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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원문보기 글쓴이: 문항!
수덕사는 경내에 넓은 면적에 많은 불당이 있고 차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6세기말 백제 위덕왕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덕사는 고려시대에 지어진 국보 49호 대웅전을 비롯하여 비구니 수도처인 견성암, 환희대, 황하정루, 소림초당, 정혜사, 전월사, 만공탑, 수덕여관, 선 미술관 등 볼 곳도 많다.
일주문을 지나고 금강문을 지나고 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을 보고 1,080계단을 올라 정혜사까지 이르면 시간도 솔찬히 걸린다.
만공선사의 부도탑인 만공탑을 지나 정혜사까지 이르니 스님들의 동안거로 정혜사 문은 닫혀 있다.
정혜사 바로 아래 만공탑은 다비 후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는 만공선사 의 유지에 따라 사리가 없다.
대웅전은 맞배지붕과 기둥의 중간 부분이 상하부분보다 두터운 배흘림 기둥양식으로 단아하고 단순미를 보여주는데 1937년 해체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건축년도가 고려말인 1308년으로 확인되어 오래 된 목조 건축물로 인정받았으며 16, 18,19세기에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단청개칠기에서 알 수 있다.
배흘림기둥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선생이 1994년 쓴 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많이 알려졌다.
대웅전 모서리의 나무기둥은 단청이 벗겨지고 풍상에 마모되어 마치 석회동굴의 종유석같이 표면이 울퉁불퉁하여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더 오래 된 고려시대 목조건축으로 인정받고 있으나 건축년대가 확인되지는 않았다.
가수 송춘희가 부른 노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제목 때문에 수덕사는 비구니 사찰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수덕사에는 견성암이라는 비구니 도량이 따로 있다.
이 노래에는 속세의 인연에 괴로워하는 여승을 묘사함으로써 수덕사로서는 좋아하지 않았다 한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일엽스님과 연관지으려 하는데, 이 노래가 발표된 1965년은 일엽스님이 수덕사에 30년 이상 수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국보 49호 수덕사 대웅전
세월에 풍화된 수덕사 대웅전 기둥
측면에 배흘림 곡선이 느껴진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개별적인 불당의 묘사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2006년 수덕사 소유로 인수된 수덕여관의 스토리, 역사와 사연이 복합적으로 얼키고 설킨 이야기가 관심을 끈다.
수덕사 혹은 수덕여관에 연루된 인물들을 하나씩 들춰보자면:
1) 일엽스님
1896년 4월 28일 평안남도에서 개신교 목사의 장녀 김원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5대 독자였으며 결혼 6년만에 장녀로 태어난 것이다.
보통여학교 시절의 친구로는 "사의 찬미"를 부른 훗날의 가수 윤심덕이 있다.
10대 중반에 동생들,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잃고 외할머니가 키운다.
이 때 삶의 고통과 허무를 일찍 느끼지 않았을까.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조선 여자로서는 선구자적으로 일본 유학을 가서 신학문을 접하고 세이토(靑踏)라는 페미니스트지를 통하여 신여성운동에 눈을 뜨며 봉건적인 조선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에 반하는 글을 쓰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 유학시 동갑내기 친구인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함께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귀국해서는 <신여자>라는 여성지를 발간하였는데 이는 위의 세이토(靑踏)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또한 염상섭, 나혜석 등과 함께 문예지 "폐허"의 동인으로 활동하는 등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하고 전통적 여성의 가치관에 저항하는 행동을 보인다.
세이토는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참정권운동을 벌였던 여성들을 가리키는 블루 스타킹(Blue stocking)을 한자어로 옮긴 것인데 1911년부터 1916년까지 52호가 발간되었다.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김일엽이 1920년에 월간으로 발간한 <신여자>도 4호로 중단되었다.
시대를 너무 앞서 간 내용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 한 것일까.
책에서는 조선사회와 봉건적인 여성 억압과 가부장제 인습의 타파에서부터 자유 연애, 자유 결혼, 여성해방 등 새로운 개인주의를 추구하겠다고 공언했는데.
이에 대해 대중은 이기주의라고 비방하였다.
매일신보, 동아일보 기자를 하고 시, 소설, 칼럼 등을 썼다.
자유분방한 남녀관계를 주창하기도 하면서 여자는 남자와 육체적 사랑을 했어도 그 남자가 머릿속에서 지워지면 처녀로 재생된다 등의 발언으로 조선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그 자신 2번의 이혼과 유부남을 비롯한 여러 남자와 동거 등 복잡한 남자관계를 경험하면서도 아현보통학교에서 3년간 문학담당 교사를 하기도 한다.
22살에 결혼한 첫남편은 미국 유학을 한 18세 연상의 이혼남 이노익이었는데 다리 한 쪽이 불구로 의족을 한 장애인으로 밝혀져 결혼생활은 4년을 채우지 못했다.
결혼 후 다시 일본유학을 갔을 때 6년 먼저 와 있던 나혜석을 만난다
일본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춘원 이광수가 24년의 생을 불꽃처럼 살다간 일본의 유명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처럼 조선의 이치요가 되라고 일엽이 태어나던 해 사망한 이치요의 한국발음인 일엽(一葉)이라는 필명을 지어준다.
히구치 이치요는 현행 오천엔권의 액면인물이다.
1921년 첫번 째 이혼 후 다시 일본 유학 중에 규슈제국대학 법대생 오다 세이조를 만나 아들을 낳았으나 (1922년) 조선여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명문 은행가인 오다 집안의 반대로 아이와 결혼을 포기하고 아이는 오다의 조선인 친구인 송기수에게 맡겨져 송영업이라는 이름으로 황해도 신천에서 자란다.
김일엽은 오다 세이조를 떠나 조선으로 돌아온 후 10년 가까이 왕성하고 적극적인 신여성활동과 문필활동을 하는 중에 1923년 수덕사 만공선사로부터 법문을 듣고 불교에 관심이 깊어지기도 하고 3개월간의 하안거, 독일에서 철학과 불교학을 공부하고 불교신문사 사장을 지낸 백성욱과의 동거, 영문학 교사, 대학에서 불교와 동양철학을 가르쳤던 대처승 하윤실과의 재혼(1929년) 등으로 불교에 빠져들게 된다.
불교에 출가 전 친구 나혜석을 만나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는 일엽에게 나혜석은 현실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4년 후에는 이혼하고 혼자가 된 나혜석이 일엽에게 불가에 귀의하겠다고 밝혔을 때는 일엽이 같은 이유로 반대한다.
두 여성이 불가에 귀의하겠다고 마음 먹기까지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서 산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부딪쳐 봤지만 인습과 사회제도가 헤쳐나가기에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열성적으로 신여성의 개념을 외쳤지만 사회적 파란은 가라앉지 않고 차츰 지쳐가며 불가에서 구도의 길을 잦게 되지 않았을까.
나혜석이 이혼 후 일엽을 찾아와 불가에 귀의하겠다며 만공선사를 만나게 해달라며 일엽을 보채던 곳이 수덕사 입구에 있던 수덕여관이며 만공선사가 나혜석에게 임자는 중이 되지 못한다고 한 이후 나혜석은 계속 수덕여관에 머무른다.
일엽은 수덕사에서 3년간 불자생활을 하고 1933년 하윤실과 이혼하고 머리를 깎고 본명 김원주를 버리고 법명 일엽의 비구니가 된다.
전 남편 하윤실, 나혜석, 한때 연인이었던 춘원 이광수 등이 만류하였지만 막을 수 없었다.
이 때 불교적 가치관을 드러낸 시들을 다수 발표한다.
이후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라는 수덕사 스승 만공선사의 가르침에 따라 절필했다가 30년 가까이 흐른 후 다시 글을 쓰고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등 수상록을 펴내고 세인의 관심을 모은다.
봉건적 조선사회에서 여성해방을 주창하며 어떤 면에서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그는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평탄치 않은 삶을 살고, 2번의 결혼을 비롯해 여러 남자와 인연을 맺기도 하다가 홀연히 불교에 귀의, 40년 가까이 비구니로 살다가 운명적 삶을 마감하고 1971년 76세로 입적한다.
그가 수덕사에 있을 때 오다 세이조와의 사이에 난 아들이 14세가 되어 어머니를 찾아왔는데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부르라고 했다고 한다.
오다 세이조는 조선총독부에 자원해 여러 차례 수덕사로 일엽을 찾아왔는데 만나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일엽이 병들어 누웠을 때 70대 노신사가 찾아와서 일엽에게 큰절을 하고 옆에 무릎 꿇고 흰 손수건을 일엽의 손에 포갰다고 한다.
오다 세이조는 평생 독신으로 유럽에 외교관으로 살다가 일엽보다 1년 앞선 1970년에 독일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정치인 정일형과 한국 1호 여성 변호사 이태영이 의붓 동생과 올케가 된다.
김원주로 살던 때의 일엽
수덕사 일엽스님
오천엔권 액면인물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2) 나혜석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며 시인, 소설가, 조각가, 여성운동가이다.
김일엽과 친구이며 생일도 1896년 4월 28일로 김일엽과 같으며 봉건적 조선에서 여성해방, 자유연애에 대해 김일엽과 같은 행보를 보인 것이 어쩌면 생년월일까지도 같은 운명적 만남이었을까.
나혜석의 조부는 호조참판, 아버지는 시흥군수로 부유한 집안이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는 등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3.1만세운동과 연루되어 5개월간 투옥된다.
나혜석이 10대때 부친이 나혜석보다 한 살 많은 어린 첩을 얻어 마음고생하는 모친을 보며 남녀평등 생각을 키웠으며 프랑스 파리에 머무를 때 서양의 자유분방한 여성과 여권운동을 목격하기도 한다.
집안의 후원으로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1913년에 일본유학길에 올라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하고 오빠도 일본유학을 하면서 나혜석에게 남자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나혜석이 사랑한 게이오대학에 다니던 유부남 최승구, 춘원 이광수 등은 오빠가 반대했다.
봉건적 유교사회에서 현모양처라는 인습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김일엽과 나혜석은 일본유학 시절 세이토(靑踏)라는 페미니스트 잡지를 통해서 남녀평등론을 넘어 여성해방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여성잡지에 실린 히라쓰코 라이초의 신여성을 주장하는 글에 매료되었다.
어떻게 보면 21세기에도 논의될 수 있는 여성의 지위에 대해 친구 김일엽과 함께 너무 앞서간 여권신장 주장으로 당시 조선시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으며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다가 소리없이 생을 마감했다.
일찌기 일본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한국 최초의 여자 서양화가가 되었다.
남편인 변호사 김우영은 일본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본부인과 사별하고 나혜석보다 10살이 많은데, 일본 유학시절 오빠의 소개로 만나 1920년 결혼하였으며 일본 외무성 외교관이 된 남편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5년을 근무하고 포상으로 유럽여행을 가게 되어 나혜석은 남편과 함께 1927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서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이탈리아, 영국 ,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을 여행하고 유럽여행중이던 영친왕 이은부부도 만났으며 파리에서 생활하는 동안 파리 화단을 접하고 그림의 지평을 넓힌다.
파리에 8개월 머무는 동안 자유분방한 그녀는 기미독립선언문 33인 중 1인으로 파리에 외교관으로 주재하던 최린(천도교 종단 대표)을 만나 불륜에 빠진다.
미국을 거쳐 당시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조선 최초 부부 동반 세계일주를 1년 8개월간 하고 남편과 함께 돌아온 나혜석은 파리에서 최린과의 불륜을 사유로 남편에게서 1930년 이혼을 통고받는다.
그 이후 최린도 너무 앞서 가는 그녀를 감당하지 못해 나혜석은 혼자가 된다.
나혜석은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죄로 고소했으나 합의금을 받고 화해하고 이혼고백서를 출판하여 결혼부터 이혼까지의 과정을 공개하기도 한다.
이혼고백서는 여성들로부터 더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김우영과 결혼 전 나혜석은 네 가지 조건을 건다. 평생 그녀만을 사랑할 것, 평생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할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 별거할 것, 일찍 타계한 나혜석의 첫사랑 유부남 최승구(동경 유학시절 만난 오빠의 친구)의 무덤에 비석을 세위줄 것.
김우영은 이를 받아들이고 나혜석과 함께 신혼여행을 고흥에 가서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준다.
춘원 이광수와도 사귀었으나 오빠의 반대로 결국 김우영과 결혼한 나혜석은 파리에서 불륜을 저지르고 1930년 위자료 없이 외도를 하고 있던 남편으로부터이혼 당한다.
이렇게 하여 강렬한 여성운동가이며 화가였던 나혜석은 명예를 잃고 남편과 자녀들까지 잃게 된다.
심신이 피폐해지고 자존심을 상실한 나혜석은 친구 김일엽을 찾아 수덕사로 찾아가고 수덕여관에 여장을 푼다.
김일엽을 졸라 만공선사를 만났으나 만공은 임자는 중이 될 수 없다며 나혜석의 요청을 거절한다.
나혜석이 1934년부터 5년간 수덕여관에 머무르는 동안 소문을 듣고 고암 이응노가 찾아와서 그녀에게 그림을 배운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을 인수하고 전시회도 열고 소설 등 글을 계속 썼으나 전시회는 실패하는 등 차츰 잊혀져 가고 큰아들을 폐렴으로 12살에 잃는 등 심신이 지쳐간다.
세월이 흘러 이응노는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세계적인 화가가 된다.
나혜석은 나이 들어 파킨슨씨병에 시달리며 손을 떨었다.
수덕여관을 떠난 나혜석은 마곡사에서 수도생활도 잠시 하다다가 안양양로원, 청운양로원 등을 거치다가 양로원을 뛰쳐나와 방랑생활을 하며 길거리에서 노숙생활을 하며 헤매다 배고픔과 추위에쓰러져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자혜원 무연고자병동에서 1948년 5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강렬한 자의식으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인으로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에 진력하였으나 스스로 저지른 불륜으로 인한 이혼, 사회적 비난, 자녀와의 별리, 이로 인한 정신적인 방황, 자존감 상실, 친지들의 외면 등으로 차츰 잊혀져가며 김일엽과 달리 회고록 한 줄 남기지 않았다.
그녀의 자녀들 중에 차남 김진은 서울대 법대교수, 막내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으나 나혜석은 이혼으로 아이들과도 헤어지고 아이들은 친가에서 양육되었다.
2009년에는 미국에 살던 둘째 아들 김진교수가 <그 땐 그 길이 왜 그리 좁았던고>라는 책을 내고 어린 시절 헤어졌던 생모 나혜석과 아버지 김우영에 대한 기억을 회고했다.
그녀 역시 시, 소설, 그림, 자유연애 등 그 당시 조선사회에 너무 앞선 가치관으로 살며 다양한 반향을 일으켰으나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잊혀져 갔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전통 혹은 인습과 충돌했을때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나혜석의 영욕으로 점철된 생애가 의문부호를 던져준다.
1970년대 이후 나혜석은 명예회복이 되어 수원에는 나혜석 생가터와 나혜석 거리가 조성되었다.
배우 나문희는 나혜석의 조카 손녀(나혜석이 나문희의 고모할머니)인데 두 사람의 인상에 닮은 구석이 있다.
나혜석은 이혼으로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아래와 같이 유언과도 같은 시를 남겼다.
파리에서 여성으로서 자유로왔던 생활이 그때로 되돌아 갈 수 없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해내지 못하는 아픔이 스며있는 것 같다.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서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사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나혜석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나혜석과 네 자녀
나혜석 자화상
복원 전의 수덕여관
복원 후의 수덕여관
3) 고암 이응노
영친왕의 서화스승이었던 해강 김규진에게서 묵화와 서예를 배우던 이응노는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 8살 많은 나혜석에게서 서양화를 접한다.
이응노는 10대 후반에 동양화와 서예를 공부하다가 나혜석을 만나 서양화에 눈뜨고 후에 파리로 가는 계기가 된다.
1944년 수덕여관을 인수하고 해방이 되고 일본에서 귀국한 이응노는 수덕사 부근의 산하를 그렸으며 부인 박귀희여사는 수덕여관을 운영한다.
이응노(李應魯)는 이응로라고 표기해야 맞는데 이응노로 굳어졌다.
해방전까지 10년 정도 일본에서 동.서양화를 공부하고 귀국하여 서양화의 기법을
전통화법에 접목시키며 화폭을 넓혀갔다.
1949년 이응노의 전시회에 갔던 이화여전 동양화과생 박인경은 그림에 빠져들고 21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연인이 된다.
화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가던 이응노는 1958년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서 작품활동을 하며 한국화를 서양에 접목시키며 명성을 얻어간다.
본부인 박귀희여사와 이혼한 이응노는 6.25때 월북한 양아들을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에서 만났다는 사유로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에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프랑스 등 외국에서 예술가를 감옥에서 자유롭게 하라는 탄원이 있었다.
사면으로 출소 후 본처 박귀희여사가 운영하던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몸을 추스리는 동안 수덕여관 뜰에 있던 너럭바위 2곳에 우주의 이치를 담았다는 문자추상화를 음각으로 남긴다.
박귀희여사는 이혼한 상태이지만 이응노의 옥바라지와 출소 후 수덕여관에서의 뒷바라지로 보살폈다.
박인경과 파리에서의 활동과 입지를 위해 이혼을 해준 박귀희여사는 이렇게 조강지처의 애달픈 미덕을 보여주었으나 이후 이응노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스른 이응노는 다시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고 만다.
그러다가 1977년에는 백건우. 윤정희 부부 북한 납치 미수사건에 연루되는데 당시 부인이던 박인경이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의심이 있었다.
이응노는 1977년 백건우. 윤정희 부부의 파리 결혼식 주례를 섰었는데 결국 이 납치시도사건으로 귀국을 못하다가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진정한 예술인으로 인정받으며 1989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의 고암 초대전에 전시될 작품을 그리다가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한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 "군상" 연작이 유명하며 한국화를 서양화에 접목시켜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인정받았으며 사후 수덕사에서 가까운 고향 충남홍성에 생가복원과 이응노미술관이 대전에 생겨 명예를 회복하였다.
이응노
수덕여관에 살면서 그림 그릴 때의 이응노. 맨 왼쪽이 부인 박귀희여사
충남 홍성의 이응노 생가
이응노 기념관 (생가 옆)
대전 이응노 미술관
수덕여관 앞뜰 너럭바위에 이응노가 음각으로 새긴 문자 추상
이응노의 작품 "군상"
4) 만공선사와 경허선사
만공선사는 김일엽이 수덕사의 비구니가 되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라며 일엽에게 글쓰기를 중단하라고 하였으며 실제로 일엽은 30년 가까이 절필했다.
일엽의 친구 나혜석이 세상에 상처 받고 수덕여관에 기거하며 일엽을 통하여 만공선사를 만나 불가 귀의를 희망했으나 만공은 "임자는 중이 될 수 없다"며 거부하였다.
만공의 부도탑은 수덕사 내 정혜사 아래쪽에 있으며 일반적인 부도와 달리 조형적인 미가 있으며 다비 후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만공탑에는 사리가 없다.
만공의 스승 경허선사는 한국의 선불교를 중흥시킨 큰스님이며 그를 주인공으로 작가 최인호가 "길 없는 길"이란 소설을 펴냈다.
경허선사
만공선사
사리가 없는 만공선사 부도 만공탑
5) 김일엽과 오다 세이조의 아들 일당(日堂) 스님
일엽이 일본에 유학할 때 만난 은행명문가집 아들 오다 세이조와의 사이에 사생아로 1922년 도쿄에서 태어난다.
14살이 된 일엽의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 수덕사를 찾아왔으나 일엽은 "나는 속세를 떠났으니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며 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속세의 인연을 끊으려는 일엽의 고충이었을까.
수덕여관에 머무르던 나혜석은 일엽의 아들을 잠 재워주며 어머니 가슴을 만져보지 못한 일엽의 아들에게 자신의 가슴을 만지도록 했다고 한다.
일엽의 아들은 일엽이 아들과 오다 세이조를 떠난 후 오다의 조선인 친구 송기수의 양아들 송영업으로 황해도 신천에서 정미소 아들로 살다가 14살 때 생모의 존재를 알고 수덕사로 일엽을 찾아오지만 어머니라 부르지 못한다.
이후 그도 그림을 배우게 되는데 이당 김은호화백의 양자로 들어가 김설촌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김은호화백으로부터 그림을 배울 때 운보 김기창화백과 동문수학했다.
그의 부친이 지어준 이름 오다 마사오, 한국이름은 송영업 => 김설촌=> 김태신으로 바뀐다
일본으로 그림 유학을 떠나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우고 고야산 불교대학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한 그는 북송화를 계승한 독보적 색채화가로 일본 3대 미술상을 휩쓸고 세계적 화가로 성장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학도병으로 전장에 배치되는데 동창생들과는 달리 후방의 군종화가로 배속됐고 부친 오다 세이조가 손을 쓰지 않았나 생각했다.
전장에 배속된 동창생들은 거의 전사해서 동창생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해방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붓아버지 송기수를 만나러 38선을 넘는다.
그러나 부농이었던 의붓아버지는 부르조아 계급에 친일파로 낙인찍혀 그도 취조를 받게 되었는데 도쿄제국미술학교 출신이라는 게 드러나자 김일성 초상을 그려볼 것을 지시받고 즉석에서 그리자 평양으로 옮겨져 혁명과업으로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게 됐으며 대형초상화는 김일성종합대학에 걸리게 됐다.
북한 곳곳을 돌며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다 황해도 집 부근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몰래 배를 타고 38선을 남하할 수 있었다.
후에 김일성 초상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물감 원료를 구하러 일본에 갔을 때 6.25가 터져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귀국이 막히고 어머니 김일엽이 입적한 1971년까지 일본에 머무른다..
이 때는조총련계라는 명목으로 다시 입국이 불허되었는데 김종필이 신원보증을 서서 김일엽이 입적한 3개월 후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교포 처녀와 결혼해서 세 아들을 두고 화가로서 확실한 입지를 다졌다.
1972년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김태신이라는 한국이름을 얻었으며 67세에 어머니를 따라 불문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 직지사에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다.
그의 그림은 돌가루를 이용한 채색화로 한국화에 채색화의 영역을 넓혔다.
나이 80에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라는 책을 써서 김일엽의 아들임을 밝힌다.
니이 93세인 2014년에 입적하였으며 저승에서나마 어머니, 아버지와 해후하기를 빈다.
수덕여관은 2006년 수덕사에 인수된 후 2009년 예산군이 복원하였으며 김일엽, 나혜석, 이응노, 일당스님의 운명이 얼키고 설켜 역사와 사연이 녹아든 공간으로 수덕사 일주문 옆에 오늘도 말없이 삶에 지친 사람들의 사연과 발자욱을 지켜보고 있다.
수덕여관을 거쳐간 김일엽, 나혜석, 이응노, 박귀희, 일당스님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이응노화백이 남겨 놓은 너럭바위 문자추상 암각화와 수덕여관 간판만이 남아 아련한 역사의 뒤안길을 되돌아보게 한다
김일엽과 오다 세이조의 아들 일당스님
일당스님의 그림 채색화
일당스님의 그림 산수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