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54
2월2일[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연중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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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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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4IRct3dZ_EY
[서울대교구 임시백 치백요섭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심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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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존재 자체로 주변의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까?>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성전으로 모시고 가서 하느님께 봉헌함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성전에 봉헌되신 아기 예수님처럼 주님께 봉헌되고 선물이 되기를 청하는 마음으로 초를 봉헌합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묵상해봅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드린다는 것, 바친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를 하느님께 바칠까요? 하느님은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먼지요 티끌이요,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주신 분이십니다.
그분 섭리의 손길 아래 우리 인생은 활기를 띠며 가치와 의미를 지닙니다. 그분의 크신 자비가 아니라면 우리는 잠시도 제힘으로 서있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우리는 좋은 것이 생겼다면, 감사할 일이 생겼다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상의 선물로 주신 우리 인생이기에, 우리 자신을 수시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역동적이며, 상호적이며, 오가는 것입니다. 맨날 받기만 하고 드리는 것이 없다면, 그 관계는 절대 오래가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주고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 보면 그저 하느님께 청하기만 합니다. 하느님 처지에서 보면 참으로 난감하고 어색할 것입니다. 자녀로서 아버지께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나는 과연 주님께 무엇을 드려왔나? 무엇을 봉헌하고 있나? 무엇을 선물할 것인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제대에 봉헌할 초를 깎으며 초가 지닌 상징성을 생각합니다. 초는 언제나 자신을 녹여가며, 자신을 소멸시켜 가며 주변의 어둠을 밝힙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주변을 화사하고 훈훈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는 존재 자체로 주변의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과 세상을 위해 자신을 조금씩 소멸시켜 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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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협상의 기술: 요구가 아닌 욕구에 집중하라>
허브 코웬이란 작가는 “인생의 8할은 협상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협상은 회사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전반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와 어느 정도 협상을 하게 됩니다. 이 협상의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매일 싸우느냐, 사이좋게 지내느냐가 결정됩니다.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천재적인 물리학자라 불리는 파인만이 있습니다. 그는 천재였지만 성격이 고약하여 그의 기행만 따로 모아놓은 책이 있을 정도랍니다. 특별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1965년 전화 한 통화가 걸려옵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니 상을 받으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타면서 만나야 할 사람들, 일주일 동안 여행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도 끔찍하여 이렇게 응답합니다.
“됐어요. 상 받으려면 북유럽까지 오가느라 비행기를 10시간이나 타야하고 일주일이란 시간을 써야 하는데 ... 귀찮아요. 받지 않겠습니다.”
이에 놀란 노벨상 재단 측에서는 갖은 회유와 협박을 가했습니다. “이 상은 초등학교 우등상이 아닙니다. 받으시면 국가의 영광이 되는 상입니다. 그리고 교수님, 일주일씩 있을 필요는 없고요, 상만 받고 바로 가셔도 됩니다. 교수님이 이러시면 앞으로 다른 미국 노벨상 후보자들에게도 지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인만은 “됐습니다. 귀찮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이들은 협상이 아니라 협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협상과 협박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협박은 쌍방이 둘 다 기분 좋게 끝날 수는 없습니다.
이때 파인만의 아내가 나섭니다. “여보,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그런데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번에 당신이 상을 거부하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발적으로 노벨상을 거부한 첫 인물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누가 관심을 가질까요? 바로 기자들이겠죠. 그냥 며칠 고생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파인만은 아내의 말에 설득당해 노벨상을 수상하러 떠났습니다. [참조: ‘거절할 수 없는 협상의 신이 되는 법’, 웅이사의 하루 공부, 유튜브]
이 이야기는 최철규 작가의 ‘협상의 신’이란 책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최철규 작가는 협상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요구에 집중하지 말고 욕구에 집중하라.’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파인만이 제시했던 요구는 오랜 시간여행하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만 듣고 날짜를 줄이려는 노력과 더 나아가 협박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파인만의 아내는 남편의 욕구에 집중하였습니다. 남편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 않으면 기자들 때문에 더 많은 사람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말하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상대의 욕구에 집중해야 상대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상대도 즐겁게 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도 통용됩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께서 아드님 예수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한 것입니다. 이제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들을 쓰시라는 뜻입니다.
당신을 참 주님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님 뜻에 맡기는데 주님께서 즐겁지 않으실까요?
아무래도 주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사 때 무언가를 청할 때 돈과 함께 청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통틀어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해 가장 즐거워하시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인간에게 감사의 봉헌을 받는 것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주님께 봉헌돼야 했던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기에 모든 죄가 들어왔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에 그 죄가 사해졌습니다.
무엇을 얻어내려면 그 무언가를 주시려는 분의 욕구를 올바로 알고 그 욕구에 합당한 것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주님께는 그것이 ‘봉헌’입니다.
어떤 아이가 땀을 흘리며 슈퍼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콜라 하나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아저씨는 콜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콜라 없다고 가라고 해야 할까요? 그 아이는 콜라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구가 아니라 욕구를 볼 줄 아는 주인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콜라 몸에 안 좋아. 완전 설탕 덩어리야. 물이나 이온음료가 어떻겠니?”
상대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상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성당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내가 원하는 것만 줄기차게 청해봐야 그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먼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그러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봉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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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2)봉헌하면 생명, 가지려 하면 독>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을 보았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상처’에 관한 내용인 줄 알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치유’에 관한 영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됩니다.
문방구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존심 때문에 소원이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말하며 먼저 학교로 뛰어갔던 같은 반 남자친구, 바쁜 탓에 소원이 머리를 묶어줄 수 없었던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을 해치려는 못된 아저씨에게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의 착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소원이는 결국 그 악마 같은 사람 때문에 대장까지 파열되어 평생 옆구리에 호스를 차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살아난 것만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언론은 한 아이와 가족의 피해는 생각지도 않고 카메라를 들이밉니다. 그렇게 비싼 1인실에 입원을 해야만 했고 가족은 마음고생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게 됩니다. 다시는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는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친구가 적금을 털어 도와주고 아이들까지 소원이를 위해 모금을 합니다. 혼자 학교로 갔던 같은 반 남자 친구는 자기가 함께 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후회 섞인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치유되기는 소원이의 상처는 너무도 큽니다. 특히 옆구리로 변이 새어나와서 그것을 닦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가 그 무시무시한 범죄자처럼 느껴집니다. 아빠가 병실에 들어오면 부끄러워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둘이 있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조금씩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않고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 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 덕분으로 학교도 갈 수 있었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나쁜 아저씨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누군가가 자기를 아프게 한 만큼 그만큼 큰 사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원이는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자신의 사탕을 나누어주며 아빠에게 농담도 하는 그런 아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던 범죄자는 짧은 쾌락으로 자신의 온 인생을 맞바꾸었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어야지 그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다가는 그것이 내 안에서 독이 되어 나를 죽이게 됩니다.
봉헌은 사랑하면 당연히 주어야 하는 내 자신이고 나 자신의 희생입니다. 소원이 아빠는 소원이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소원이는 그 제물을 받아들였고 다시 인형 속에 들어가 있는 아빠의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봉헌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소진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향이 자신을 태워 아름다운 향기를 올려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랑한다면 자신을 소진하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우리 조상들은 가난해지려 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 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지만 금지된 것까지 가지려 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니 관계는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당신의 봉헌으로 기워 갚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당신 것이라 여기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 봉헌해 드립니다. 그분이 당신의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봉헌은 우리 죄와도 직결됩니다. 죄란 마땅히 봉헌해야 할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푼젤’이란 디즈니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는 불로초와 같은 꽃이 한 송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로초는 수백 년을 산 마녀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불로초를 감추어놓고 자신만 사용하여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신을 한 왕비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왕비와 아기까지 생명이 위험해지자 온 나라 사람들은 그 생명의 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마녀가 감추어둔 꽃을 뿌리째 뽑아서 왕비를 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쁜 공주가 태어났는데 그 공주의 머리카락은 공주가 노래 부를 때마다 금색으로 변하며 그것을 만지는 사람은 누구나 치유되고 젊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마녀는 그 공주를 몰래 훔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깊은 산 속 높은 탑 위에 가두어 두고 자신만이 또다시 그 생명과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탑 위에 한 도둑이 숨어들면서부터입니다. 그 도둑은 왕궁에서 왕관을 훔쳐 달아나다가 그 탑까지 숨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주는 몰래 그 훔친 물건을 감추고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 주면 나중에 그 왕관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엄마라고 속여 왔던 마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주가 그 왕관을 돌려주면 그 남자는 바로 떠나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도둑은 자신이 훔친 왕관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라푼젤을 참 부모님에게 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마녀는 더 이상 공주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다 그렇듯이 왕과 왕비는 자신의 딸을 찾아준 그 도둑과 자신들의 딸을 혼인시킴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됩니다. 라푼젤이라는 공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긴 했지만 결국 우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봉헌할 줄 알면 그것이 비로소 우리 것이 되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이 생명나무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봉헌하시기에 그분을 되돌려 받습니다. 우리 또한 그 분을 영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면서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는 못된 소작인들 때문에 주인의 외아들인 당신이 돌아가셔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봉헌하지 않고 내 것으로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면 그 생명나무는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되어버립니다. 마녀가 라푼젤을 자기 혼자의 것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왕국과의 관계단절을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취하려고 했던 어린이 성추행범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봉헌축일은 우리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고 오롯이 다시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면 그것은 내 안에서 독으로 변하여 나를 죽이게 됩니다.
경주 최씨가 오랫동안 만석꾼 집안으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집 가보가 ‘돈을 똥처럼 여겨라!’라는 집안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명은 나에게 생명을 주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봉헌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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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함께 ‘과달루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루르드와 파티마는 지명입니다. 그런데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지명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발현하시면서 디에고 성인에게 ‘나는 과달루페의 성모’라고 하셨습니다. 과달루페라는 말은 원주민의 말인데 ‘뱀을 물리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뱀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동물입니다.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루르드와 파티마의 성모님과 달리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디에고 성인의 틸마(원주민이 입던 망토)에 ‘성화’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모님의 성화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먼저 성모님의 피부는 원주민의 피부와 같습니다. 성모님의 망토에는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데 1531년 당시의 별자리와 같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드레스는 스페인의 여인들이 입던 드레스라고 합니다. 성모님의 발아래에 천사가 성모님의 망토와 드레스를 잡고 있습니다. 이는 원주민과 스페인 정복자의 화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필마의 수명은 대게는 40년 이내인데 성화가 새겨진 필마는 7년 후면 500년이 되지만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눈을 컴퓨터로 확대해 보면 성모님의 눈에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풀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성모님은 디에고 성인에게 성당을 지어 봉헌하라고 하였습니다. 디에고 성인은 주교님께 성모님의 이야기를 전했지만 주교님은 원주민인 디에고 성인의 말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성모님은 12월에 장미가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고, 디에고 성인은 그 장미를 틸마에 담아 주교님께 드렸습니다. 주교님은 12월에 그것도 멕시코에서는 볼 수 없는 유럽의 장미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디에고 성인이 그 필마를 펼쳐서 장미를 주교님께 드리는 순간 틸마에는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새겨졌다고 합니다. 이후로 과달루페에는 성전이 봉헌되었고, 멕시코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이후로 800만 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칼과 총으로 선교하려고 했을 때는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는데 성모님의 발현 이후로 많은 원주민이 스스로 세례를 받으려고 성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스페인의 정복자들에게 발현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주교님이나 사제에게 발현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신앙이 깊었던 원주민 디에고 성인에게 발현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직책이나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과 뜨거운 신앙입니다.
오늘 서울대교구에서는 사제서품식이 있습니다. 16명의 부제가 사제서품을 받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던 것처럼, 새 사제들의 부모님도 사랑하는 자녀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고, 봉헌하였습니다. 새 사제들은 신학교에서 3가지 덕목을 배웠습니다. 첫째는 성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복음을 선포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새 사제들이 기도를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둔다면 앞으로의 사목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지덕입니다. 사제는 개인의 영성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전해주는 영성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개인의 말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성경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셋째는 체덕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였습니다. 감기에 걸려서 심한 기침을 하는 사람이 감기약을 팔면 사람들은 사지 않습니다. 사제는 늘 자신의 건강을 잘 챙겨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을 해야 합니다.
주님! 오늘 사제서품을 받는 16명의 새 사제들을 축복해주시고, 주님께 받은 모든 사랑을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눌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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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22-4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것이나 큰 기쁨,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면,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의미마저 잃게 될 것이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율법에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 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의인 시메온은 아직 아기를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알아보았다.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는 당신의 평생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한다. 한나 역시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한나는 일찍이 사별하였지만,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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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주님 봉헌 축일인 오늘 교회는 성전에 봉헌되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축성 생활을 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더불어 세례와 함께 주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 또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여야 함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봉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봉헌은 단순히 어떤 결심이나 서원과는 다른 더 근본적인 행위입니다. 결심은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앞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향하려는 결심도 있지만, 결심이라는 행위 자체는 결심한 것을 향하여 ‘나’를 잘 가다듬고, 결심한 바를 실천으로 옮길 ‘나’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나’ 자신에게 집중합니다. 그러나 봉헌은 ‘나’에게서 벗어나, ‘봉헌받는 분’에 집중하는 것이고,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 ‘다른 분’에게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서원은 자신에게 엄격한 ‘의무’를 부과하면서, 하느님께 특정한 일을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물론 그 약속의 궁극적 목적이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는 봉헌이 될 수는 있겠지만, 서원 자체는 어떤 객관적인 일을 하는 ‘의무’를 받는 것입니다. 봉헌은 결심이나 서원처럼 사랑이 자라나고 확인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봉헌은 직접 마음에서 마음으로, 인격에서 인격으로 사랑 자체가 자유롭게 흐르는 것입니다. 봉헌은 아주 순수하고, 아주 명료하며, 아주 진지하게 나를 다른 이에게 주는 사랑의 행위입니다.(칼 라너, 『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 참조)
주님께 나 자신을 봉헌한다고 하면서도 ‘봉헌받는 분’이 아니라 봉헌하는 ‘나’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지, 또는 ‘봉헌’의 행위보다 봉헌을 위한 개별적인 ‘수단’이나 ‘일’에 더 마음을 많이 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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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봉헌>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2-24)
‘첫 아들’을 주님께 봉헌하라는 율법은 탈출기 13장에 있는데, 탈출기 13장을 보면, 첫 아들을 주님께 봉헌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뒷날, 너희 아들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그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수컷을 모두 주님께 바친다. 그러나 아들들 가운데에서 맏아들은 모두 대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네 손에 감은 표징과 네 이마에 붙인 표지로 여겨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다.’"(탈출 13,14-16) 따라서 ‘봉헌’은 ‘해방’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아들’을 봉헌할 때에는 성전에 갈 필요 없이 어느 곳에서든지 은 다섯 세켈의 돈을 사제에게 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민수 18,15-16) 그런데도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으로 데리고 간 것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친 것처럼(1사무 1,28) 성모님과 요셉 성인도 예수님을 하느님께 바쳤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봉헌 이야기에는 은 다섯 세켈을 바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다른 아기들처럼 돈을 바침으로써 봉헌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직접 봉헌했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산모의 정결례’를 거행한 것은 레위기 12장에 있는 율법대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봉헌하지 않아도 되고, 또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니까 성모님이 정결례를 거행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두 가지 일을 모두 한 것은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해석합니다.>
‘주님 봉헌 축일’은 예수님의 봉헌을 기념하면서, 우리 자신의 봉헌도 묵상하는 날입니다. 또 이날 1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는 것은, ‘촛불’이 봉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서 빛을 내는 것은 봉헌이 어떤 일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1)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봉헌’입니다. 그것을 의식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우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늘 우리 자신을, 또 우리의 인생 전부와 우리의 목숨을 봉헌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 봉헌은 기본적으로 주님께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그동안 받은 은혜와 앞으로도 받게 될 은혜에 감사드리는 일이 봉헌입니다. ‘감사’에 관해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아벨과 카인의 제물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창세 4,3-5ㄱ)
‘맏배들’을 바쳤다는 말을 근거로 해서, 아벨은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가장 좋은 것’을 바쳤고, 카인은 의무감으로 그냥 아무거나 바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은, 아벨의 봉헌만 봉헌으로 인정하셨고, 카인의 봉헌은 봉헌으로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감사드리는 마음 없이 의무감으로 바치는 것은 봉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봉헌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주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나의 것’을 바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것’을 바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바치신 일이 좋은 예입니다.
“......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7)
성전 세를 바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봉헌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주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기적으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잡은 고기를 시장에서 팔아서 돈을 마련했다면, 그것은 노동을 해서 돈을 번 것이고, 그러면 ‘나의 것’을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4) 무엇을 바치든지 간에, 바치는 그 물건이나 돈보다도 바치는 마음과 정성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어떤 가난한 과부’가 모범적인 예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3-4)
우리는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가지고 있는 돈을 전부 다 바쳤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온 마음을 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의 마음과 정성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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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학민 안드레아 신부님]
평내 성당에서 하느님과 신자분들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생활을 하는 이학민 안드레아 신부입니다. 모든 교구 신자분들께 하느님 사랑의 인사를 전합니다.
시간을 되뇌어 보니,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를 서품 성구로 삼아, 주님께 봉헌된 사제가 된 지 일 년하고 꼭 이틀이 지났습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당신의 삶으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주님께 제 영을 받아달라고 떼써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모님께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기를 하느님께 봉헌한 사건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사건 이전에 하느님께서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 곁으로 보내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오늘 성모님이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한 사건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는 마음과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은 마음이 만나는 사건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사랑해서, 서로에게 내어준 사랑의 봉헌물 예수님, 그러한 예수님은 사랑 하나로 이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인 사랑, 우리가 이 사랑의 결정체인 예수님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게 자신의 것을 서로에게 내어 줄 수 있을까요?
본당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미사 강론 끝에 꼭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 말을 전합니다. 얘들아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서로 뻘쭘하고 당황하던 시간을 거쳐, 차츰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말투가 변해가며,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내놓은 최고의 봉헌물은 예수님의 사랑이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사랑에 감사하고, 우리 역시 사랑의 마음을 되돌려 드리는 은총 가득한 시간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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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장동훈 빈첸시오 신부님]
<초막을 허물어라>
강의를 해준 인연으로 수녀님들의 첫 서원 미사 주례를 부탁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서원자들이 선택한 복음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마태 17,1-9)였습니다.
강론을 위해 복음을 묵상하던 중 이 초년병 같은 수도자들이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습니다. 베드로가 지어 바치겠다던 초막은 실상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땅을 뒤로하고 떠났던 아브라함, 모세와 백성들의 광야 40년, 변변한 거처하나 없이 떠돌던 예언자들, 모두 순례자라는 숙명을 짊어진 이들이었습니다.
초막은 그러니까 그들 삶의 고단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약속에 기대어 ‘미지의 땅’으로 나아가던 모든 여행자들의 운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초막은 돌로 지은 집이 아니라 쉽게 짓고 허물 수 있는 여행자들의 임시거처입니다. 그것마저 마다하고 스승은 제자들을 재촉해 다시 산길을 내려왔던 것입니다. 스승 역시 저 옛날의 순례자들처럼 하느님 약속에 기대어 ‘알 수 없는 내일’에 자신을 내어맡긴 것입니다. 산길을 내려오던 스승, 실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하느님의 뒷모습입니다.
이제 막 봉헌생활의 문턱에 선 서원자들, 적어도 이런 복음을 선택한 이들이라면 수도 없이 짓고 허물기를 반복해야 할 이 여정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새삼 그들이 대견했던 이유입니다.
봉헌된 아기 예수와 함께 오늘 복음의 또 다른 주인공은 아기의 부모들이겠습니다. “반대의 표징”이 될 것이라는 시메온의 말 앞에 여전히 소녀 같은 어머니, 마리아의 표정은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놀랐다’는 루카의 묘사는 가브리엘 천사의 탄생 예고(루카 1,26이하)를 듣던 마리아의 놀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놀람들은 그러나 경이로움과는 거리가 있는, 오히려 막무가내로 밀어닥치는 폭풍우 앞에서 느낄법한 당혹스러움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작은 여인의 위대함은 두려운 미지의 운명을 “곰곰이” 숙고했다는 것입니다.
저 옛날 하느님의 약속에 신뢰를 품고 집과 땅을 버려두고 길을 나섰던 첫 여행자들처럼, 그도 ‘초막’을 허물고 떠날 줄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루카는 탄생 예고와는 달리 시메온의 쾌청하지만은 않은 예언 앞에 부모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 기록되지 않은 문장 속에 실로 부모들의 진짜 봉헌이 숨어있겠습니다. 봉헌된 것은 아기이지만 부모들은 세상의 모든 어버이들처럼 분명 아기가 짊어질 운명에 자신들의 운명마저 얹고 포개어 함께 봉헌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피앗(fiat)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2독서의 히브리서는 모든 점에서 인간과 같아진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난을 짊어진 분이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영원이 유한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불완전해진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낮춤은 인간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 하느님의 ‘봉헌’인 동시에 인간, 이 보잘 것없는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한 하느님 ‘일치’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봉헌은 뭔가를 안에서 밖으로 내어놓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 나의 것이 아닌 것을 제 것으로 삼는, 밖에 있던 것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수용에 가까운 것입니다.
미지의 내일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은 이 알 수 없는 길을 마련한 하느님의 계획을 나의 계획으로 삼는, 그 길에 나의 운명을 얹고 포개 그분과 일치하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흔히들 하느님을 향한 봉헌을 뭔가 그럴듯한 나의 것을 희생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렇게 따진다면 사실 참된 봉헌은 그분의 놀라운 계획을 도리어 내가 선물 받는 것이겠습니다.
며칠 후면 ‘거룩한 변모’를 복음으로 선택했던 수도 자들이 드디어 종신 서원을 합니다. 초막을 얼마나 짓고 부셨을지, 여정을 시작할 즈음 ‘나의 계획’으로 가득했던 가방은 얼마나 단출해졌을지 궁금합니다. 그분이 마련한 놀라운 여정에 언제든 홀연히 떠날 가난한 순례자로 서 있길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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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상욱 안드레아 신부님]
<우리의 믿음, 나의 믿음>
오래전 이스라엘의 가정에서 첫째 자녀가 사내아이로 태어날 경우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할례와 봉헌제사입니다.
할례는 내가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몸에 새기는 표시였으며, 봉헌제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태를 열고 나온 첫 번째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말씀에 충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전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행해졌으며 아주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묶어주는 야훼신앙을 일상생활 안에서 드러내는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전통을 지키시면서 그분 역시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며 또한 이스라엘의 전통과 역사 안에서 예언되었던 참다운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특히 봉헌제사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누구보다도 기다려 온 곧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누구보다도 기다려 온 시메온이라는 예언자의 손으로 집전됨으로써 예수님께서 바로 시메온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메온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 기다려 온 그 메시아에 대해서 부모에게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실 분입니다.”(공동번역 성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를 구원할 메시아로 오셨지만 누구나 그분을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는 이들은 일어나고 믿지 않는 이들은 그들의 불신 때문에 쓰러질 것입니다.
메시아 자신이 쓰러질 사람과 일으킬 사람을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대한 믿음이 있고 없고가 개인을 쓰러질 사람과 일으킬 사람으로 구별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그분으로 인해 “사람들의 숨은 생각이 드러날 것”(공동번역 성서)입니다.
여기에서의 숨은 생각이란 바로 하느님께 대한 불신을 뜻합니다.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만 있고 믿음은 없는, 그래서 자신들의 하느님을 자신들의 손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이게 될 불신이 그동안은 공동체의 믿음에 가려 마음속에 숨어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서 개개인의 믿음과 불신이 모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과 일대일의 관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개인의 믿음은 공동체 안에서 더욱 풍성해지고 깊어지지만 공동체의 믿음은 개개인의 믿음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으로 인해 “쓰러지는 사람”이 아닌 “일어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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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김민조 하상바오로 신부님(동티모르)]
<참된 봉헌>
오늘은 주님 봉헌 대축일로, 성모님이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날입니다. 봉헌의 의미를 생각하면, 동티모르 신자들의 미사 봉헌예물이 떠오릅니다. 동티모르의 신자들은 대축일 미사와 행사때에는 각 마을에 나는 야채와 채소 그리고 농작물 그리고 닭과 염소 등을 제단에 봉헌합니다.
이 봉헌물들은 정성껏 키운 것들로, 밭에서 수고스럽게 키운 야채부터 집안의 재산인 닭과 염소까지 모두 그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봉헌은 단순히 좋은 것을 바치거나 건네는 일방적인 행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대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예수님 봉헌은 주 하느님께 예수님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봉헌입니다. 더불어 하느님께 성모님의 고통, 기쁨과 슬픔, 불안과 두려움, 절망과 뉘우침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해드렸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순간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참된 봉헌을 드리기 위해, 우리들의 아픔과 고통 슬픔과 두려움, 절망과 나약함 이 모든 것들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봉헌해 드렸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봉헌은 비워진 나의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과 믿음 희망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 희망으로 주 하느님께 우리를 봉헌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뱨입니다.”(로마 12.1)라고 말하였습니다. 날마다 주 하느님께 합당한 에배를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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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인 동시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제정하신 수도자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흔히 수도 생활을 축성 생활 혹 봉헌 생활(Vita Consecrata)이라 칭합니다. 이처럼 수도 생활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축성 생활이라고도(=하느님 측면에서)하고, 봉헌 생활(=인간 측면에서)이라고도 합니다. 즉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수도자가 자신의 전 존재를 자발적으로 봉헌(=바치는 삶)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를 사랑으로 기꺼이 축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축성 생활의 날을 맞으면서, 비록 수도자는 아닐지라도 주님의 봉헌에 비추어 과연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했으며, 그것도 온전히 거듭해서 바쳐드리며 살고 있는지 반성해 봐야겠습니다. 저 자신 길지 않은 봉헌 생활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온전히 바치면서 나날이 비우고 또 비워서, 죽고 또 죽어서 참으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성찰해 봅니다. 봉헌된 세월만큼 주님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 있지 못한 저 자신을 제가 더 잘 알고 있기에 다시금 봉헌합니다.
오늘 축일의 복음에서, 루카는 봉헌 생활의 참된 모범으로 시메온 예언자를 우리 모두에게 제시합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무엇보다도 한평생 하느님께 충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도 생활에 있어서 봉헌 역시 한때가 아니라 평생을 봉헌한 삶이어야 하며, 봉헌 생활은 단거리 경기가 아닌 마치 장거리 달리기와 비슷합니다. 이처럼 한때 열심한 봉헌 생활이나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충실한 존재이고 충실한 삶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시메온의 덕목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며, 주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2,25)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이런 삶을 살았기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찬미와 영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으며, 마침내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뵈옵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2,29~32 참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 「봉헌 생활」에 의하면, 수도자의 표상은 마치 타볼산의 『변모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나는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14항) 라고 권고합니다. 교회 초기의 모든 영성적 전통은 관상 생활을 ‘산 위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연결하였으며, 어느 면에서는 봉헌 생활의 활동 차원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결국 수도자란 변모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면서 주님을 따르며 서원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하는 존재입니다. 수도자는 끊임없이 ‘산을 올라가는 것= 기도 생활’과 ‘산을 내려오는 것=활동 생활’, 즉 고독과 친교, 물러남과 나아감의 조화와 균형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런 조화와 균형 잡힌 삶의 양식을 통해서 수도자는 교회의 교계적 신분은 아닐지라도 “교회의 생명과 성화의 신분”(교회헌장 44항)으로써 교회 내의 고유한 위치를 자치하게 됩니다. 성녀 대 데레사가 말한 것처럼 『수도자가 없다면 교회와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자서전32-11) 이에 대해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복음의 증거 3항>에서 『봉헌 생활 같은 구체적인 표징이 없을 때 교회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랑은 식어지고, 복음이 전하는 구원의 역설은 무디어지며, 세속화로 치닫고 있는 세상에서 신앙의 ‘소금’은 그 맛을 잃게 될 위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라고 피력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신을 완전히 봉헌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교회는 주님 봉헌 축일을 맞아 1년 동안 교회와 가정에서 사용할 초를 축복합니다. 초가 상징하는 의미처럼 자신을 태워 온 누리에 그리스도의 빛을 밝히는 촛불처럼 수도자들이 생활하고 활동하는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봉헌함으로써 교회의 생명과 성화의 신분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여러분과 함께 생활하고 활동하는 남녀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하해 주길 바랍니다. 코로나도 이제 잠잠해졌기에 작년과 달리 여러 수녀회에서 서원식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꼭 기억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다만 저를 포함한 모든 수도자에게 코헬의 이름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못난 선배들 탓하지 말고, 다음 권고를 다시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느님께 서원한 바를 채워라. 서원을 하고 채우지 않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5,4)
다시금 강조하지만, 진정한 봉헌은 주님께 받은 것을 주님께 온전히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렸던 참된 봉헌의 모범은 아브라함과 성모님이십니다. 자신과 가족의 희망의 전부였던 ‘이사악’을 하느님께 봉헌한 아브라함, 하느님의 영으로 잉태하시고 낳으신 아드님 예수님을 아무 조건도 없이 봉헌하신 성모님은 우리의 본보기이십니다. 성가 221장의 이냐시오의 <받아주소서>는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통해 우리가 살아야 할 참된 봉헌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성가, 곧 기도입니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 소유한 모든 것을 주여 당신께 드리나이다 이 모든 것 되돌려 드리오리다 내게 주신 모든 것 주의 것이오니 오직 주님 뜻대로 처리하소서 당신 사랑은총을 나에게 주시면 바람 없으오리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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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노잣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잣돈은 사망한 고인이 저승길을 떠날 때 여비 하시라고 관에 지참금을 넣는 것으로, 고인의 수의 가슴이나 허리춤에 끼워 놓습니다. 도시에서는 이 모습이 사라졌지만, 지방에는 아직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나라만 있는 전통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은 자의 입에 뱃삯으로 동전을 넣었습니다. 통행료를 내야 죽은 자의 나라로 들어가는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고대 사람들은 무덤에 음식을 넣기도 했습니다. 저승에 가는 동안 배고픈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음 이후의 시간을 아무도 모르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들어갈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영생을 위해 한 가지 화폐만이 가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여정을 떠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이웃에게 자신의 보물을 선물한 만큼만 저쪽으로 옮길 수 있다.”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랑만을 말씀하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구원의 길에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먼저 당신 몸 전체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모범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기에 굳이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이 태어나시고, 또 똑같이 생활하시면서 우리와 같은 삶을 사십니다. 당신 삶 전체로 모범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 자체로도 충분한 봉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단순한 봉헌만으로 멈추지 않지요. 자기 생명까지도 봉헌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 등장한 시메온 예언자는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생명과 삶을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쓸데없이 ‘노잣돈이나 두둑하게 준비하지.’라는 세속적인 생각을 버리고, 더 사랑하며 살면서 사랑이라는 화폐를 내놓고 당당하게 하느님 나라에 입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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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된 봉헌>
루카 2,22-40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참된 봉헌>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22)
내가 빚은 것이
아니라
나를 빚으신 분께
내가 지닌 것이
아니라
나를 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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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준영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은 봉헌 축일입니다. 교회는 전통에 따라서 제단과 가정을 밝힐 초를 축성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초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같은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고, 그 빛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더 이상 어둠의 자녀가 아닌 빛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이 가르침 즉, 이 전통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 교회는 주님의 봉헌 축일에 초를 축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봉헌되신 주님을 기억하고, 초만 축성한다 생각하지 말고, 우리도 주님처럼 봉헌의 삶과 빛의 자녀로서 살길 다시금 다짐하며, 초를 축성하는 것처럼 우리도 축성된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초처럼 이웃에게 빛이 되고, 따뜻함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의 부모님은 아들을 성전에 봉헌하면서 율법에 따라, 비둘기 한 쌍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는 형편에 따라 바치는 제물이 다릅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소, 양 등 큰 가축을 드렸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비둘기나 참새 등 작은 것을 봉헌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둘기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형편에 따라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교무금, 봉헌금 등, 그밖에 필요한 봉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받은 탈렌트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능, 시간, 마음을 주님께 기꺼이 봉헌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어떤 것을 봉헌하면 좋겠습니까? 첫째는 기도입니다. 하루 중 주님께 단 5분이라도 감사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는 주님께 축복을 청하는 것이고, 그 축복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선행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이웃을 위해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소외된 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선행을 통해 주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글에서 읽었던 내용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입니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상 최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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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은“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봉헌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쓰임 받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 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우리를 위해 모두를 내어주신 그분처럼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초는 자신을 녹여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내어놓는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더 큰 사랑을 통하여 세상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 구세주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고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였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으며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시메온은 성령께 순명하였기에 성령께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고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죽어도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백 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깊이 알아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도 바로 구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권력과 부가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걸맞은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봉헌은 우리의 봉헌을 재촉하고 있으며 그 봉헌은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온 시메온은 성령과 함께 기다림의 삶을 살아왔고 그 안에서 위로와 구원이 이루어졌으니, 지금 내 삶의 자리가 바로 천상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천상을 갈망하는 만큼‘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일 수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구세주가 찾아오는 자리이며, 그 자리를 가꾸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이 순간을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히브13,15)
온 마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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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봉헌의 여정>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주님 성탄후 40일째 되는 2월2일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봉헌하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특히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습니다.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는 주님의 모습을 말라키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대로 오늘 봉헌 축일 미사전례 은총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그는 은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의 봉헌을 날로 새롭게 함으로 말그대로 봉헌의 기쁨을, 봉헌의 행복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이자 수도자들은 물론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봉헌 축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봉헌의 축복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절호의 날입니다. 세상에 봉헌보다 아름다운 말마디는 없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봉헌이란 말마디의 깊은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수 없는 말마디가 봉헌입니다.
봉헌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이며 봉헌은 믿는 이들의 모두이자 삶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축복,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자유, 봉헌의 평화등 봉헌의 은혜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봉헌의 행복을 체험해보지 못하고 아까운 인생 헛되이 마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전하고 쓸쓸하겠는지요! 봉헌의 삶에서 저절로 솟아 나오는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봉헌의 삶을 통해 존엄한 품위의 인간 존재임이 잘 드러납니다. 오늘 축성생활을 맞아 한국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유덕현 아빠스의 담화문중 주목되는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요즘 나이 많은 수도자들이 수도회를 떠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수도회에 거의 없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중 큰 하나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낄수 없고, 수도회 안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봉헌을 새롭게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참으로 내 소중한 성소를 날마다 가꾸고 돌보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니 또한 영적훈련이요 영적전쟁에 속합니다. 한두번 봉헌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하느님 중심의 ‘봉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니 매일이 봉헌 축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봉헌의 절정은 죽음이요 언젠가의 갑작스런 거룩한 죽음의 봉헌이 아니라 하루하루 크고 작은 일상의 봉헌의 여정에 충실할 때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봉헌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봉헌 축일이되면 떠오르는 두 편의 시가 있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늘 주님이신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은 목마름과 배고픔이, 갈망과 열망이, 마르지 않는 봉헌의 샘이자, 지칠 줄 모르는 성소의 원동력이 됩니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어느 자매님이 살아 생전에 작은 꽃 한송이를 선물했을 때 드린 짧은 자작시도 잊지 못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삶자체보다 더 좋은 봉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좋은 사람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듯이 날마다 사랑의 봉헌의 삶을 사는 분들이라면 하느님께는 그 삶자체로 최고의 봉헌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봉헌의 모범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던 예수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이요, 의롭고 독실하게 살면서 봉헌된 삶에 항구하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메온입니다. 또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던 한나 예언자였습니다.
우리가 끝기도때마다 바치는 참 아름다운 시메온의 노래는 정말 날마다 정성을 다해 바친다면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타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새삼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 영성이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바로 정주의 삶은 봉헌의 삶, 성화의 삶이요, 정주의 여정은 봉헌의 여정, 성화의 여정이요, 정주의 축복은 봉헌의 축복, 성화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정주의 삶, 봉헌의 삶, 성화의 삶이 깊어가면서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감으로 참나의 실현도 이뤄지겠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의 묘사처럼 봉헌의 축복은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믿는 이들의 자녀가 모두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봉헌의 축복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끝까지, 한결같이, 살아있는 그날까지, 날로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실현을 이뤄주는 정주의 여정, 봉헌의 여정, 성화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합시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봉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끝으로 봉헌생활을 압축한, 늘 바쳐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희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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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낮춤과 바침
오늘은 주님께서 성전에서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무릇 모든 기념이 그렇듯이 이 축일을 지내는 것도
주님의 봉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기념하는 것이 한 가지이고,
그런 의미를 우리도 본받아 살자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첫째로 주님 봉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보면 이렇습니다.
주님 봉헌의 첫째 의미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봉헌입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이고,
그래서 이것은 십자가상의 희생 제사와 같은 의미이고,
촛불이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듯 그런 촛불의 의미입니다.
이 의미에 대해 주님의 오심을 평생 기다려온 노인 시메온은
마리아와 요셉이 주님을 봉헌하러 왔을 때 이렇게 노래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인간에게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 인간은 신화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의 봉헌은 부모 마리아와 요셉의 봉헌 이전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드님 그리스도를 세상에 바치신 의미이고,
십자가 수난의 의미 이전에 성탄 곧 육화와 낮춤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을 위해 바치신 것처럼
이제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처럼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바치고,
더 나아가 우리의 모범이신 주님처럼 우리 자신을 하느님과 세상을 위해 바칩니다.
이렇게 할 때 곧 낮춤과 바침을 할 때
우리도 세상의 빛이신 주님처럼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고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축성 생활을 하는 수도자의 날이기도 합니다.
수도자들이 주님의 이런 봉헌의 의미를 충실히 살아
주님처럼 세상의 빛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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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2,23)
<봉헌의 삶!>
오늘 복음(루카2,22-40)은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시는 말씀과 그 모습을 목격한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입니다.
오늘은 '아기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봉헌축일'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수도자들과 수도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은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봉헌의 삶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삶 전체는 '봉헌의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육화의 신비인 탄생과 땀의 신비인 공생활에 계시되어 있고, 봉헌의 삶의 꼭대기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봉헌의 삶이셨으니, 우리의 삶도 봉헌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내야 할 봉헌의 삶은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내 것이 내어지는 삶'입니다.
시작에서 마침까지 봉헌의 삶을 사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의 삶도 봉헌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봉헌의 삶을 '보다 더(Radical)' 살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수도자들입니다. 수도자들은 '예수님 봉헌의 삶인 복음삼덕의 삶', 곧 '순종과 가난과 정결의 삶'을 서약한 분들입니다. 신자들보다 더 봉헌의 삶을 살려고 애쓰는 많은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침체되어 있는 수도 성소의 활성화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느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비오니, 사람이 되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저희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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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R5uJL5Zo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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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 30)
부르심의
떨리는 첫 마음을
기억합니다.
제 숨결을
봉헌합니다.
생과 사랑 속에
봉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여정이
바로 봉헌의
여정입니다.
비틀거렸던 시간도
출렁거렸던 시간도
무너져내린 시간도
봉헌이었습니다.
깊어지는 기도는
봉헌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삶은
봉헌으로 다시
피어납니다.
우리가 기어이
가야 할 길은
봉헌의 길입니다.
누군가의 봉헌을
먹고사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그 길이 어둠을
환히 밝히는
빛이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가장 강렬한
사랑의 이름은
봉헌입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하느님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봉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구원의 시작은
바로 봉헌이었음을
기억합시다.
주님, 이 순간을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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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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