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여부재(材與不材)
사람의 처세는 재(材)와 부재(不材)의 사이에 처하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사이에 처하라는 말이다.
材 : 재목 재(木/3)
與 : 더불 여(臼/7)
不 : 아닐 부(一/3)
材 : 재목 재(木/3)
출전 : 장자(莊子) 외편(外篇) 산목편(山木篇)
한영규씨의 '조희룡과 추사파 중인의 시대'에 조희룡(趙熙龍)의 '향설관척독초존(香雪館尺牘鈔存)'이 실려 있다. 운치 있는 짧은 편지글 모듬이다. 그 중 한 편인 '계숙에게(與季叔)'란 글이다.
石有暈, 木之癭, 皆物之病也, 而人愛之.
돌의 무늬나 나무의 옹이는 모두 그 물건의 병든 곳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아낍니다.
人之有才, 如木石之病.
사람이 재주를 지님은 나무나 돌의 병과 한가지입니다.
不自愛而爲人所愛.
자신은 아끼지 않건만 다른 사람이 아끼는 바가 됩니다.
久則見厭, 反不如凡石閒木之自在無恙矣.
하지만 오래되면 싫증을 내니, 도리어 평범한 돌이나 보통의 나무가 편안하게 아무 탈 없는 것만 못하지요.
人之處世, 可將處材不材之間.
사람의 처세는 재(材)와 부재(不材)의 사이에 처하는 것이 좋습니다.
햇무리 진 돌은 수석(壽石) 대접을 받아 좌대 위에 모셔진다. 나무의 울퉁불퉁한 옹이는 사람으로 치면 암세포 같은 종양이다. 이런 것이 많아야 분재(盆栽)감으로 높이 쳐준다.
그뿐인가. 없는 옹이를 만들려고 철사로 옥죄고, 좌대에 앉히겠다며 멀쩡한 아랫부분을 잘라낸다. 나무나 돌의 입장에서는 재앙을 만난 셈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금방 싫증을 낸다. 얼마 못 가 좀 더 신기한 것이 나오면 거기에 혹해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재주를 파는 일은 늘 이렇다. 붕 떴다가 급전직하 추락한다. 그때 가서 평범한 돌, 보통의 나무를 부러워해도 늦었다.
재여부재(材與不材), 즉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재능을 비유한다. 장자(莊子)의 산목편(山木篇)에서 유래했다.
莊子行於山中, 見大木, 枝葉盛茂.
장자가 산속을 걷다가 큰 나무를 보았는데, 그 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했다.
伐木者, 止其旁而不取也.
한 나무꾼은 그 나무 옆에 멈춰 섰으나 그 나무를 베지는 않았다.
問其故, 曰; 無所可用.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길, '쓸 데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莊子曰; 此木, 以不材, 得終其天年.
장자가 이르길, '이 나무는 재목감이 아니므로 그 천년의 수를 얻으리라.' 하였다.
夫子出於山, 舍於故人之家.
장자가 산에서 내려와 친구 집에서 머물게 됐다.
故人喜, 命豎子殺雁而烹之.
친구는 기뻐하며 하인에게 기러기를 잡아 요리를 하라고 했다.
豎子請曰; 其一能鳴, 其一不能鳴, 請奚殺.
하인이 주인에게 물었다. “한 마리는 잘 울고, 다른 한 마리는 잘 울지 못하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主人曰; 殺不能鳴者.
주인이 답했다. “잘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明日弟子 問於莊子曰; 昨日山中之木, 以不材得終其天年, 今主人之雁, 以不材死. 先生將何處.
다음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속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누릴 수 있었고, 오늘 주인 집 기러기는 쓸모가 없어서 죽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시려고 하십니까?”
莊子笑曰; 周將處乎材與不材之間.
材與不材之間,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 若夫乘道德而浮游則不然.
장자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 사이에 있으려고 한다.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 사이라는 것은 중용의 도(道)와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래서 양쪽으로 얽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자연의 이치에 따라 순응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언제나 그 재주가 문제이다. 남달리 뛰어나도 문제이지만 너무 우둔해도 문제인 것이다. 요즘 세태는 너무 편협해도 문제이지만 속없이 나불거리는 그 입(口)도 문제이다. 과연 그 중간은 어디인가?
양시양비론 처럼 둘다 옳고, 둘다 그를수 있다는 생각을 하루 빨리 공유한다면 극단주의, 배타주의에 치우쳐 미움과 갈등, 다툼과 분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사회는 서로 양보하고 이해할수 있는 공동선을 찾을수도 있지 않을까?
오로지 '도' 아니면 '모'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극단주의와, 내 것만 옳고 남의 것은 다 그르다는 이기주의 적인 의견만 팽배하여 재여부재(材與不材), 즉 중도는 설곳이 없다.
오로지 타협은 없고 투쟁만 있을뿐이다. 이렇게 끝도 없고 길도 없는 기차길 같은 평행선만 달려 가면서 자기편 논리만 옳고 객관적이고, 상식적이고 유일한 정의라는 것이다.
양시양비론, 중립적 자세는 비겁하며 사회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아닌 비판을 서슴치 않고 있다. 어찌하면 좋을까?
황소가 아무리 힘이 세도 외나무 다리에선 힘을 못쓰고 물고기가 아무리 빨라도 뭍에서는 거북이 보다 느리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
사물은 언제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르게 보일때가 있다. 거기서 해답을 찾을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재여부재(材與不材) 중도가 필요한 것이다.
옛말에 삼인문수(三人文殊)라는 말이 있다. 3인이 모여 논하면 지혜를 다스리는 문수보살과 같은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 이 난국을 타개 하기위해선 지혜를 모아야 한다. 태산같은 자부심을 보이다가도 풀잎처럼 누울때도 있어야 한다.
아니면 모두가 나몰라라 백년하청(百年河淸)이나 해야 되나? 황하가 맑아지기 만을 기다린다는 뜻인데 천년을 붉게 물들인 황하가 백년이 흐른들 맑아질까?
그저 손놓고 초야에 묻혀 안빈낙도(安貧樂道)나 하는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처지이지만 평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며 즐긴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