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1일 묵상 본문 : 요한복음 4장 1절 - 14절 - 땅의 것에서 눈을 들어 하늘의 진리를 알고 깨달음으로 만족과 풍요함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시작 기도
주님, 추워진 날씨 가운데 주말의 아침을 시작합니다.
차가운 기운이 이불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도록 만들지만 육신의 요구를 따라 살지 않기 위해 일어나 주께로 마음을 향합니다.
죄와 부정함으로 더러워진 마음과 영혼을 주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어 주옵소서.
주의 음성을 듣는 자로 서게 하시고 주의 뜻에 순종하는 자리에 서게 하옵소서.
주일을 준비하는 시간을 성실함으로 보내도록 도와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주관해 주시고 영과 육의 강건함으로 허락하여 주옵소서.
육신의 연약함으로 힘들어하는 지체들을 기억해 주시기 원합니다.
온전한 회복과 강건한 마음으로 함께 예배하는 자로 서게 하옵소서.
오늘도 함께 하시고 은혜와 진리로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과 주해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님이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이 듣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예수님이 유대지역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하고 있었다.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본절은 후기 삽입된 기록으로 추정하여 괄호로 표시하고 있다. 여기서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이라고 밝히는데 이는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지 물세례를 주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세례를 베푼다는 잘못된 소문을 바로잡고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유대지역을 떠나 갈릴리로 이동하셔야 했음을 보여준다.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요단강 동편이나 해변 길로 가기도 했었다.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일반 유대인들과 다르게 예수님은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없으셨기에 사마리아로 지나가게 되셨고 사마리아 중에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시게 된다. 수가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야곱의 우물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으로 추정한다.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피곤하셨는데 이는 온전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성을 사도 요한이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가현설이 잘못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가현설은 성육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영혼만 잠시 머물렀다고 주장하는 헬라 사상이었다.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가에 앉으셨고 이때는 6시(오후 12시)쯤이었다.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사마리아 여인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여인으로 여겨졌기에 사람들이 물을 길러 오지 않는 뜨거운 정오의 시간에 우물가에 나왔으며 이때 예수님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는 요청을 하신다. 당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 그것도 사람들로부터 부정하다고 여기는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는 행동은 일반적 행동이 아니었다.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요한은 예수님이 여인과 대화를 시도하게 된 것은 당시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수가라는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님만 혼자 있었기 때문임을 밝혀준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당시 유대인은 일반적으로 여성들과 공개적인 접촉을 피했으며 랍비가 공중 앞에서 여자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발각되면 그의 명성은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공개된 장소에서는 아내와도 잘 대화하지 않는 모습을 가지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의 반응은 매우 놀람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고 요한은 이러한 당시 문화를 설명했던 것이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적대감으로 반응하는 여인에게 2가지 무지에 대해 이야기하신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선물, 즉 생수에 대한 무지와 둘째는 대화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무지였다.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육신적으로 이해했기에 그녀는 예수님이 물 길을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우물(25m정도의 우물로 추정)에서 물을 길을 수 있으며 생수(흐르는 물)를 주겠냐고 반문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겼으며 야곱의 우물에서 살고 있는 그의 후손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님이 야곱 보다 위대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예수님은 육신의 물과 영생의 물을 대조하며 육신의 물은 다시 목마름을 가져오는 한계를 가진 것임을 지적하신다. 그리고 자신이 말하는 것은 영생의 물임을 드러내신다.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말하는 생수는 영혼에 참 만족을 주는 것으로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게 만드는 것임을 선포하심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요 생명을 주는 자임을 드러내신다.
나의 묵상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이것을 종교 지도자들이 알게 되었음을 보시고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사역지를 옮기신다.
종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은 궁극적으로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에 아직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장소를 옮겨 갈등을 최소화하도록 만드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다른 복음에서서 기적을 행하시고도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리지 말라고 하셨던 모습과도 연결된다.(마9:30)
모든 사역을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순종하며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모든 인생에게 모범이 되시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 가져야 할 자세를 보여주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기회를 따라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서 가신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혼혈족이라고 생각하며 멸시하고 이방인처럼 취급했다.
그러나 모든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찾아가시고 그들을 만나셨으며 그들과 교제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죄인된 인생에게 참 소망이 되시고 구주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적인 자부심이나 혈통적 조건이 구원받는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신다.
그래서 야곱의 우물을 매개체로 해서 야곱의 우물이 가지는 한계, 다시 목마르게 하여 물을 길러 오게 만드는 제한성을 드러내시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해 이야기하신다.
육신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한계가 있고 종말에는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것에 중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중심을 두도록 하신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는 것은 한계가 있고 본질을 알고 깨닫게 하는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의 우물을 매개로 생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에 대한 개념을 가르치신다.
육신의 삶에 매여 있는 인생은 영생에 대해 아는 자가 와서 일깨워 주지 않으면 늘 육신의 삶에 매여 살아가는 모습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에 대해, 영적 본질에 대해 일깨우도록 가르치셨으며 자신의 가르침이 땅에 것에 대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속한 것임을 반복하여 말씀하셨다.(요3:6, 6:63)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고 땅에서 얻게 될 부귀영화에 목적을 두고 가르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땅의 것에 있지 않고 늘 하늘에 속한 것임을 가르치셨다.
이는 성도가 무엇에 목적을 두고 생각하고 이해하며 가르쳐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땅의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자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배척하게 되며 땅의 가르침에 익숙한 자는 하늘의 가르침에 무지하여 그것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 모습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에게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막6:1~6)
오늘날에도 땅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인생은 복음의 진리에 대해 무지함을 보인다.
그래서 땅의 것을 얻고 누리는 것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따라 해석하고 받아들이며 자기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 그리스도를 거부한다.
이러한 삶의 결과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고자 했다가 결국 예수님이 그것을 거부하시자 떠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3~66)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땅의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하늘의 것에 목적을 두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며 깨달음인지를 고백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복음에 담겨 있으며 성도가 복음을 아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영적 갈증을 해결하고 참 만족을 주는 것이 되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 복음의 은혜를 오늘도 누리고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인생의 참 기쁨과 만족이 됨을 고백하며 이 고백이 모든 지체들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나타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오늘도 주의 말씀 앞에 인생의 어리석음과 지혜가 어떻게 구별되는 지를 깨닫습니다.
인생의 지혜는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늘의 진리, 복음의 진리를 아는 것에 두는 모습이며 그 지혜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아는 영생을 누리는 것에 있습니다.
이 영생을 아는 자가 목마름에서 벗어나 생수로 만족을 누리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육이 아닌 영의 가르침임을 알고 그 가르침을 배우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세상은 갈수록 육신의 만족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며 살아가게 만듭니다.
세상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오직 주의 말씀에서 만족을 얻고 누리게 하옵소서.
오늘도 그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자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이끄시고 주 안에서 풍성함을 얻고 전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주일을 준비하는 가운데 함께 해 주시고 성도들과 함께 진리를 나누며 기뻐하는 모습이 되도록 주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선한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옵소서.
함께 하시고 은혜와 진리로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