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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묵상글 ( 연중 제10주간 월수일. - 하느님 없는 황홀경?.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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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 없는 황홀경?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
오늘 독서는 카르멜산에서 엘리야가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입니다.
누구의 신이 응답하는지 그것을 놓고 대결하는데
그 과정에서 거짓 예언자들이 예언 황홀경에 빠지지만 신의 응답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없는 황홀경,
이것을 보면서 저는 하느님이 없는 황홀경과 같은 경험을
우리도 하거나 하려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황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느님이 없는 꽃 감상을 하고,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하느님 찬미는 없고 꽃 감탄만 하는 일은 우리에게 많지요.
이것은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신자라면서 그리고 기도한다면서
하느님 없는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부좌 틀고 관상 기도를 한다면서
실제로는 명상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에 그치거나
하느님 만남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 그 목적인 기도 말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목적이 하느님 또는 이웃과의 인격적 만남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라면 그것은 재물을 많이 달라고 하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이기주의적인 기도이기에 당연히 사랑의 기도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시시하게 물질을 탐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탐욕인 황홀경을 기도 욕심으로 원할 수 있습니다.
황홀경을 다른 말로 하면 무아지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마약 중독자들도 원하는 황홀한 경지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황홀경을 탐할 것이 아니라
앞서 얘기했듯이 하느님과 이웃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원해야 할 것이고,
그랬을 경우,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 아닌 크나큰 고통이 반대로 올 수도 있습니다.
성인들의 경우, 특히 프란치스코의 오상의 경우와 같이
너무나 사랑하여 기도할 경우, 주님의 상처를 같이 받게 되는데
그것은 너무도 사랑하면 똑같은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기도라고 알려진 기도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지요.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당신이 황송하옵게도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꿀과 같은 당신 사랑에 내 마음 달게 해주시고,
불과 같은 당신에 내 마음 뜨겁게 해주시어, 당신 사랑의 크신 힘으로
하늘 아래 있는 그 모든 것에서 저의 마음을 빼내어 차지하소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 주님을 사랑하듯이 지극한 사랑으로 기도하면
그의 고통을 내가 대신 느끼는 일도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의 고통이 내게 옮겨오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고 신체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프란치스코처럼 이런 기도를 바치기까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거짓 예언자들처럼 고차원적인 욕심을 채우는 기도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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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오랜만에 어느 자매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예전의 젊음은 완전히 사라졌고,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걷는 한 할머니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도 많이 늙었네요.”
무엇이 이런 변화를 불러온 것일까요? 자매님의 삶일까요? 아닙니다. 시간이 이런 변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이 자매를 거의 30년 만에 만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50대 초반이었던 자매님은 80대 할머니가 된 것이고, 저는 20대의 풋풋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50대 중년이 되어 만난 것입니다.
자매님을 그리고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3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그 흐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 바뀌지 않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시간을 이기시고 또 시간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에 항상 그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큰 착각은 자기 시간을 살아야 하는데, 구약 시대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율법을 통해 사람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과 예언서의 기본 정신은 자유와 해방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를 억압과 구속하는 법으로 만든 것입니다. 형식주의와 율법주의가 팽배했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정신인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더 열심히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을 뛰어넘어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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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좋은 사람을 보면 그를 본보기로 삼아 모방하려 노력하고, 나쁜 사람을 보면 내게도 그런 흠이 있나 찾아보라(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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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 복음 안에서 완성(실행, 성취, 채워짐)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고, 결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복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계명을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알고 있는 것을 말로 선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고, 그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합니다.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는데,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그리고 내일 우리가 기념하게 될,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사랑의 원의’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기를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행동으로 지키고 가르치며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닌, 행실로 사랑하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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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큰 사람이 되십시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되고 맙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여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 보다는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의 핵심인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작은 것,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직은 것이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 사람이 되어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가운데 큰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의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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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한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그러자 나타나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러자 필립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보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보다 더 큰일을 하실 수 있다.
2달 전쯤에 봉사자 한분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부님 본당에서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이해서 성령의 밤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댈러스에서 그게 가능할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한번 해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성령 기도회를 보았습니다. 지구 차원에서 성령 기도회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당 차원에서 성령 기도회를 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봉사자는 찬양 팀을 만들었고, 악기 봉사자들로 밴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찬양 팀의 이름을 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라우다떼(찬양하다)’로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성령강림 대축일이 되었고, 봉사자는 찬양 팀과 음악 밴드와 함께 멋진 찬양의 밤을 신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댈러스에 뭐 대단한 게 있을까?’라는 저의 걱정은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찬양의 밤을 마치고 저는 봉사자에게 감사인사를 드렸습니다. 앞으로 찬양 팀과 음악 밴드가 함께하여 ‘음악 피정’을 해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의 예언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 넘었습니다. 엘리야는 혼자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바알의 예언자들이 엘리야를 이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알의 예언자를 물리치시고,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골리앗은 큰 칼과 갑옷을 입었습니다. 다윗은 볼이 불그스레한 청년이었습니다. 손에는 돌팔매만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배움이 많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처럼 하느님의 계명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어부들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부들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갈릴래아의 어부들과 함께 성장하였습니다. 비록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교회는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교회는 인류 문명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역사하십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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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주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종교법률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완수하거나 이루어지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높은 목표를 제시합니다.
율법만을 중시하는 종교적 태도보다는 그것의 심장을 이루는 사랑의 원칙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구절들을 중심으로 사랑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 대해 탐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주님의 주요 가르침 중 하나이며, 사랑이 모든 율법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시작됩니다. 주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써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또한 사랑은 우리의 이웃을 향한 관심과 배려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며, 우리가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중 하나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용서와 자비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 대해 용서하고 자비롭게 대해야 합니다. 이는 종종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 자신을 용서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 주변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필수적인 힘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율법과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주요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며, 용서와 자비를 베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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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질을 배우다 보면….
망치질해 보셨나요?
그럼….
망치질에 손가락이 비명을 질렀던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의 손톱 밑은 이내 검게 변했던 기억들도 있을 것입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칼질을 해 보셨을까요?
그럼….
칼질에 손을 베였던, 그래서 아까운 피가 흘렀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처음보다 잘합니다. 망치질도 칼질도 말입니다. 더 집중하고 더 조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배우는 과정에는 아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건너야 더 잘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랑은 아픔을 품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아픔 뒤에는 더욱 성숙한 사랑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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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戰士)
“더불어(together) 영적승리의 삶”
삶은 전쟁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참으로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모두가 제대가 없는 평생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이 됩니다. 이 주제는 수도사제생활 만35년 동안 강론시 계속되는 주제가 되었고, 되고 있으며 사는 날 동안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주님의 빛나는 불굴의 전사 엘리야 예언자가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 450명과의 대회전에서, 1:450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승리로 끝나는 신바람 나는 긴 장면을 읽으면서 순간 착안한 오늘의 강론 제목이 “주님의 전사, 더불어(together)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가 되겠고, 영적승리의 삶에 앞에 반드시 붙어야 할 ‘더불어(together)’란 말마디입니다. 영적승리의 삶은 혼자가 아닌 주님과 더불어의 삶, 영적전우들과 더불어의 삶을 통해 쟁취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 다산과 맹자의 말씀도 오늘 강론 주제와 일치합니다.
“시련이 나를 태우는 불이라면, 노력은 나를 깨우는 망치다. 불굴을 품은 강철은 수없이 두드려져야 완성된다.”<다산>
“하늘이 큰 일을 맡기려 하면 반드시 먼저 뜻을 세우기까지 괴로움을 주고 피곤케하며 굶주리게 하고 궁핍하게 한다.”<맹자>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 다산과 맹자는 주님의 빛나는, 불굴의 전사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겠습니다.
저보다 11세 연상의 87세 노시인이 출간한 시집이 흥미로워 구입했습니다. 유명한 단편소설 <소나기>의 저자 황순원의 큰 아들인 황동규 시인이 그 주인공입니다. 앞머리에 소개된 이채로운 말마디를 통해서도 이 시인 역시 불굴의 전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시인 황동규는 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도정에도 여전히 삶과 현실의 한가운데서 세상 살기의 의미와 진실에 이르기 위해 하루하루 전력투구하고 있다.”
얼마전 “그냥 살라” 제 강론에 항의성 비슷한 메시지도 잊지 못합니다. 삶의 한복판에서 정말 치열히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 레지나 자매와 오고 간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정말 그냥 살아요. 눈뜨면 기도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기도하면 졸고 성체조배가면(21시-22시) 그냥 자고 자다가 집에 오면 또 자고 새벽부터 다시 시작...그래도 행복합니다. 졸지도 잠도 주무시지 않는 주님이 계시니까요.”
“자매님은 그렇게 치열히 사는 것이 아름답고 맞습니다. 그냥 주님의 전사로 치열히 사시다가 때로 주님 앞에서 그냥 쉬기도 하시구요”
어제 오후의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이런 축제와 같은 장례미사를 장례예식장에서 봉헌하기도 처음입니다. 포크레인 요한 형제의 모친 이순금 마르타 자매님의 장례미사였습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입니다. 수도원 초창기부터 한결같이 성실히 수도원 공사시나 온갖 허드렛일 봉사를 해준 포크레인 세례자 요한 형제를 통해 만나뵙지 못했지만 그 어머니의 인품과 신앙을 짐작할 수 있었고 적중했습니다.
장례미사시 30여명이 성체를 모셨고, 미사전에는 10여명 젊은 자손들이 고백성사를 봤고 유가족들이나 참석한 분들의 모습이 즐거워보이고 착해 보였습니다. 요한 형제가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당시 12살의 큰 형에 동생이 셋이니 어린 자식들 5명을 젊은 과부가 되어 산전수전 다 겪으며 훌륭히 키워냈고 끝까지 충실히 신앙생활에 충실하다가 90세로 선종한 것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의 전사로서 더불어의 평생 영적전쟁을 승리로 끝낸 죽음으로 마침내 천국에 입장하셨다고 강론중 전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장례미사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축하합니다! 주님의 전사, 마르타 자매님, 복된 선종의 죽음을!”으로 정했습니다. 미사후 수도형제의 “지난 주일미사 강론시 ‘생명선’(lifeline)이란 말마디가 무슨뜻인가요?” 질문이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공동체 울타리가 바로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보호해주는 생명선입니다. 공동체 울타리 생명선이 없은 노숙자나 행려자들 얼마나 위태한 삶을 살아갑니까? 더불어의 울타리 생명선이 무너져 혼자될 때 절망과 좌절에 자살하기도 합니다. 우리 수도형제들 수도원의 울타리 생명선에서 벗어나 세상 한복판에서 혼자 살아간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되겠습니까? 얼마전 어느 선배가 후배에게 주었다는 충고도 잊지 못합니다. ‘직장이 전쟁터라고? 밀어내기 전까지는 살아 남으라. 밖은 지옥이다!’”
천하무적, 하느님의 전사 엘리야가 최종 승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믿음 충만한 언행을 소개합니다. 흡사 다윗과 거인 골리앗의 전투를 연상케 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나 됩니다.”
최선을 다한후 생사가 달린 절박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영적전투에서 만반의 준비를 다한후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주님의 전사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주십시오.”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에 이어 지체없는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리니, 엘리야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 정말 통쾌한, 유쾌한, 상쾌한 삼쾌의 빛나는 승리입니다. 그대로 빛나는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이 친히 배경이, 동반자가 되어 주시는 더불어의 영적전투일 때,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엘리야를 훨씬 능가하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불세출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한 철저한 주님의 전사 예수님인지 다음 대목에서 확인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율법이나 예언서들 모두에 대한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예수님의 확신이 단호한지요! 모세의 십계명을 업그레이드 하여 진복팔단의 참행복을 선보인 주님께서는 이어 참으로 모든 율법을 포괄하면서도 그들을 훨씬 업그레이드 된, 6개의 대당명제를 제시합니다.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서 완전한 영적승리를 위한 최고의 처방을 제시하십니다. 내일부터의 복음이 소상하게 이를 밝히 보여줄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살아 계신 하느님과 함께 할 때, 공동체의 영적전우들과 함께 할 때,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로써 영적승리의 삶이 뒤따를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끝으로 읽을 때 마다 영적전의를 새롭게 하는 제 좋아하는 담쟁이 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26년전 1998년 나이 50에 쓴 시이지만 여전히 새롭게 읽혀지는 제 좋아하는 자작시중 하나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일이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요 구원이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 주님의 전사이다”
<1998.6.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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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다만 그러하게 하소서>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불신에는
이유가 있고
믿음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믿음일 때까지
다만 믿게 하소서
절망에는
이유가 있고
희망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희망일 때까지
다만 희망하게 하소서
증오에는
이유가 있고
사랑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사랑일 때까지
다만 사랑하게 하소서
거짓에는
이유가 있고
참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참일 때까지
다만 참되게 하소서
악에는
이유가 있고
선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선일 때까지
다만 선하게 하소서
추함에는
이유가 있고
아름다움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아름다움일 때까지
다만 아름답게 하소서
죽임에는
이유가 있고
살림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살림일 때까지
다만 살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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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한 자도 없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한 말을 잊지 않는 사람은 빈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말씀이 어떻게 빈말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당신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하지 않으면 벌을 주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당신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을 어떻께 실제로 행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은 당연히 율법의 가장 작은 것까지도 완수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이처럼 영혼이 성장하면, 우리의 재능도 발달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고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선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더 큰 길을 가겠다고 작은 길을 버려서도 안 된다. 우리는 가급적 최상의 방법으로 그것들을 전부 완성해야만 한다." 우리의 신적인 능력에 이르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의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하느님은 자신을 최고의 천사에게 줄 뿐만 아니라 내게도 준다. 만일 내가 천사들이 받는 것만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나는 천사가 풍성한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것만큼 받게 될 것이다" 받기 위하여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서 받을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향상 새로워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의 일천 배라도 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준비 부족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본성을 거스른다면, 그것은 그분을 해치는 짓이 되고 말 것이다.” 성장이야말로 영적 체험의 본질적인 요소다. “‘있음’은 ’됨‘ 속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됨은 한계를 모른다.(184)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5절: 십자군 운동
제 4차 십자군(1202-1204):
이 계획의 무성과와 무의미함은 서구에서 남자들만으로 무장한 십자군을 계속하는 데 회의를 일으키게 하였다. 하느님은 피에 굶주린 군인들보다는 방위력이 없는 소년 • 소녀들을 이용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설명될 수 없는 1212년의 소년 십자군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때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천 명의 소년 • 소녀들이 프랑스의 목동인 스테파노와 퀼른의 열 살짜리 니콜라오 두 소년의 인솔하에 성지로 급히 출발하였다. 예상대로 이 광신적인 계획은 무서운 비극으로 끝났다.
원정은 벌써 이탈리아에서 흩어졌다. 많은 아이들이 더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소녀들은 사기꾼들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더럽혀졌다. 마르세유와 브린디시에서 배를 기다리기 위해 모였던 나머지 아이들은 비양심적인 선주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노예로 팔렸다. “이 소름이 끼치는 모습”은 십자군 사상의 “악의적인 풍자화”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그 시대의 정신 태도에서는 다른 사회적 계층과 연령층으로 십자군의 감격이 추이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 하였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폭력적인 진압과 정복 대신 평화적인 선교를 한다는 십자군 사상의 건전한 핵심을 그후에 취하였다. 그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다미에타로 술탄을 직접 찾아갔다. 그의 설교는 효과가 없었고, 적대하고 있던 군대들은 그후에도 피비린내 나게 서로를 물어뜯었다 -1219년에 다미에티를 점령 하였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 도시에서 무서운 살인행위를 저질렀다. 그후 그들 모두 포로가 되었으나 술탄으로부터 관대한 취급과 보호를 받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지에서 프란치스코회의 평화적인 선교는 이때 시작되었다.
제 5차 십자군(1228∼1229):
그것은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개인적인 계획이었다. 또한 그는 그때 파문중에 있었다. 그는 이집트 술탄과의 교섭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인에게 반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1224년에는 성도(聖都)를 결정적으로 잃었다.(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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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
자연과 언어 사이에 있는 간극 곧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우리는 쉽게 감지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연은 연속성, 끊어지지 않고 쭉 이어지는 상태나 성질을 늘 함유하고 있지만, 이를 표현하는 언어는 불연속성, 분절성을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연과 언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처럼 구약과 신약 사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핵심인 율법과 예언의 정신은 신약에도 연속적으로 이어지지만, 동시에 신약에 와서 불연속성도 드러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까닭은 구약의 율법은 낡고 화석화된 언어라면, 신약의 복음은 살아있는 자연 곧 생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하고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는 구약의 핵심인 율법과 예언의 근본이자 본질인 ‘사람과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충실한 계약 곧 자비와 사랑은 변할 수 없기에 이어지겠지만, 본래의 의도와 정신이 사라진 채 율법주의적인 문자는 파기하시겠다는 의도를 표명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셔서 율법과 예언을 통해 하느님 당신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셨지만, 세상과 사람은 당신의 뜻을 거역했기에 마침내 당신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 구원계획을 완성 곧 구원하시려는 의지를 밝히신 것입니다. 율법은 한계를 지닌 인간의 언어, 불연속성이라면 복음은 예수님의 인격 곧 예수님의 존재와 삶 자체이기에 단절과 분절이 아닌 영속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사랑으로 사람이 되신 당신의 강생과 당신의 파스카로 말미암아 세상과 사람의 구원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의 완성은 율법 준수, 문자라는 형식적이고 기능적인 실천에 있지 않고, 율법의 근본인 하느님의 모상적 존재인 사람을 구원하고 사랑하는 일, 곧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13,10)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13,34)하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의 실행이 곧 완성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매개이며 본질입니다.
사실 율법이 필요한 때가 있었죠. 사도 바오로는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3,24)하고 가르치면서도, 아울러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로3,20)하고 선언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5,19)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23,4)하고 말씀하신 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사람이라고 자처하던 율법 학자들처럼 ‘입술’로만 살지 말고, 비록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랑의 삶을 살라고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5,19)하고 확언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존재의 크기는 바로 율법과 복음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존재와 삶으로 실행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중심은 사람이며,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며 살았느냐에 달려 있기에 무엇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이것이 지금도 유효한 까닭은 바로 소위 우리가 말하는 진리의 영속성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이를 예수님은 당신 존재와 삶을 통해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시고 그 흔적을 따라 성령과 함께 뒤따라오기를 지금도 바라시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시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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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말에 반감을 가지게 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규칙과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율법주의’를 비난하셨지 ‘율법’ 자체를 반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와 목적은 뒤로 한 채 조항을 지키는 것 자체에서만 의미를 찾고 그로써 하느님께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율법주의는 두려움과 편협함과 완고함을 낳을 뿐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 없음’도 경계하십니다.
‘율법의 폐지’를 바라는 사람들은 법은 필요 없고, 사랑하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은 법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곧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유명한 문장인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라.”가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법을 꺼리고 거기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여긴다면,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자신 안에 사랑이 없으면서도,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자기만족에 기울게 됩니다.
이기적인 자아 추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화하면서 율법을 없애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울림』, 200-204면 참조).
우리는 규정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율법주의’와 내적인 기준을 없애고 무분별한 자유를 바라는 ‘율법 없음’을 모두 경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율법의 참의미’를 깨닫고, 이를 지키는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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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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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매일의 꾸준한 작은 봉헌과 헌신은 신앙생활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시골에서 살다 보니 은혜로운 일이 참 많습니다.
도시에서 사무직에 종사할 때는 조금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종이나 씨앗을 뿌리면서, 잡초를 뽑거나 예초기를 돌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니, 그 안에 얼마나 ‘작은 것들’ ‘소중한 생명’들이 숨어있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물웅덩이에는 벌써 뭔지 모를 작은 알들이 우글우글 거립니다.
적당히 부드러워진 땅속에는 새끼 지렁이들이 꿈틀꿈틀 댑니다.
이웃 밭과의 경계선으로 심어놓은 나무 가지 마다에는 수많은 작은 꽃들이 보송보송 매달립니다.
바닥에는 아주 작은 노란 풀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오릅니다.
그야말로 여기저기 ‘작은 것’들의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자동차만 타고 다닐 때는, 흙을 손에 묻히지 않고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할 눈부신 광경입니다.
그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경제개발 논리, 속도전에 젖어 살아와서 그런지 너무 큰 것, 빠른 것,
대단한 것, 뛰어난 것, 앞서 가는 것만 선호합니다.
그러다보니 작은 것, 평범한 것, 소박한 것, 가족적인 것, 일상적인 것들의 소중함과 가치는
어느새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신앙생활 안에도 많이 따라 들어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 안에서도 뭔가 대단한 것을 찾아다닙니다.
특별한 분위기만 선호합니다.
말씀 좋고 ‘기도빨’ 세다는 곳만 순례합니다.
본당이나 단체들 강의를 다니면서 절실히 느끼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특강은 한 번씩 분위기를 바꿔주는 외식이나 간식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명강사라 할지라도 반짝 한번 왔다 가는 것입니다.
특강 한번 듣는다고 뭐가 특별히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 간식이나 외식이 아닌 주식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일의 미사입니다.
매일의 아침 저녁기도, 이것 역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매일 하루 세 번 바치는 삼종기도, 습관처럼 드리는 묵주기도, 수시로 바치는 화살기도,
매일의 꾸준한 작은 봉헌, 일상적인 십가가의 수용, 이런 것들이 사실 신앙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여기저기 특별한 곳, 대단한 곳, 신기한 곳, 줄기차게 찾아 다녀봐야 그 끝은 언제나 허탈함이며 공허함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작은 것, 일상적인 것들을 중요시 여기고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큰 것, 대단한 것도 중요시 여기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것, 반복적인 것, 구체적인 것, 작은 것들에 대해서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충실하게 해나가야겠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 큰 사람, 대단한 사람들도 잘 대우하고 환대하지만 내 가장 가까운 가족, 형제,
이웃, 직장 동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작고 소소한 일상들에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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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신앙의 장애물을 뛰어넘는 삶
<2024.6.12> 아침을 여는 묵상(행 19:21~41절)
❝신앙의 장애물을 뛰어넘는 삶❞
❚ 달리면서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목표를 향해 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 장애물을 뛰어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 성령 안에서 명령을 순종해야 합니다(21~22절).
에베소에서 사역했던 기간에 일어났던 일들이 끝난 후에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갈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21절)... 바울이 이방 문화의 중심지인 로마에 가서 얼마나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는지 그의 굳은 마음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돕는 사람 가운데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먼저 마게도냐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머물렀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작정하다, 엔 토 퓨뉴마티)하심 따라 이뤄진 결심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만족에 빠져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결과를 만들어 낼 때가 있습니다. 주변의 반응과 세상적 가치관에 묶여 하나님의 나라를 작은 테두리 안에 가두는 어리석은 삶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사역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모든 신앙의 장애물을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더 도전하고 시도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복음 안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23~34절).
바울이 에베소에서 얼마간 머물며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바울의 원대한 계획은 뜻하지 않은 장애물에 부딪혔습니다. 데메드리오라는 세공업자가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당시 에베소의 주요 사업은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파는 것이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바울 때문에 이 사업에 지장이 생겼다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대적했습니다.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사람들은 ‘에베소 사람 아데미여’(28절)라고 외치며 무섭게 폭도로 돌변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다니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연극장으로 끌고 갔습니다(29절). 위기에 처한 동역자들을 위해 바울이 백성 가운데 들어가려 했지만, 제자들이 그를 만류했습니다. 극장 안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고, 심지어 자신들이 그 곳에 왜 모였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32절). 군중심리는 무섭게 난폭해 졌고, 광포한 군중들은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는 위대하다...’(34절,쉬운성경)라고 두 시간 동안 외쳐댔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영적 전쟁의 선전포고와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한 결심을 할 때 사탄의 공격은 반드시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고, 적잖은 소동도 일어나게 합니다. 그러한 장애물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리고 여러 소동 때문에 포기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으로 인한 소동은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반드시 거쳐야 할 장애물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다면 그 어떤 장애물이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전진해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를 힘쓸 때,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그 장애물을 통과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을 버리고 복음 안에서 사명을 잘 감당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믿음 안에서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35~41절).
이어 서기장이 나서서 무리들을 진정시킵니다. 그는 먼저 에베소 성의 사람들을 칭찬하며(35절),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36절)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끌고 온 사람들이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거나 아데미 여신 숭배를 훼방하지 않았음을 지적했습니다(37절). 만약 그들에게 법적인 문제가 있다면 고소하여 정식 재판 절차를 거치라고 말했고, 나아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소동을 일으킨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비난을 받을 위험이 있고, 또 이 소동에 대해 변명할 말이 없다면서 모임을 해산시켰습니다(39~41절).
바울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이 가져다주는 고난에 붙잡혀 있지 않고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세계를 보면서 현실의 고난과 핍박과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한 서기장의 개입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현실이 주는 고난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그 영광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꿈, 주님께서 주신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진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장애물에 부딪히는 일도 있고, 험한 산과 바다 끝에 거하는 절망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그것마저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고백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요,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사모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신앙생활을 해 나아감에 있어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나타난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성령과 복음 안에서 그리고 믿음 안에서 용기 있게 사명을 감당하므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행 19:21~4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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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계명들이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하늘 나라도 높고 낮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십일조와 같은 계명들을 소홀히 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을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가는 데 특별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실제로 십일조가 구원의 핵심 요소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며 구원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목적지만 닿으려고 해서는 작은 계명들에 충실할 수 없습니다.
우주 왕복선 챌린저 참사(1986)를 생각해봅시다. 고체 로켓 부스터의 O-링 씰 때문에 비행 73초 만에 부서져 탑승한 우주비행사 7명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비극은 저온에서의 O-링 성능에 대한 공학자들의 경고를 간과한 결과였습니다.
그냥 목적지에 닿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작은 것은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음주운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된다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음주운전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집에 못 가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게 될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만 들어가면 된다고 여기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이타닉 침몰(1912)도 그렇습니다.
선박은 여러 차례 빙산 경고를 받았지만 고속으로 계속 주행했습니다.
또한 선박 건조에 사용된 강철 리벳의 품질이 표준 이하여서 충돌 시 선체가 더 쉽게 파손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치로 인해 ‘가라앉을 수 없는’ 선박이 처녀 항해에서 침몰했고 이에 따라 1,500명 이상의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했습니다.
목적지가 하늘나라여서는 안 됩니다.
작은 계명들을 무시하다가 결국 목적지에도 도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목적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거부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들이 무언가 이루어 낼 것임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부자들이 해 놓은 말에
귀 기울입니다.
영국에 “펜스를 관리하면 파운드가 스스로 알아서 관리할 것이다.”
(Take care of the pence, and the pounds will take care of themselves)란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동전을 잘 관리하면 큰 돈은 저절로 관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승호 회장도 “자식(동전)에게 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부모(지폐)가 잘해줄 리 없다.”라고 말합니다.
김승호 회장이 자신의 회사 앞의 노숙자에게 지폐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놀라서 지폐와 큰 동전들만 가지고 작은 동전들은 바닥에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김승호 회장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아무 가치도 없는 동전들을 주워서 회사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작은 돈에 충실한 자신을 보며 큰돈들이 들어올 것을 직감한 것입니다.
이들이 작은 것에 충실할 수 있는 이유는 그냥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커다란 부를 이루어내겠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작은 것을 소홀히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계명을 지키게 되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성녀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잔 다르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려고 순교의 길을 선택했던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이 ‘세심증’을 겪습니다.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면 성인이 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사제의 소명을 느낍니다! 나는 사도의 소명을 느낍니다! 나는 전사, 사제, 순교자가 될 것입니다.
나의 작은 존재여, 나는 선지자들과 박사들처럼 영혼들을 깨우치고 싶습니다.
나는 사도의 소명이 있습니다.
나는 온 땅을 여행하여 당신의 이름을 전파하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모든 땅의 땅에 심기를 원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작은 고통을 참아 받으며 자신의 소명에 바쳤습니다.
그렇게 수도원에서만 살았음에도 위대한 성녀가 되었습니다.
선교의 주보 성인이 되었습니다.
좋은 뜻만 있으면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더 하늘 나라에 확실히 들어가는 목적, 곧 위대한 성인·성녀가 되는 사명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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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새로운 정신과 옛 율법
율법과 예언서를 만드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라고 하심으로써 모두 이루셨다. 그리고 파스카 신비로 율법을 완성하셨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이 모든 것들은 아무리 작은 계명이라도 잘 보존하며 열심히 성실하게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작은 계명도 하늘나라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 가르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르치려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때, 그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주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인 상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신데 어떻게 실제로 행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당연히 율법의 가장 작은 것까지도 지키셨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가르치지만 지키지는 않는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다. 계명들 가운데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 반대되는 법을 만들어 낸 자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을,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법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 약속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선의 것은 아니다. 법은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을 어기게 되면 불편해지는 것이 사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유롭다. 그러기에 법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법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에 매여,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마음의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율법에 나의 이웃을 대입시키고 판단하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좀 더 하느님의 눈으로 성서의 정신을 따라 인간을 생각하고 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율법주의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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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5,17-19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격언은 진리라고 하기에 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늘 힘이 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머리로 아는 것을 제대로 활용할 때 나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힘이 됩니다. 스스로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면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스스로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음을 알면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머리로 알고만 있으면 그 앎이 나에게 오히려 병이 됩니다. ‘이걸 빨리 채워야 하는데’, ‘이걸 빨리 고쳐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마음의 짐이 되고 죄책감이 되며 나중엔 이상과 현실 사이의 큰 괴리감 때문에 절망과 자괴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율법이나 예언서의 완성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도 그런 차원입니다. 물론 예언서들에 나오는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613개나 되는 수많은 율법 규정들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어렵다고 해서 그 어려움을 핑계로 제대로 실천도 해보려 하지 않고 이런 저런 단점들을 들먹이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는건 예수님이 하고자 하신 일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도 아닙니다. 예언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으로 가는 올바른 길로 이끄시려고 당신 예언자들을 통해 전해주신 안내 메시지입니다. 또한 계명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불안함이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당신 사랑에만 집중하며 기쁘게 살 수 있게 하시려고 건네주신 이정표이지요. 그런데 그 계명을 더 완벽하게 지키겠다는 열의로 만든 수많은 율법 규정이 그 근본 정신을 가려버렸습니다. 수백 가지나 되는 조항들 하나 하나를 글자 그대로 지키기에도 버거워 정작 하느님 사랑 안에 제대로 머무르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점을 바로잡으려고 하십니다. 쉽고 편한 것을 찾는 우리는, 그래서 나태함과 게으름에 쉽게 빠지는 우리는, 하기 싫거나 어려운 것이 있으면 단점을 찾아내고 핑계를 대며 그것을 아예 안하려는 태도를 보이지만, 그래서는 우리 삶에 발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지 않고 ‘완성’하겠다고 하십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 완전하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자비에서 우러나는 융통성으로 경직되어 있는 법과 규정을 보완하듯, 당신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율법의 부족함을 채우심으로써 사람들이 그 율법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크고 깊은 사랑을 느끼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 정확히 말하면 마지못해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말씀과 계명을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는 경외심으로 기꺼이 실천할 때, 우리는 그 안에 숨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참된 기쁨을 누립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놀라운 섭리를 알아봄으로써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굳은 확신 속에서 참된 행복까지 함께 누리게 되지요. 그러니 하느님 말씀과 계명을 스스로 지키는 ‘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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