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인간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단다. 실은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맞다. “나의 죽음을 나에게 알리지 말라” 평소에 인간들은 이순신 장군 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산다. 마치 들판을 걷다가 소나기 맞은 격으로 사방팔방 어디를 피해서 공포의 먹구름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대책은 없는가? 있다. 감추는 식이다. 그리고 그 위에 오락을 만들어 뒤엎는 것이다. 그래서 공포를 그때그때마다 잊고자 한다.
일본의 어떤 회사는 이 ‘감추는 사업’을 시작했다. 퇴직을 감추어주는 일이다. 사업은 간단하다. 해고당한 샐러리맨들이 해고 사실을 가족들로부터 완벽하게 감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일종의 유령 회사를 만들고 명함을 찍어준다. 전화가 오면 여직원이 받아서 “아무개 과장님 지금 외근 중이십니다”라고 메시지를 받아놓는다. 그리고 고객이 퇴직당한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을 맡아서 매달 얼마씩을 통장에 입금하여 가족들을 안심시킨다. 이렇게 되면 그 퇴직자는 당분간 가족들로부터 자신이 퇴직자라는 것을 감출 수가 있다. 가장의 자존심이 얼마간은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악마는 알고 있다. 인간에게는 죽음 공포와 자존심 공포에 시달리는 약점이 있다는 것을. 따라서 악마는 충분히 인간을 가지고 논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란 신과 더불어 춤추고 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공포로부터 잊고 지내려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즉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악마로부터 멀어지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이 곧 악마라면 어떻게 할 건가? 문제는 본인이 소망하는 자아성을 그대로 고수하고 지속시키려는 데 있다. ‘죽어 마땅한 자아성’ 대신에 ‘절대로 죽어서는 아니 되고 우수해야 되는 자아성’을 쥐고 있는 한, 그 사람은 영원히 악마의 밥이다. 이런 자에게는 자아를 부추겨주고 자아에게 희망을 주고, 자아의 모든 행함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그런 곳을 찾게 마련이다.
그래서 악마가 사람 다루는 법은 매우 쉽다. 행함을 숙제처럼 제시하고 검사 맞도록 하면, 인간은 기를 쓰고 최선을 다 하여 기어이 그 행함 숙제를 달성하고야 만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승리자임을 확인하고 싶은 고집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고집이 자신을 지옥으로 이끈다. 무서운 공포 앞에서 인간은 매일같이 사자처럼 울부짖는다. “제발 내가 나로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해줘!” 이것이 곧 “나의 죽음을 나에게 알리지 말라”는 본심이다. 여기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책망하신다. “네가 뭔데?”(마 7:23)
첫댓글 그러면 십자가 마을은 도대체 뭔가 ? 교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회사도 아니고 가족 집단도 아닐꺼고 친목 단체도 아닐꺼고 도대체 그 마을은 정체가 뭘까?
모든 교회를 악마에게 경배하는 사탄교로 만들었네.. 행함 숙제? 그건 이슬람교가 훨씬 더 심하지. 기독교는 이슬람교의 행함에는 새발의 피도 못미치는거 아닌가?
착각은 자유라 하지만 엄청난 착각속에 살아가는것 같다. 이런 강의를 매주 듣는 사람들하고 어떻게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한가? 도저히 말이 안통하지
이순남 , 무릉선사 등과 끝없는 평행선을 긋는 이유가 있었네. 교회를 악마가 내주는 숙제하는곳으로 치부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리.. 에혀!!!!
십자가 마을 글들이 너무 많아서 다 읽어 볼순 없지만 대충 정리되네.. 인간은 죽는순간까정 절망적인 존재네 .거기엔 기쁨이나 즐거움, 소망 희망 사랑 등은 없고
오로지 누구의 십자가인지 모르지만 십자가의 피만 끝없이 반복되네. 인간 행동 자체를 악마가 내주는 숙제정도로 밖에 해석이 안되는데 그곳에 무슨 사랑이나 소망이 있으리
죽는 그 순간까정 절망만 주구창창 노래한다면 인간은 살아서 모하겠노 ? 십자가 마을은 아마 절망이 최고의 가치인것 같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도 십자가마을의 절망 앞에선 두손 두발
다 들었지 싶다. 같은 성경을 읽으며 어떻게 인간은 끝도 없이 절망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지 대단하다 하겠다.
은혜를 받으려고 죄를 더하려고 하는 논리를 느낍니다. 비극적인 신학같이 여겨집니다..그렇습니다.이근호 십자가마을 신학은 인간의 절망과 끝없는 비극을 노래하는 비극적인 신학인것 같습니다.
누구한테 받는 은혜인지는 모르지만 암튼 죄가 극성에 이르면 은혜역시 극성에 이르므로 극과극은 통한다.. 극악의 죄를 통한 극성의 은혜를 갈구하는 신학인가요?
죄가 커지면 커질수록 은혜가 커지기에 일부러 자기 행동을 제어할 필요는 없네요. 죄가 더 많이 늘수록 불교의 수미산보다 더 높아질수록 은혜가 커지니 어쩌면 죄에 대해 방관하거나 방임하는게 이근호 신학에선 옳은 일이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런 많은걸 느끼네요
입으로는 수억마디를 해도 그냥 "말"일 뿐 입니다
수사죠
그"추상적" 언어가 삶에 있어 어떤 큰 도움입니까?
남자가 어떤 여자를 절실히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목이 말라 죽어갑니다
그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한다는 수천번의 말보다 마실 물을 찾어서 갖다 줘야
합니다
그게 "사랑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행동으로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안 달리셨다면 우리는 예수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부처도 고행을 통해 진리를 봤다고 주장하고 자비=사랑하라고 합니다.
님 속에 예수는 부처처럼 하면 되는 것을 괜히 죽기까지 했습니다.
바울의 죄와 만로역정의 죄
바울은 성경에 바울서를 비롯해 대부분 서신서의 필자이며 성령의 인도로 누구 보다도 예수그리스도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가 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을까요?
죄에 대한 기준이 낮느냐 높느냐가 죄를 인식하는 잣대가 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책망을 하심으로 이 죄에 대한 기준점 변화가 생깁니다.
그때만이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 됨을 알수 있습니다.
바울이 일부러 하나님을 사귀려고 죄를 지어 죄인의 괴수가 되었을요?
자신 스스로가 높은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데 죄를 어찌 보겠습니까?
사람은 원하든지 안 원하든지 2번의 경우입니다.
다만 마음은 누구나 1번을 원 할 뿐입니다.
(롬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2)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정의의 이름으로 님께서 1번을 원하시는 것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나의 실체를 파혀쳐 보면 항상 2번임이 밝혀집니다.
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다'를 구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말하나 정작 그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여 롬 7:15 내가 무엇을 행하는 지 알지 못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책망하심으로 내 속을 밝히시면 그때사 내가 누군지 바울이 왜 그런 고백을 했는지 왜 십자가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죽기 까지 하시고 부활 하셨는지 다 알게 됩니다.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는 오늘도 예수그리스도를 말하며 사랑을 이야기 하며 스스로를 정말 잘 믿는 성도로 착각합니다.
그러니 무엇을 행하든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지만 실은 그것이 불법 즉 예수그리스에게 반항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 기막힌 진리를 어찌 전해야합니까?
여기서 소외되어 버리면 이를 갈고 분이 나오는 겁니다.
저 윗글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무릉선사님 그럼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무릉선사님의 그 성경해석이 옳음을 확증할 수 있나요?
제가 님의 말을 어떻게 믿으며 왜 믿어야 하죠?
님의 말씀이 예수님 말씀이라서?
님이야 말로 착각하시는게 그건 님의 성경해석의 한 주장일 뿐이에요
제발 자기가 선지자인양 하지 마세요 휴~
참 갑갑하다
죄에 대한 기준이 높느냐 낮느냐가 죄를 인식하는 기준이
된다 ⇒죄는 뭐며 기준은 뭐며 그 인식은 어떤 경로를 통하여 발생하며 인식한다 함은 어떤 상태인가요?
무릉님 ...따지고 들면 한도끝도 없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비=사랑이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그럼 무릉선사님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세요
못 하시죠?
자기가 행치 못하는걸 입으로만 떠듭니까?
부처가 내 죄를 대신하고 죽었습니까?
오직 예수만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고 다시
부활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 믿습니다
되었나요?
님께서 저의 말씀 전함을 받아드리지 못함을 제가 더 잘입니다.
이스본님 사건도 결국은 두영간에 단절된 소통에서 오는 현상입니다.
오늘 저의 말씀 전함을 무조건 님을 향한 공격이라 생각치 마시고 이 공박이 약이 된다는 생각으로 진지하게 생각 하실 용의가 있다면 대화를 지속하며 님께서 궁금해 하는 확증과 무엇이 우리 둘을 갈라 소통을 단절시켰는가를 설명 드릴 수입니다.
믿으나 안믿으나 구원의 확신이 있으나 없으나 살아있는 인간 행위 자체를 100% 부정하고 항상 스스로를 절망 상태에 가져다 놓고 날마다 십자가 피만 부르짖는 사람하고 무슨 대화나 설득이 필요할까?
그들은 밤낮 기쁨도 소망도 사랑도 없이 스스로 절망의 사슬에 묶여 밤낮 나는 죄인의 괴수요 라고 노래 하는걸 진리라고 생각하니.. 그럼 도대체 이근호 목사는 뭔가? 하나님의 유일한 선지자인가? 그가
말하는건 진리고 다른건 전부 악마의 속삭임이란 말인가? 악마의 행위 숙제를 대신 내주는 사람들이 기존 교회의 목사들이란 말인가? 너무나 위험하고 기이한 마을이라 하겠다.
그네들이 말하는 인간 삶의 최선은 불교의 면벽 참선이 아닌가 싶다.. 죽을떄까정 벽만 바라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죄에서 건져내랴? 나는 죄인의 괴수요라고 벽보고 참선하고 죽기전까정 스스로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며 너는 인간 쓰레기이므로 무슨 행동을 하던 위선이니 항상 절망만 부르짖으며 십자가의 피만 되새겨라 이게 최선의 삶이 아닌가 싶다.. 참으로 할 말을 잃게 하는 교리다.
핵심적으로 각자의 양심이 곧 말씀입니다.
양심에 비춰 말씀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를 확증하면 끝입니다.
이때 주가 주신 양심의 그기준이 말씀으로 나옵니다.
헌금의 양심은 두가지로 나뉩니다.
1.힘이 닫는대로 헌금하면 선한 것이다.
2. 가진 재산을 전부하지 않는다면 헌금은 선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를 면치 못한다.
이것을 증명하면 모든 복음이 다 풀립니다.
사람은 이세상 살면서 어려운 가운데서 노력하며 돈을 법니다.
그 노력의 댓가로 돈을 쓰든지 안쓰든지는 번자의 권리이요, 노력도 하지 않은 가난한자들에게 나눠 줌은 지극히 부당한 것입니다.
그들도 나와 같이 돈을 벌어 살아야 마땅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를 떼어 나눠 주었다면 참으로 용기 있는 결단이요,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지금 님께서 바로 이른 류의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저는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님께서 저이 말씀전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다음에 나오는 바로 이것때문입니다.
저도 그정도로 주께서 선이라고 인정해주고 님과 같은 형제끼리 그래 잘한다 나도 님의 모범적인 행위에 도전 ㅈ받아 더욱 분발해야지. 하면 우리의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고 이런 상충함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 걸리는 것이 당혹스러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모든 것은 주의 것으로 달란트가 달라 잘 살고 못사는 것 뿐 너희들은 다 같은 형제니 서로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가진 것은 물론 내 목숨까지도 바쳐야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의 가진 것중 일부를 자기의 쓸 것을 위해 떼 놓았다가 그 것이 죄인 것을 징치하기 위해 내가 죽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생각에서 말씀을 행하면 우리 모두 잘 살턴데 말씀은 그 이상의 순수한 선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우리에게 내린 이유입니다.
우리끼리 말씀을 해석하여 적당한 선에서 짤라 지켜면 된다고 생각 했는데 말씀의 본질은 완벽한 선을 추구했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고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 속에 죄가 밝혀져 버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완벽한 제사를 지낸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손으로 올리는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는 이유와 손으로 지은 전에 거하시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기준을 깡그리채 날려버립니다.
이것을 우리가 생가 할 때 인간성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들려 올때마다 칼끝을 그 화자에게 겨누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땅에 속한자로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그 지배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보통의 인간은 그 사단성이 그대로 표출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 사단성이 바로 선악과에서 나온 나도 한 선을 행한다는 것이요 자유의지인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말씀은 그것을 부수는 모루가 되어 철저히 박살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님께서
1번의 사람이라면 지금 나의 주장과 심하게 부딛치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나와 부딛침이 곧 말씀과 부딛치는 것이니 종국에 나는 한다고 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잘 맏는다고 생각 했는데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지옥의 판결을 내려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기준으로 항상 말씀 지킴을 보지만 주님의 기준은 그보다 완벽한한 말씀지킴을 요구 하기 때문에 서로가 상충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주께서는 완벽한 요구를 원하시는가는 율법에서 잘나타 나 있습니다.
이세상 모두가 완벽 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무슨 죄에 걸려도 다 위반자가 되어 죽음 외는 길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후에 십자가 사건을 벌려 그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순수한 예수님께서 이루신 새로운 의로 건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100%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십자가 사건 때 그 100%를 인정하는 완벽한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바치는 것은 안받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해도 주께서는 자신이 예비한 양( 예수그리스도)를 이삭 대신에 받았습니다.
그 구약에서 지금까지 한결 같이 사람의 손으로 한것은 받지 않는 부족한 신이 아니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여 복음은 선물이요 우리의 공로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번 읽어 보신 후에 추가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생각에 지키는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이고 말씀에 기준으로 지키는 것이 주께서 인정하시는 선입니다.
그 선은 사람은 한사람도 지킨 바가 없고 예수그리스도만이 지킨 것으로 성경말씀은 주장합니다.
천국은 조금의 죄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람인지라'라는 변명이 통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완전한 제물, 이삭을 대신한 제물, 온 세상의 죄를 다 지고 가신 제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온갖 행위가 다 들어 있는 종합 선물셋트인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의 행위가 선해 보이는 지요?
무릉님은 불가의 도와 예수님의 피를 짬뽕하여,,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사랑도 필요없고,,오직 피로구원만 받고.
행위는 필요없으니,,,,무릉님 그만 하시지요..
사도 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일을 하고도 나는 은혜를 받았으 그만이다 그렇게 이야기 하겠습니까?
그런면에서 보면 우리는 사도 바울보다 100배 천배 더 죄인이고 괴수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흰눈 같이 깨끗히 하셨습니다.
이제 자녀가 된 사람들은 죄를 미워하고 회개에 합당한 삶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바울이 사울일때 예수를 아직 믿지 아니하고 만나지못했을때
예수믿는자들을 핍박하며 죽였던 자신을 지금 죄인이라며 이단의괴수라 하며 고백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난후부터는
죄와사망의법에서 생명의성령의법으로 해방받았음을 고백하며
누가 사망의몸에서 건져내주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높이며 찬양하며 증거하는자가 되었습니다
불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바로 지금 댓글 단 사람의 주장과 똑 같습니다.
참회하고 자비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지요?
님들도 십자가로 회개하고 사랑하라는 것으로 동입니다.
그렇다면 님들의 주장이 그만해야할 주장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기에 불교와 다르지 않으니 종교통합을 외치는 겁니다.
지성이면 감천하는 종교로 복음을 보면 오해입니다.
그것은 정한수 올리고 비는 종교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선인지 아닌지보단 십자가마을 이근호 교리는 아예 인간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바 인간의 삶도 부정한다 하겠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남은 인생을 무슨 의미로 사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삶이 부정되고
아무 의미도 없는데 살아 숨셔서 모하나? 뭔가 의미있는 일이 있어야 살아갈 소망과 힘을 얻고 의미를 부여하며 살 게 아닌가? 십자가 앞에서 영원히 엎드리며 눈물만 흘리며 나는 죄인의 괴수요 절망적인 존재다라는것만 외치는게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경지란 말인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망적인 교리와 인간 행동과 삶을 부정하는 교리는 참으로 기이함에도 불구하고 동조한다는게 기적이다.
십자가마을사람들은 허무주의 신앙같아 보입니다.
메마른 신앙이지요. 삶이 곧 행위와 결부되어있거늘 행위를 논하는것 자체를 부인하니...
행위를 논하는게 곧 행위구원이라고 매도를 하니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지..............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