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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가 조금 안돼 지하철 7호선 건대입구역 플랫폼 맨 앞쪽으로 향하는데 손전화에 낯선 번호가 뜬다. 아니나다를까 사니 형이다.
밤에 북한산을 넘어와 벌써 수락산역 근처에 왔다. 일행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산에 올라가 눈 좀 붙이겠다고 했다.
한 시간 전쯤에 꼬맹이가 늦잠 잤다고 기브업 하면서 오늘 산행 일행은 순식간에 넷으로 준 상황이었다. 내 갈길 간다.
오전 7시 30분쯤 집을 나와 건대입구역에서 환승하고 도봉산역에 내리니 오전 8시 30분쯤이었다. 정확히 일주일 전 지쳐서 안 보이던 서울둘레길 깃발들이 오늘은 눈에 들어온다. 도봉산역을 나와 그 산과 정반대 방향으로 나오면 바로 창포원.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가족나들이에 참 좋은 곳인 것 같다. 아침 햇살 속이라 그런지 더 싱그럽다. 연못도 있고 화단도 잘 가꿔져 있다. 창포원 마당에서 바라보이는 자운봉의 위용이 대단하다. 등 뒤로 한 채 냅다 달렸다. 아침이지만 기온이 시나브로 오르는 게 느껴진다. 상도교를 건너면 수락비치 아파트. 천으로 합류하는 작은 내를 따라 아스콘 트랙이다. 오르막이지만 편히 뛰었다.
반바지에 면 티 하나 걸친 내 복장은 누가 봐도 산행 차림이 아니다. 허리 오른쪽에 찬 '미스터리 팩'에 핫브레이크 둘 넣고 손전화, 충전 배터리 하나씩 넣었을 뿐이다. 선글래스 바꿔 쓰기도 거추장스럽고 해서 최대한 간편히 챙긴 것이다. 그래도 덥다. 수락비치 아파트를 벗어나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길이 널찍하고 잘 닦여 있어 편안히 오르내릴 수 있다. 아주 힘든 구간도 없어 손전화 블루투스에 연결된 ‘익스플로이전스 오브 더 스카이'의 기타 리프를 나직이 따라 부르며 뛰었다. 송글송글 땀방울 자국이 세 군데 정도 맺히자 수락산역이 가까워졌다. 어르신에게 여쭈니 벽운계곡이며 어느 곳으로 내려가나 마찬가지란다.
하지만 사니 형이 쉬고 있는 곳을 지나쳐선 안된다는 점 때문에 지도를 검색하고 찬찬히 내려갔다. 아톰 형이 전화를 걸어와 1번 출구로 나오라고 하고 300m 정도 뛰어가니 한달 만에 보는 두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사니 형에게 알려준 대로 군부대 옆으로 난 산길에 접어드니 5분여 만에 사니 형이 누웠다가 몸을 일으킨 벤치가 눈에 띄었다.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새벽 1시에 탕평대로 올라 승가봉으로 해서 도봉산 입구 내려와 버스 타고 이쪽으로 이동했단다. 난 속으로 조금 더 먼 루트를 짐작했지만 세월 덕인지 형이 아주 무리한 것만은 아니어서 다행스러웠다.
그렇게 넷이, 그러고 보니 정상적으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은 둘 뿐이고, 둘은 이상한 방식으로 합류했다, 조붓한 산길을 걷는다. 이달을 시작으로 서울둘레길을 모두 돌아볼 계획이다. 이제까지 정상을 공격하는 양식을 벗어나 4부나 5부 능선의 마을길들을 잇는 둘레길을 음미해 볼 생각이다.
사니 형은 시작한 지 얼마 안돼 "북한산 등 국립공원은 사람 중심으로 계단 폭을 잡지 않는데 이곳은 딱 사람 보폭에 맞춰 계단을 설치한 것 같다"며 흔감해 한다. 일주일 전 내가 이곳을 역방향으로 뛰면서 나라살림이 이렇게 주민복리에 초점을 맞춘 것에 감탄한 것이나 같은 맥락이다.
노원골(이곳의 둘레길 표시 리본이 눈에 띄지 않아 조금 주의해야 함) 건너는 곳에 시래기국밥집을 지나쳤다. 국밥 5000원 받는다는데 나중에 먹어볼 생각이다.
동네 아이들이 이름지었다는 안내문이 푹 웃음을 짓게 하는 배바위를 지나쳐 중간중간 벤치나 (공원 등에서 자주 보는 4인용) 식탁 겸용 벤치, 평상, 전망대가 마련돼 쉴 짬을 튼실하게 보낼 수 있다. 오전 9시가 조금 못돼 출발한 지 한 시간쯤 흐른 뒤 평상 둘이 나온다. 회장님이 싸온 바나나 둘과 사과 두 알 쪼갠 것, 아톰 형의 오이로 기력을 보충했다.
5분쯤 더 진행하면 바위 슬랩 비스무리한 곳이 나온다. 사흘 전 답사 때 다음 사진 올렸던 곳이다. 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아 희끄무레하다. 앞서던 사니 형 불러 올라가자고 할 뻔했다가 관뒀다. 올라가봐야 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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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이곳을 왜 채석장이라고 불렀는지 알려주는 것들이 나온다. 어느 길에 왼편으로 커다란 가림막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왜 그런지 알려줬더니 아하,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채석장 규모나 수준이 손으로 파내는 수준이라고 사니 형이 웃어댄다. 아무튼 이곳 전망대에 서면 중계, 하계, 상계동의 그 무수한 아파트의 숲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산마루금들의 물결을 바라보는 전망대와 달리 이곳은 마치 인간의 힘과 욕망이 이렇듯 꿈틀대는 곳을 다시 보여주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곳이다. 사니 형도 이런 전망대는 처음이라고 탄복한다. 감탄이라기보다 탄식에 가깝다. '내 땅 한 뙈기도 없다'는 식이다. 예서 줄인다.
두 시간이 조금 못돼 당고개역에 당도했다. 아톰 형이 이런 얘기를 했다. “편의점 커피가 가성비가 매우 높다. 빅데이터로 입맛을 평균해 맞춘다고 한다.” 커피 마니아인 사니 형의 회가 동한 모양이다. 세븐일레븐 가서 둘을 사서 마셔본다. 정말 괜찮아 모두 감탄한다. 난 일주일 전 일이 떠올랐다. 3시간쯤 달리다가 완전히 녹초가 돼 택시로 알바(울트라 마라톤이나 트레일러닝 하는 이들은 정규 루트를 벗어나 달리거나 다른 수단으로 이동하는 것을 '알바 뛴다'고 한다. 일종의 음어) 뛰어 약속한 창포원에 다다랐는데 고생했다고 아이스커피를 건넸는데 정말 기가 막힌 맛이었다. 무더위에 지친 입에 달콤쌉싸래한 맛이 들어가니 어찌 맛없겠는가?
당고개역 오른쪽 위 주택가 거쳐 철쭉동산 오르는데 푸르른 신록이 정겹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 그리 덥지 않았는데 간간이 불어오던 산들바람이 멈추면 몹시 더워진다.
낮 12시 10분쯤 됐다. 회장님이 그만 됐다고 한다. 화랑대역이 4㎞ 넘었다는 표지판을 본 직후였다. 어디를 목표로 딱 내세워 산행을 강행할 뜻은 애초에 없었다. 밤을 도와 북한산을 넘어온 사니 형도 감안해야 할 것 같았다. 200m쯤 진행하니 텃밭들이 나오고 허름한 주택가가 저아래 보여 무작정 텃밭 사이로 들어섰다. 사니 형은 없는 것 없이 있을 건 다 있는 작물 이름을 열거하며 걸음을 옮긴다.
5분쯤 내려오니 이 동네 낯설지 않다. 아, 거기? 몇 년 전 방송 일 할 때 '서울에 남아있는 1970년대 마을'이라고 소개했던 백사마을(중계본동 104번지 일대라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이다. 이 마을 어느 골목에서 멀리 도봉 자운봉의 위용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탄복한 적이 있었다.
아무튼 12시에 점심을 먹자는 회장님 지침을 받잡게 됐다. 두리번거리는데 별로 눈에 들어오는 음식점이 없어 지하철역 근처로 나갈까 싶었는데 마침 회장님이 쌈밥집 풍선 안내판을 봤던 모양이다. 2층인데 '수리중' 안내문이 있다며 나보고 올라가라고 해서 가보니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일단 맥주부터 시켜 목을 축이고 보리밥쌈밥 2인분과 쭈꾸미 2인분, 메밀콩국수 2인분씩 머릿수보다 훨씬 많이 시켰다.
처음에는 불안했다. 손님도 없었고 웬지 주인 아주머니 표정도 "뭐 이런 시간에 손님이 오나' 하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차림이 푸짐하다. 무엇보다 한달 전 과 동문들 치르느라 힘들었을 회장님이 저리 좋아하시니 만족이다. 내 입맛에 다른 건 그저그랬는데 주꾸미와 강된장, 그리고 지은 지 얼마 안된 듯한 보리밥(양이 조금 적었던 듯했다)이 좋았다.
맥주와 막걸리 두 병씩, 소주 하나(내가 독차지 ㅋ)를 두꺼비 날파리 삼키듯 먹었다. 회장님이 카드 계산하고 돌아오길래 우리 셋 2만원씩 걷어 건넸다. 택시 타고 4호선 노원역으로 와 전철 타고 동대문운동장역에서 회장님과 난 내려 각자 흩어지고 아톰형과 사니 형은 아마도 어딘가에서 2차 했을 것 같다. 난 뚝섬역에 내렸는데 아차산 다녀온다는 회사 선배를 만나 2차에 끌려갈 위기를 겨우 모면(?)하고 지친 낮잠을 즐겼다. 일어나보니 오후 5시. 프로야구 곧 시작한다. 보람찬 하루다.
추신. 회장님은 그 많은 손님들 치르고도 물리지 않은지 다음 얘기를 했다. '원래 9월까지 있으려 했는데 주인이 무슨 이유로 8월 21일까지 비워달라고 한다. 옆방으로 비켜 있을까 하다가 그냥 올라오기로 했다. 7월 하순부터 8월까지는 일정이 빡빡히 잡혀 있으니 우리 회원들 7월 둘째주 정도에 한 번 더 놀러와도 된다.' 그렇게 간 큰 짓을 해야 하나, 잘 모르겠다.
첫댓글 둘레길 산행이라 편하게 걸어서 이야기꺼리가 별로 없었는데도 산행기는 재미집니다. 잘읽었음.
사니 형과 경복궁역에서 치맥 하면서, 재미지게 이야기 하고 귀가. 행복한 하루!
애썼네. 잘 읽었네. 7월 산행이 기다려지는군.
알도 발빠르게 산행기 썼네. 재미있게 읽었어. 직업은 못속인다. ㅎㅎ 아마도 7월 제주행을 염두에 두고 겸사겸사 쓴 듯. 어차피 내가 내려가 있는 동안에 올 수 있는 것이고 다시는 그 집에 머물 수도 없을 듯하니 시간 되는 사람들만 번개 제주행을 하면 좋을 듯. 그리고 내가 완전히 올라오는 날짜는 8월 12일 토요일이고 올라온 뒤에 잠깐 또 어디 갔다 올 예정이라서 서울엔 9월부터 있을 듯. 베짱이처럼 사는 듯해서 열심히 사는 주변 사람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이제 슬슬 할 일을 모색해 봐야지...ㅎㅎ
몇 달 만에 산행인가. 싶어서 설렜습니다. 물론 쉬운 코스라는데에서 자신감이 붙어 손을 번쩍 들었던 거고요. 산행 전날, 배낭도 미리 준비해 놓았는데, 산행 당링에는...눈을 뜨니 7시였습니다. 최근래 가장 늦잠을 잔 날이 하필 산행날이라니... 하늘 같은 선배들께 꼬맹이를 기다리시게 해 달라는 염치 없는 말은 못하고 포기햇습니다... 근데, 정말 소풍 같은 산행이었군요. 아쉽기 그지 없습니다. 산행기는 어제 전철에서 일독^^
요새 연일 폭염이라 둘레길 산책도 땀 꽤나 흘리셨을 듯요.. 신속히 쓰신 산행기, 즐독했습니다. ^^ 주꾸미볶음과 강된장에 침샘이 고이는 저녁입니다.
산행길과 겹쳐 걸은 적이 있을지는 몰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둘레길을 제대로 걸어본 것은 처음인 듯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국립공원과는 다른, 혹은 반대의 성격들이 느껴져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걷기 좋더군요.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함께했던 분들, 반가웠습니다.
사니 형. 7월 7일 제주 내려가 2박3일이나 3박4일 남 선배 집에서 지내려 합니다. 함께 할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피엘님이 현지에 계시는 단지 좋은 기회일 뿐 아니라, 마지막 기회일 듯 한데 ... 저는 함께 할 수 없겠군요. 알님, 그리고 여행에 함께 하시는 분들, 안전한 산행과 즐거운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