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오규원
죽음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1991)
해설
[개관 정리]
◆ 성격 : 우의적, 냉소적, 비판적
◆ 표현 : 추상적인 대상(죽음)에 인격을 부여한 우의적 수법의 사용
자문자답하는 형식을 통해 냉소적인 느낌을 전해 줌.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죽음 →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상징
추상화된 이름으로, 현대인의 '의식의 죽음'을 풍자하기 위해 설정된 인물
* 걷기가 귀찮아서 → 일시적인 편안함, 극도의 귀찮음에 젖어 사는 모습
* 나는 할 일이 많아 → 죽음이 택시를 탄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유와 변명으로
둘러대는 말
* '생각'과 '한 잔' 중에서 '한 잔'을 선택하는 죽음 → 현실적 어려움이나 고민을
피하려는 모습
*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 생각하고 고민하기를 미룬 죽음이 둘러대는 핑계
*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 그만두기로 했다.
→ 생각 자체를 귀찮아하는 모습, 모든 일들을 귀찮아하는 모습
* TV를 보다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함.
신문에서 '건강이 제일이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수긍함.
→ 의식의 주체성을 망각한 현대인의 자화상
◆ 제재 : 무기력한 현대인의 삶
◆ 주제 : 무기력하고 개인주의적인 현대인의 삶에 대한 비판
[시상의 흐름(짜임)]
◆ 1~2연 : 몸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삶
◆ 3~5연 : 현실의 어려움을 회피하는 삶
◆ 6연 :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삶
◆ 7~8연 : 개인주의에 빠져 사는 삶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에서 '죽음'은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설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처럼 행동과 생각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장치는 먼저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되고 있다. 독자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시의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죽음'은 귀찮다는 이유로 몸이 편한 일만 하려 하고, 고민이나 생각조차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변명과 핑계만 늘어놓으며 하지 않는다. 여행을 하겠다는 계획조차도 스스로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신문 같은 대중매체가 주입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로 제시된다. 이렇게 볼 때 '죽음'은 바로 '의식의 죽음'에 다름 아니다. 이 시는 이렇게 죽어 버린 의식으로 당장 편한 것만 찾으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우화란, 인간 이외의 동물 또는 식물에 인간의 생활 감정을 부여하여 사람과 꼭 같이 행동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빚는 유머 속에 교훈을 나타내려고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그 의도하는 바는 이야기를 빌려 인간의 약점을 풍자하고 처세의 길을 암시하려는 데 있다. 이 시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시인은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에 인격을 부여하여 그의 하루를 보여줌으로써 인간 사회, 즉 현대인의 부정적인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우화라는 양식이 독자에게 일정한 교훈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시인은 비판적 주체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전달하려 한다. 이 시에서 주인공은 죽음이다. 그 죽음은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의 주체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자체가 이미 죽음과 같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죽음'은 사람의 이름이다. 과연 시시한 도시에서 시시한 생각을 하면서 시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썩 어울린다. 몸의 편안함을 쫓으며 못난 이유를 같은 방식으로 합리화하고, 책임을 미루고 결국 이를 잊고 마는 시시한 삶이나, 대중매체에 판단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불구적 삶의 모습을 시인은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걷기보다는 택시 타기를 즐기고, 일에 매달려 끙끙대기보다는 놀이의 유혹이 좋고, 이윽고 달콤한 안주(安住)의 목소리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에서 '죽음'이란 이름의 소유자가 보이는 이와 같은 행태는 우리들의 그것과 거의 같다. 짧은 순간의 안일과 평온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핑계를 생산해 내는 것인가. 언제나 더 큰 것에서 이유를 빌려오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이기심일 뿐이다.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젊은 날의 이상과 기개를 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세상은 맑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부단히 젊은 날의 꿈과 이상을 내려 놓기를 유혹하고 변명과 핑계와 합리화의 지침들을 주입한다. 원칙과 원리를 영원히 교과서 속에 감금하고 스스로 흔쾌히 편법과 야합의 전령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다름 아닌 '죽음'이다. 죽음이 아닌 진정한 삶의 세상을 꿈꾸기에는 너무 늦은 것일까. 아예 불가능한 것일까. 시인은 자신의 생각을 명쾌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 시적 인식의 예리함과 정연함, 그리고 냉철함을 기억하도록 하자.
<해설:이희중>
[작가소개]
오규원[吳圭原] : 본명 오규옥, 시인
출생 : 1941. 12. 29. 경상남도 밀양
사망 : 2007. 2. 2.
데뷔 : 1968년 현대문학 등단
수상 : 2003년 제35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부문
1995년 제7회 이산문학상
1989년 제2회 연암문학상
경력 : 1982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1 도서출판 문장 대표
작품 : 도서 51건
저서(작품) : 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전집, 두두
대표관직(경력) :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정의>
해방 이후 『분명한 사건』·『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등을 저술한 시인. 교수.
<개설>
본명은 오규옥(吳圭沃). 경상남도 밀양 삼랑진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1941년 경남 밀양 삼랑진에서 출생했고, 부산중학교를 거쳐 1958년 부산사범학교에 진학했다. 1961년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부산 사상초등학교 교사로 첫 부임을 했고, 교편을 잡은 다음해인 1962년 동아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1964년 5월 시 「겨울나그네」로 『현대문학』 초회 추천을 받았고, 이 지면에서부터 ‘오규원’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7년 「우계의 시」로 2회 추천을 받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으로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했다. 추천자는 김현승 시인이었다.
1969년 동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71년 첫 시집 『분명한 사건』을 한림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973년 두 번째 시집 『순례』를 민음사에서 출간하고, 『현대시학』 주간인 전봉건 시인의 권유로 시평을 쓰기 시작해서 잡지와 일간신문의 월평을 쓰기 시작했다.
1975년 『분명한 사건』『순례』 개봉동 시리즈를 포함시킨 시선집 『사랑의 기교』를 민음사에서 출간하고, 1976년 그동안 썼던 시에 관한 산문들을 모은 시론집 『현실과 극기』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1978년 세 번째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1979년 태평양화학을 사직하고 『문장』이라는 출판사를 직접 경영하여 『김춘수전집』 1,2,3권, 『이상전집』 1,2,3권 등 50여권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1981년 네 번째 시집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를 출간하고 1982년 이 시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에세이집 『한국만화의 현실』을 열화당에서, 『볼펜을 발꾸락에 끼고』를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983년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전임교수가 되었다. 시론집 『언어와 삶』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고, 1985년 시선집 『희망 만들며 살기』를 지식산업사에서 출간했다. 1987년 다섯 번째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를 문학과지성사에서, 문학 선집 『길밖의 세상』을 나남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989년 「비디오가게」 외 4편으로 제2회 연암문학상을 수상하고 수상작품집 『하늘 아래의 생』을 문학과비평사에서 출간했다. 1990년 이론서 『현대시작법』을, 1991년 여섯 번째 시집 『사랑의 감옥』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1995년 일곱 번째 시집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1999년 여덟 번째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를 민음사에서 출간하고, 2002년 『오규원시전집』(전2권)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2005년 아홉 번째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와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2007년 작고한 후 다음해인 2008년 유고시집 『두두』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초기시에 해당하는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는 관념을 언어로 구상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관념적 의미에 물들지 않은 절대 언어를 지향하며, 시인의 상상과 사유 속에서의 언어를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초기시는 현실적인 시공간보다는 주체의 내면의식과 환상이 결합된 가상세계가 중요한 소재가 된다. 중기시인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는 산업화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는 광고를 시에 도입하는 등 형태적인 실험을 통해 물신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아이러니를 이용하여 억압적인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후기시는 『사랑의 감옥』부터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두두』 까지의 시들이다. 이 시기에 오규원은 날이미지 시론을 전개하며 환유적인 방식에 의거한 시 쓰기를 시도한다. 그것은 현상과 그 이면의 생성과 변화 과정을 읽어내는 주체의 해석이 결합된 것이다. 이처럼 오규원은 언어와 이미지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하여 시 쓰기 방식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와 실험의식을 보여준 시인이다.
<상훈과 추모>
현대문학상(1982), 연암문학상(1989), 이산문학상(1995),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화부문 (2003) 수상
<참고문헌>
『오규원 깊이 읽기』(이광호 편, 문학과지성사, 2002)
「오규원의 시론 연구」(문혜원,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25, 2004)
「오규원 시의 변모 과정과 시 쓰기 방식 연구」(이연승, 이화여대 박사논문, 2002)
「타락한 말, 혹은 시대를 헤쳐가는 해방의 이미지」(김동원, 박혜경, 오규원 좌담, 『문학정신』, 1991.3)
[네이버 지식백과] 오규원 [吳圭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첫댓글 삶과 죽음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은 72주년을 맞은 6.25전쟁의 날입니다.
호국영령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