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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1일(토)
* 시작 기도
(느 1: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주님...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 간 느헤미야는 왕궁에서 왕의 술맡은 관원이었습니다.
그나마 이방에서 지위가 있었던 터라 왕의 신임을 받은 그는 고향인 예루살렘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습니다.
유다에서 온 동생 하나니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물으니 그곳은 초토화 되었고 사람들은 심히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불이 타는 듯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지금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바로 그 지경입니다.
물론 먹고 사는 문제야 느헤미야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이 풍족하지만, 우리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입니다.
지금 이념적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한 상태로 으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냅니다.
우리 조국을 불쌍히 여기사 주의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나라가 되게 하소서.
만물 안에서는 완전한 공의가 있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공의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하루도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되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한 날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4:1-14
제목 : 내가 주는 물은 영생으로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나의 묵상
예수께서는 유대지방에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일을 하셨다.
이런 일을 예수께서 요한보다 많이 한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은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세례를 베푼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일련의 사실을 들었다는 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려고 하셨다.
그 때 주님은 의지적으로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셨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 빙 둘러서 가곤 하였다.
그 이유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정복당하던 시기(주전 722년)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바벨론을 비롯한 이민족을 데려다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 두었다.
이는 인종 및 종교의 혼합 정책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이로 인하여 다수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민족과 혼혈이 되어 혈통의 순수성을 상실하였기에 남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취급을 하면서 아주 경멸하였다.
(왕하 17:24)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예수께서는 당시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분위기를 초월해서 굳이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는 분명한 의도가 있는데 이를 가리켜 ‘신적 의지’라 한다.
하여 주께서는 이런 신적 의지를 가지고 사마리아로 가셨다.
한편 주님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셨다.
이 곳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까웠으며 또한 거기에 야곱의 우물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오랜 여행에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아 쉬셨는데 그 시각이 낮 12시였다.
이 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는데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다.
그 때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고 없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말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인 것 같은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종하지 않는다’는 말은 말을 섞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만, 원어적인 의미로는 그릇을 함께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릇을 함께 쓴다는 것은 친밀감의 표시이다.
그런데 유대인에게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 여인으로서는 자신이 쓰는 그릇으로 물을 좀 달라는 유대인의 호의는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이처럼 의아하게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약에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너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한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구하였을 것이며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여인이 묻는다.
“주여(퀴리에), 당신은 물을 길을 수 있는 그릇도 없고, 또한 이 우물은 깊기도 한데 도대체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을 수 있단 말이지요? 이 우물은 우리의 조상인 야곱이 우리에게 준 것이며, 이 우물에서 야곱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짐승들이 다 마신 우물인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큰 자입니까?”
야곱은 주전 2,000년대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우물의 역사는 2,000년이 되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 우물에서 야곱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짐승들까지 다 마셨단다.
이는 이 우물의 성분이 아주 좋으며 성분이 좋기 때문에 그 우물이 파괴되지 않고 사람들이 잘 보존하여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수량도 아주 풍성함을 나타낸다.
여인의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이 야곱의 우물을 마시는 자는 또 다시 목마를 것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주는 물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솟아나는 샘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여자’는 일반적으로 신약의 교회를 의미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바꿔가면서 음행을 저지르는 부정한 여인이라기보다는 오늘날 교회를 대표하는 한 여인으로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이 여인이 남편을 바꿔가면서 부정한 행위를 한 것은 본문에 의하면 사실이다.
그런데 이는 오늘날 교회의 부정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한 단면임을 부인할 수 없다.
야곱의 우물은 이곳 외에 성경 어느 곳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대화의 장소가 바로 이 야곱의 우물 곁이다.
여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야곱의 우물을 날마다 마신다.
그러나 그 목마름을 해갈하지 못하고 다시 또 물을 길으러 나오는 것이다.
야곱의 우물은 잠시는 갈증을 해갈해주고 목을 축여주지만 금세 다시 목이 마르고 만다.
여기서 야곱의 우물이란, 뿌리 깊은 신앙의 전통과 유산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부정한 여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낮 곧 태양이 작열하는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전해서 영생을 누리도록 하지 않고 사람의 뜻인 땅의 것에 매몰되어 있는 영적 부정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셨고 하늘로부터 오셔서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교회는 그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섬기며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얻어 영생을 누려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는 생명을 얻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상황을 해결해주고,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것을 전하며,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종교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정상에 우뚝 서 있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것을 강조하시면서 땅에 있는 종교로서 최고인 유대교로는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말씀하셨다.
지금 예수를 믿는 기독교가 유대교로 회귀하고 있는 실정이다.
땅에서 난 자들은 만물 위에 계신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땅에 속하여 땅의 것을 말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세상적인 이치로 보면 이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순리의 종교가 아니다.
세상은 순리만 따라도 잘 한다고 박수를 쳐주지만,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결코 순리를 따르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생명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런 진리 곧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기독교회가 땅의 것에 매몰되어 땅의 것만 바라고 세상의 순리조차 거역하는 종교로 전락하여 세상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어떻게 해서든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숫자를 채우며 재정을 늘려 목회성공의 패러다임에 목사 자신과 교회를 가두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교회들 간에 양 도둑질이 다반사가 되었다.
어떤 목사들은 아예 대놓고 작은 교회의 교인들을 꼬드겨서 자기가 다니는 큰 교회로 데리고 오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꼬드기는 방법이, 작은 교회는 프로그램이 없지 않느냐면서 자기 교회는 대형 교회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많다.
그러니 자녀들 교육 프로그램도 거의 전문가 수준이라면서 작은 교회 교인들을 빼앗아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께서는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건만, 요즘 다시 건물 성전을 짓느라고 교회들마다 혈안이다.
무너뜨려야 할 성전을 다시 세우는데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단다.
건축을 해야 하는데 예배당 건축이라고 하면 무게감이 나가지 않으니 성전 건축이라고 하면서 경건함과 거룩함의 무게감이 나가도록 해야 헌금을 많이 한다는 웃픈(웃기면서 슬픈)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교회마다 프로그램 전쟁이다.
어느 교회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금세 다른 교회에서 그 프로그램을 따라 하거나 아니면 그보다 업그레이드 시켜서 좀 더 좋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은 몇 년이 못 되어 다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 바꿔가면서 교회를 부흥성장(?) 시키려는 목회자들의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것이 사마리아 여인이 날마다 물을 길어 마시는 야곱의 우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때마다 남편을 바꿔치기 하면서 즐기는 여인과 다를 바가 뭐란 말인가?
여인은 자신에 솔직(17절,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하기라도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그 부정을 부정으로 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부정한 줄도 모른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부정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영생에 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예수님조차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기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오셨다.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바로 영생인 것이다.
그래서 아들도 창세전에 아버지로부터 말할 것과 이를 것을 명령받았는데 그 명령이 곧 영생이다.
(요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또한 위, 하늘로부터 오셔서 항상 만물 위에 계신 주님께서는 창세전에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지만 그것을 받는 자가 없다.
그러나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무는 것이다(요 3:31-36).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누리고 전하는가?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한 이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선물과 자기가 누구인지 알면, 아마도 네가 나에게 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하셨을 때 그는 영적인 물 곧 영생수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육신의 목을 축이는 물만 생각했을 뿐이다.
이 여인의 모습이 정녕 오늘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교회는 또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은 그런 하늘의 선물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솟아나는 샘물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저 육신의 목을 축일 수 있는 땅에서 나는 생수에 목말라 했었다.
이는 잠시는 해갈하지만, 금세 다시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 질병이다.
지금까지 부정한 여인으로 대비되는 교회의 이야기는 다름 아니라 나의 이야기다.
내가 바로 그렇게 부정한 자였으며 프로그램의 노예로 살았었다.
제자훈련이며 전도 프로그램과 양육 프로그램, 주일학교 부흥을 위한 메빅이나 윙윙 등 온갖 프로그램에 빠져 그것이 진리인 줄 알고 거기에 흠뻑 취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어떤 프로그램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른 프로그램을 찾아 또 전전하였다.
이것이 나의 실상이며 현실적인 지극히 현실적인 땅의 것에 목마른 나의 모습이었다.
이것이 조금 채워지면 살 것 같고 채워지지 않는 듯 싶으면 죽을 것만 같은 그 무엇이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알면 야곱의 우물의 뚜껑을 덮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하고 또 다른 우물을 찾아 기웃거렸다.
그런 나를 주님께서는 아예 그런 것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를 징계하셨다.
그리고 내가 내 손으로 덮지 않아도 되도록 아예 이 모든 우물을 때려 부셨다.
그런 나를 아무도 없는 광야로 내모셨고, 나는 거기서 허허벌판 광야를 혹독하게 경험해야만 했었다.
나는 김해에서 목회를 사임한 후에 필리핀과 몽골을 돌고 돌아 지금 이곳 베트남에 와 있다.
이곳에서의 한인목회는 허허벌판 광야 그 자체이다.
어떠한 프로그램이나 야곱의 우물도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이다.
나는 이제 프로그램의 노예도, 야곱의 우물에 중독된 자도 아닌 오직 복음에 매인 자요 그 복음을 전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복음의 포도주로 살아간다.
오늘도 망망대해 위에 혼자 외로이 떠 있는 작은 조각배 같지만, 이 조각배로 복음의 포도주를 나르며 목마른 영혼들의 갈함을 영원히 해갈해 주는 복음의 파수꾼으로 살아간다.
창세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여 아들에게 주신 그 영광이 나의 영광이 되어 홀로 있는 이 자리에 비추인다.
나 또한 아들이 있는 그 곳, 아버지 집, 아버지 품속에 있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가 부정한 자요, 부정한 교회였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깝죽댔던 자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영생으로 인도하는 솟아나는 샘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자였나이다.
이런 내가 목사라고 성도들을 가르쳤으며, 선생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악인으로서,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그런 내게 주의 심판이 임했고 지금은 한국을 떠나 베트남의 작은 한인교회 목사로 있나이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공의로 받아들입니다.
주여, 죄인 중에 괴수인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내가 구할 것은 오직 긍휼밖에 없나이다.
주님이 베푸신 긍휼에 하나님의 본질인 은혜와 진리가 있나이다.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정결한 신부로 온전히 설 수 있도록 새롭게 빚어주옵소서.
주님의 얼굴에 비쳐진 아버지의 영광의 빛이 내 심령에 빛살가루 되어 채워지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자랑이요 나의 기쁨이며 나의 노래, 나의 전부입니다.
이제 더 원할 것 없나이다.
오직 주님의 품속에 있기 원하나이다.
나를 받아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