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이 친구는 규슈 서쪽지방에서 흥기했던 류조지가의 중신으로 나중에 대명으로 출세한 인물입니다! 임진난에서도 수군인가을 끌고 온걸로 기억하는데... 역시 우리나라의 명장들에게 된통 당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상당한 기량이 있던 인물입니다! 그럼...보시죠!
출처는 일본 역사군상시리즈 규슈전기에서 발췌!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直茂) 1538-1618
류조지가의 중신(重臣). 지모․용맹․박식함을 고루 갖춰 주군 타케노부을 지탱한 명장이다. ‘치쿠고(筑後)의 웅(熊)’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를 도와 규슈에서 류죠지가가 세력을 떨쳐울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마야마(今山)전투에서는 대병력을 거느린 오토모군을 상대로 야습의 기략으로 패배시킨 인물이었다.
그러나 시마즈와의 충돌을 우려한 나오시게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타케노부는 5만여 대군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갔다가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의 적은 군세와 시마즈 본대의 매복에 걸려 류죠지의 수만 군세가 무너지고 주군 다카노부의 전사한 이후에는 몰락의 길을 걸은 주가(主家) 류쇼지가를 대신해 치쿠고일대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훗일 임진왜란에서 수군으로 토도 다카도라(藤堂高虎)등과 함께 싸웠다. 결국 도쿠가와 정권아래서 명실공히 사가(佐賀)번 34만석의 초대 번주가 된다.
- 나베시마씨(鍋島氏)의 유래-
사가번(佐賀藩) 35만 7천석의 번주(藩主) 나베시마의 원조는 오오미(近江) 겐지(源氏)의 삿사(좌 )목 타카쯔나(高鋼)으로부터 9대손인 나가오카이세슈쯔네히데(長岡伊勢守經秀)는 옛적에 히젠에 내려와 나베시마촌에 살며 이름을 나베시마씨로 바꾸었다.
쯔네히데는 에이로쿠(永德)3년(1383)에 서거하고 아들인 쯔네나오(經直)는 류조지씨(龍造寺氏)를 섬기기 시작하면서 본거를 본압촌으로 이동했다. 이후 이곳은 나베시마씨의 본거지가 되었다.
나베시마씨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가번의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조부․기요히사(淸久)의 활약 덕분이었다. 에이로쿠 3년(1530) 쥬코쿠(中國)의 오우치씨(大內氏)가 히젠(肥前)에 공격해 들어와 타데나와테(田手畷;첩)에서 쇼우니씨(少式氏)와 교전하자 나베시마 기요히사, 기요후사(淸房)부자는 귀면(鬼面)을 한 200여명의 병사들과 함께 오우치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쇼우니씨의 승리를 주도했다.
당주 류조지 이에가네(龍造寺家兼)는 기요히사의 공을 치하하는 동시에 장남 이에쯔미(家純)의 딸을 기요후사에게 시집보내었다. 이 혼인으로 인해 류조지씨와 깊이 맺어짐으로서 나베시마씨의 위세는 더해갔다.
이 기요후사와 가순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나베시마 나오시게이다. 나오시게는 텐분(天文)7년(1538) 본압의 관에서 태어나 어릴적 이름은 안법사였다. 17세에 좌위문대부을 얻고 후에 비탄슈 노부나리(飛驒守信生)로 바꾸었으나 훗날 덴쇼 7년(1589) 가가슈나오시게(加賀守直茂)로 개명한다.
나오시게의 무용이 천하에 널리 알려진 것은 겐기(元龜)원년(1570)에 이마야마합전(今山合戰)에서 였다. 6만여명에 달하는 오토모(大友)의 대군이 히젠으로 진출해오자 본거지 사가성(佐嘉城)는 함락의 위기를 맞이했다.
이때 나오시게의 감연(敢然; 과단성있고 용감한)히 야습(夜襲)을 주장하고, 직접 700여기(騎)을 거느리고 이마야마의 총대장 오토모헤이지로노부사다(大友八郞親貞)의 본진에 야습을 감행해, 노부사다의 목을 베고 동시에 오토모군을 격퇴했다.
이로서 사가성의 위기를 구한 것이었다. 나베시마씨는 [타데나와테(田手畷)], [이마야마(今山)]의 두 차례의 류조지가의 존명의 위기를 구했다. 당시 33세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이 이마야마합전의 승리로 인해 류조지가에서 확고한 지위을 확립할 수 있었다.
류조지 타카노부(龍造寺隆信)는 이마야마합전의 승리를 계기로, 오토모씨의 세력권에 있던 치쿠젠(築前), 치쿠고(築後), 히고(肥後)을 차례로 먹어들어가 당시 세력을 확장하던 사쓰마(薩摩)의 세력권과 경계를 맞닿았다. 당시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치쿠고․히고을 제압할 수 있는 치쿠고의 사가미성(酒見城)에 들어갔다.
덴쇼 12년(1584) 3월 류조지 타카노부는 남쪽의 시마하라(島原)반도의 소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을 토벌하기 위해 병사을 일으켰다. 시마즈씨(島津氏)도 하루노부 구원을 위해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에게 3,000여의 병력을 주어 히젠으로 보내었다.
이때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염려가 되어 주군 타카노부에게 『 시마즈는 전투에 뛰어난 자들로 섣불리 공격을 하면 안됩니다. 제가 선진(先陣)으로 나가 적의 상태을 확인한 후에 몸소 출마하십시오』라고 진언(進言)했으나 타카노부는 『걱정마라, 이에히사, 하루노부을 토벌하는데, 이토록 주의하는 마음(用心)은 아무소용없다』하며 웃으며 출진했다.
이것이 역사상 이름높은 [오키나와테(沖田畷)의 합전]의 전투였다. 나오시게가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한(懸念)것이 통하여 우려한 일이 벌어졌다.
류조지 타카노부는 이에히사의 교묘한 [미끼매복전법의 계(釣野伏의 計)]에 걸려 류조지군은 대패하고 자신도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패보을 접한 나오시게는 교묘히 군사를 수습하여 귀성했다. 기세가 오른 시마즈군이 타카노부의 머리를 갖고와 사가성의 개성을 협박하자 나오시게는 주군 타카노부의 머리을 받기를 거부하며 『명문 류조지씨에게 항복이란 두글자는 없다. 빨리 공격하라. 히젠무사의 의지을 보여주겠다.』란 결연(決然)한 말을 했다.
나오시게의 결의가 완고함을 알자 시마즈 이에히사는 공성전(攻城戰)의 무익함을 생각해 군을 돌이켰다. 나오시게는 이후 류조지 마사이에(龍造寺政家)을 총사(總師)로 앉치며, 타카노부 전사후 혼란스런 류조지가의 태세을 정비하고 자신은 사가성에서 마사이에을 보좌하여, 사실상 류조지가의 체제를 자신이 집정(執政)했다.
나오시게는 범용한 마사이에을 보좌하며, 류조지씨의 가운을 만회하려 했지만 마사이에는 남쪽에서 팽창을 해오는 시마즈씨의 압력에 굴복해, 나오시게의 진언을 무시하며, 시마즈의 휘하에 들어가려 했다.
류조지씨의 위기가 닥쳤습을 안 나오시게는 비밀리에 사자을 입경시켜 간바쿠(關白)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나오시게의 이름으로 서안을 보내었다.
『저의 류조지가는 시마즈씨의 압력에 굴복하려 합니다. 마음속으로 시마즈씨의 아래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전하의 규슈입성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규슈에 들어와 당당하게 선진(先陣)으로 오시길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 라고 언상(言上)했다.
천정(天正) 14년(1586) 9월, 나오시게의 필사의 간언에 주군 류조지 마사이에는 시마즈와 절교를 선언하고 히데요시의 깃발아래에 들어가 히고(肥後)북부로 진격했다.
천정 15년(1587) 2월, 히데요시는 아카마가제키(赤間關)에 도착했다. 나오시게는 특별히 허락을 받아 히데요시을 배알할수 있었다.
히데요시는 [ 나오시게가, 이 어려운 상황에서 과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신묘한 것이다. 이후에도 충근(忠勤; 충성스럽고 부지런한)하도록....] 이런 약속을 받았다.
히데요시의 대군앞에 시마즈세력도 흐지부지 무너져 내려 시마즈 요시히사는 천정 15년(1587) 5월, 히데요시의 군문(軍門)에 나와 항복했다.
간바쿠 히데요시는 치쿠젠(築前)의 관기(管崎)에서 규슈경영을 위해 나라를 분할했다. 이때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는 같이 대명의 위치에 앉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나오시게에게
[ 류조지 마사이에는 당초에 시마즈씨에게 가담하려 했다, 다시 반항할지도 모른지 않던가, 여기에 일말의 행동에, 공을 세운 너에게 히젠(肥前)의 육군(六郡)을 내리겠다. 거성은 사가성(佐嘉城)이다. 거기에 그방면에 히젠의 기타 타카키(北高來)군(郡)과 양부군(養父郡)의 일부을 같이 주겠다. 거성에는 조속히 알려주마.....] 하고 바다를 건너갔다.
이후 류조지 마사이에가 병약하여 국정이 어려워지자 류오지가의 회의에서 나오시게에게 집정을 인계받게 된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이로써 류조지씨을 대신하여 다이묘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메이지 유신때까지 이어지는 히젠 32만석의 대번(大藩)의 기초을 쌓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있다가 동군으로 돌아서 이에야스의 용서을 받았고 이후 가문을 물려받은 아들이 도쿠가와 막부에 히젠의 봉록을 인정해달라는 서신을 보내 승인받고 히젠 32만석의 영지을 지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