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그렇게 덥지 않은 것 같다.
2년전인가 엄청 무더워 홧김에 에어컨을 들여놓았지만 작년에도 올해도 에어컨의 이기를 거의 활용하지 못했다. 가끔 기계 유지차원에서 일부러 켜곤 했지만 금새 추워져 이내 꺼버리곤 했다.
여름은 더워야 하고 겨울은 추운 것이 좋은데 요새 계절은 제자리를 잃어버린 것 같아 맘이 아프다.
그래도 여름은 여름인지라 휴가를 가라 하니 어딘가 가야 할텐데 마음이 동하지가 않는다. 휴가라고 여행해본 적도 없는 주제에 어디 조용한 동남아 해변리조트라도 가서 사나흘 푹쉬면서 날씬한 비키니 걸들의 몸매나 감상해볼까? 아님 한참 겨울인 남반구로 가서 계절의 역습을 즐겨볼까? 라며 잠시 머리를 굴려봤지만 내 주제에 무슨 해외여행?
역시 촌놈이라는 태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함양으로 결정한다.
작년 봄에 어머니를 강제로 서울 병원으로 모시고 온 난 후에 거의 1년넘게 집이 비워있었다.
작년 가을에 어머니가 20년전에 심어놓은 대추나무랑, 감나무랑, 석류랑 호두나무의 열매를 훔치러 잠시 들은 적이 있다. 나무들한데 거름 한번 주지 않고 가지한번 다듬어 주지 않은 자식놈이 뻔뻔스럽게 그 과실을 공짜로 취하려고 한다. 자식놈들은 다 그렇다. 올 봄에는 출장길에 하루밤 묵었지만 전기도 없이 촛불을 켜놓고 지내야 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집은 쉬이 망가진다고 해서 별 할 일도 없는 놈이 사람 훈기라도 쐬여줘야 할 것 같아 아침 늦게 차를 함양으로 몰았다. 대전을 넘어 오니 벌써 공기가 다르다. 내친김에 장계에서 덕유산 육십령고개로 선회했다. 옛날에 무척이나 높았고 길도 엄청 구불구불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영 아니다. 두어번 핸들을 돌리니 금새 정상이다. 휴게소는 영업을 하는 모양인데 놈팽이같은 중년 남자 세명이서 파라솔밑에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전부이다.
별로 볼 것도 없는 것이 차라리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장계마을을 내려다 보면서 멍하게 담배하나 빨고 나서 이내 다시 천천히 차를 함양으로 돌렸다.
예전기억으로 서상 국도변에 무슨 정자가 몇 개 있었던 것 같은데 눈에 띄이지 않는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나 보다.
오후 서너시에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날씨가 더운데도 싸한 기분이 느껴진다. 엄마가 안계신다 생각하니 고향같지가 않다.
그래도 집이라도 살리자고 들어서자마자 보일러를 켜놓고 에어컨, 냉장고등 가전제품들도 녹슬지 않게 작동을 시켜 놓는다. 집안을 몇발자국 안 다녔는데도 벌써 양말이 새까맣게 변한다. 헌 수건 하나를 적혀 방바닥부터 대충 닦아내본다. 조금 낫다.
보일러가 있는 뒷간에 가니 이것저것 물건들이 많다. 사람이 안 사니 집안이라도 간결하게 해놓자고 치워버리기로 한다. 한 눈에 보기에도 별 소용이 없는 물건들이다. 소용이 없다는 것은 내 생각이다. 울 엄마들은 다 그렇듯이 모두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신다.
몇 십년은 넘을 것 같은 엄마의 고생과 한숨이 같이 묻어 있는 수많은 양은 냄비들...
우리들이 몇 번 쓰다가 싫증내서 던져놓은 퀘퀘묵은 가방들....
못 쓰는(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저런 가전제품들....
무슨 액체인가들이 가득 들어 있는 수많은 병들...
하나를 열어 보니 무슨 젓갈 같은데 희멀건 것들이 부글부글거린다.
박스도 많이 모여 있다. 힘들게 농사 진 것들을 자식놈들에게 싸 줄 때 쓰려고 모아둔 모양이다.
가운데 엄청 큰 박스가 눈에 띄인다. 높이가 1미터는 되어 보인다. 무엇을 넣어 두었다 보니 요새 세상에 흔하디 흔한 패트병이 가득이다.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우리가 올 때마다 사먹은 생수병들이다. 무슨 돈을 주고 물을 사먹느냐며 못마땅해 하시는 그 빈병들이다. 십수년은 모은신 것 같다. 몇 백개는 될 것 같다. 제 뚜껑까지 맞추어 꼭꼭 닫아 놓은게 간장이나 매실이나 줄 때 쓸 요량이였던 같다. 그래도 몇 백 개라니..하하
웃으면서도 갑자기 서글퍼진다. 악착같이 우리를 키우시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억척스런 엄마의 마음을 애닯아 해 보지만 그냥 싸구려 내 감상에 그칠 뿐이다.
엄마가 이런 물건들을 다시 쓸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슬픈 생각이 든다. 주인없는 물건들은 제 삼자에겐 쓰레기에 불과한 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없는 집에 썩어가는 것들이라도 치어야 하겠기에 수퍼에 가서 대형 쓰레기 봉투를 몇장 사 온다.
울 엄마는 평생 쓰레기 봉투한 번 사 보신 적이 없다. 내가 무어라 그래도 버릴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신다. 정말 우리집은 쓰레기로 나가는 것이 거의 없다. 음식쓰레기도 거의 남기는 법이 없고, 어지간한 것들은 집에서 다 태워없애고 텃밭에 거름용으로 한 쪽에 쌓아두고 썩힌다(집 굴뚝에서 연기나고 거름만드는 집은 우리집에 없어 옆집들에 많이 죄송했습니다)
잠시 일꾼이 되어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종이는 종이대로 재활용할 수 잇는 것들은 재활용장소에 운반하고 쓰레기는 봉투에 주워담는다.
패트병은 부피가 커서 찌그러트려서 마대자루에 담는데 엄마가 닿아 놓은 뚜껑들을 일일이 다시 열고 발로 밟아 찌부려트려야 하는 것이 엄청 번거럽다. 아이고 엄마~~라는 푸념이 나도 모르게 나온다. 대충 치우는데 세시간정도 걸린 것 같다. 온 몸이 땀범벅이고 새까맣다.
찬물한번 찌끄리고 소파에 누워 한숨을 돌린다.
커피한잔 마시려고 가스불을 켜니 초크 불도 안 비친다. 가스가 없는 건지 가스렌지가 고장난 건지 모르겟다. 커피포트가 있어 거기에 물을 끓이려고 하니 그 조차 작동이 안된다. 빌어먹을~~ 하는 수 없이 수퍼가 가서 싫어하는 캔커피를 두어개 사와서 마신다.
텔레비도 안 나온다. 저번 봄에도 안 나왔는데 아마 유선 방송국에서 차단한 모양이다.
다음날에는 밖으로 눈을 돌렸다. 담장을 삐집고 나온 나무 가지들, 키 큰 잡초들을 낫으로 모가지를 싹뚝 자르고, 꽃보다 잡초가 더 많은 정원에도 낫을 대충 휘둘러 본다. 보도블럭으로 되어 있는 마당에도 블록 틈새들로 잡초들이 목을 내밀고 있다. 모가지 자를 정도는 아니라고 손으로 뽑기도 하고 발로 짓이겨 밟아버린다.
어제밤에 덮고 자던 이불도 밖에 내려 넌다.
사람이 산다는 것을 표시하려고 마당에 있는 아궁이 불을 지핀다. 빈 솥에 불때기가 좀 그래 물을 가득 채우고 불을 피운다. 물이 팔팔 끓는데 여름이라 사용할 때가 없다. 에너지 낭비지만 불 땔 나무는 엄청 많다. 언젠가 다 처분해야 불쏘기개들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이곳 저곳 공사판에서 부스러기 나무를 모아 놓은 게 조그만한 트럭으로 한 차 분량이다.
내친김에 집안에서도 불을 피운다. 연기를 쏘여주면 습한 냄새와 몹쓸 벌레들을 퇴치할 수 있을 것라 생각한다. 집 안팎에서 연기가 자욱하다.
이번에는 그만하자. 그분들의 흔적을 한꺼번에 몽조리 없애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핑계를 댄다.
집도 사람냄새를 그리워한다. 나흘을 집에서 부대끼면서 딩굴었더니 조금 집다워진 것 같다. 둘째날에는 친구놈들도 우리집에 자라고 했다. 갈데 없는 놈들이니 우리집에 훈기나 좀 주고 가라고...하하 김선생, 박선생 미안하이... 간만에 동숙인데 퀴퀴한 집에서 냄새나는 이불로 재워서...좋은 일 했다고 생각해 주게...
이번은 함양에서의 색다른 휴가인 것 같다. 낮에는 혼자 일하고 저녁에서는 친구들과 소주한잔 하면서... .
내 딴에는 책이나 읽으려고 세권이나 가져왓는데 한 권도 다 못 읽고
친구들과의 수다로 채웠다. 그래도 즐거운 함양에서의 체류엿다.
다만 사흘 저녁을 내리 돼지고기만 먹었더니 좀 질린 것 말고는 다 좋았다.
사람사는 냄새가 가시지 않게 자주 들러야 겠다. 집안도 깔끔하게 해 놓고 언제가 선선해지면 어머니를 하루밤이라도 여기서 주무시게 해 드리고 싶다.
당신의 손때 묻은 것들과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게..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고작 이것 뿐인 것 같다.
역시 우리는 모두 몹쓸 자식이다.
첫댓글 한편의 수필이네.
부모의 맘을 잘 표현하였구만.
효자친구임에 틀림없네그려.
땀을 흘리며 집안일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고생많았구먼.
가끔은 고향이라는 부름으로 오렴.
가끔 지나가다 대추랑 석류 보면서 수확할때라고 생각되면 연락해주게..그핑게로 다시 한번 모이세...
잘 보내다 갔는가?
상동우리집은 보전대책이 없어 팔았지만 가끔 환기를 시켜주어야 하네
그게 사람 냄새라고 하남?
옆에 있는 그 텃밭 내가 부쳐도 된다면 집들러 기끔 창문이라도 환기시켜주지.
아직 땅은 못구하고 돌배나무 묘목은 작업을 해야겠고.
한 2-3년만 하면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