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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친 들국화의 전인권이 자신의 휴대전화에 기자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배경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담배를 문
사자 머리의 마흔여섯 전인권이었다. 지금보다 말랐고, 창백했다. "4번째 마약 복용 혐의로 체포된 직후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2000년이다.
"일가친척에게 나쁜 놈이 됐고 주변에 쪽팔리니까 그거 만회하려고 한겨레신문 맨 뒷면에 3번 (사과) 광고를 냈어. 자비로. 얼마 썼는지는 비밀. 그때 쓴 사진이야."
마약하다 적발되고 사과 광고라니. 정말 '마약해서 죄송합니다'란 문구로 광고를 냈을까.
"아니, (사진 위의 사과 문구는) 국산 담배를 애용합시다! 하하. 아무것도 안 쓰고 그것만. 광고를 내서 많이 만회했어. 빵(감옥)에 들어가서도 사과 광고 하고 들어오길 잘했다 싶었지."
가장 자주 들여다보는 휴대전화 배경화면에 왜 그 시절 사진을 입력했을까. 잊고 싶은 시절일 텐데.
"잊지 않으려고. 이걸 보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 자신에게 엄격하자. 나한테 까다로워질 거야, 앞으로도 계속."
7일 환갑의 전인권을 만났다. 사방으로 솟구친 사자 머리 대신 머리를 뒤로 넘겨 단정하게 묶은 차림새였다. 부인 정혜영(57)씨를 동반한 전인권은 품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말을 잘 못해서 좀 적어 왔어. 보면서 해도 괜찮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들국화는 작년 12월 새 앨범 〈들국화〉를 발표했다. 박자론은 이 앨범에 수록된 그의 노래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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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다 박자를 지키고, (박자를 깨는) 파격을 남발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랬더니 피곤하지 않아. 최대한 요약을 한 거야. 남용
없이 요약을 한 거지. 요약이 재미있어. 요약이란 게 뭐냐면 '걷는 데 꽃이 있는데 뭐 어쩌고저쩌고' 이런 거 다 없애고 그냥
'걷고~' 하면 되는 거야. 느낌을 잘 살리면, 부를 때 잘 부르면 대중은 느끼거든."
―절제인가요?
"응. 그래. 그런데 요약이라고 써주면 더 좋겠어. 같은 말이지만. 그렇게 하다 보니까 스스로 '내가 음악 할 자격이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
―지난 시간을 후회하나요?
"후회도 하지. 그 시간 그렇게 보냈으면 안 됐는데."
그는 "성실해지기로 마음먹은 뒤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무엇을 인정했다는 건가요?
"
사람들이 간혹 나보고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라고 했어. 요즘 들어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술을 안 마시는 것도 그걸
인정해서야. 과거엔 손에 닿으면 (마약이든 술이든) 그 자리에서 다 하는 사람이란 걸 인정하지 않았어. 하지만 요샌 받아들여.
예나 지금이나 내 성격은 물가에 내놓은 애야. 그러니깐 술도 안 마시게 되는 거야."
―태도의 변화가 있다면?
"
전엔 누가 나한테 뭐라 하는 게 무조건 싫었어. 근데 지금은 달라. 내가 먼저 물어보고. 말을 듣지. 마누라한테도. 성원(들국화의
동료 멤버 최성원)이한테도. 그리고 나한테 엄격해지고 까다로워지니까 (음악이) 더 재밌더라고. 그렇게 실컷 음악을 한번 해보고
싶어."
―가장 잘한다고 평가하는 후배 가수는?
"게이트 플라워즈. 내가 돈을 좀 벌면 이 친구들 공연이나 앨범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록을 제대로 하고 있어."
―늘 선글라스를 쓰는데.
"
김대중 대통령 때 청와대에 갔는데 경호원이 벗으라고 했어요. 안 벗었지. 왜냐고? 내 자존심, 프라이드, 프라이버시 그런 거.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내 스타일, 내 자유인데. '이거 벗으라고 하면 돌아간다'고 했지. '그럼 그냥 들어가세요'라고 그러더라고.
싱겁게."
―대통령 반응은?
"대통령이 안 나오셨어. 이희호 여사만 나오셨어. 하하."
―선글라스는 폼인가요?
"
아니요. 이건 좀 실질적이야. 공연을 할 때 내 눈을 보인다는 게 신경쓰일 때가 있거든. 조명도 들어오고. 그런 게 내가 실력이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아. 정말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글라스가 있든 없든 잘할 거 아니에요. 그냥 인정하기로 했어. 나는
선글라스를 껴야 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객도 인정해 주겠지."
―전인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게 있다면?
"음악과 미술, 예술이지. 예술에 대해 메모해 놓은 게 있어. 뭐냐면 '자신이 갖고 있는 쾌감을 끝없이 찾아간다'는 거야. 그런데 '끝없이'란 부분이 슬픈 거야. 다른 사람이 뭐라든 거기에만 끝없이 충실한 거야."
―도달할 수 없지만 계속 가는 것?
"그렇지. 도달과 상관없는 거야. 간다는 게 중요한 거야."
―요즘 영감은 어디에서 얻나요?
"김연아. 김연아가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열심히 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해요. 지금은 그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해요."
◇아, 주찬권!
납작 말라 있던 들국화가 다시 꽃으로 피어난 직후, 3인조 들국화의 동료 멤버이자 드러머 주찬권이 숨졌다. 원인 불명의 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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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만의 들국화 재결성도 사실 주찬권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정신병원을 나온 전인권을 찾아간 것도, 제주도에 사는 최성원을 찾아간
것도 주씨였다. 소속사 관계자는 "그의 노력 때문에 들국화 재결성이 가능했다"며 "앨범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떠나 유작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때의 충격은… 정말 충격이었어. 아무것도 못할 정도였으니까." 전인권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주찬권은 어떤 존재였나요?
"인간미 넘치는 동생이었어. 한 살 어렸지만 마음이 넓었고, 다 포용하고. 운동신경도 좋아 당구도 잘 치고, 뭐든 못하는 게 없었는데, 또 수줍음은 많았어. 보고 싶네."
―주찬권과의 기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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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시작하면 찬권이가 꼭 첫 곡으로 부르자고 주장하던 곡이 있었어. 'He Ain't Heavy, He's My
Brother'(그는 짐이 되는 사람이 아녜요, 그는 내 형제예요). 내가 이 곡을 처음에 부르면 자기 마음이 편안해진다나.
그래서 내가 물었지. 왜 이 곡이 마음을 편하게 하느냐? 그랬더니 이 노래가 the road is long with many a
winding turns(그 길은 많이도 굽어 있는 멀고도 먼 길입니다)하고 시작하거든. 근데 이 부분이 처음부터 쫙하고 올라가야
해. 찬권이 말이 내가 이 부분을 잘 올려 부르면 마음이 놓인다는 거야."
―전인권의 컨디션을 확인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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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사고뭉치라서 그날 공연을 망치지는 않을지 늘 걱정했던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이 곡을 쫙하고 올리면,
찬권이가 '이제 됐다. 오늘 공연 잘하겠구나' 하면서 마음을 놓았던 거지. 자기 워밍업 때문이 아니라 날 위해서 그랬던 거야. 내
컨디션을 봐서 자기가 드럼으로 받쳐주고 끌고 가려고. 그런 사람이었어."
최근 앨범 〈들국화〉에 수록된 곡 '하나둘씩 떨어져'(작곡 주찬권, 작사 전인권)는 주찬권이 숨진 다음에 가사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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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권이가 죽기 전에 내가 후렴구 가사 전까진 대충 썼는데, 이게 운명인 건가. 이게 계속 안 써지는 거라. 그러고 있다가 찬권이가
갑자기 갔어. 그래서 슬픔 속에 허우적거리면서, '찬권이가 어디 갔나 찬권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사를 붙인 거야."
주씨의 장례식 이후 녹음된 이 곡에서 전인권은 유독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길 건너 층층계로
낙엽에 하나둘씩 떨어져
거리에는 멈추어진 불빛들
저 끝에 지금의 나
길마다 내가 버린 내 얼굴
아~ 내 청춘
[한국 최고 록밴드 '들국화'… 1집 '행진' 80만장 大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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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의 전설' 들국화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록밴드로 꼽히는 그룹이다. 전인권, 최성원, 고(故) 주찬권 등이 1985년에
결성해 그해 1집 '행진'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80만장이 팔리며 수록된 모든 곡이 히트했고, 2007년
대중음악 100대 명반 중 1위에 선정됐다. 다음 해 2집 '너랑나랑'을 선보였으나 실패하자 1987년 해체했고, 26년 만인
2013년 재결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