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잘한 짓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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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렉 2> LA 시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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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5 / LA=한승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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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슈렉>의 결말에서 ‘동화계’ 친구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린 슈렉과 피오나 공주. 도둑 결혼은 아니었건만, 피오나의 아버지 해롤드왕은 슈렉을 ‘날도둑놈’ 취급한다. 늪에 사는 괴물과 어엿한 공주의 결혼, 과연 이 결혼은 미친 짓이었을까? LA에서 슈렉 부부의 결혼 시사기를 전한다.
혼자가 좋아 지저분한 독신 생활을 고수했던 슈렉. 어쩌다 보니 수다쟁이 당나귀 동키와 친구가 되고, 밤낮의 외모가 다른 피오나 공주와도 사랑에 빠졌다. 마법에 걸려 밤이면 박색으로 변했던 피오나 공주. 어쩌다 보니 왕자님 대신 괴물에게 반해 평생 미운 모습으로 살아가게 됐다. 하지만 어쩌랴. 눈에 콩깍지가 낀 것을. 결혼이 사랑의 무덤이라는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전편 <슈렉>에서 입을 귀에 걸치며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던 슈렉과 피오나의 순탄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이 <슈렉 2>의 숫자 ‘2’ 크레딧과 함께 예측 불허로 펼쳐진다.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
현지 시간 5월 9일, LA 시내 랜드마크 리젠트 시어터에서 디지털 영사 방식으로 상영된 <슈렉 2>는 눈 뜨고는 못 봐줄 슈렉과 피오나의 신혼 여행으로 시작한다. 유치한 커플 룩과 아슬아슬한 수영복을 입고 해변을 뒹구는 이 엽기 부부의 닭살 돋는 행각은 달콤한 러브 송에 실려 뮤직 비디오처럼 흘러간다. 우연히 인어공주가 슈렉에게 엉겨 붙어 잠시 분위기가 살벌해지기도 하고, 주책맞은 동키가 신혼부부와 한 방을 쓰겠다고 우겨 썰렁해지기도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웬만해선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피오나 공주의 부모가 사는 '겁나 먼(far far away)' 왕국으부터 친정에 한번 들르라는 어명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슈렉 2>는 조건 대신 사랑을 택한 결혼이 받는 사회적인 위협에 하나씩 문제를 제기한다. 늪에선 진심으로 축하받았던 슈렉과 피오나의 용기 있는 결혼은 '겁나 먼' 왕국에선 인정받지 못한다. 마법에 걸린 딸을 성에 가둬 놓으면 멋진 왕자가 구해 딸의 행복을 보장하리라 굳게 믿었던 피오나의 부모는 괴물 사위에 밤낮으로 뚱녀인 딸을 결코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6천 명이나 몰린 환영 인파는 쥐 죽은 듯한 고요로 이 결혼에 이의를 제기하고, 피오나의 아버지 해롤드왕은 슈렉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정통 코스 요리와 골프 등의 호사 취미로 기를 팍 죽인다. 냉대와 멸시 속에서 슈렉은 점점 소심해지고, 피오나를 찾아온 요정 대모는 “너도 성형 수술을 하고 명품 옷을 입으면 멋진 왕자님을 만날 수 있을 거야”라며 유부녀에게 바람을 넣는다.
<슈렉 2>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던지고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져라’고 설파했던 <슈렉>의 교훈이 정말 유효한 것인지 스스로 되묻는다. 보여지는 것보다는 진심이 중요하다는 <슈렉>의 전언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가족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칫 공허한 말이 되기 쉽다. 남 눈치 안 보고 뚝심 하나로 살았던 슈렉조차 '겁나 먼' 왕국에 와서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는데,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는 말처럼 하나마나한 립 서비스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 슈렉의 부모, 그러니까 피오나의 시부모가 늪지로 와서 벌어지는 일들로 속편을 꾸려가고자 했던 앤드류 애덤슨 감독은 그보다는 슈렉이 피오나의 성으로 갔을 때 전편의 주제를 심화시키면서 캐릭터를 더욱 풍부하게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슈렉 2>는 중세 프랑스의 성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하면서도, '겁나 먼' 왕국의 풍경을 할리우드 사인이 내려다 보이는 베발리 힐스의 로데오 거리처럼 묘사했다. 베르사체리, 알마니 알모리, 버거 프린스 등 브랜드가 즐비한 거리를 카메라가 쫓고 지나갈 때 관객들은 포복절도하며 이 영화의 엉큼한 블랙 유머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영화는 <프리티 우먼> <미션 임파서블> <반지의 제왕> 등 도가 지나치도록 많은 할리우드영화를 패러디하는 가운데 디즈니를 조준했던 전편의 전복 정신을 할리우드 영화 전체로 확대시켜 놓는다.
웃음거리가 돼도 슈렉이라면
2001년 <슈렉>의 등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드림웍스와 PDI가 공동 제작한 <슈렉>은 디즈니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관습을 통쾌하게 뒤집으며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못생긴 괴물 슈렉이 ‘옛날 옛적에’로 시작해 ‘그들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책을 찢어 밑을 닦는 장면으로 문을 열었던 <슈렉>은 <신데렐라>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 등 백마 탄 왕자와 아름다운 공주의 운명적인 사랑을 통렬하게 비웃었다. 위험 천만할 것 같은 이 비웃음은 전세계 4억8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예술영화 이전에 실사영화만을 상대했던 칸영화제가 28년 만에 애니메이션을 본선 경쟁 부문에 초청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동화 나라의 허구적인 복음을 쳐부순 <슈렉>의 패기에 아이들보다 먼저 넉다운된 것은 ‘만화영화’라는 완고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성인 관객들이었다.
그중에는 <슈렉 2>에 목소리 연기로 참여한 안토니오 반데라스, 루퍼트 애버릿 등도 포함돼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전화가 왔다. <슈렉 2>에 출연해 주실래요? 예. 시나리오도 안 보고 어떤 역인지도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도요? 카메오든 뭐든 무조건 합니다.” 캐스팅 경위에 대한 질문을 받은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군더더기 없는 직설 화법으로 당시를 회고했다. 그가 연기한 ‘장화 신은 고양이’는 <슈렉 2>에 등장하는 새로운 캐릭터로 애처로운 눈빛 하나로 관객의 애간장을 녹이는 속편의 ‘히든 히어로’다. 해롤드왕으로부터 슈렉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결국 슈렉을 돕게 된다. 누가 보더라도 장화 신은 고양이는 <데스페라도>와 <마스크 오브 조로>로 각인돼 있는 반데라스의 느끼한 킬러 이미지를 풍자한 것.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줄리아 로버츠의 게이 상사로 출연했으며 실제 커밍아웃까지한 루퍼트 에버릿은 슈렉과 연적인 ‘프린세스 차밍’의 목소리를 맡아 스스로 이미지를 희화화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유약한 마마 보이 프린세스 차밍은 일정 정도 게이를 풍자한 캐릭터다. 이것은 게이의 성 정체성 자체에 대한 조롱이라기보다 미국 사회에서 패션을 선도하는 부유한 게이들에 대한 풍자인데, 루퍼트 애버릿도 “젊은이들은 부시시한 머리에 터프해 보이는 아웃도어 웨어를 입고 다니지만 그렇게 야생적으로 보이기 위해 미장원에서 살다시피 한다. 나에게도 약간은 그런 허영심 넘치는 이미지가 있는 것 같다”며 캐스팅 배경에 불쾌함을 표시하지 않았다. 한편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교제 중인 카메론 디아즈도 피오나 공주 방에 붙어 있는 오매불망 왕자님의 초상화를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얼굴로 쓰도록 선뜻 허락해 관객들은 배역과 목소리 연기자, 그들의 이미지와 사생활을 아우르는 복잡다단한 연쇄망을 유쾌하게 통과할 수 있다.
커지기보다는 알차진 속편
의례 전편보다 많은 물량을 쏟아 붓는 실사영화와는 달리 <슈렉 2>는 전편과 비슷한 6천만 달러의 제작비를 썼다. 하지만 기술적인 수준은 전편에 비해 2,3배 정도 좋아졌다는 게 시각효과 슈퍼바이저 킹 베렌버그의 말이다. 그는 슈렉과 동키가 숲속을 거니는 장면을 <슈렉>과 <슈렉 2>의 비디오 소스를 이용해 즉석에서 비교해줬는데 캐릭터들뿐 아니라 나무와 날씨 등 배경 묘사가 훨씬 풍부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는 걸 한눈을 감고 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특히 <슈렉 2>는 움직임보다는 질감에 있어 상당한 발전을 보였다. 디지털 영사 방식으로 상영된 시사회에서는 면도한 후 거칠어진 슈렉의 피부나 언뜻 보이는 피오나의 새치 등이 육안으로 잡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벨벳처럼 조명에 민감한 소재의 의상은 물론이고 장화 신은 고양이의 가벼운 털과 프린세스 차밍의 찰랑이는 금발 머리, 대모 요정의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 넘긴 머리까지 헤어만 해도 다양한 연출이 가능해졌다. 바운스 섀더(Bounce Shader)와 서브서피스 스캐터링(Subsurface Scattering)이란 두 가지 혁신적인 기법이 <슈렉 2>의 키 테크닉이라고 한다.
캐릭터는 다양해지고, 스토리는 풍부해지고, 주제의 심도는 깊어졌으며, 기술력까지 일취월장한 <슈렉 2>는 애니메이션에 속편 영화라는 핸디캡을 딛고 57회 칸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올랐다. 전편이 거둔 성공에 대한 부담 속에 만들어졌지만 속편으로서도, 전편과는 관계없는 새로운 영화로서도 합격점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중평이다. 제작 총지휘를 맡은 제프리 카젠버그는 <슈렉 3>은 2006년 3월, <슈렉 4>는 2008년 4월 개봉 예정이라고 비공식적으로 밝혔는데 이 정도의 신선함, 그리고 유쾌함이 보장된다면 10편까지 나와도 환영받을 것이다. 결혼 생활이 얼마나 할 얘기가 많은가. 고부 갈등, 출산, 육아, 외도… 아, 이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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