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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방랑객
교토 여행 12 - 도쿠가와씨가 지은 니조성 정원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생각하다!
간사이 여행 사흘째인 2024년 9월 20일 교토 고조거리와 가와라마치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호텔을 나와 렌터카를 몰아 교토 시내 중서부에 자리한 니조성에 도착하는데 성 건너편에
사설 주차장에 차를 넣고는... 대로로 나와 해자에 높은 성벽을 두른 니조성의 위용을 바라봅니다.
니조성에는 입장료가 2가지가 있으니..... 700엔 짜리는 정원만 보는 것이고 궁전까지 보면
1,300엔 짜리를 끊어야 하며 초등 학생은 300엔이고 중학생은 400엔으로
성문을 들어서니 2차 해자가 보이는데, 니조성 (二条城 이조성)은 동서 480미터에
남북 360미터 로 무척 크고 넓은 성이니, 폭 13미터, 깊이 17미터인 해자를 두르고 있습니다.
니조성 니노마루 입구에 중간크기 정도의 문이 있는데 지붕의 재질이 특이하게도 신사에서
처럼 히노키피즙 나무 껍질로 만들어져 있으며 단아하게 축조된 지붕의 처마는
검은 옻칠을 한 바탕에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 을 하였으니 서양인들은 연방 감탄사 를 냅니다.
저만치 금박을 입힌데다가 세세한 조각으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정문이 보이니 수많은 관광객
들이 사진 찍느라 바쁜 모습을 보는데..... 처마 가운데에는 여러 종류의 새모양을
조각한 현판 이 걸려있으니 한눈에 보이도 매우 정교하게 조각 되어 있는걸 알 수 있습니다.
니조성 은 모토리큐 니조조 (元離宮 二条城) 라고도 부르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덴노(천황) 가 머무르던 교토 고쇼 (京都御所 경도어소) 를 보호하고 또 자신이
교토를 방문했을 때 머무를‘쇼군 將軍’의 거소 로 사용하기 위해 1601년에
건축을 시작해서 2년 후에는 니노마루(二之丸) 부분이 먼저 완공 되었다고 합니다.
니노미야 정원 은 궁전 뒤에 위치되어 있는 아담한 정원으로 연못 이 있고 주변에
암석이나 나무 등을 배치하는 지천회유식 정원 인데... 1626년에 코보리 엔슈
(小堀遠州) 라는 에도 시대의 건축가이자 정원 설계사가 설계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정원은 하치진노니와 (八陣の庭) 라고도 불리우며 연못 중앙에 샘을 상징하는 돌이 3개
놓여 있고 연못의 좌우로 학과 거북이 모양으로 돌이 배치된 게 특징 입니다.
혼마루는 니조성의 제1 성곽 으로 니노마루 뒷편에 있는데.... 성 안에 다시 성벽 을
쌓고 해자 를 둘렀으며 니조 성에서 가장 수난을 많이 당한 곳으로
천수각은 낙뢰를 맞아 불타 버리고 1788년에는 궁전 까지 화재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1600년 동서 20만 대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전투에서 승리해 일본의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이듬해 여기 니조성(二条城) 건축을 시작했으며... 1603년 일왕에게서
“쇼군(將軍 장군)”으로 임명되어 에도 도쿠가와 막부를 여는데 쇼군의 정식 이름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이니 일본 원주민인 '에미시(毛人)' 를 정복하는게 임무였습니다.
BC 3세기경 한반도 에서 철기문명에 벼농사 를 짓는 사람들이 건너와 조몬인 을 아우르고
부족국가를 세우니 야요이인 인데, AD 4세기 말을 탄 김해가야인 들이 건너와 왜인의
소국가들을 통합해 한반도와 규슈에 걸친 세력를 이룬후 391년 왜군을 이끌고 한반도로
되돌아와 동족인 김해가야 및 아라가야인들과 연합해 신라를 공격해 서라벌을 포위 합니다.
다급해진 신라 내물왕 은 "왜병이 가득하니 노객(노비) 이 되겠다" 며 고구려에 엎드리자
광개토대왕은 399년말 5만대군을 남하시켜 신라를 구원해 종발성(김해)을 함락하니
왜군과 김해가야인들은 일본으로 달아나는데 원군이 없었다면 신라는 망했을 것이라!
그런데 고구려가 신라를 차지하지 못하고 급하게 회군한건 후연이 침략해 왔기 때문입니다.
400년 2월 후연의 모용희가 3만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해 5천을 포로로 잡아
가고 700리 땅 을 차지하니 철수한 것인데, 후연 은 396년 광개토대왕을 평주목
요동대방이군왕 에 책봉했으니..... 전연에 수도 국내성이 함락되고 왕모와 왕비에 5만명
백성이 잡혀갔던 탓에 책봉을 받았던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예를 따랐으니 평화가 유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해인 397년 후연 은 북위에게 수도 중산을 뺏기고 북쪽 용성으로 달아났으니
30% 도 채 안되는 국토만 남은지라 북위의 재침에 대비해 국력을 키우기 위해 빈틈을
노려 고구려를 침략한 것인데, 고구려는 2년후인 402년 후연의 숙군성 을 반격하지만
다음해 404년 왜군은 고구려땅 황해도 를 침탈하니 백제가 뱃길 안내 를 했던 것일까요?
고 최인호씨는 김해 대성동 13호 고분 주인공이 규슈로 건너가 왜인의 소 국가들을 통합한 숭신왕
이라고 했으니 서기 400년에 달아난 왜~김해 가야인들이 오사카로 진출해 나라현
가시하라에 세운 나라가 야마토(大和) 며, 다이아몬드 교수는 일본어 뿌리는 백제어 이고
한국어는 신라어로..... 교도 통신은 DNA 분석에서 야요이인과 조몬인 혼혈이 일본인 이라 합니다.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가니 혼마루 천수각터 로 여기서 내려다 보는 경치 가 좋으니
혼마루를 둘러싼 해자 들을 천천히 내려다 봅니다. 그리고 안습 이라고 불리는
건물은 황실의 별장인 가쓰라리큐(桂離宮) 일부를 이용해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안습의 혼마루 궁전 은 일반에게는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며.... 세이류엔 이라고 불리는 정원 은
1965년에 민간에서 얻은 정원석 과 다실 등으로 조성한 곳으로 벚꽃이 피면 더욱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니조성(二条城) 을 지은 이 자리는 원래는 니조신고쇼
(二条新御所 니조신어소) 였다는데..... 그럼 혼노지의변 때 오다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 가 모반한 아케치 미쓰히데군의 공격을 받아 싸우다 패해 자결한 그곳 입니다.
빗츄(오카야마현) 다카마쓰성의 모리군 을 공격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 를 지원하기 위해 1만 3천을 이끌고
단바를 떠나 서쪽으로 향하던 아케치 미쓰히데는 1582년 6월 21일 여기 니조성의 남쪽 근거리 에
위치한 혼노지(本能寺) 에 이르러.... "적은 혼노지에 있다! (敵は 本能寺に あり!)" 라고 외치며 난입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는 한때 총애했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그가 즐겨
부르던... “인생 오십년 하천(下天) 의 하루에 비교하면 일장춘몽, 덧없는 꿈 과 같구나.”
라는 아쓰모리 처럼 스러집니다! 人間五十年 下天の中を くらぶれば 夢幻のごと くなり
인근에 묘가쿠지(妙覚寺) 에서 숙박하던 노부나가의 적자 노부타다 는 혼노지에 변이 발생
했다는 소식을 듣자 혼노지로 달려가려고 했으나 가신들이 막았고, 곧이어 노부나가
의 할복 소식이 전해지면서 아케치군에 대적하기 위해 방비가 허술한 묘가쿠지를
벗어나 사네히토친왕 (誠仁親王)이 자택으로 사용하던 니죠신고쇼(二条新御所) 로 옮깁니다.
오다 노부타다 는 바로 이곳 니죠신고쇼 (二条新御所) 에서 적은 수의 병력으로
이세 사다오키 (伊勢貞孝) 가 이끄는 아케치 대군의 공격에 맞서 선전 했으나
결국 중과부적의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멸했으며 노부타다 자신도 자결 했습니다.
가신들은 후퇴해서 다음을 기약 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노부타다는 평소 빈틈없는 일처리를 보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모반 했다면 자신이 도망칠 후방도 병사를 배치해 두었을 것이니
사로잡히면 무사이자 오다가의 적장자로서 세상에 이런 수치가 있을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노부타다도 자결 하면서 역시 아버지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수급이 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그의 말을 따른 수하들이 니죠신고쇼의 마루
바닥(縁の板) 을 벗기고 시체를 감추었기 때문에.... 아케치군이 끝내 그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노부타다를 도와 뒷처리 를 맡은 무사는 가마다 신스케 (鎌田新介)였으니 그는 우물속에 숨어
있다가 야밤이 되자 탈출한뒤 고야산(高野山) 에서 숨어 지내던 중에....
도요토미 정권의 다이묘 후쿠다 마사노리 (福島正則) 의 초청을 받아 가신이 되었고,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마사노리를 따라 바다를 건너와서 조선 남원성에서 전사했다고 합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혼노지의 변을 맞아 26세로 사망한 오다 노부타다 가 살아남았다면 일본 통일
은 오다가 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니, 노부나가가 전장에 나설 때 마다 따라 다니며 전공을 세워 후계자
수업 을 받아왔고...... 혼노지 변이 일어난 당시 노부나가에게서 오다가의 당주직을 물려받은 상태 였습니다.
오다 정권은 노부나가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지해 유지된 것이 아니라 유능한 가신들이
역할을 담당하는 시스템 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인데... 그러나 기둥이던
노부나가와 당주 노부티다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오다가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오다가를 대신해 단시일내 일본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일본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탁월해서라기 보다는 이러한 오다 정권
의 시스템에 힘입은 바 크며, 히데요시가 아니라 시바다 가쯔이에 (柴田勝家) 를 비롯해 오다가의
가신들 중에서 그 누가 정권을 잡았다 하더라도..... 오다 정권에 의한 일본 천하통일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성립에 앞서 히데요시 는 이에야스의 영지를 도카이지방 (東海地方)
에서 변두리인 간토(関東) 로 옮기도록 명했는데, 노부타다 는 특별히 이에야스를
경계할 일이 없으니... 그럼 일본의 중심이 간사이(関西)에서 간토(関東)로 옮겨
가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렇다면 오늘날 일본의 중심은 도쿄가 아니라 오사카 일 것입니다!
노부나가 부자가 죽은후 다이묘들은 그들 부자의 예를 타산지석(他山之石) 으로 삼아 당주
와 후계자가 함께 위험한 지경에 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피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노부타다가 살았다면 히데요시가
일본의 패권을 잡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 그럼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요스 회의 에서 후계자가 된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타카 는 훗날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와 대립해 싸우다 죽으면서 절명시 를 남겼습니다!
옛부터 주인을 치는 자의 노마(野間)라면은 천벌을 기다려라 하시바 지쿠젠.
(昔より 主を討つ身の 野間なれば 報いを待てや 羽柴筑前
다치바나 교코 (立花京子)는“노부나가와 십자가”라는 책에서‘아케치 軍記’를 인용해 노부나가의 후원자 였던
예수회는 노부나가가 예수회와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 확장 정책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에다가 일본 통일
을 눈앞에 두자 통제를 벗어날 것을 우려 해서는 기리시탄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 를 충동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아케치 미쓰히데 는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모양의 인장 을 사용했으며 셋째 딸 다마코
玉子(옥자, 가리샤) 와 가신 다카야마 우콘 이며 측근들 중에는 그리스도
교도가 많았습니다. 아케치 미쓰히데도 히데요시에게 패해 죽으면서 절명시 를 남겼습니다.
순역에 두 문은 없고 큰 길은 마음 속에 있음을 깨달았도다. 오십 오년간의 내 이 꿈이여,
깨고 나니 원래로 돌아가누나. (順逆無二門 大道徹心源 五十五年夢 覚来帰一元)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평화 를 유지하고자 희망했으니 임진왜란때 잡혀간
조선인들을 일부 돌려 보내자 조선도 통신사를 파견해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부산에 왜관 을 설치해
무역하니 김동철 교수는 “500년 이어진 부산 속‘이방인 특구’․․․ 동아시아 물류 허브였다” 라는 글을 썼습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일본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조선에 왜관 설치를 요청해
1601년 영도섬에 절영도 왜관 이 설치되고 1607년 육지인 동구청 일대에 두모포 왜관 이 설치된후
1678년에 왜관이 초량으로 옮겨지니... 동구청 부근은 지금도“고관” 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산의 왜관 역사 는 그보다 훨씬 오래됐으니 조선 태종 1407년 에 부산시 동구
자성대에 왜관 이 최초로 설치되니 부산포 왜관 인데 이 해에 제포(웅천현 진해) 와
부산포(동래현) 가 개항 되고 1423년 염포(울산) 가 개항되면서, 삼포개항으로
왜관의 시대 가 열렸으니 부산에는 1407년 부터 1876년 까지 470년간 왜관 이 있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삼포 가운데 제포(진해) 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그다음 부산포,
염포 순인데 1544년 사량진왜변 으로 두곳은 폐쇄되고 부산포 1곳만 열린 가운데
1592년 임진왜란 침략을 당하는데‘경국대전’을 보면, 부산포 왜관이 있는 동래현
은 종5품 현령 이 임명되다가 일본 사신 이 들어오므로 종3품 동래부사 가 파견됩니다!"
"1547년 동래부가 탄생되고 단일 왜관 시대 가 열리면서 부산은 일본과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으니... 교류의 최종 목적지는 서울이었는데 일본 사절이 서울로 가던 길 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침략로 가 되었으며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절영도왜관·
두모포 왜관 이 설치되고, 1609년 기유약조가 체결되면서 양국 국교는 정상화 되었습니다."
"17세기 이후 일본은 일본과 교류하는 외국을 무상(貿商) 의 나라, 통신 의 나라로 구분했으니..... 전자는
교역 관계를 맺은 중국· 네덜란드 이고 후자는 국교 관계를 맺은 유구·조선 이었는데 유구는 1609년
사쓰마번이 침략해 점령한후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으니 명실상부한 통신의 나라는 조선 뿐이었습니다."
"17세기 이후 동래(부산) 는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일본인)이 거주하는 유일한 열린 도시
였으니 왜관은 500명 정도의 일본인(대마도인) 이 사는 이방인 지대였는데
왜관을 통해 외교· 경제· 문화· 풍속· 정보등 다양한 교류를 했으니 공무역 수입품
에는 물소뿔· 후추· 명반(백반)· 소목(단목) 등 동남아시아 물품 이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대마도를 통한 형태지만, 왜관은 조선이 동남아시아와 교류하는 공간이었는데 사무역
물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 고급 비단(실) 과 일본 은 이었고 간접 형태지만
왜관은 중국과 일본이 교류하는 공간 이었으니.... 즉 왜관은 중국, 일본 및
동남아시아 물품이 교류되는 공간이었으며 동래(부산)는 동아시아 물류의 허브 였습니다"
"초량 왜관 은 1709년에 왜관 밖에 설문을 만들어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으니 왜관은
엄격히 통제돼 닫히고 갇힌 공간 이었으며 불법으로 왜관 경계를 넘으면 사형
이었지만... 왜관 일본인과 왜관 밖 조선인은 이 사선(死線)을 끊임없이 넘나
들었으니 왜관은 경계짓기와 경계넘기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동적 현실적 삶터 라!!!"
"조선 후기 한일 양국의 교류는 통신사와 왜관 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니
통신사 파견은 1607년 부터 1811년 까지 모두 12번 이었는데, 처음 3번은 회답겸
쇄환사였으니... 통신사가 한시적· 제한적· 명분적 교류였다면, 왜관은 일상적·
구체적· 실리적 교류의 장 이었으니 지금 두 나라에서는 통신사행열 축제 가 열립니다."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出島) 에는 네덜란드 상관 이 일부 복원되어 존재 하지만
흔적조차 없어진 부산의 왜관 과는 대조적인데... 2010년‘부산초량왜관
연구회’가 만들어져 활동을 하고 있으니 왜관(터) 은 중세는 물론 근대·
현대 부산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키-스톤(중요한 돌)’ 이라고 생각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요청으로 실현된 부산 왜관 과 통신사 생각을 하면서 정원 을
산책하다가 좀 더 둘러보면 좋겠지만.... 오늘 중으로 보아야 할 곳이 많으니
시간이 없는지라 니조성을 나와 렌터카에 올라 교토 시내 니시키 시장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