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수업 9 죽음 이후 아미타불의 광명과 함께 하는 염불법
죽음의 순간이 인생 최고의 기회입니다. 앞선 글로 법신의 청정한 빛과 하나될 수 있는 순간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만약 하나될 수 있다면, 그 시간을 연장할 수 있을만큼 살아생전에 수행의 준비를 잘 했다면, 이 순간이야말로 해탈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문제는 대다수의 중생들은 수행의 준비가 미비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좋은 기회도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습니다.
보다 현실적인 기회를 알려드리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걱정마세요. 두 번째 보신의 빛이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이 빛이 바로 아미타불의 광명입니다.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의 48대원이 있습니다. 이 중 십념왕생원은 가장 중요합니다. 중생이 임종의 순간 첫째, 극락에 태어나기를 희망하는 원심을 품고 둘째, 아미타불의 명호를 열번 듣거나 말한다면 예외없이 광명으로 그를 맞이하러 가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임사체험을 연구한 이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개 임종 이후 밝은 빛을 목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생각해봐야 할 점은 임사체험자들에게는 원심과 염불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중생의 죽음 이후 광명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찾아온다고 봐야 합니다. 사실 찾아온다는 표현은 틀렸습니다. 마음의 본성의 빛이 드러나는 것이기에, 마음을 공유하고 있는 중생 모두에게 공통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념왕생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정토를 설명하는 경전들에는 아미타불과 극락의 보살들이 반야용선을 타고 염불수행자를 접인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단순히 광명이 찾아오거나 경험되는 것을 넘어서 극락세계로 이끌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십념왕생원의 효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심과 염불심을 원동력으로 삼아 죽음 이후의 두 번째 기회를 잡아서 정토왕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종교를 모태신앙으로 가지고 있다고 불교로 개종하는 분들은 이런 의문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아가페적이고,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그 힘으로 사랑하는 자녀들을 모두 천국에 태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 도대체 지옥에 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과연 무조건적인 사랑에 해당될까요? 전지전능한 것이 정말일까요?
이를 해결하기 위한 키워드가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만 존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이 선택은 부처님도 하나님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인과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법칙이야말로 신의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원치 않는 중생을 극락으로 이끌 수 있는 권리는 아미타불에게 없습니다. 요청하지 않는 지옥 중생을 천상으로 옮길 수 있는 권한이 지장보살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자대비한 불보살님들은 항상 중생의 요청을 기다립니다. 최소한의 인과가 성립되어야 권한이 생기고 그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념왕생원은 극락세계로 중생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요청입니다. 극락세계에 가고 싶다고 부탁한 것이고, 극락왕생이라는 과를 맺기 위한 최소한의 인이 바로 염불 열번인 것입니다. 이러할 때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중생의 극락왕생을 도울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 아미타불과 보살들은 이 순간 너무나도 큰 환희심을 느낄 것입니다. 밝게 빛나는 몸과 마음으로 중생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 것입니다. 이제 그 손을 잡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보신의 빛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넘어야 하는 함정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자비도량참법>에는 임종 이후 영가의 경험에 대해 다양한 묘사를 합니다. 그 중 하나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악업을 너무 많은 지은 중생은 선업보다 악업이 훨씬 익숙합니다. 그 결과로 빛을 어둠으로 보고, 어둠을 빛으로 보는 거꾸로 된 견해를 지니게 됩니다. 이 어리석음이 죽음 이후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악업을 많이 지었으니 야차가 쫓아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이 위험과 재앙이 광명의 환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야차의 손을 잡고 지옥을 극락으로 착각하며 쫓아가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로 말입니다. 반대로 죽음 직후에 평등하게 찾아오는 보신의 빛은 어두움으로 경험됩니다. 그럼 큰 두려움을 느낀 채 도망가기 마련입니다. 밝게 빛나는 아미타불의 손을 잡기만 하면 극락왕생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 지르며 공황에 빠져 도망갑니다. 눈 앞에서 왕생의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업이 습관화 된 결과물, 무명번뇌의 무서운 점입니다. 자유의지로 극락을 마다하고 지옥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임종 직전의 십념왕생원은 일종의 계약입니다. 아미타불의 접인 계약서에 마지막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그럼 죽기 직전에 염불수행하면 누구나 왕생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 살아생전 염불의 습관이 없는 이들은 공포스러운 죽음의 과정 속에서 염불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합니다. 그렇기에 일상 속에서 염불 수행을 습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 살아생전 지악수선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눈 앞에서 극락왕생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게 됩니다. 자유의지로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결국 두 가지 중 최소한 한 가지는 훈련해야 합니다. 지악수선의 원칙으로 착하게 살던지, 그럴 겨를이 없었다면 적어도 염불수행을 통해 아미타불에 대한 신심과 친숙함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귀신처럼 무섭게 보이는 아미타불의 정체를 눈치챌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질테니까요. 아무리 공포스럽더라도 용기내 아미타불의 손을 잡을 수 있을테니까요. 염불공덕이 중요한 그 순간 영가를 도울 것입니다.
복잡한가요? 그래도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원리를 이해한 상태에서 단순한 수행의 원칙을 정리해야 합니다. 사실 복잡할 것 없지 않나요? 그냥 매일 염불수행하면 됩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염불수행을 매일의 습관으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첫째, 아미타불의 광명에 익숙해집니다. 둘째, 염불이라는 선을 실천한다면 자연스럽게 지악수선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나무아미타불' 육자염불이 입에 붙으면 두려움이 극대화 될수록 오히려 더 염불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순간 당연히 십념왕생원을 실천하여 계약서에 최종적으로 도장을 찍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죽음의 순간 주어지는 해탈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최고의 방편은 염불수행입니다. 두 번째 보신의 빛의 도움으로 극락왕생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살아생전 염불수행을 많이 한다면 염불삼매의 힘으로 첫 번째 청정한 법신의 빛과 하나될 수도 있습니다. 해탈의 기회를 잡는 방법이자 동시에 극락왕생의 힘이 되는 이 염불수행을 삶 속에서 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요? 또한 가장 쉽고 간편한 사띠수행의 방법인 이 염불수행을 실천하지 않을 핑계가 더 남아 있나요?
그냥 염불하면 됩니다. 이것만으로 삶이 극락과 같아지고, 죽음 이후 최소한 극락왕생이 보장되며, 나아가 곧바로 해탈 열반을 증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위대한 공덕으로 만든 수행자 보신의 크기만큼 중생을 구제할 수도 있으니 염불수행이야 말로 모든 불자들에게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수행이자 필수로 실천해야 하는 의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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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친구중에 며칠전 어머님이 호스피스병동으로 이동하신 분이 있어 글을 공유했습니다. 부모님은 죽음으로 마지막 사랑과 가르침을 주고 가시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의 극락왕생과 친구도 죽음공부가 절실해지는 기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_()_ 물론, 저에게도요.
감사합니다_()_
스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염불수행...
성불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스님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스님_()_
스님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예~~^^ 스님_()_
감사합니다_()_ 나무아미타불_()_
예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스님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