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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다. 슈퍼맨의 정반대 지점에서 탄생한 <배트맨>은 지난 70여 년 동안 수많은 변화와 부침을 겪으면서 슈퍼히어로를 뛰어넘는 존재로 전 세계의 사랑을 받아왔다. 영화 칼럼니스트 김정대가 만화 원작과 영화 시리즈를 종횡무진하며 배트맨에 얽힌 모든 이야기를 들려준다.
1930년대 후반 미국은 경제대공황의 암흑 터널을 가까스로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미국인들에게 밝은 미래는 요원한 것으로 느껴졌다. 거리에는 여전히 부랑자들이 넘쳐났으며, 갱단의 무차별 학살극 등 끔찍한 범죄 역시 나날이 기승을 부렸고, 대외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을 예언하는 불길한 징후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대중들은 자연히 이런 악몽 같은 상황을 종식시켜줄 영웅을 애타게 갈망하게 되는데 뜻밖에도 그들은 천박한 것으로 여겨졌던 팝 컬쳐인 만화책에서 바로 그런 영웅들을 만나게 된다. 1938년에 제리 시겔과 조 슈스터는 액션 코믹스 1호를 통해 아메리칸 메시아라 할 수 있는 영웅 수퍼맨을 소개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에 밥 케인이라는 젊은 만화가는 슈퍼맨보다 더욱 인간적인 영웅 배트맨을 소개하여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슈퍼맨과 배트맨의 등장은 바로 코믹북의 황금시대(Golden Age)가 열렸음을 알리는 시그널이기도 했다.
박쥐 영웅의 탄생 DC 코믹스(당시 명칭은 내셔널 얼라이드 퍼블리케이션스였지만 편의상 본문에서는 DC 코믹스로 통일한다)의 편집장이었던 빈 설리반의 연락을 받았을 때 밥 케인의 나이는 불과 22세였다. 당시 설리반은 DC 코믹스가 발행하는 잡지 디텍티브 코믹스에 슈퍼맨과 유사한 형식의 슈퍼히어로 만화를 그려줄 이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레이더망에 걸려든 이가 바로 케인이었던 것이다. 설리반의 요청을 받고 케인이 처음 그린 슈퍼히어로의 모습은 슈퍼맨과 매우 흡사했다. 슈퍼맨 이후 만화 속 슈퍼히어로의 외양은 쫄쫄이와 팬티를 입은 모습으로 정형화됐는데 케인 역시 영웅은 당연히 이런 검증된 패션을 입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케인은 슈퍼맨과의 차별화를 위한 갖가지 창조적 변형을 꾀하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망토의 모습이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영웅에게 슈퍼맨과 같은 보자기형 망토를 둘러주는 대신 새의 날개를 달아보았다. 즉 케인이 처음 그린 영웅의 모습은 버드맨(!)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어서 날개의 모습을 글라이더 형태로 약간 변형해보았다. 이 날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오니솝터(박쥐 모양의 날개가 달린 탈 것)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영웅의 정체성이 규정됐다. 즉 이때부터 케인의 영웅은 조류(새)가 아닌 포유류(박쥐)의 특징을 지니게 된 것이다.
초창기의 배트맨 디자인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가면이다. 슈퍼맨과는 달리 배트맨은 가면을 통해 진짜 얼굴을 숨김으로써 보다 확실한 이중 정체성을 확보한다. 케인이 처음 디자인한 배트맨의 가면은 흥미롭게도 도미노 가면(얼굴의 반을 가리는 무도회용 가면)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케인에게 영감을 준 또 하나의 중요한 소스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조로. 보다 정확히는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주연의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1920)에서의 조로의 모습이다(케인은 이 영화 속 조로의 가면을 모방하여 배트맨의 가면을 디자인했다). 이 외에 케인이 참조한 또 하나의 소스는 바로 고전영화 <배트 위스퍼스>(1930)다. 매리 로버츠 라인하트의 원작을 각색한 이 영화에는 망토를 두른 배트라는 범죄자가 등장하는데 케인은 자서전에서 배트맨이 바로 이 캐릭터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케인은 배트맨의 첫 디자인을 완성한 뒤 그것을 파트너인 만화작가 빌 핑거에게 보여줬다. 핑거는 이를 본 뒤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는데 이 조언은 현재 모습의 배트맨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핑거는 우선 배트맨이 이름값을 하려면 보다 박쥐와 닮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그는 가면을 박쥐 머리 모양으로 변형하자고 제안했는데 이에 따라 케인은 두 귀가 뾰족하게 솟은 두건 형태의 새로운 가면을 디자인했다. 또한 핑거는 글라이더 형 날개도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이런 딱딱한 날개를 달고 배트맨이 각종 곡예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는 이것을 박쥐 날개와 같은 주름을 가진 망토형 날개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케인은 이를 받아들여 보다 활동적인 배트맨의 날개(망토)를 디자인했는데 이 날개는 가면과 곧장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각적으로도 매우 돋보였다.
핑거는 또 배트슈트(의상)의 색을 검정색과 회색으로 바꿀 것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배트슈트는 (화려한 색인 슈퍼맨과는 정 반대로) 어둡고 침침한 톤으로 새롭게 채색됐다. 그리고 마지막 화룡점정으로 핑거는 “배트맨의 눈동자를 지워버리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케인은 배트맨의 눈동자를 지우고 그의 눈을 마치 깜깜한 밤에 반짝이는 박쥐의 눈 같은 모습으로 수정했다. 이것은 훗날 독자들이 배트맨을 신비롭고 으스스한 존재로 여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디자인을 완성하여 설리반으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아낸 케인은 핑거와 함께 역사적인 배트맨의 첫 번째 이야기를 구상했고, 그것은 1939년 5월에 발간된 디텍티브 코믹스 27호에 실렸다.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는 전설이 됐다.
새로운 영웅상의 정립 최초의 배트맨 이야기는 총 6페이지 분량이었으며, 케미컬 신디케이트 사건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고든 서장은 친구인 부자 사업가 브루스 웨인과 잡담을 나누던 중 화학회사의 최고경영자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현장으로 출동한 고든은 살해당한 경영자의 아들을 취조하다가 경영자의 예전 파트너 중 한 명의 전화를 받게 되고, 추가 살인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잠시 뒤 배트맨이 홀연히 나타나 추가 살인을 하려는 살인청부업자를 덮치고, 사건을 해결할 결정적 증거를 입수한다. 그는 결국 모든 사건이 경영자의 전 파트너 중 한 명이 꾸민 일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야기는 배트맨이 범인을 처치한 뒤 그의 진짜 정체가 웨인이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면서 마무리된다.
이 배트맨의 외형상 특징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면 위로 돌출한 귀의 길이가 짧다는 것이었다. 이 귀는 만화가 회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길어졌고, 배트맨의 체격도 시간이 갈수록 우람한 몸짱 스타일로 진화해갔다. 그런데, 향후 배트맨 만화의 성격을 규정지을 중요한 특징들은 이미 이 이야기에서 뚜렷하게 제시된다. 우선 이 이야기에서는 펄프 잡지의 향수가 매우 짙게 느껴진다. 펄프 잡지는 과거 미국에서 유행하던 싸구려 소설 잡지류로 닥 사비지, 조로 등 숱한 고전 영웅들이 바로 이 매체를 통해 유명세를 탔다.
또한 이 잡지들은 슈퍼히어로 만화의 작가들에게도 결정적 영감을 제공한 바 있다. 배트맨의 첫 번째 이야기는 구성 방식이나 스토리텔링 등 여러 면에서 펄프 잡지 특히 섀도우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그리고 이 점은 바로 배트맨 만화의 장르적 특질과도 직접 연결된다. 그 특질이라는 바로 이런 것이다. 배트맨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탐정 이야기다. 따라서 이후 전개될 모든 배트맨 이야기는 단순한 액션 모험물이 아니라 펄프 잡지 스타일의 탐정 추리극/범죄 스릴러 형태를 띠게 된다(배트맨이 실린 잡지가 디텍티브(탐정) 코믹스였다는 점은 이 측면에서 보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케인은 첫 번째 이야기에서 배트맨이 건장한 남성을 집어 던질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부각시키지만 동시에 그가 슈퍼맨과는 달리 보통 인간이라는 점도 밝힌다. 예컨대, 케인은 배트맨이 공중 점프를 할 수 있는 이유가 날개처럼 펴지는 망토 때문임을 그림을 통해 독자가 알 수 있게 했으며, 유리로 된 독가스 챔버를 빠져나올 때는 그가 렌치를 이용해 유리를 부수도록 하여 그의 힘이 어디까지나 인간적 영역에 머물러 있음을 독자에게 주지시킨다. 이런 배트맨의 인간적 특징은 디텍티브 코믹스 29호에 실린 세 번째 이야기에서 더욱 확실하게 그려진다. 여기에는 배트맨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장면이 삽입됐는데 독자들은 이 이야기 이후 그가 보통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는 또한 슈퍼맨과 구별되는 배트맨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부각된다. 그것은 바로 “배트맨은 슈퍼맨처럼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다”라는 점이다. 위험에 처한 이라면 악인이라도 일단 구하고 보는 슈퍼맨과는 달리 배트맨은 목숨이 위태로운 악당을 구해주는 쇼맨십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사실 이런 특징은 이미 첫 번째 이야기에서부터 간접적으로 암시된 바 있으나(범인이 산이 가득 찬 탱크에 빠지자 배트맨은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악당다운 최후군!”이라는 말을 툭 던진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더욱 확실하게 강조된다. 이야기의 결말부분에서 악당 닥터 데쓰(Doctor Death)는 배트맨에게 쫓기던 중 불이 난 실험실에 갇힌다. 그러나 배트맨은 그를 구해주기는 커녕 불이 타는 실험실을 지켜보며 “Death… to Doctor Death"라는 언어유희까지 즐긴다. 당시의 독자들에게 이런 광경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배트맨의 인간적 속성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배트맨은 이타적인 영웅 슈퍼맨과는 달리 개인적인 목적을 지닌 인간적인 영웅인데 그가 이런 목적을 지니게 된 사연은 디텍티브 코믹스 33호에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15년 전 소년이었던 브루스 웨인은 아버지 토마스 웨인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극장을 나와 밤거리를 걷다가 권총 강도를 만난다(이 강도는 훗날 조 칠이라 명명된다). 웨인의 어머니의 목걸이를 뺏으려던 강도는 결국 웨인이 보는 앞에서 부모를 살해한다.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며 공포와 쇼크에 휩싸인 웨인은 “부모님의 영혼에 맹세컨대 나는 여생을 모든 종류의 범죄와 맞서 싸움으로써 그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는 데 바치리라!”라고 다짐한다.
이후 그는 인고의 노력 끝에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으며, 혹독한 훈련으로 강인한 육체를 보유하게 됐다. 흉악한 악당들과 맞서려면 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줄 변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웨인은 고민을 거듭하던 중 방으로 날아 들어온 박쥐를 보고는 “바로 저거야! 나는 박쥐가 되겠어!”라고 외친다. 이 기원 이야기는 “악에 대한 복수자 배트맨은 이렇게 탄생했다”라는 문구로 매듭지어진다.
케인과 핑거가 만들어낸 이 기원 이야기는 당시로서는 내용과 다뤄진 방식 모두에서 쇼킹함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은 초반부에 영웅의 탄생 설화를 독자에게 소개한다는 (슈퍼맨 이후 확립된) 슈퍼히어로 만화의 관습을 깨버리고 무려 6개월 동안이나 어떻게 탄생했는지도 모르는 영웅의 활약상을 보여준 뒤에야 영웅의 탄생 설화를 공개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또한 아이가 보는 앞에서 부모가 살해된다는 내용 자체도 유소년을 주 타깃으로 한 만화로서는 다소 부적절할 정도로 충격적이어서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이것은 모세 이야기에 비유되곤 하는 슈퍼맨의 탄생 이야기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케인과 핑거는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웨인이 고독한 크라임파이터(범죄와 싸우는 이)가 돼야만 하는 정당성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고 여겼다. 물론 그들의 계산은 정확했다.
어둠의 기사의 여정 배트맨은 19세기의 문학과 20세기 초반의 대중문화 특히 펄프 잡지 속의 영웅 이미지가 결합하여 탄생한 인물이다. 핑거의 말을 간접 인용하자면 배트맨은 셜록 홈즈와 달타냥을 결합하여 조로의 옷을 입힌 캐릭터다. 이 중 특히 주목할 부분은 조로와 배트맨의 유사성이다. 조로는 1919년에 작가 존스톤 맥컬리가 펄프 잡지를 통해 처음 소개한 인물로 배트맨처럼 이중 자아를 지니고 있다. 두 캐릭터는 모두 핸섬한 상류층 부자이며, 낮에는 플레이보이적인 귀족 생활을 누리다가 밤에는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른 채 크라임파이터로 변신한다. 하지만 두 캐릭터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조로는 명백히 과거 지향적인 인물이지만 배트맨은 반대로 미래 지향적인 인물이다. 말을 타고 칼을 쓰는 조로와는 달리 배트맨은 배트모빌, 배트플레인 등의 최첨단 탈 것과 다양한 과학무기를 이용한다.
배트맨은 슈퍼맨과 같은 초인이 아니기 때문에 범죄자와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기발한 장비를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한다. 배트맨은 이 장비들을 유틸리티 벨트에 감추고 다닌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케인과 핑거는 이 부분과 관련해 웨인이 백만장자라는 설정을 이야기의 신빙성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배트맨은 백만장자이기 때문에 첨단 과학 장비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논리적으로 고든은 배트맨의 정체가 백만장자인 웨인이 아닐까라고 진작 의심했어야 했다.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에서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독특한 설정들만큼이나 이목을 끈 것은 바로 만화의 누아르적 분위기였다. 동시대에 탄생한 슈퍼히어로임에도 슈퍼맨과 배트맨은 너무나 대비되는 컨셉을 지니고 있다. 전반적으로 밝고 활기찬 분위기를 띠고 있는 슈퍼맨과는 달리 배트맨 만화는 항상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깔고 있다. 주로 밤거리를 배경으로 하여 펼쳐지는 변형된 탐정이야기인 배트맨 만화는 비슷한 시기에 유행한 필름 누아르의 미러 이미지라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이견의 여지가 없이 완벽한 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슈퍼맨과는 달리 배트맨은 도덕적으로도 다소 모호한 존재다.
당장 그의 외모부터가 그렇다. 악당의 공포감을 유발하기 위한 배트맨의 복장은 악당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두려움을 심어줬다. 게다가 뾰족한 귀와 빛나는 눈을 가진 그의 두상 그리고 박쥐의 날개는 전형적인 악마의 이미지와도 일치되는 것이어서 종종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망토를 두른 그의 모습은 한 눈에도 또 하나의 악의 상징인 드라큘라 백작과 닮았음을 알 수 있다(실제로 케인은 자신이 벨라 루고시 주연의 <드라큘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후대의 만화가들은 이 부분을 차용해 배트맨이 흡혈귀가 되는 내용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슈퍼맨과는 달리 배트맨이 부모에 대한 복수라는 개인적인 목적에 따라 활동한다는 점과 그의 활동영역이 법의 테두리 밖이라는 점은 또 다른 논란을 야기했다. 이것은 곧 ‘법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경주의는 정당한가?’라는 전통적인 자경주의 논란과 연결된다. 이는 심각한 도덕적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치안 부재의 카오스 상태에 빠진 고담 시는 분명히 법을 대체할 정의 실현 수단이 필요하긴 하지만 바로 그것에 해당하는 배트맨의 자경 행위는 실정법상으로는 위법이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설정에 대한 케인의 입장은 분명했다. 그는 배트맨이 법 밖에서 활동한다는 설정이 자신의 경험에서 유래한 것임을 밝힌 바 있다(브롱크스의 험악한 거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케인은 생존을 위한 자경주의에는 익숙해진 인물이었다). 대공황 시대의 치안 위기 상황을 몸소 겪은 미국인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런 설정을 끌어안았다.
고담 시의 명명과 로빈의 등장 핑거는 불운한 만화 작가였다. 그는 케인이 배트맨을 디자인 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조커, 펭귄 등 스타급 악당들이 탄생하는 데도 혁혁한 공헌을 한 인물이지만 안타깝게도 배트맨의 공동 창작자로 기록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핑거가 남긴 유산들은 예외 없이 배트맨 신화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중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고담 시라는 명칭이다. 배트맨이 활동하는 도시는 뉴욕 시를 모델로 하고 있지만 핑거는 뉴욕 시라는 말을 만화에 등장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배트맨의 활동지에 뉴욕 시의 거주자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사는 이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도시 명을 붙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여러 가지 도시 명을 놓고 고민하다가 뉴욕의 별명 중 하나인 고담(Gotham)이 만화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진다고 판단하여 1940년에 나온 배트맨 4호에 그 명칭을 최초로 소개했다. 이후 고담 시는 슈퍼맨의 메트로폴리스와 함께 DC 코믹스의 가상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됐다.
한편, 1940년 4월에 나온 디텍티브 코믹스 38호에서는 배트맨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 하나가 등장한다. 소년들이 동일화 할 수 있는 틴에이저 캐릭터가 하나 필요하다고 여긴 케인은 배트맨에게 틴에이저 파트너를 하나 붙여주기로 하는데 그가 바로 로빈이다. 디텍티브 코믹스 38호에서는 로빈의 탄생비화가 소개되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로빈의 본명은 딕 그레이슨으로 그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서커스단의 나는 그레이슨(Flying Graysons) 팀의 멤버다. 어느 날 그의 부모가 공중 그네타기를 하던 중 줄이 끊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는데 그레이슨은 우연히 이 사고가 갱단이 꾸민 짓임을 알게 된다. 그레이슨은 경찰에 이를 알리려 하지만 그때 배트맨이 나타나 만류한다. 배트맨은 “마을 전체가 갱단에 의해 장악됐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을 알리려 하는 순간 너는 죽음을 당할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그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킨다. 그레이슨은 자신도 악당들과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주저하던 배트맨은 결국 그를 파트너로 삼기로 결심하고 그를 훈련시킨다. 훈련을 마친 뒤 그레이슨은 로빈 후드 스타일의 의상을 착용하고(로빈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주연의 영화 <로빈 후드>(1922)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캐릭터다) 로빈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게 된다.
사실 슈퍼히어로는 당연히 성인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에는 틴에이저 영웅을 만화에 등장시키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DC 코믹스의 발행인 잭 리보비츠는 소년을 범죄자들과 싸우게 할 수는 없다, 소년이 히어로라는 설정은 너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로빈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로빈이 등장한 후 만화의 판매 부수가 두 배로 껑충 뛴 것이다. 이런 예상치 못한 사태를 누구보다 반긴 이는 바로 핑거였다. 배트맨을 셜록 홈즈에 비유하곤 했던 그는 (셜록 홈즈의 친구) 와트슨처럼 배트맨에게도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고 여겼는데 이런 고민은 로빈의 등장으로 일거에 해결된 것이다. 하지만 로빈의 폭발적 인기는 케인이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낳기도 했다. 케인은 처음부터 배트맨을 어둡고 심각한 분위기의 이야기로 구상했지만 명랑하고 활기찬(음침한 배트맨의 복장과는 달리 로빈의 복장은 화사함 그 자체다) 로빈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크게 바뀌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는 로빈을 갑자기 만화에서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만화가 케인이 초기에 의도한 누아르 스타일로 복귀하기까지는 자그마치 30년이 걸렸다.
악당들의 천국 배트맨의 역사는 DC 코믹스의 새 편집장으로 휘트니 엘스워스가 부임하면서 전환기를 맞았다. 배트맨의 상업적 가치에 매료된 엘스워스는 1940년 봄부터 아예 배트맨 이야기만을 실은 잡지 배트맨을 발간하게 된다. 배트맨 1호는 만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간행본으로 평가되는데 수록된 에피소드 중 하나에서 조커가 처음 소개되기 때문이다. 음흉한 미소와 녹색 머리, 창백한 얼굴, 붉은 입술이 트레이드마크인 조커는 무성영화 <웃는 남자>(1928)에서 배우 콘라드 바이트가 했던 으스스한 분장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배트맨 1호에서는 조커의 필살기도 처음 공개되는데 바로 독(조커 베놈)을 써서 희생자를 웃는 얼굴로 죽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조커가 사건 현장에 조커 카드를 남기는 등의 쇼맨십을 발휘할 줄 아는 인물이라는 점도 소개된다. 특이한 것은 여기에는 조커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화학 약품통에 빠져 광대의 모습이 된다는 조커의 탄생 비화는 무려 11년이 지난 뒤에야 소개된다). 이것은 만화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케인·핑커 콤비의 독창적 마인드를 잘 보여주는 또 다른 대목이다.
조커는 본래 배트맨 1호를 끝으로 사라질 인물이었다. 실제로 만화는 조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조커가 한번 쓰고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악당이라고 직감한 편집장 엘스워스는 과감하게 작가적 영역에 개입하게 된다. 결국 그의 압력으로 만화의 결말은 급하게 다시 그려졌는데 급조된 새 결말에서는 조커가 죽지 않은 것으로 됐다. 결국 엘스워스의 기지(?)로 인해 조커는 훗날 만화에서 숱하게 재등장하며 배트맨의 영원한 숙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편, 배트맨 1호에 수록된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또 한 명의 유명한 악당 캣우먼이 최초로 등장한다. 여기 등장한 캣우먼은 널리 알려진 버전과는 달리 고양이 복장을 하지 않았으며, 이름도 더 캣(the Cat)으로만 불린다(캣우먼의 모습은 이후 여러 편의 작품을 거쳐 서서히 다듬어져 갔다). 더 캣이라는 말은 밤도둑을 뜻하는 단어 Cat Burglar에서 유래한 것으로 만화에서 더 캣은 보석을 훔치는 도둑으로 그려진다. 노파로 변장한 더 캣은 배트맨과 로빈에게 잡힌 뒤 그 정체가 밝혀지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젊고 섹시한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반한 배트맨은 만화의 끝 부분에서 그녀를 고의적으로 놓아주는데 이것은 훗날 배트맨과 그녀 사이에 형성될 묘한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어서 무척 흥미롭다.
1941년에 나온 디텍티브 코믹스 58호에서는 또 한 명의 스타악당 펭귄이 등장한다. 핑거는 이 캐릭터가 황제펭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얼핏 보면 젠체하는 영국 신사가 턱시도를 걸친 모습과 닮았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외알 안경과 모자를 쓴 채 우산(잡다한 무기들이 감춰짐)을 들고 다니는 이 땅딸막한 캐릭터는 대중들이 혐오하는 상류층 귀족들의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왜곡하여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펭귄의 이미지는 웨인의 그것(대중들이 선호하는 상류층 귀족의 이미지)의 정 반대지점에 위치한 것인 셈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배트맨과 펭귄의 대립구도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얼터 에고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다(훗날 팀 버튼은 <배트맨 리턴즈>에서 이런 전통적 설정을 무시하고 펭귄을 기형으로 태어난 사이코패스로 해석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사실 얼터 에고의 대립구도는 배트맨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브라고 볼 수 있다. 배트맨의 악당들은 대부분 (배트맨처럼) 불운한 과거를 지녔으며,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배트맨 역시 악당들과 다를 바 없는 광인이다. 차이가 있다면 배트맨은 어두운 내면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의 광기를 범죄와 싸우는 쪽으로 발산하며, 악당들의 경우는 그 반대라는 것뿐이다. 디텍티브 코믹스 66호에 처음 소개된 악당 투 페이스는 바로 이런 모티브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유능한 지방 검사인 하비 켄트(훗날 하비 덴트로 개명됨)는 악당이 뿌린 염산으로 인해 얼굴의 반쪽이 흉측하게 타게 되는데 이후 그는 자신의 어두운 반쪽의 유혹에 굴복하여 악당 투 페이스가 된다. 투 페이스는 고전영화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악당인데 이 악당의 기괴한 외모는 얼터 에고의 대립이라는 모티브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모티브를 조금 더 확장하면 배트맨의 악당들은 배트맨의 부정적 자아가 형상화된 것이라는 결론에까지 도달한다. 결국 배트맨이 치르는 전투는 부정적인 자아와 긍정적인 자아 사이에서 늘 갈등하는 배트맨의 내면 심리의 표현이기도 하다. 배트맨의 악당은 배트맨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유명한 역설은 바로 이런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 아마도 이 역설에 가장 어울리는 악당 중 한 명은 바로 리들러일 것이다. 물음표가 잔뜩 그려진 의상을 입고 다니는 이 악당은 배트맨에게 병적으로 집착하여 그에게 복잡한 퍼즐을 주지 않는 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변혁의 시대 배트맨에게 있어 최강의 적은 조커나 펭귄 따위가 아니라 바로 정신의학자 프레드릭 워썸이었다. 1954년 워썸은 저서 순수한 이들의 유혹을 통해 만화책이 청소년에게 끼치는 해악을 조목조목 지적했는데 이 책의 사회적 파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워썸은 특히 배트맨을 질 나쁜 만화 중 하나로 지목했는데 그 이유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무려 네 페이지에 걸쳐 나열한 배트맨의 해악 중 하이라이트는 바로 배트맨과 로빈은 게이라는 것이었다. “배트맨과 로빈은 꽃이 만발하고 호화스러운 집에 함께 살며 집사까지 거느리고 있다. 그것은 동성애자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환경이다. 배트맨과 같은 이야기는 아이들의 동성애 환상을 자극시킬 것이다”라는 것이 워썸의 주장이었다. DC 코믹스 입장에서 당혹스러웠던 것은 엘스워스의 편집장 부임 이후 배트맨 시리즈가 자체적인 검열(엘스워스는 1940년 이후 배트맨이 총을 쏘거나 악당을 죽이는 내용을 금지시켰다)을 통해 자극적인 내용을 자정해오던 상황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결국 이 일로 논란이 심화되자 DC 코믹스도 보다 강도 높은 내용 개편을 단행해야 했다. 개편 방향은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켜 배트맨과 로빈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의혹을 불식시키는 쪽으로 맞춰졌다. DC 코믹스는 새 캐릭터들을 통해 배트맨과 로빈을 정상적인 (유사) 가족의 일원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56년에 등장한 캐릭터가 바로 배트우먼이다. 배트우먼은 이후 심심할 때마다 재등장해 잡다한 활약을 하고, 때로는 배트맨과 어설픈 로맨스 행각까지 벌인다. 물론 액션물을 원하는 많은 독자들의 눈에는 갑자기 유사 멜로드라마로 둔갑한 만화가 매우 당혹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DC 코믹스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1961년에는 배트우먼의 조카딸 배트걸까지 등장시켜 로빈과 강제로 짝을 지어주려 한다. 결국 이 시기의 배트맨 만화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는데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SF적 요소의 가미였다. 이 시기에 DC 코믹스는 폭력에 대한 논란을 무마하기 위해 외계에서 온 악당이나 갑자기 커진 배트맨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SF적 소재를 담은 배트맨 만화를 줄기차게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진지했던 만화의 스타일은 엉망이 되고 만다.
대중들은 결국 하나 둘 배트맨 만화에 등을 돌렸고, 이에 당황한 DC 코믹스는 1964년에 줄리어스 슈워츠를 새 편집장으로 부임시켜 다시 한 번 개혁을 단행한다. 슈워츠는 만화를 위기에서 건져내기 위해 배트우먼, 배트걸 등의 캐릭터를 없애버리고 캐릭터 디자인도 보다 리얼한 것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등의 대수술을 감행했다. 슈워츠는 또한 게이 논란에 대응하기 위해 알프레드 집사를 죽이고 로빈의 숙모인 해리엇 쿠퍼를 웨인의 집에 들여놓음으로써 세 남자가 한 집에 산다는 전통적인 설정을 파괴했다. 그런데 얼마 뒤 ABC의 TV 시리즈 <배트맨>에 알프레드가 등장하게 되자 슈워츠는 어쩔 수 없이 보조를 맞추기 위해 만화에서도 알프레드를 부활시켰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슈워츠를 비롯한 어느 누구도 이 TV 시리즈 <배트맨>이 대중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지를 알지 못했다.
TV 시리즈 <배트맨> 슈퍼맨과는 달리 배트맨은 만화책 외의 다른 매체에서는 오랫동안 굴욕에 가까운 대접을 감수해야 했다. 1940년대에 방송된 라디오극에서 배트맨은 슈퍼맨을 돋보이게 하는 양념 쯤으로 종종 등장했고, 콜럼비아에서 제작한 시리얼(극장 상영용 연속활극) <배트맨>(1943), <배트맨과 로빈>(1949)은 만듦새도 엉성했을 뿐더러 만화와는 동떨어진 내용(일본인이 악당으로 등장한 <배트맨>은 2차대전시 유행한 프로파간다 필름의 성격마저 지니고 있었다)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1960년대 중반에 20세기 폭스와 ABC가 손을 잡고 <배트맨> TV 시리즈(1966~68)를 만든다고 했을 때 밥 케인의 기대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나온 결과물은 케인이 그린 초기 만화들과는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아담 웨스트가 배트맨으로, 버트 워드가 로빈으로 각각 분하고 특급 스타들이 단역 및 카메오로 총출동한 이 TV 시리즈의 특징은 캠프(camp, 과장되고 유치하며 우스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시리즈의 제작자인 윌리엄 도지어는 만화책의 팬이 아니었으며, 배트맨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진지한 드라마가 아닌 팝 아트 스타일의 풍자 코믹극으로 시리즈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이런 정책에 따라 이 시리즈에는 진지한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당혹스런 요소들 예컨대 액션 신에서 “쉬익”하는 의성어가 말풍선에 담겨서 뜬다든지 악당과의 결투 후 배트맨이 갑자기 춤을 춘다든지 하는 것들이 넘쳐났다.
배트맨과 로빈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썰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배트맨은 마치 사전에 어떤 위기가 닥칠지 예상이라도 한 듯 유틸리티 벨트에 우스꽝스러운 도구들을 넣어 다니면서 요긴하게 쓴다(물론 유틸리티 벨트에 그 많은 도구들이 어떻게 다 들어가는지에 대한 설명 따위는 없다). 열혈 만화팬들은 이 시리즈가 배트맨을 조크로 만들고 있다면서 일제히 비난했지만 일반 대중들의 반응은 달랐다. 시리즈의 시즌 1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며 미국 전역에 걸쳐 배트마니아를 양산했다. 비록 시리즈는 시즌 2, 3을 거치며 시청률이 급락하면서 제작이 중단되는 운명을 맞이했지만 그 영향력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배트맨> TV 시리즈는 만화책을 보지 않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배트맨의 존재를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리즈는 만화로 배트맨을 접하지 못한 다수의 대중들에게 배트맨은 유치한 작품, 나아가 슈퍼히어로물은 유치한 것이라는 선입견을 심어주기도 했다.
배트맨의 르네상스 시대 <배트맨> TV 시리즈는 만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1967년에 TV 시리즈 제작진은 떨어지는 시청률을 만회하기 위해 새 여성캐릭터 배트걸을 등장시키기로 했는데 이에 따라 DC 코믹스 역시 보조를 맞추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만화에 배트걸을 소개해야 했다(이 배트걸은 앞서 언급한 배트걸과는 다른 인물로 진짜 정체는 고든 서장의 딸 바바라 고든이다). 또한 만화의 분위기 역시 TV 시리즈의 영향을 받아 유치한 캠프 스타일로 변모했는데 이것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TV 시리즈의 인기로 한 때 크게 치솟았던 만화책의 판매고는 시리즈의 시청률 하락과 함께 다시 곤두박질쳤고, DC 코믹스는 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DC 코믹스는 TV 시리즈로 인해 망가진 만화의 본래 스타일을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이 과정에서 케인은 편집위원 카민 인팬티노와 의견 대립을 보이며 결국 DC 코믹스를 떠나게 된다. 이후 케인 및 그의 영향을 받은 만화가들(제리 로빈슨, 딕 스프랭, 셸든 멀도프 등)의 시대는 저물고, DC 코믹스는 자연스레 세대교체를 경험하게 된다.
캠프 스타일을 축출하고,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의 배트맨 만화를 재건하는 데 가장 기여한 신진 만화가는 바로 닐 아담스였다. 아담스는 섬세한 드로잉과 복잡한 그물코 음영 기법을 통해 케인의 심플한 그림체와는 대조되는 사진처럼 리얼하고 생생한 배트맨 그림체를 선보였다. 그는 출중한 작가 데니스 오닐과 함께 여러 실험적인 작품들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들은 후대의 만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투 페이스가 17년 만에 다시 만화에 복귀한 점, 지구 환경의 밸런스를 위해 인류를 대청소하려는 황당한 테러리스트 라스 알 굴의 등장, 5~60년대에 우스꽝스러운 광대로 전락했던 조커가 다시 본래의 심각한 살인마로 복귀한 점 등은 이 시기의 가장 빛나는 성과들이다. 한편, 이 시기에 DC 코믹스가 슈워츠와 폴 레비츠 등 유능한 편집장을 거치며 이룬 또 하나의 업적은 바로 만화책을 성인들의 구미에도 맞도록 모던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1980년대 배트맨의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 르네상스 시대를 연 선두주자는 바로 프랭크 밀러였다.
1986년 DC 코믹스는 향후 배트맨 역사의 분수령이 된 프랭크 밀러의 역작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발표했다. 4부작 미니시리즈 형태로 된 이 작품은 코믹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고급 종이를 쓴 호화본으로 발간됐는데 이런 야심찬 전략은 높은 판매고와 열광적 호평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만화에 대한 기존의 선입견을 완전히 깨고 싶었던 밀러는 파격적인 설정과 세련된 누아르적 터치를 통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배트맨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가까운 미래 50대의 브루스 웨인은 10년 동안이나 배트맨으로서의 활동을 그만 둔 상태이며 고든 서장은 은퇴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하지만 뮤턴츠라 불리는 갱단이 거리를 장악하고 성형수술을 한 투 페이스가 범죄자로 복귀하자 그는 배트슈트를 다시 입기로 결심한다. 아캄 정신병원에 수감됐던 조커는 옛 숙적의 복귀 소식을 듣고는 TV 토크쇼 도중 방청객을 모두 살해하고 탈출한다. 이 작품에서 폭력적인 성향의 배트맨과 짝을 이루는 로빈은 놀랍게도 13세의 소녀이며, 배트모빌은 미끈한 스포츠카형 자동차가 아닌 무시무시한 장갑차다. 고든 서장은 배트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려는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으로 그려진다. 자경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찰, 미디어의 행태 및 권력의 속성에 대한 냉소(작품 속 대통령은 레이건을 풍자했다), 그리고 고독한 영웅의 심리에 대한 날카로운 탐구 등이 어우러진 이 걸작은 향후 등장한 모든 배트맨 영화에 영향을 준 문제작으로 평가된다.
밀러는 이듬해에는 배트맨 원년을 발표한다. 자사의 슈퍼히어로들의 역사를 다시 쓴다는 DC 코믹스의 전략의 일원으로 기획된 이 작품은 웨인이 배트맨으로 활동한 첫해를 그리고 있다. 밀러는 이 작품에서 고담 시를 부패에 찌든 사악한 도시로 그리고 있는데 그 이미지는 향후에 나온 영화들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 작품은 그간 배트맨을 빛내는 조연에 불과했던 고든의 내면과 인간성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을 시도해 화제가 됐는데 이는 훗날 <배트맨 비긴즈>에 결정적 영감을 제공했다.
밀러의 작품들은 이후 배트맨 만화가 킬링 조크(1988)나 아캄 정신병원(1989)과 같은 성인 취향의 고급 그래픽 노블로 넘어가는 데 교량 역할을 했다고도 평가된다. 와치맨으로 유명한 영국 만화작가 알란 무어의 걸작 킬링 조크는 조커의 레전드에 새로운 시각을 가미하여 인기 사이코패스의 면모를 재조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조커가 과거에 코미디언 지망생이었다는 것, 그가 배트걸을 저격하여 하반신 불구로 만들었다는 것 등의 쇼킹한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이는 같은 해에 있었던 제이슨 토드 사망사건(박스 기사 참조)과 더불어 조커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야기로 기록된다. 한편 알란 무어에서 촉발된 영국 만화작가들의 DC 코믹스 침공은 아캄 정신병원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영국 작가 그랜트 모리슨과 삽화가 데이브 맥킨이 호흡을 맞춘 이 작품은 아캄 정신병원에서 악당들과 대면한 배트맨의 복잡한 내면 심리와 모호한 도덕적 정체성을 사이코드라마 형식으로 파헤친 문제작으로 기막힌 대사들과 그로테스크한 그림체로 많은 화제를 뿌렸으며 베스트셀러에도 등극했다. 그러나 배트맨의 역사에서 1989년이 기념비적인 해로 기억되는 것은 이 작품이 아니라 바로 장편영화 <배트맨> 때문이다.
장편영화 <배트맨> 시리즈 리처드 도너 감독의 1978년작 <슈퍼맨>은 <배트맨> TV 시리즈 이후 왜곡됐던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이 영화로 대중들은 슈퍼히어로물도 신화적 품격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제작자들은 만화 소재의 영화도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후 워너는 자연히 DC 코믹스의 또 다른 영웅 배트맨의 영화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프로젝트를 추진한 제작자 마이클 우슬란과 벤자민 멜니커는 <슈퍼맨>의 각본가 톰 맨키비츠를 고용하여 <배트맨>의 각본을 쓰게 했다.
맨키비츠의 각본은 브루스 웨인의 부모가 조 칠에게 살해당하는 부분에서 시작해 연대기 순서로 전개되며, 결말에서는 로빈이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각본이 내용뿐만 아니라 분위기적으로도 너무나 <슈퍼맨>과 흡사하다는 점이었다. 제작자들은 이런 이야기 구조가 <슈퍼맨>에는 통할지 몰라도 <배트맨>에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들이 원한 것은 케인의 초기만화와 같은 누아르 스타일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각본을 다시 작성하기로 했는데 그 결과 프로젝트는 오랫동안 제자리걸음을 해야 했다. 헌데 운 좋게도 얼마 후 제작자들에게 롤모델이 될 만한 만화가 하나 등장했다. 바로 다크 나이트 리턴즈였다.
제작자들은 이 작품을 접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영화가 구현해야 할 비전임을 알게 됐다. 그런데 그런 제작자들의 다음 행보는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내용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영화의 감독을 맡길 인물을 물색하던 제작자들은 이반 라이트만, 조 단테 등의 후보를 놓고 고민하던 중 <피위의 대모험>을 만든 (거의 신인에 가까운) 팀 버튼에게 메가폰을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연출 제안을 수락한 버튼은 각본가 샘 햄과 함께 <배트맨>의 각본 작업을 진행해 나갔는데 그는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영화가 나가야 할 비전이라는 제작자들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이 만화의 분위기는 영화로 옮기기에는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여겼다.
이에 따라 그는 만화의 어두운 톤은 유지하되, 그것을 적절한 수준의 동화적 분위기와 조화시키기로 했다. 웨인이 배트맨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심리적 요인에 특히 집착한 버튼은 <배트맨>을 단순한 영웅활극이 아닌 복잡한 심리드라마로 규정하고, 영화의 모든 요소를 이런 테마를 부각시키는 쪽으로 맞추기로 했다. 각본의 수정작업은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됐는데 버튼은 이 과정에서 맨키비츠의 원안에 있었던 로빈을 없애버리고 원작과는 달리 웨인의 부모를 죽인 이를 조커로 설정하는 모험도 단행했다. 또한 그는 배트맨 역을 코미디 배우라는 인식이 강한 마이클 키튼에게 맡겨 팬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많은 이들은 키튼의 캐스팅 소식을 접하고는 “혹시나 TV 시리즈의 유치한 스타일이 부활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우려했지만 이는 기우로 판명됐다.
팀 버튼의 <배트맨>은 전례가 없는 기괴한 슈퍼히어로물이었다. 이 영화가 배트맨의 역사에 가장 기여한 부분은 은막에 누아르 풍을 도입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슈퍼히어로 누아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버튼은 영화 속 모든 사건을 밤에 일어나도록 설정해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했으며, 미술 감독 안톤 퍼스트는 30~40년대 건축양식과 미래식 마천루 이미지를 혼합하여 범죄에 찌든 지옥과도 같은 고담 시를 시간을 초월한 폐소공포증이 느껴지는 공간으로 기막히게 표현함으로써 많은 찬사를 이끌어냈다. 만화와는 달리 영화의 배트맨은 매체의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눈동자를 드러내야 했는데 우려와는 달리 이 부분은 감정이 생생히 드러나는 가면 디자인과 키튼의 멋진 연기에 의해 효과적으로 극복됐다. 또한 슈퍼히어로는 쫄쫄이를 입는다는 기존의 선입견을 깨고 배트맨에게 과감하게 근육이 새겨진 방탄 갑옷을 입힌 것도 혁신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적어도 배트맨 영화로서는 적지 않은 논란거리를 안고 있었다. 만화팬들은 웨인의 부모를 죽인 범인을 조커로 설정함으로써 원작의 구조를 파괴하고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를 단순화시킨 데 크게 분노했으며, 조커가 만화와는 동떨어진 잭 니콜슨 버전으로 과장돼 버린 것 그리고 잭 니콜슨의 카리스마에 눌려 키튼의 배트맨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것에도 불만을 제기했다. 또한 리얼한 액션극을 원한 관객들은 영화의 지나치게 동화화된 액션에도 고개를 저었다(멋지게 등장한 배트윙이 조커의 권총 한방에 추락해버리는 신은 많은 관객의 실소를 자아냈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워너는 버튼의 연출방향이 옳았다고 확신했고, 그에게 기꺼이 2편의 메가폰까지 맡기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가 박스오피스를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배트맨>은 전 세계에 배트맨 광풍을 몰고 왔고, 한껏 고무된 워너는 버튼에게 원하는 대로 마음껏 2편을 연출하라는 백지수표를 위임했다. 이에 버튼은 전편에서 흥행을 의식하여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비전을 2편에서 마음껏 펼치게 된다. 전편보다 훨씬 극단적인 비주얼과 잔혹한 상상력, 복잡한 심볼리즘으로 중무장한 <배트맨 리턴즈>(1992)는 분명히 매력적인 영화였다.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전편 때와는 딴판이었다. 많은 이들은 영화의 지나치게 어두운 비주얼에 불평을 해댔고(특히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보기에는 너무 충격적이다”라며 일제히 봉기했다), 몇몇 평론가들 역시 어지러운 스타일과 산만한 플롯(캣 우먼, 펭귄, 맥스 쉬렉 등 악당이 세 명이나 등장하여 초점이 분산된 것도 영화의 약점으로 지적됐다) 등을 운운하며 영화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영화는 전편에 훨씬 못 미치는 흥행수익을 올렸고 워너는 차기작으로 내정했던 <캣우먼>의 제작까지 보류해야 했다. 결국 3편의 제작을 앞두고 워너는 감독을 교체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풍문과는 달리 버튼은 3편의 감독도 맡기를 희망했으나 결국 제작자로만 남게 된다).
조엘 슈마허가 감독하고 발 킬머가 새롭게 배트슈트를 입은 3편 <배트맨 포에버>(1995)는 전작의 문제점을 의식하여 보다 밝은 분위기로 만들어졌다. 표면적으로 이 영화는 <배트맨 2>보다 나은 흥행성적을 올려 워너를 안도케 했으나, 실상은 많은 불길한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관객은 당장 영화의 배경 설정에서부터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누아르적 색체가 지배적이던 전작들과는 달리 <배트맨 포에버>의 고담 시는 화려한 컬러로 도배된 코믹북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배트맨은 전형적인 마초형 영웅으로 단순화됐고, 만화에서 가장 심각한 캐릭터인 투 페이스는 (연기파 배우 토미 리 존스가 연기했음에도!) 짐 캐리가 분한 리들러의 촐싹쇼에 밀려서 카리스마 없는 평범한 악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 마디로 <배트맨 포에버>는 시류를 거스른 영화였다. 슈마허가 선보인 코믹북 스타일은 누아르풍의 진지한 영화를 만들자는 초기 기획의도와는 정 반대로 영화가 1960년대식의 캠프 스타일로 점점 회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슈마허가 너무 많은 주요 인물들을 한꺼번에 등장시킴으로써(영화에는 두 명의 인기악당 외에 배트맨의 연인 메리디안 그리고 로빈까지 등장한다) 좁아터진 고담 시의 인구밀도를 부쩍 높인 것도 분명한 불안요소였다. 결국 이 영화에서 살짝 엿보인 이런 문제점들은 4편 <배트맨 앤 로빈>(1997)에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시리즈 자체를 좌초시키고 말았다.
<배트맨 앤 로빈>에서는 그토록 우려한 캠프 스타일이 거의 완벽하게 부활했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짤막한 농담조의 것으로 축약됐고, 버튼의 영화에서 돋보였던 치밀한 심리묘사 따위는 완전히 증발했으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액션 신에서는 휙~하는 유치한 만화적 음향효과까지 삽입됐다. 새 배트맨 배우인 조지 클루니는 섹시한 젖꼭지와 볼록 튀어나온 주요 부분을 특징으로 하는 배트슈트로만 관객의 뇌리에 남게 됐고, 그렇지 않아도 북적대던 고담 시는 세 명의 악당(미스터 프리즈, 포이즌 아이비, 베인)과 로빈으로도 모자라 배트걸까지 등장함으로써 카오스 상태가 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만화에서 배트맨의 가장 치명적인 적이었던 베인이 영화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것은 팬들의 불평거리 축에도 끼지 못했다. 결국 아놀드 슈워제네거, 우마서먼 등의 초호화 배역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시리즈 중 최악의 성적을 내고 말았다.
새로운 원년과 <다크 나이트> <배트맨> 영화 시리즈의 인기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 배트마니아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애니메이션에서였다. <배트맨>의 대히트 후 워너는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는데 이 프로젝트의 선장역을 맡은 이는 젊은 애니메이터 브루스 팀이었다. 처음부터 성인 취향의 수준 높은 애니메이션을 목표로 내건 그는 에릭 라돔스키와 함께 제작을 맡아 폴 디니와 같은 유능한 작가들을 영입하여(디니는 제작에도 참여했다) 야심차게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배트맨 리턴즈>가 개봉한 직후 방영되기 시작한 <배트맨 애니메이션 시리즈>(1992~95)는 예상을 뛰어넘는 열광적인 호평을 이끌어내며 프라임타임의 인기프로로 등극했다.
팀 버튼의 <배트맨>의 누아르적 톤에 1940년대에 나온 플레이셔 형제의 <슈퍼맨> 애니메이션의 세련된 맛을 버무린 듯한 이 애니메이션은 기존의 배트맨 만화 및 영화의 핵심 요소를 모두 아우르면서 새롭고 신선한 설정을 대거 가미하여 배트맨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시리즈가 소개한 새로운 캐릭터 할리 퀸은 큰 인기를 끌어 이후 만화책에도 등장하게 된다). 90년대 애니메이션 중 최고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 이후 브루스 팀은 <배트맨 비욘드>(1999~2001), <고담 나이트>(2008) 등 수준급 애니메이션을 계속 발표하며 주가를 올리게 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이 점점 어른스러워지고 있던 이 때 <배트맨> 영화들은 반대로 점점 유치해져가고 있었다. <배트맨과 로빈>의 실패 후 워너는 이미 망가져버린 시리즈를 계속 이어나가기보다는 아예 시리즈 자체를 새로 시작하기로 정책을 바꿨다. 이에 따라 워너는 2000년대 초에 무려 세 가지의 새로운 <배트맨>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첫 번째는 볼프강 페터슨 감독의 <배트맨 대 수퍼맨>이었는데, 페터슨이 <트로이>(2004)를 연출하게 되자 이 계획은 취소됐다. 두 번째는 <배트맨>의 외전작인 <캣우먼>으로, 2004년에 마침내 현실화됐으나 엄청난 재앙으로 끝나고 말았다. 세 번째 것은 프랭크 밀러 원작의 <배트맨 원년>으로 대런 아르노프스키가 감독으로 내정됐고 프랭크 밀러가 직접 각본까지 썼으나 결국 보류되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뒤 전 세계의 배트마니아를 흥분케 한 빅뉴스가 터졌다. <메멘토>, <인썸니아>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영국 출신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배트맨의 기원을 다룬 새 영화를 찍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2005년, 마침내 배트마니아들은 그 경이적인 결과물을 보게 됐다.
<배트맨 비긴즈>는 (매혹적이기는 하나 리얼한 배트맨 이야기라기보다는 팀 버튼표 잔혹 동화에 가까웠던 1,2편을 포함한) 이전의 배트맨 영화들에게 결여됐던 두 가지 요소인 휴머니티와 리얼리즘을 갖추고 만화의 기조와 누아르적 분위기까지도 고스란히 담아낸 놀라운 작품이었다. TV 시리즈를 포함하여 지금껏 나온 배트맨 영화 중 까다로운 만화팬들과 일반 관객들의 환호성을 동시에 자아낸 경우는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웨인의 인간적 고뇌와 크라임파이터가 돼야만 했던 심리적 동인은 과거의 어느 작품보다도 현실성 있게 그려졌고, 소품 하나하나의 묘사와 세트디자인, 액션 신의 편집, 심지어 미장센에서도 극도의 리얼리즘이 넘쳐나며, 배트맨의 가면과 배트슈트는 적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본래의 목적과 절묘하게 부합되도록 디자인됐다. <배트맨 비긴즈>야 말로 과거 걸작만화들인 배트맨 원년과 롱 할로윈, 추락하는 사나이가 추구하려 했던 기원 이야기의 리얼리즘을 완벽하게 완성한 영화인 셈이다.
많은 팬들은 영화의 새로운 배트모빌 텀블러나 분노에 가득 찬 배트맨의 인간적인 표정을 보며 자연스레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떠올렸고, 바로 그 작품이 만화계에서 이루었던 혁명이 은막에서도 재현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트맨 비긴즈>는 어디까지나 혁명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것은 지금 미국 현지에서 대대적인 찬사를 받고 있는 <다크 나이트>에서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팬들은 비로소 60년대의 유치한 광대도, 잭 니콜슨의 개성이 녹아든 변종도 아닌 교활하고 악랄하며 소름끼치는 오리지널 살인마 버전의 조커를 보게 될 것이며, 만화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굴곡이 많은 인물인 하비 덴트/투 페이스의 본연의 면모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다크 나이트>는 한동안 갓길로 벗어났던 배트맨 사가의 원류가 무엇인지를 확인시켜줄 것이며, 리얼리즘 슈퍼히어로 누아르의 정수가 어떤 것인지를 관객들에게 확실히 보여줄 것이다.
꼭 알아두어야 할 배트맨 용어들
다크 나이트(Dark Knight) 배트맨의 별명으로 Caped Crusader와 함께 본명만큼이나 자주 쓰인다. 유사품으로 로빈의 별명 보이 원더(Robin the Boy Wonder)가 있다.
아캄 정신병원(Arkham Asylum) 배트맨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정신병원. 본래는 조커와 같은 구제불능의 사이코패스들을 가둔 곳이지만 후에는 배트맨의 악당이라면 정신 상태에 관계없이 모조리 이곳에 수감된다.
다이내믹 듀오(Dynamic Duo) 배트맨, 로빈 콤비를 일컫는 말. 자매품으로 끝내주는 트리오(Terrific Trio, 배트맨, 로빈, 배트걸 트리오)가 있다.
배트모빌(Batmobile) 배트맨이 모는 자가용의 통칭. 만화와 TV 시리즈, 영화를 거치며 다양한 디자인이 소개됐다. 자매품으로 배트플레인(Batplane, 배트맨의 비행기로 배트윙이라고도 한다), 배트포드(Batpod, 배트맨의 오토바이로 배트사이클이라고도 한다), 배트콥터(Batcopter, 배트맨의 헬리콥터), 배트보트(Batboat, 배트맨의 보트) 등이 있다.
배트케이브(Batcave) 웨인의 저택 지하에 있는 배트맨의 활동 본부. 첨단 실험실과 상상을 초월하는 슈퍼컴퓨터인 배트컴퓨터가 있으며 각종 무기와 장비, 배트슈트가 보관돼 있다.
배트 시그널(Bat Signal) 박쥐 로고를 하늘에 띄우는 서치라이트형 기구로 배트맨을 부르는 호출기라고 보면 된다.
유틸리티 벨트(Utility Belt) 배트맨이 차는 허리 벨트. 배트커프(Batcuffs, 박쥐 모양의 수갑), 배타랑(Batarang, 박쥐 모양의 부메랑) 등 잡다한 무기들이 달려 있다.
광대 범죄왕자(the Clown Prince of Crime) 조커의 별명. 유사품으로 펭귄의 별명인 범죄의 신사(Gentleman of Crime)가 있다.
고담 시(Gotham City) 고담이라는 명칭은 빌 핑거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뉴욕 시의 별칭이다. 흥미로운 것은 DC 코믹스의 또 다른 가상공간인 메트로폴리스(슈퍼맨의 활동 무대) 역시 뉴욕을 모델로 했다는 점이다. 슈퍼맨의 창작자인 제리 시겔과 조 슈스터는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에서 도시 이름을 따왔다.(랑은 1924년에 미국을 여행하던 중 뉴욕 시의 마천루와 스카이라인을 보고는 영화에 대한 영감을 떠올렸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고담 시와 메트로폴리스는 같은 곳이므로 배트맨과 슈퍼맨은 끊임없이 영유권 분쟁을 해야 한다. 또, 위급할 때는 배트맨이 슈퍼맨에게 “나 지금 좀 바쁘니 조커를 대신 잡아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DC 코믹스는 이 두 가상 도시가 지리적으로 떨어진 별개의 도시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한때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배트맨의 굴욕(배트 시그널에 슈퍼맨 마크가 달려 있는)과 같은 황당한 사건은 웬만해서는 일어날 일이 없다.
알프레드 페니워스 다른 슈퍼히어로 만화와는 달리 배트맨의 제반 설정은 대단히 합리적이다. 낮에는 사업가로, 밤에는 어둠의 기사로 활약해야 하는 브루스 웨인은 사실상 잠잘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몸이다. 그런 그가 집 정리를 할 시간이 있겠는가? 또, 그 많은 배트맨의 장비들은 언제 정비하겠는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는 인물이 알프레드 집사다. 배트맨 16호에 처음 소개된 이 인물은 본래는 뚱뚱한 영국인인데 그의 아버지가 웨인 밑에서 일한 적이 있다. 알프레드는 가업을 잇기 위해 웨인과 딕 그레이슨(로빈) 콤비에게 집사로서 일하겠다고 요청하는데 두 사람은 자신들의 정체가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결국 이 요청을 수락한다.
얼마 후 알프레드는 우연히 두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고, 두 사람은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니 알프레드를 우리 팀에 합류시키자고 결정한다. 보기와는 달리 알프레드는 정보원 경력도 있는 유능하고 똑똑한 인물로 배트맨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아군이며, 제2의 아버지 역할까지 한다. 그런데, 1943년에 나온 시리얼영화 <배트맨>의 제작진은 한 가지 사고를 치게 된다. 만화와는 달리 알프레드를 마른 인물로 설정한 것이다. DC 코믹스는 이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급히 만화의 알프레드에게 다이어트를 시켰고, 그 결과로 훗날 등장한 알프레드는 모두 슬림한 체구를 가지게 됐다.
제이슨 토드 사망사건 1983년에 DC 코믹스는 2대 로빈 제이슨 토드를 독자들에게 소개했다.(1대 로빈 딕 그레이슨은 또 다른 슈퍼히어로 나이트윙이 됐다.) 그런데 이 인물은 몇 년 뒤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악당들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독자들이었다. 1988년 DC 코믹스의 편집장이었던 데니스 오닐은 한 가지 흥미로운 이벤트를 기획한다. 바로 독자들의 투표를 통해 제이슨 토드의 운명을 결정짓자는 것이었다. 당시 토드는 1대 로빈 딕 그레이슨과는 달리 독자들에게 큰 어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988년에 나온 배트맨 427호에서 제이슨 토드는 조커가 설치한 폭탄 때문에 중태에 빠진다. 그런데 만화의 끝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로빈은 조커에 의해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독자들)은 전화로 그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후 DC 코믹스는 토드의 생사를 결정짓는 전화투표를 실시했다. 사실 오닐은 내심 독자들이 압도적인 표 차이로 토드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의 생각보다는 훨씬 자비로웠다. 투표 결과 토드의 운명은 5,343 대 5,271로 아슬아슬하게 죽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어찌됐든 DC 코믹스는 약속한 대로 토드를 배트맨 428호에서 죽인다. 그 결과 DC 코믹스 사무실에는 독자들의 항의 메일이 무수하게 쌓이게 된다. 하지만 이 깜짝 이벤트 덕분에 DC 코믹스는 토드보다 훨씬 인기 많은 3대 로빈 팀 드레이크를 소개할 수 있었다.
김정대(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