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잊으랴 / 어찌 우리 이날을 /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광복 이후 어수선한 정국을 틈 타 북한에 단독 괴뢰정부를 세운 김일성은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을 넘어 전격적인 무력남침을 감행했다. 공산주의에 맞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던 전쟁이 한국전쟁이다. 38선을 기습적으로 통과한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가공할 화력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26일 낮에 벌써 북한군은 문산에서 법원리까지 진출해 서울로 진격 중이었다. 국군 15연대의 최병순 소령이 이끄는 육탄용사들이 수류탄만으로 육탄공격을 감행했다. 육탄특공대원들에 의해 북한군 전차 6대가 파괴되자 당황한 북한군은 공격을 중단하고 문산리로 철수했다. 그러나 밤늦게 폭우가 쏟아지자 기상의 악조건을 역이용해 공격을 감행해 왔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폭우에 최후 저항선이 무너지자 국군은 결국 후퇴하게 된다.이에 국군은 도봉산에서 상계동을 잇는 구릉지대에 방어선을 쳤으나 불행하게도 이 지역은 적의 기계화 기동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국군은 병력과 장비, 지형의 절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26일 17시, 다리에 매복해 있던 로켓포조 분대장이 진격해 오는 탱크 1대를 파괴하는 최초의 전과에 이어 이날 밤 결성된 특공대가 적 탱크 2대를 추가로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뜻하지 않은 탱크 손실에 잠시 공격을 멈췄던 북한군은 27일 새벽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탱크 40대와 자주포를 앞세우고 총공격을 감행한다. 이에 국군은 총력을 다해 저지했으나 전력의 열세에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 미아리와 청량리를 잇는 제2의 방어선을 쳤다. 그날 밤 적이 다시 공격해 오자 국군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화력을 집중해 선두에 있는 탱크를 파괴시켰다. 이에 북한군이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사이에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는 거센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장대비가 쏟아지자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야간 경계태세를 소홀히 했다. 특히 길음교(橋) 폭파 준비와 폭약 도화장치의 점검을 하지 못했다. 국군의 상황판단과는 달리 창동 일대에서 공격준비를 갖춘 북한군은 밤이 되자 공격을 개시해 미아삼거리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무섭게 쏟아지는 폭우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깜깜한 밤에 탱크를 앞세우고 다시 공격해 오는 북한군에 우리 국군은 필사적으로 맞섰으나 화력의 열세는 물론, 예기치 못한 악시정으로 결국에는 북한군의 길음교 진출을 허용하고 말았다.전쟁사를 보면 제공권을 빼앗겼거나 적은 수의 병력으로 기습할 때 흔히 악기상을 이용한다. 그런데 미아리나 문산 전투의 경우를 보면 전력과 화력이 일방적으로 우세했던 북한군이 악천후를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아리나 문산 전투에서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국군의 용맹성으로 예상 밖의 전차 피해가 생기자 북한군 지휘관은 가장 나쁜 기상조건이 가장 유리한 공격시간이라고 판단해 심야에 폭우가 쏟아질 때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군 지휘관들은 비가 많이 내려 전차 기동이 어렵고, 북한군은 야간에 전투를 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방심했다.전투에서의 고정된 패러다임은 패배를 불러 올 확률이 높다. 무릇 전투란 살아 있는 생물과 같아 시시각각으로 그 상황이 변한다. 어떠한 기상조건이 공격자에게만 절대 유리하고 방어자에게는 절대 불리하라는 법은 없다. 뛰어난 지휘관이요, 리더라면 상식적으로 불리한 기상조건이라도 상황에 따라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창의적 패러다임을 갖춰야 함을 잘 보여준 전투사례라 할 수 있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