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릉동 추억
어제 12시부터 15시 사이에 소낙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다.
그 시간에 우산을 받쳐 쓰고 하산할 수 있는 산과 코스를 그려봤다.
불암산 ‘당고개역-경수사-정상-헬기장-공릉산백세문-공릉역’ 코스로 잡았다.
10시 33분 당고개역을 나서는 데 일기예보보다 이른 시각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역사(驛舍)로 들어와 배낭에서 우산을 꺼내고 배낭커버를 씌웠다.
우산을 펴 머리 위에 받쳐 쓴 채 서울둘레길 쪽으로 걸어갔다.
서울둘레길을 조금 걷다가 곧장 불암산 정상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경수사’란 절 뒤 큰 바위가 잘 보이는 지점에 이르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우산이 바지와 등산화를 보호해주지 못할 정도였다.
거기서 비 내리는 광경을 담은 후 경수사로 들어갔다.
10시 55분부터 11시 45분까지 절에 머물면서 비가 폭포가 돼 흘러내리는 모습도 찍었다.
비가 더 이상 내리지 않을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정상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뗐다.
폭포약수터와 동일약수터 갈림길을 12시 20분에 지나갔다.
그 직전에 나타난 거대한 바위, 로프 길을 버리고 바위구멍을 통과하는 좌측 길을 택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된 것이었다.
이전에 로프를 잡고 바위 위에 올라가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방향 전경을 구경한 적이 있다.
12시 30분, 덕릉고개와 정상으로 향하는 주능선 갈림길에 올라섰다.
시원한 바람을 벗 삼아 어르신 한분께서 앉아 쉬고 계셨다.
아빠는 나무를 부여잡고 선 채 선선한 바람을 쐤다.
그 어르신께서 그곳을 뜨자 그 자리에 앉아 사과와 단팥빵 한 개씩을 먹으면서 쉬었다.
당초 계획을 바꿔 거기서 ‘책을 읽다가 정상을 밟은 후 곧장 하산할까?’라는 생각도 했다.
12시 53분, 정상 쪽으로 이동하는 데 헬기가 나타나 정상 주변을 선회했다.
빗속에서 누군가가 미끄러져 사고가 난 것 같았다.
13시 04분, 다람쥐광장에서 보니 거북바위(거북산장) 바로 위에서 구조작업을 하고 있었다.
13시 09분, 정상에 올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담은 후 곧장 내려갔다.
거북바위 앞을 지나가면서 산장 안으로 들어가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물었다.
다리를 다쳤다고 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불암산성(헬기장) 쪽으로 이동했다.
13시 30분 불암산성을 지나 14시 34분 ‘공릉산백세문’ 앞에 섰다.
그 후 원자력병원 화장실에서 세면을 하고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로비에서 휴식을 취했다.
소보로 빵 한 개와 삶은 옥수수 절반을 먹으면서.
15시 정각에 병원을 나서 천천히 공릉역(15시 18분 도착)까지 걸었다.
공릉동, 아빠와 인연이 있는 동네다.
1992년 최초로 독립했을 때 공릉동 현대아파트 입구에 자리를 잡았다.
친구 탁00, 후배 최00 선생과 함께.
‘아카데미학원’과 ‘아카데미학력연구소’란 이름으로.
대입학원 강사(교무책임자)로 일하면서 지역별 학력수준을 면밀히 연구했다.
그 시절 중랑구 묵동, 노원구 공릉동 지역이 서울에서도 학력수준이 가장 낮은 편에 속했다.
우리는 학력수준이 낮은 지역으로 들어가 학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결의를 하고 함께 뭉쳤다.
당시엔 지금처럼 유명한 ‘은행사거리’가 형성되기도 전이었다.
지금은 강남구 대치동·양천구 목동·노원구 중계동 은행사거리를 3대 ‘학원가’라고 한다.
상식 밖으로 늦게 개원(開院; 1월 중)했지만 상당히 큰 바람을 일으켰다.
수준 높은 학부모와 학생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이00 교수님(따님 대한민국 최고 명문중 예원학교 재학)과 사모님,
아빠 고교 1년 선배(해군사관학교 출신) 정00 중령(당시) 동기 따님 허가영과 그 어머님,
선화예술중학교 3학년이면서 예고 입시를 준비하던 여학생 등이 눈에 선하다.
연세대학교 ROTC 출신 장교(당시 소령) 사모님의 눈물을 잊을 수 없다.
그 소령은 자식 교육에 무관심한 채 오직 자신의 취미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허가영과 동급생인 중학생이 구구셈도 잘 하지 못했다.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었던 아빠(부원장)는 그분 아들에게 별도 과외를 무료로 해줬다.
허가영 어머님께서 몇 년 후 명일동 아빠 학원을 찾아오셨다.
가영이가 대원외국어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말을 듣고 아빠 후배 대원외고 이00 선생을 소개했다.
그런 학원을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한 갈등이 지속됐다.
동업은 다 그런 것이란 말을 들었지만 우리는 그렇게까지 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내부 선생님 중 한 분이 자기에게 넘기라고 간청해 그분에게 인계했다.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남기고 공릉동을 떠나야 했다.
아들도 공릉동 학교에 대한 애착이 많을 것이다.
아빠가 아들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그렇게 했던 이유를 이제라도 이해해주면 좋겠다.
나중에 아들이 공릉동 학교 때문에 6개월 이상 방황했다는 얘기를 엄마로부터 들었다.
그때 아빠 마음이 어떠했겠니?
너무나 아파 속으로 많이 울었다.
이젠 전화위복이 돼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렸지만.
아들이 아빠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되겠지?
대한민국 모든 장병들과 함께하는 태풍부대 육군28사단 상병 김0, 오늘도 화이팅!!!
첫댓글 함께 산행을 한것같네요^^* 전화위복 되셨다니 다행이구요^^*
앞으로 좋은일 가득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늘 겅강하시길 바랍니다.
산행이 멋지세요~
늘 행복하세요^^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에릭님
글 과 사진 너무 고맙습니다.
마치 제가 산을 오르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동업참 힘들죠~
잘된 케이스들도 있고 안된케이스도
있듯이 다 비슷한것 같습니다.
사업이 힘든건 아닐까요 ㅎ
참 잘 될 것으로 알았습니다.
두 사람이 견해차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중간에서 개입하는 것이 곤란했습니다.
한 사람이 제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바위를 바탕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오는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더위 한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광석님의 노하우가 계신것 같아..
다행입니다..
동업이란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운영형태에 있어서 가장 어렵고 힘든 형태가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일설에 동업이란 자식하고고 하면 안된다는 애기들도 있구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최소한 90%이상 내어 놓을 수 있는 자세가 되어있지 않으면 힘이 들것이란 것이 통설인듯 합니다...
광석님...
화이팅입니다..
고맙습니다.
이열치열을 즐기는 편입니다.
동업, 당시 두 사람 사이에서 제가 중재를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친구는 중학교 동기로 오래된 사이였고, 최 선생은 친구와 사회친구로 그때 처음 알게 됐습니다.
친구와는 말을 막 하는 사이였습니다.
최 선생은 제게 형님이라고 불렀지만 저는 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다툴 때 제가 중간에 개입하면 오해할 여지가 있어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끝내(지금까지) 원수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동업이 참 어려운게 맞습니다.
예전에 87년도 동대문 이스턴 호텔 옆에 친구와 오파상을 차렸습니다.
전 자금을 조달하였고 친구는 아이템으로 영업을 하였지요
그런데 영업이 잘 안되고 하니깐 어느날부터인가
월세와 경비 충당에 제가 감당이 안됨은 물론 갈등이 생기기 시작 하였습ㄴ니다.
당시에 제가 손을 다쳐서 영업쪽은 친구가 맡아서 하기로 하였지만
월세도 재대로 못 내어 결국에는 문을 닫고 말았지요.
그 친구 어느날인가 자취를 감추더니 연락조차 없이 인연을 끊었습니다.
해서 동업은 늘 많은 고민을 주는듯 합니다.
전화 위복이 되었다니 천만 다행 입니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참 힘드셨겠군요.
고맙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진다고 했지요?
계곡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