분하고 창공을 나는 새처럼 참으로 눈부시고 자유롭고 힘차보이니 그대로 하느님의 시같은 삶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오늘 복음과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와 더불어 우리를 치유해주시고 당신의 권능으로 충만케 하시어 우리 모두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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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모두가 가는 길>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모든 사람이 가는 길.
오늘 독서와 복음은 여러 길 얘기입니다. 복음은 복음을 선포하라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 길은 복음 선포의 길입니다.
열왕기는 두 가지 길을 얘기합니다. 모두가 가는 길과 주님의 길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가는 길이란 뭘까요? 모두가 가는 길을 다윗도 간다고 하는데 그 뜻이 뭘까요?
그것은 다윗 자기도 예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왕일 뿐 아니라 대단한 왕이요 더 나아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어도 모두가 가는 길은 자기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시황은 세상의 모든 권력을 소유하게 되자
자기만은 모두가 가는 길에서 예외가 되고자 했지요.
그래서 불로장생을 꿈꾸었고 그래서 불로초를 찾았는데 모두가 가는 길과 다른 길로 가려 했던 이 진시황과 달리 다윗은 모두가 가는 길 곧 죽음과 관련해서는 진정 아무 예외와 특권 의식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두가 가는 이 길을 잘 가고 있고 잘 갈 것 같습니까?
예외나 특권 의식은 없고 그래서 안 가려고 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못해 가고 기꺼이 가지 못한다면 잘 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가는 길을 나도 간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우리의 길은 모두가 가는 길일 뿐 아니라 향해 가는 길이요 따라가는 길, 곧 아버지께 가는 길이고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어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가야 할 운명의 길이 아니라 순명의 길이고,
매우 인격적인 길이고 사랑의 길입니다.
모두가 가는 길이니 묵묵히 혼자 가거나 그들을 따라 터벅터벅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가고 주님과 함께 즐거이 가는 길입니다.
저는 오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나는 하느님 안에 있고 삶과 죽음도 하느님 안에 있다. 하느님 안에 나는 주 예수님과 함께 있고 내 안에는 성령께서 함께 계신다.
그러니 모두가 가는 길을 저도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있는 하느님 안에 저도 있는 것입니다.
Deus Meus, Omnia(나의 하느님, 모든 것이시요!)라고 프란치스코가 기도했듯이 모든 것이신 분이 하느님이시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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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복음화!>
오늘 복음(마르 6,7-13)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 곧 그 영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고 그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이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만 의탁하라.'는 명령으로 다가옵니다.
열두 제자들은 그렇게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요즘 저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정을 필사 중에 있습니다. 어제는 바오로 사도의 3차 선교 여정의 시작인 '사도행전 19장까지' 필사했습니다.
'다마스쿠스'에서 주님을 만나 완전히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 지역에서 만나게 되는 박해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기쁜소식(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몸소 보여준 복음선포의 삶을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이는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지금 나는 복음 선포의 삶을 기쁘게 살아내고 있는지?'
만약 믿는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과 삶인 복음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무요 허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복음 때문에 기뻐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화의 첫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세상 복음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하느님의 제자들이 됩시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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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2PlMXwKTZ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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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려라.”(마르 6, 11)
열심히 걸어온
사람만이
발 밑의 먼지를
털어 버릴 수
있습니다.
은총의 힘으로
걸어왔기에
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쪽으로만
치우칠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균형이
필요합니다.
사는 기쁨이란
털어버려야 할 것을
털어버리는
기쁨입니다.
털어버리는
이 일이 우리를
살리는 일이 됩니다.
모든 차별과
거부를 털어버립시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감정의
잡동사니 안에
갇혀 이 순간을
놓치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먼지를 털어버리는
반성의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주목받으려 했던
제 욕심의 먼지를
발견합니다.
발 밑의 먼지는
제 마음의
먼지였습니다.
털어버리는
이 실천이
초심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오늘입니다.
여기까지 힘껏
걸어올 힘을
주신 주님께
비로소 감사드립니다.
멈출 수 없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멋진
2월 되십시오.
털어버려야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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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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