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6일2020년 남가주 호다월요일 기도모임 중,
여호수아형제님이 읽어주신 신문사설의 내용입니다.
성지순례 특집: 다시 밟은 사도바울의 발자취5.
사도요한이 말년을 보낸 에베소
크리스천 위클리 2019년 11월21일자 신문 발췌.
우리는 큐샤다시 그랜드 벨리시 호텔에서 주일 아침을 맞이했다. 호텔 소강당에서
일찍 주일예배를 드리고 에베소를 순례하는 날이었다.
에베소는 밧모섬으로 가는 배편이 있는 항구였고 밧모 섬에서 돌아온 사도 요한이
인생의 말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요한이 모시고 살았던 마리아의
집이 있어
마리아 기념교회가 있고 누가의 무덤도 있는 곳이다.
에베소의 현재 이름은 셀주크. 로마시대에는 로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등과 함께
로마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번성했던 도시였다. 사도 바울이
2,3차 전도 여행 때
방문하여 이곳에서 머물며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낸 곳이다.
에베소는 BC11세기경 그리스에서 이주해온 이오니온들이 아르테미스 신전을
중심으로 도시국가를 이루어 살던 곳이다.
사데에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의 유적이 있다면 에베소는 그것보다 더 웅장했던
당시 최대의 신전이 있었다. 이 지역의 비옥한 토지와 편리한 해상교통 떄문에
중요한 도시였지만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이 도시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에베소는 본래 항구 도시였지만 세월이 흘러서, 해안이었던 곳이 토사로 매립되기도
하고 지진으로 지형이 변하여 지금은 해안으로부터 약4Km정도 내륙으로 들어와 있다.
에베소에는 화강암으로 깔린 도로, 모자이크로 장식된 대리석
길, 웅장하게 깎아 세운
돌기둥들,
재판과 토론, 그리고 시장의 기능을 하던 광장 아고라, 2만5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야외 원형극장, 1만2천여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있었던 셀수스
도서관의 유적들이 남아있다. 셀수스 도서관은 로마당시 알렉산드리아, 버가모와 함께
세계3대 도서관의 하나로 알려진 곳이다.
사도요한 기념교회
바울이 AD67년경에 순교하자 디모데는 에베소에 와서 목회를 하던 중 ‘5월
아르테미스 축제’때 열광하는 군중들을 향하여 말씀을 선포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했다.
그 후 사도요한이 뒤를 이어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게 되었는데 그 역시 도미타아누스
신전 앞을 지나다가 황제의 동상앞에서 경배하기를 거부하다 결국 체포되어 로마로
연행되었다.
황제는 요한에게 독배를 마시게 했으나아무런 해를 받지 않자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던졌지만 또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결국은 밧모섬으로 그를 유배시켜
혹독한 채석장 중노동자로 벌을 받게 했다. 요한은 그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를 기록한 것이다.
요한복음은 밧모섬으로 귀양가기 전인AD80-90년 경에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면서
기록했고 계시록은 밧모섬에서, 그리고 귀양 후에는 요한 1,2,3서를 기록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당한 후 요한은 밧모섬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와
제자들을 양육하다가 AD100년경에 95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요한이 묻힌 곳에 기독교가 공인되 후인 4세기경 목재로 된 요한기념교회가
세워졌고 비잔틴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교회당이
건립되었다.
에베소 원형극장
일반적으로 도시의 인구를 추정할때 사용되는 척도가 대극장의 수용인워으로 알려져
있다. 에를 들면 그곳에 있는 대극장의 수용인원이 25,000명이라면, 그 도시에 살고
있었떤 인구는 대략적으로 그 인우너수에 10배를 곱한
250,00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의 인구는 약 250,000명 정도였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원형극장은 헬라 시대에 처음 건축되었으나 로마의 네로 황제때 더 확장되었고
이곳에서 음악회나 연극보다는 검투사들의 전투경기 전차 경기들이 펼쳐졌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을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맹수들의 밥으로 잔인하게 순교를
당했던 곳이다. 밀라노 칙령에 의해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자 기독교인들은 이
원형경기장의 석재들을 뽑아다 기독교 건축물 특히 가까운 성 요한교회를 건축하는데
많은 부분을 사용했다.
성모마리아 기념교회
로마 하드리안 황제때 의학과 과학의 수준 높은 교육 장소였지만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 시대에 교회로 전환하여 증축하여 ‘성모마리아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AD431년 200명의 주교들이 모여 제3차 에베소 종교회의(에베소 공의회)를 개최했던
곳이다.
이 종교회의에서는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였던 네스토리안(Nestorian)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로서 받아들여져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정녀 마리아는 주 예수의 어머니 곧
성모(Theotoskos)이시다”라는 기독교 교리가 확정된
곳이다. 그 후로 동정녀 마리아는
공식적으로 ‘성모 마리아’로 불리게 되었고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의 방문으로 성모
마리아 교회와 성모 마리아의 집을 카톨릭 성지로 지정 되었다.
제1차 니케아 종교회의(예수님을 참 하난미으로 경의),
제2차 콘스탄티노플리스
종교회의(삼위일체 결의), 그리고 제3차 에베소 종교회의(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결의)가 모두지금의 터키에서 열린 셈이다.
누가의 묘
누가 복음을 기록한 누가의 묘가 이곳에 있다. 로마 시대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 있었던 장소였는데 비잔틴 시대에는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던
건물이었다고 한다.
1860년 영국고고학자가 오데온을 발굴하던 중 본 건물의 일부에서 십자가와
황소(누가를 상징하던 동물)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판명했다고
한다.
셀수스 도서관
사도행전19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파할때 마음이 굳어져서
군중앞에서 도를 욕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떠나서 신자들을 데리고 두란노 학원으로
가서 날마아 사람들과 토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두란노 서원이 바로 셀수스
도서관일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으나 셀수스 도서관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를
하면서 가르쳤던 시기보다 더 나중에 건축되어진 것으로써 신빙성이 없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By 조명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