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구룡포. 외 2편
최상호
1996년 『교단문학』 등단. 시집 『김춘수의 ‘꽃’을 가르치며』, 『고슴도치 혹은 엔두구 이야기』 외 3권. 시선집 『마음 밭의 객토작업』
그곳
돌길로 이어지는
작은 골목 끄트머리쯤의
이층집에서 누님은 더부살이를 했다.
다다미 깔린 방이었지 아마.
처음 본 전등알이 청어 눈깔처럼 반짝이고
얘 얘, 탕 안에서는 떼미는 거 아니야.
목소리 걸걸한 먼 친척 아저씨의 웃음이
부끄럽던 동그란 일본식 욕조의 기억.
이제는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연속극의 촬영지란다.
그래, 누님도 그때 거기서 담장 밑 동백꽃처럼
피어 있었지.
긴 방파제 끝,
비린내 물씬 풍기는 낡은 등대를
운명인 듯 찾아 가면
성석제의 소설 속
고래잡이 포수의 딸 민현을 만날 것도 같다.
어쩌면 흘러간 세월을 돌이키는
치명적 사랑을 해 볼 것도 같다.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 봄이 오면
아니, 온 몸이 얼어붙는 겨울이면 어떠랴.
구룡포인걸.
건망증 맞이하기
여름 들어서
건망증이 부쩍 늘었다
동창들 모임 같은 데서
신나게 떠들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그 이름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아 공명(共鳴) 한다든지
언젠가는 시 낭송회에서
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는데
참 기쁜 시간이었는데도
와서 보니 벌써
얼굴도 목소리도 다 떠나고
함께 마신 솔잎 향기만
입 안 가득 남아 있었다
이러다 어느 날
내 노래를 잊어버리는 날이
올지 몰라
벼락같이,
우리 집으로 향하는 은행나무 사이
오솔길도 잊어버리고
어쩌면 내가 누군지도 잊고
잊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편안히 살아갈지 몰라
그러다 보면
욕망도 눈물도 잠재워진
시간 속에서
백치(白痴) 의 평화를
맛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좌식 소변에 대한 항거
집안 화장실에서
사방에 오줌이 튀어 냄새 나니
이제부터는 모두 앉아서 볼 일 보라는
아내의 엄중한 통고.
이건 사실 작은 일이 아니다.
태곳적부터 이어 온 위대한 관습을 향한
테러,
정신적 거세(去勢)다.
부족 간의 그 엄청난 싸움 뒤에도,
멧돼지와 사슴을 힘겹게 사냥한 뒤에도
한껏 내어갈긴
수컷들의 승리의 표식.
그러나 이제는
직장에서도 거리에서도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날개조차 푸드덕거려 보지 못한
이 시대의 사내들.
귀소의 둥지에 모여서도 조용히
쥐 죽은 듯이 볼 일을 보아야 하는
풀 죽은 세상의 남자들아, 아들들아.
제안하노니
그냥 이대로
예전처럼 그냥 콸콸콸 소리 나게
오줌을 갈기자꾸나.
주눅 든 하루를 오줌의 홍수로 떠내려 보내고
그렇게 볼 일을 마치고 나면
조금은 위로가 되는 저녁이 되리니
이건 정말
냄새와 위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움의 색깔 그리고 삶의 색깔
얼마 전에 인기리에 종영된 어느 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오래토록 기억 저 쪽에 잠들어 있던 구룡포란 이름을 되살려 주었다.
밤이면 산짐승이 내려와 닭이며 개를 채어가는 완벽한 두메산골의 소년이 처음 접한 도회지 문명 구룡포- 그다지 크지도 않은 동해안의 한 포구였지만, 그 신기한 문물이 보여 준 첫 인상은 꽤나 강렬하였다. 촛불 열 댓 개를 켜 둔 것처럼 밝은 방안이며 선창가의 배들과 널려진 생선들,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골목 안의 목욕탕 등은 산속 마을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곳에는 내가 제일 따르던 둘째 누님이, 어류 장구를 팔던 친척 집에 일손을 도와줄 겸 머물고 있기도 하였다.
돌이켜 보면 그때의 체험 모든 조각마다 다 아름답고 아픈 상흔들이 박혀 있는 곳이긴 하여도, 그러나 당시 생활 환경이나 어린 나이 탓에 그리 쉽게 왕래하지는 못하였다.
대학생 때쯤이던가. 친구와 함께 그의 첫사랑 여학생을 만나러 무작정 남대문 김서방 찾기 식으로 부둣가를 헤맨 적도 있긴 하지만, 대개의 경우 어쩌다 고향에 가더라도 포항에서 한참을 가야하는 구룡포까지는 가지 못하고 간혹 친척 식구들의 소식만 들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곽재구의 ‘포구기행’이란 수필을 보면서 그립던 구룡포에 다시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은근히 생기곤 했다. 구룡포가 배경이 된 성석제의 소설 ‘단 한 번의 연애’를 읽었을 때에는 마치 달콤한 사탕의 맛을 잊었다가 미각을 되찾은 어린아이마냥 마음이 부풀었다. 그냥 바람처럼 떠나 볼까 싶기도 하였다.
추억 어린 그 항구를 찾아 가는 것이 이제 조금은 두렵다. tv 드라마 촬영지가 된 후에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원래 모습이 몰려든 관광객으로 인해 망가져 버린 것을 여러 번 경험하다 보니 혹 구룡포 역시 그러한 전철을 밟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첫사랑은 재회하지 않고 그리워하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들 하니, 변해 버린 그곳을 찾기보다 좋은 추억만을 간직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든 첫사랑은 어차피 내 삶에 새겨진 깊은 흔적이지 않은가.
나이를 먹고 동년배 친구, 지인들을 만나면 가장 쉽게 화제에 오르는 것은 건강 문제이다. 그리고 건강 이야기에서 선두 주자로 나오는 건 역시 건망증 에피소드다. 핸드폰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거나, 노래방에서처럼 가사가 나오지 않으면 노래 한 곡 제대로 못한다든가 혀에만 뱅뱅 도는 친구의 이름 등. 두 번째 작품 <건망증 맞이하기>는 이런 건망증을 두려워하거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반갑지 않은 현상으로만 봐야 할 것인지를 한 번 생각해 본 작품이다.
사실 우리의 뇌가 컴퓨터처럼 정확하게 무제한적으로 지난 일들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시시 때때로 그걸 꺼내 반추한다면 과연 그게 바람직할까 싶은 의문이 든다. 잊을 건 적당히 잊고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일들로 다시 채워 나가는 삶이 더 건강에 좋은 게 아닐까. 생각해 보라. 그 ‘웬수 같은 인간’과의 달갑지 않은 작은 경험까지도 늘 거머리처럼 따라 붙어 다닌다면 기억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과 온통 뒤엉켜 머릿속은 용량초과로 스트레스의 근원지가 될 것이다. 우리의 뇌가 쓸 물건, 안 쓸 물건 따로 저장하여 자물쇠 채워 둘 수 있는 서랍 같은 것이 아닌 이상 적당한 망각은 필요한 것이고 축복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나 적지 않은 유명 인사들도 건망증이 심하여 그에 얽힌 일화도 많다.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고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는 것이 오히려 필요한 일에 초인적 집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유독 짧은 시의 특성을 이런 망각과 비유해 보면 또 재미있을 것 같다. 잊어버리고 잘라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없애고 중심만 추출하는 것, 불편한 기억이지만 필요한 것은 또 입에 쓴 약처럼 꺼내어 정제하고 당의(糖衣)를 입혀서 정서를 흔들어 주고 심금을 울리는 시구(詩句)로 만드는 작업이 바로 시를 쓰는 과정이 아닌가!
오늘 신문에 기독교계에서 존경 받는 어느 목사님이 자기 삶의 좌우명을 ‘덜 논리적이고 더 사랑하자’ 이라고 말한 것을 보았다. 다 기억하여 또박 또박 지적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적당히 잊어주고 바보처럼 편안한 마음을 유지해야 남을 더 사랑할 수 있다. 건망증은 그래서 축복이다.
<좌식 소변에 대한 항거>는 아파트 생활이 대부분인 우리나라 도시인들, 아니 화장실이 실내에 위치한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한 번쯤 겪어 본 현실적 난제를 재미있게 터치해 본 것이다. 사실 남자들이 서서 조준하는 오줌 난사는 아무리 정확해도 사방에 튀기기 마련이고 그래서 폐쇄된 공간에 많은 냄새를 풍기기는 한다. 오죽하면 가정이 아닌 공공 화장실에도 별별 문구들이 다 등장할까. ‘남자들이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한 발짝 더 다가서지 않으면 제가 본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제법 멋(?)을 부린 경고성 표어가 숱하게 붙어 있다. 입식 소변기 안에 파리 한 마리를 새겨 놓은 그 유명한 아이디어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걸 보면 오줌 튀김 방지 문제는 서양도 예외는 아닐 듯 하고.
하여간 각 가정에서 아내와 엄마의 지청구를 들어야 하는 남자들의 처지가 ‘웃프다.’ 그런 잔소리에 하는 수 없이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면서도 마음으로는 내가 언제부터 이런 신세가 되었지 하는 짜증이 나온다. 우리는 적어도 치마입고 돌아다니는 스코틀랜드나 인도 남자들을 이상한 놈들이라고 비웃어 온 당당한 양반의 나라 후예가 아닌가 말이다.
어릴 적 할머니나 웃어른들이 남자 아이들을 꾸짖을 때에 가끔 ‘서서 볼일 보는 사내 자식이~’ 운운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이 습속은 하나의 상징이요, 자존심으로 지켜져 왔다. 그게 무너지고 있다. 하긴 세상이 하도 빨리 변하니 좀 있으면 가정마다 “야, 바지 다려둔 것 없으니 너 누나 치마 입고 출근해” 이런 소리가 오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