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
새벽 다섯시 알람 소리에 놀라 비몽사몽간 반사적으로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마음이 들떠 이리저리 뒤척이다 깊은 잠을 못자서인지 연신 하품만 나온다.
샤워부스에서 머리를 대충 감고 희미한 거울을 실눈으로 보며 턱밑에 듬성듬성한
수염을 대강 민채로 샤워를 하고 나니 잠이 이제야 조금은 달아난것 같았다.
대설 추위라 그냥 나설수 없어 내복을 끼워입고 두툼한 외투를 주섬주섬 걸치고
설레발이처럼 왔다갔다 설치는 바람에 잠을 깨어버린 마누라의 투정소리가
어느순간 귓전을 때린다. 이 꼭두 새벽에 어디를 가느냐고 짜증이 잔뜩섞인
목소리로 다그치는데 구례 간다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속사포처럼 바로
반격이온다.
여자의 서슬퍼런 냉기 섞긴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른다.
선잠을 깨우는 일방적인 번개 나들이에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어딜가든 미리 언질도 주지않고 훌쩍 떠나는 이중 적인 그런 남편의 태도에
부아가 났을 법도 하지만... 상황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난 들은체 만체 이를 뒤로하고 꽁지 걸음으로 살금살금 현관을 향하고 있었다.
밤귀가 밝으신 어머님이 깨시지 않케 말이다.
구례는 옛부터 산자수명하여 살기좋고 인심 좋키로 소문이 자자했을 뿐만 아니라
예향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었다.
해마다 철쭉이나 벚꽃등 봄꽃이 필무렵이면 곡우제행사가 걸쭉하게 열렸는데
언제부터인가 남악제로 바뀌면서 연달아 동편제 송만갑 소리축제등이 이어져
이제 전국행사로도 유명해져 고향을 알리는 연례행사가 되고있다.
어릴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민속최대 명절인 설날이후 정월초부터
대보름까지 마을마다 설 분위기에 취해 흥을 한껏 높였던 우리 고유의
농악 놀이는 흥겨운 굿판 한마당로서 누구나 어깨를 들썩이게하는 전통 음악
장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마을의 전통놀이로서 면면이 내려온 큰자랑
거리 였다.
마당놀이라고도 일컫는 풍물놀이 한마당인 전라도 농악은 모두가 하나가 되는
굿판으로서 리더인 상쇠의 장단에 맞춰 부쇠(꽹과리) 수징 부징 설장구
부장구 삼장구 사장구 수버꾸 부버꾸 삼버꾸 사버꾸등을 갖춘 꾼들이 신명
나게 한판 어울려 놈으로서 마을 사람 전체를 춤추게하고 특히 소고놀음이나
상모꾼들의 능수능란한 상모 돌리기는 묘기 대행진을 방불케 할뿐만아니라
이를 즐기는 사람들조차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오금이 당겨질 정도이며 또
구성지기가 전국 으뜸이어서 장안의 화제를 몰고 다녔다.
구례구역 건너편 속칭 찬수라고 일컫는 섬진강이 빤히 내려다 보이는 계산리
마을을 중심으로한 잔수농악이 유명세를 타고 있었는데 오랜 노력끝에 이를 발굴
하여 드디어우리나라 전통 농악놀이로서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정식 등록
되므로서 구례농악이 전국적으로 발 돋움할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남성을 위주로한 기존 농악외에 부드럽고 유연한 여성 농악이 1970년대까지
구례에서 명맥을 이어오다 예산문제등으로 이제는 시들해 지고있는 와중에
반갑게도 고향에서 전국각지 내노라하는 전문 학자들이 모여 호남 여성농악
세미나 를 갖고 이어서 잔수농악등 각마을 농악놀이와 함께 모처럼 여성농악
다섯마당 잔치가 구례 실내체육관에서 펼쳐 진다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길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모처럼 옛추억을 되살리는 기대에 부푼 뜻깊은 여행이 될것으로 믿고싶다.
새벽 찬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반사적으로 몸은 웅크려진채 내발은 누가
쫓아오기나 한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달리다시피 도로를 향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기차 출발 시간이 30분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랴 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역 서쪽 정류장에 내린후 종종 걸음으로
플랫폼으로 향했다. 다행히 10여분 전에 가까스로 도착했기에 헐레벌떡
매표소로 달려가 직원에게 입석을 좌석으로 바꿔줄수 없냐고 통사정을
했지만 역무원도 새벽잠이 덜깬듯 모기만한 목소리로 좌석이 매진되었다고
하며 시큰둥한 얼굴로 귀찮다는듯 고개만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티켓팅을 해서인지 출발시각만 있지 탑승 게이트 번호조차 없는게 아닌가 ?
허둥지둥 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 보았자 이 추위에 왜 묻냐는 태도로 고개만
흔들뿐 도대체 나같은놈 질문에 관심조차 없다는 얼굴 표정 이었다.
난 전라선만 생각하고 이곳 저곳을 두리번 거렸으나 마음 급한것은 나혼자요
조급함만 더할뿐이고 이곳 저곳을 헤매다 가까스로 7번 객차에 몸을 싣고
45번 좌석에 엉덩이를 맡긴채 정신을 차려 휴대폰에 저정된 내역을자세히
살펴보니 내 사무실 직원이 인터넷 구매를 하면서 좌석표가 없으니까 급한
김에 나름대로 머리를 썼는지 우선 신탄진 까지 가는 표는 좌석을 확보하고
그곳에서부터 구례구 까지는 전라선 입석표였다. 출발할때는 경부선 우등
열차를 타고 가다 신탄진 에서 다시 20여분을 기다려 전라선 우등열차를
갈아 타는 묘기 대행진 같은 희한한 여행을 다 해보게 되었다.
이나이에 2시간 여를 서서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헛 웃음이 절로
난게 아닌가
기차는 어둠을 뚫고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깊은 적막을
깨트린채 남으로 남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까만 밤 차창밖으로 비추이는
고즈넉한 밤풍경이 네온불빛 사이로 스치듯 지나가고 어쩜 처연하리 만큼
고요함이 더하는듯 을씨년스런 겨울 열차는 저마나 사정을 안고 떠나는 뭇
사람들의 사연을 가득 채운채 묵묵히 달리고 있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 도회를 벗어난 열차가 들판을 미끄러지듯 간간히
쇳소리를 섞은 소음을 내 뿜은채 누가 쫓아 오기라도 한것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뿌연 밤을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젖혀진 커튼 사이로 언뜻언뜻
내보이는 창밖 풍경이 네온 불빛따라 더 차갑게만 느껴지는 12월의 밤이다.
한시간여를 힘차게 달리고있는 차창 밖으로 어슴프레 먼동이 터왔다.
서서히 보여지는 새벽녘 바깥풍경은 모두가 하얀 세상인양 백야처럼
경이로웠다.적어도 도회속에 찌든 내눈속엔 그렇케 보였다.
지난며칠 켜켜히 쌓였던 하얀눈들이 어둠속에서 조용히 내게로 다가
오는것이 아닌가.
까만밤 외로히 서서 처연하게 제몸을 태우는 네온불과같이 어울리는
설경이 묘한 감흥을 일으키며 회색빛 도시에 찌들었던 몸과 마음을
씻어주듯 어쩜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서서히 차창넘어로 밝아오는 아침속으로 졸음을 떨쳐내며 시간이
흐를수록 내눈은 즐거움속에 흠뿍 빠져들고 있었고 가까히 에서 멀리까지
힘차게 달리는 창 저편에서 파노라마 처럼 속도감있게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은 차마 어떤 수사로도 표현할길 없는 자연이 빚어낸
최고의 걸작이라고 나는 당당히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님 어떤 멋진 미사려구로도 감히 담을수없는 밤열차 속에서 바라본
야외 풍경은 차마 떨칠수 없는 가슴 뭉클함을 던져 놓았기에 그동안
응어리되어 켜켜히 쌓였던 짐을 덜어놓은것처럼 나의 존재감은 이미
잊은채로 타인이 되어 자연의 섭리로 바꿔놓은 바깥세상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행여 내가 지금 너무 과장된 표현하고있을 지라도 할수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난 오랫동안 그 황홀한 광경에 눈을 뗄수가 없었다.
풍년을 남기고간 드넓은 빈 들판을 하얀 눈으로 길게 수놓고도 모자라
낮은 골짜기 굽이굽이마다 여인의 능수버들같은 아름다운 곡선의 허리를
감싸고 사뿐히 내려앉은 곱디 고운 박사고깔 같은 눈 눈들 ..
산자락마다 곱게 빚은 하늘이 내려주신 하얀 솜털같은 포근함을 안고
사뿐히 내려앉은 신비로움으로 가득찬 백옥입은 천사같은 참 고운 너..
저마다의 모습으로 자신을 뽐내며 나를 미치게하고 까만 내눈을 깨끗히
씻어주고도 모자라 고요한 밤을 지금껏 지새우고 있는 너..
오랫만에 너무 오랫만에 난 무엇에 길게 홀린듯 너땜에 오늘 이렇케
무아지경속에 한참을 헤매고 있는줄도 모르겠다. 정말 예사롭지 않은
초겨울의 밤 나들이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했다.
병풍처럼 드리워진 산허리를 감고도 모자라 천지를 하얗케 수놓은 눈
시리도록 하이얀 저 눈꽃들을 대체 누가 누굴위해 왜 저토록 곱게 흩뿌려 놓았는가
이른 새벽 먼동이 틀무렵 보일듯 말듯 한가로운 동네 어귀에 나지막한
지붕사이로 모락 모락 피어나는 희뿌연 연기와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겨울
눈은 과연 어느 순수작가의 어여쁜손이 빚은 천상의 작품이란 말인가
찬란한 아침 햇살을 곱게 머금고 반짝이는 저 눈꽃들을 입안 가득히
넣어 꼭 깨물고 싶은 너는 겨울이 만든 최고의 걸작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직 잠이 덜깬 산짐승의 먹거리를 이불처럼 덮고 않은 저 하얀 눈은 뉘란 말인가
어둠이 걷히고 밝은 태양이 언젠가 저 하얀눈을 까맣케 녹여버릴 지라도..
아니 한장의 사진속에 남겨질 찰나가 될지라도..
차라리 지금이 너무 어여쁜 저 새하얀 눈송이는 왜 나를 이렇케 흥분케 하는가
가지마다 소복히 걸터앉아 며칠밤을 새우고도 끄덕 없는 하얗고 시리도록
차가운 너는 누구인데 무엇때문에 이춥고 긴 겨울밤을 홀로 지새우는가
어쩜 우리가 언젠가 누워야할 산모퉁이 양지바른 묘지위를 감싸고 있는
백의천사는 과연 누구인가
의연하고 선비처럼 당당하게 하얀 눈을 곱게 이고 소나무 가지위에서
찬란한 아침 햇살을 머금고서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하얀 눈송이와
눈꽃들은 차라리 나더러 차속에서 내려와 같이 살잔다.
육십평생을 그저 그렇케 살다가 비로소 눈을 뜨고 밤풍경에 매료된 바보같은 나 -
이제서야 달리는 밤열차속에서나마 삶이 뭐란걸 조금은 깨닫고 있는 어리석은 나-
곡성역을 지나서 부터일까 갑자기 어디서부터 따라 왔는지 우리곁을
길동무처럼 함께 달리고 있는 시원스런 섬진강이 친구처럼 다정히 내게로
다가왔다.
이제 마지막 남은 일급수인 섬진강은 우리의 탯줄이요 심장이며 자연의
보고이자 언제나 반겨주는 우리모두의 모두의 영원한 동반자 이기에
파숫꾼으로 남아야하며또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이 귀한 강을 안고 사는 우리들은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 사람인가.
난 사랑스런 저강을 껴안고 연인처럼 볼에 입맞추고싶고 오랫만에 만난
이산가족처럼 얼싸안고 덩실 춤을 추고 싶었다.
광주에서의 학창시절 고향길을 무시로 드나들며 눈 시리도록 많이
봐왔지만 한번도 외면하지않고 날 반겨줬던 반짝이던 그때 그강이
바로 섬진강이 아니던가 .
그 오랜 세월을 아무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흘러 강물속에 깊이 담긴 수많은
사연들을 가득 싣고 달려왔기에 이제는 지칠법도 하건만 오늘도 쉬지않고
내달아 드넓은 바다로 바다로 속삭이듯 흐르고 있는 속깊은 강물-
난 구례구역이 다가올때까지 들뜬 마음을 그냥 접을수없어 몇번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쪽을 들락거리며 달리는 차창너머로 조용히
그리고 낮게 흐르는 섬진강의 깊은 침묵속에 금방 빠져들었다.
산 주위를 바람같이 휘감고 돌아 내리면서도 골짜기마다 묻어둔 한많은
사연 들을 어머니 품속처럼 가슴깊이 안고서 아무일 없는양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있는 저 강물의 의젓함에 누가 감히 돌을 던지랴.
난 오늘따라 이리저리 부대끼며 상처난 아픔도 있으련만 어쩜 이를
숨긴채 계곡을 숨바꼭질하듯 내달리며 수수만년 산과 물이 엮은 자연의
오묘함에 그져 망연자실 넋을 빼앗기고 있는것이 아닌가.
그 아름다운 강위에 그리고 바위곁에 뽀오얀 눈들이 나란히 누워 잠시
스쳐가는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반가워 어쩔줄 모르고 바람 같은 손으로
하얀 손짓을 한다.
자연을 파괴하기만한 이 저주스런 인간의 탐욕을 덮어버린 선녀같은 하얀눈-
이 더럽고도 각박한 세상을 무시로 덮어버린 차갑고도 따뜻한 눈 눈아
난 너땜에 내마음을 잠시나마 그속에 묻어두고 싶고 속살을 내보이고 싶다.
만약 사람들이 저 하얀 눈처럼 티없이 맑고 고운 마음이라면-
만약 인간이 세상을 감싸 안은 저 눈처럼 포근함을 갖고 있다면-
맑은 영혼처럼 착해지겠지
하고 잠시 생각에 젖어본다.
추운밤 너무도 시린 차가운 이겨울
감기 조심하시고 건승 하시길 빌며...
임진년 저무는 언덕에서 양 봉 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