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학자가 ‘이미’(already) 도래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not yet)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한다. 곧, 시간성의 문제에 있어서 ‘이미’와 ‘아직’이란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존재를 표현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규정 요소를 ‘통치’로 받아들였을 때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다.
즉, 이 땅에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온 우주가 그의 통치와 다스림,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이러한 이중적 시간성의 문제는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인 면 ‘이미’와 미래적인 면 ‘아직’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침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고 외쳤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역동적인 개념을 가진 것으로 문맥상 하나님 나라가 곧 활동할 것이라는 기대를 낳게 한다. 요한은 단 한 번의 메시아의 오심으로 단번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완성될 것을 기대했다. 이는 침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의 두 제자를 보내어 예수님께 질문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마 11:2-3).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이며 완성적인 성격이 나타나고,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도래를 실체로서 말씀하기도 하셨다. 이것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에서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한편으로는 미래에 오는 것으로 선포하는 자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현재 실재화 되고 있다는 자료들을 발견하고 이 두 가지 자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하여 학자들의 이견이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막 1:15(하나님 나라의 선포), 마 12:28; 눅 11:20(하나님 나라와 마귀의 세력들), 마 11:5-6; 눅 7:22-23(하나님 나라의 임재의 표적들), 마 13:16-17; 눅10:23-24(복된 눈과 귀), 눅 4:16-30(나사렛에서의 예수님의 설교), 마11:12, 눅 16:16(침노당하는 하나님 나라), 막 4:11-12(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 눅 17:20-21(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 나라), 막4:11-12(하나님 나라의 비밀)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완성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마 5:3-12; 눅 6:20-23(복들에 관한 설교), 마 8:11-12; 눅 13:28-29(하나님 나라의 잔치), 막 9:43-48, 10:15; 마 7:21, 8:8-9, 18:3; 눅 11:52, 12:32(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에 대한 말씀), 마 16:28; 막 9:1; 눅 9:27(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 등을 들 수 있다.
20세기 현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철저하게 완성만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있다. 철저한 종말론자인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 을 들 수 있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현재의 영적 실재로 해석될 수 없다고 하였다. 슈바이쳐는 예수님에 대하여 묵시적 환상에 사로잡혀 결코 실현되지 않았고,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을 기대하며 살았던 미혹된 광신자로 보고 있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선포함에 있어서 구원을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이지적 변화에서 기대하지 않고, 유대 묵시문학에 표현된 내용을 선포한 유대인 묵시적 선지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불트만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묵시적이며 유대주의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 실재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밝아 오고 있는 중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시작에 관한 선포가 채워지지 않았고, 따라서 옛 세상의 임박한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기대가 오산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후에 불트만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묵시적 개념들은 신화론 적이지만, 이 신화론 속에 실존적 의미가 실현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 나라의 성취(현재적)만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다드(C. H. Dodd)를 들 수 있다. 그는 예수가 자신의 삶과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현존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태복음 4:17의 ‘엥기켄’(ηγγικεν)은 마태복음 12:28의 ‘에프다센’(εφθασεν)과 동의어이며, ‘왔다’(has come)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 ‘이미’(already)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와 당대 유대인들이 생각한 예수님의 나라 개념을 서로 비교해 보면 여러 면으로 다른 점이 드러나고 있는데,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는 철저히 미래적인 특성이 있는 점에 반해, 예수님이 가르치고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인 특성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하나님의 현재적 특성이 드러나는 말씀 중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마 12:28)인데, 이 말씀은 사단을 다스리는 예수의 승리가 바로 그들을 향한 왕국 도래의 증거라고 보기 때문인데, 특히 병자를 치료하고, 악한 영들을 쫓아내며, 다리 저는 자와 귀머거리, 벙어리와 눈먼 자들을 회복시켜 주는 일 그리고 죄를 사하여 주는 일 이런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에서 나타나는 증거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나타나는 요소 중 중요한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던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나타난 기적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에 대한 표적들이며 그의 능력을 통하여 공포하는 것이다. 또 다른 말씀을 보면 숨겨진 보화, 진주(마 13:44-46)는 하나님 나라는 숨겨져 있다. 발견되거나 캐내어지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것으로서 완성은 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즉, 숨겨져 현존하므로 취임은 되었으나 완성은 미래에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개인적으로 발견될 것으로서 개인적이다.
또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로 결단케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의 공생애 동안 활동을 통해 미래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에 구체적이고 현재적인 사건으로 현실화되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의 현재성을 살펴보면 먼저 자기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다(막 1:14-15; 마4:12-17). 여기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라는 말은 예수님 당대의 그 어떤 유대 문헌이나 구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선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선언은 ‘하나님 나라’가 장차 이루어질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이미 시작되었거나 혹은 바로 눈앞에 도착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의 지상에서의 공생애를 시작하심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현재적으로 임하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병자를 치유하시는 이적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병자를 치유하시는 이적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과 모든 병자를 고치신 이적을 같은 맥락에서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임했는데 그 증거가 자연법칙을 초월해서 병자가 치유되는 이적으로 과시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메시아가 되셔서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도입하시는 분이신데, 이분이 이적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은 메시아 구원의 표시이며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르러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르러 활동하고 있는 증거라고 하셨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는 말씀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수님께서 알리셨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제시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고 묻는 바리새인을 향하여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하신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너희 안에’라는 말은 '너희 중에'(in the midst of you, 또는among you)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가 너희 속, 곧 마음속에 있다고 말씀하실 리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 말씀을 묵시적 사색으로 인한 미래의 나라가 아니라 그 나라의 임하심이 현재의 사건이라는 것, 즉 그 나라가 나타날 것과 사건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들 가운데 현재 임하여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G.보스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동일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현재 교회의 직원들과 현재 교회를 통해서 통치하고 계시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의 모습을 시각화하려는 시도이다”
어거스틴도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근본적으로 동일시했고 그것은 중세 시대에 계속되었고, 심지어는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을 통하여 최근까지도 어느 정도 그 동일성이 인정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현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이 종교 개혁자, 특히 칼빈의 견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현 복음주의자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칼빈의 개념을 아는 것은 ‘현재’의 하나님 나라 개념의 뿌리 이해를 통하여 현 입장을 정돈하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윌슨은 누가복음에 나타난 ‘미래적’ 종말론과 ‘현재적’ 종말론의 공존 현상에 대해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경향”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학자는 이것을 “이중성”(duality)이나 “이중성 태도”(double attitude)라고 부르기도 한다.
래드는 이에 대해 성서의 이중적 이원론 –땅 위의 사람들에게 하늘 하나님의 내림(coming)과 미래의 지상 왕국 건설에 대한 현재의 기대–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로마서 14장 17절과 고린도전서 4장 20절은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영위하는 ‘현재적’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 4:20)
데살로니가전서 2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개념이 연관 지어져 있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 2:12)
요한계시록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한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하여 살펴본 바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오심을 현재의 실재적인 의미로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고, 그의 메시아로서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게 되어 하나님이 새로운 왕으로서의 그 자신의 백성에 대한 통치가 현재에 실제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2.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 ‘아직’(not yet)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인 측면에 대해 말할 때 ‘아직’이라는 표현보다는 ‘계속’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좇아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초림하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세상에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그 나라의 생활을 맛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그가 전파하는 메시지와 그의 행하심을 통해 한 가지로 고백한다. ‘이런 권세와 능력이 누구에게로부터 왔는가?’하는 의문이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통치권을 가지고 계심을 사람들은 인식할 수 있었다.
후에 불트만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묵시적 개념들은 신화론 적이지만, 이 신화론 속에 실존적 의미가 실현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겁 많고 자기 살기 위해 스승을 버리고 도망쳤던 사도들을 비롯한 120명의 신자가 함께 모여 성령의 강림하심을 경험하고서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궁극적 실현은 역사 건너편에서 이루어지며, 거기에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이 드러난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눅 13:28-29; 마 8:11)라 고 하셨다.
하나님 나라 잔치는 아직 미래에 속한 것인데, 많은 성도가 동서로부터 나아와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잔치에 참예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러한 ‘아직’에 관한 말씀의 약속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이리라 본다. 고생 끝에 낙이 있다는 말처럼 성도들에게 이 땅의 고통과 절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 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리라는 희망을 품고 낙심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아직’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 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고 하셨다. 여기서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는 상호 교체될 수 있는 말이며 구원(19:25)과 영생(19:29)과 같은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직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앞으로 이루어질 ‘미래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들어가기가’ ‘들어가는 것보다’ 하는 말씀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은 세상 끝날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임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으로 볼 수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셨다. 여기서도 ‘들어갈 것이 아니요……. 들어가리라’고 말씀한다.
문맥상으로 볼 때 이 구절은 마지막 심판 문제와 관련하여 나타나고 있다. 그 다음절에 나타나는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22절)에서 그날은 분명히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이 마지막 심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21절에서 미래시제의 목적어로 나타나고 있는 천국은 미래의 천국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날에’라고 하는 이 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라 본다.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34) 중에서 예수님은 서두에 자신의 독특한 호칭인 ‘인자’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이것이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예수님 자신이 인자의 영광으로‘오게 될’ 그 마지막 날과 그리고 그때 있게 될 마지막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님이 자신이 재림주로 다시 이 땅에 오시는 그날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날의 주인공이심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나누어주시면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 14:25)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이르게 되는데 그때 포도나무의 새 열매를 먹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그날을 ‘기다리고 계심’을 뜻하는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관련하여서 살펴볼 것은 고전 15:50에서 바울 사도는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이 말씀 속에서 ‘성도의 부활’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혈과 육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우리 몸이 변화를 받아 썩을 가능성이 있는 혈과 육이 썩지 않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할 것을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런 변화된 몸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이것은 장래 부활 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이미’ 임하였으나,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악하고 음란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나 참고 나아가야 할 것을 알려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인격적이요 영화로우시며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아직 미래에 속해 있는 다가올 세계인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처럼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인 면과 미래적인 면으로 나타나는데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선포하기도 하고 또 앞으로 ‘미래’에 도래할 것이라고도 선포되었다.
래드(Ladd)는 현대 성경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업 중의 하나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이며, ‘현재적 성취와 미래적 완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열쇠를 찾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현재적이면서 또한 미래적이라는 연결된 전체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칼빈주의자인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영역 주권 사상에서 국가, 교회, 정치, 문화, 예술, 교육, 학문 등 모든 영역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서만 존재하고 그에게 소속되어 있음으로, 각 영역은 다른 영역의 권리나 자유를 간섭 또는 침해하지 아니하고 자주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더불어서 이 땅 위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 인간들의 삶의 모든 전반에 걸쳐 예수께서 왕이심을 나타내고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성도라면 먼저 인식하고 깨달아야 할 것이다. ‘자기 땅에 오매….’
카이퍼는 과학, 예술, 철학, 신학의 모든 문화적 각 영역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주권적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은 각 영역의 경계선을 침범하지 않고 또는 한 영역이 다른 영역을 종속시키지 않으면서,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화 대 명령의 실행을 위한 칼빈의 일반 은총의 이해를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일반 은총의 개념과 연결시킨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일반 은총이지만, 동시에 믿음으로 받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별 은총이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사역은 세상의 창조, 보존, 통치이다. 성자 예수님 또한 세상을 통치하신다. 주님은 이 땅의 왕으로 오셨다.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복음 1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과 이 땅의 모든 만물이 바로 삼위 하나님의 작품임을 증언한다. 또한, 창세기 6장 그리고 19장에서도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해 내시면서 ‘생명을 보존하라’고 분명히 증거 한다. 하나님 심판의 목적은 파괴와 멸망이 아니라 진노 중에 나타내시는 은총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그 주목적이다. 신약에 와서 요한복음 1장 11절에서는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의 왕으로 성육신하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르낙에 의해 설명된 당시의 신학적인 분위기는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은 그것이 개인에게 온다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그러나 그것은 각자의 마음속에서의 거룩한 하나님의 다스림, 권능을 행사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전혀 다르다. 하르낙의 이런 몰역사적 해석은 하나님 나라를 역사적인 장소, 즉 개인의 영혼에 한정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왜소하게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요, 동시에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시다. 그러기에 하르낙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각 개인에게 임하는 것,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기도 하고 동시에 세상 전체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으로 임하심을 나타낸다. 그러기에 하르낙처럼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와 몰이해를 속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칼빈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관계는 둘이 다 ‘구원’과 ‘통치’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복음의 사역자들에 의하여 제공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음으로 들어갈 수 있다. 교회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임으로 일원이 될 수 있다. 둘 다 구원을 의미한다. 구원받은 자의 통치 영역이 달라지는 것이다. 마귀의 손에서 그리스도의 손으로 옮겨진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인 영적 축복의 삶 그리고 그것을 믿는 자들의 영혼과 삶에 ‘하나님의 통치’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고, 교회는 바로 이러한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즉, 칼빈의 하나님 나라는 교회론을 통해서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씨앗은 하룻밤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누룩도 어느 한순간에 빵 전체에 퍼져서 부풀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져 간다. 하나님 나라 또한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회심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일 때, 이 땅에서 단숨에 하나님의 성품에 이를 수 있는 존재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서 아직 ‘계속’ 진행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리라 본다. 그리고 그 나라는 장차 곧 온전하게 임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