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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I
한때 자유민주주의가 시대정신으로 찬양받던 시기가 있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소련형 사회주의체제가 몰락하던 시기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바 있다. 헤겔적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다른 이념들에 대해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찬가에 다름 아니었다.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도 비슷한 시기에 ‘제3의 민주주의 물결(Third Wave)’을 논하면서, 세계적 차원의 민주화 물결을 인정하였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오늘날, 민주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우선 2010년대 이후 포퓰리즘(populism)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증대하고 있다. 과거 포퓰리즘이 발견되었던 지역에서 재현되고 있을 뿐 아니라 포퓰리즘과 거리가 멀었던 지역에서조차 그 부정적 측면이 표출되고 있는 중이다. 또한 헌팅턴이 생존했더라면 ‘제4의 민주주의 물결’로 간주했을지도 모르는 ‘아랍의 봄(Arab Spring)’은, 오늘날 그의 용어로 하자면 도도한 ‘역물결(reverse wave)’에 직면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짧은 기간 우리의 기대를 부풀게 했던 아랍의 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장춘몽이 되고 있고, 중동지역에서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독재체제는 이 지역에서의 민주화를 요원한 꿈으로 만들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포퓰리즘의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은 심각한 것으로 보이는 바, 중·동유럽에서는 새로운 권위주의 또는 독재의 양상이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러시아의 푸틴(Vladimir Putin)은 20년 이상 장기집권하면서, 자신의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을 암살하거나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등 과거의 권위주의에 못지않은 억압정치로 복귀하여 러시아의 경우 형식적인 민주주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정체로 간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중유럽의 구 공산 국가 가운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system transformation)에서 모범국가로 간주되어 온 헝가리에서는 오르반(Viktor Orb?n) 수상이 2010년 이후 언론탄압을 노골화하면서 반대세력을 억압하고, 난민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국경선에 장벽을 설치하는 등 포퓰리즘 정치를 대변하고 있다. 언론자유나 시민권 침해와 관련하여 헝가리는 유럽연합 본부와 여러 차례에 걸쳐 충돌한 바 있다. 터키의 에르도간(Recep Erdogan) 대통령도 반대세력의 제거와 폭압정치에 있어서 푸틴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오르반은 스스로를 ‘비자유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의 대변자로 자처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비자유적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한 다수결 결정이라는 민주주의 요소는 충족시키지만, 언론의 자유나 시민의 기본권과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는 무시되는 정치체제이다.
구 소비에트블럭(Soviet bloc)의 국가들이나 터키의 경우와 비교할 경우 비교적 비민주적 정도가 덜하기는 하지만, 민주주의의 선진지역으로 간주되는 서유럽과 북미 지역에서도 포퓰리즘 현상이 발견되고 있다. 영국에서의 브렉시트(Brexit) 통과나 프랑스 정치에서 민족전선의 활약, 이탈리아에서의 북부동맹과 오스트리아에서 자유당의 영향력 증대 등은 서유럽에서의 네오포퓰리즘을 대표하고 있으며, 서유럽 다른 국가들에서도 극우적 포퓰리즘 세력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미국에서도 포퓰리즘의 영향은 예외가 아니어서, 2016년 대통령선거에서 러스트벨트의 불만을 포퓰리즘적 공약으로 대변한 것으로 알려진 트럼프는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협력적 국제관계보다 대립적 외교행태를 보이고 있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는 등 반 이민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비판적 언론에 대해 비우호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처럼 21세기에 들어 포퓰리즘의 영향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동시에 민주주의의 후퇴 내지 퇴행을 의미한다. 정치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과 우적(友敵)의 구분, 언론자유의 억압과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 국수주의와 증오의 정치 조장, 소수자나 소수민족의 배제 및 제노포비아 등은 민주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의 위협을 잘 보여주는 측면이라고 하겠다. 네덜란드 출신의 정치학자 카스 무데(Cas Mudde)가 자신의 논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는 “포퓰리즘의 시대정신(Populist Zeitgeist)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쿠야마의 야심적 선언 이후 겨우 한 세대도 지나기 전에 자유민주주의는 흔들리고 있고 다양한 도전들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관련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2020년에 본격적으로 확산된 코로나바이러스(Covid-19) 사태를 들 수 있다. 전염병의 예방과 확산방지를 위해 개인정보를 수집하거나 개인의 사생활 및 동선이 정부에 노출되는 등 시민의 권리에 대한 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 행정부의 권한이 과도하게 커지고 국민의 대표자인 의원들의 역할은 축소되는 ‘행정부 일방주의’가 논해지기도 한다. 정부의 시민에 대한 획일적 통제와 감시는 오웰(George Orwell)의 ‘1984’에서와 같은 이른바 ‘빅브라더’를 출현케 하여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훼손할 위험을 내포한다. 또한 코로나로 인한 신뢰 하락과 갈등의 확산이 사회적 자본을 위축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약화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코로나로 인해 민족주의가 강화되고 배타적인 자국중심주의가 득세하면서 국제사회에서의 협력과 다자주의적 흐름은 배척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국제정세는 각국에 자민족중심주의나 일국주의를 강화함으로써 대내적으로도 비판적 목소리를 억압하거나 시민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인류역사를 코로나 이전시대(before corona: BC)와 코로나 이후시대(after disease: AD)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과장된 면이 없진 않으나, 그만큼 코로나가 앞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오늘날 민주주의 퇴행과 후퇴의 시기를 맞아 새롭게 민주주의를 부활시키고 재활성화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참여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새롭게 부각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의 세계적 위기 때문이다.
II
이 책은 제임스 S. 피시킨(James S. Fishkin)이 저술한 When the People Speak: Deliberative Democracy and Public Consult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9)을 번역한 것으로서, 원저의 제목을 그대로 옮기자면 ‘인민이 말할 때: 숙의민주주의와 공적 협의’가 되어야 하겠지만, 역자는 원저의 부제를 중시하여 숙의민주주의를 제목으로 달았다.
우리나라에서 ‘deliberative democracy’는 심의민주주의로 사용되기도 하고 숙의민주주의로 사용되기도 하며, 통일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 책의 저자 피시킨은 숙의민주주의의 핵심 아이디어를 ‘이성에 기초한 공적의지 형성(reason-based public will formation)’으로 보고 있다. 이 관점에는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 요소가 녹아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에 있어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관점에 해당된다. 피시킨의 견해에 역자도 공감하는 바이며, 심의나 숙의라는 용어 모두 이성의 요소를 잘 드러낼 것으로 보이므로 심의민주주의나 숙의민주주의 어느 것을 사용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책에서는 일상언어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이는 심의라는 용어보다 숙의라는 용어를 선호하여, 숙의민주주의를 사용하고자 한다.
출판된 지 10여 년이 지났음에도 이 책을 번역한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들 수 있다. 첫째, 우선 시기적으로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보다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는 역자의 판단 때문이었다. 국내외적인 상황이 숙의민주주의를 필요로 하고 있고, 이 책이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숙의민주주의에 관한 많은 저술들 가운데 이론적으로 명료하고, 실천적인 점에서도 기여하는 바가 큰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역자의 판단으로는, 숙의민주주의를 다룬 피시킨의 다양한 저술 가운데서도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를 체계적으로 가장 잘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한국에서의 숙의민주주의 논의 확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였기 때문이다. 시민의식의 부재 또는 정치적 무관심의 극단적 사례로 이 책에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정치인 소위 ‘스텔스민주주의(stealth democracy)’는 미국시민의 경우에만 국한되지 않고, 한국의 유권자들에게도 적용되는 현상일지 모른다.그러나 참여민주주의의 활성화에 비해 과연 한국민주주의에서 숙의가 충분히 실현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긍정적 대답을 하기 어렵다고 본다. 참여민주주의에 더하여 숙의민주주의의 실천이 한국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셋째, 공화시민의 교육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였기 때문이다. 공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공적 이성(public reason)과 덕성(civic virtue)을 발휘하는 시민을 공화시민으로 부를 수 있다면, 이는 기존에 사용해 오던 민주시민이라는 용어와 별다른 차이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역자는 개인적으로 민주시민이라는 용어보다 공화시민이라는 용어를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싶다. 그 이유는 우리사회를 포함하여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용어인 민주시민은 슘페터적인(Schumpeterian) 최소민주주의에도 적용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학부와 대학원에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현대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 책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S. 피시킨(James S. Fishkin)은 1948년에 미국에서 출생하여, 예일대에서 정치학 학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캠브리지대에서도 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현재는 미국 스탠포드대 석좌교수이자 동 대학교 숙의민주주의연구소(Center for Deliberative Democracy) 소장으로 재직중이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숙의민주주의에 있으며, 숙의민주주의를 주창하는 학자들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활동중인 학자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숙의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숙의조사(deliberative polling: DP)를 창안하여 보급하고 있다. 피시킨이 이 책에서도 줄곧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숙의(deliberation)와 평등(equality)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숙의의 수준이 높아지면 평등과 거리가 멀어지는 엘리트정치가 될 위험이 있고, 반대로 평등이 잘 구현되자면 보통 사람의 참여는 확대되지만 숙의의 수준이 낮아질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숙의와 평등 두 가지 목표 모두를 충족시킬 방안으로서 피시킨이 제안하고 있는 것이 바로 숙의적 여론조사 또는 숙의조사인 것이다. 이 책의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자면, 숙의조사는 ‘거울’과 ‘필터’를 결합시키고자 시도한다. 엘리티즘적인 ‘필터’의 요소와 대중민주주의 요소인 ‘거울’을 결합시키는 것이 피시킨의 의도이다.
피시킨 제안의 핵심은 ‘소우주 숙의(microcosmic deliberation)’를 통한 숙의민주주의의 실험이다. 피시킨은 숙의민주주의의 또 다른 종류로서 ‘숙의의 날(Deliberative Day)’도 제안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숙의의 날’보다 실현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는 점에서 숙의조사에 우선점을 두고 있다.
그가 제안한 숙의조사는 전 세계적으로 도입되거나 실험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전 세계적 노력들을 기반으로 저자는 2018년에 Democracy When the People Are Thinking이라는 책을 저술한 바 있다. 2018년의 책에는 미국, 영국, 그리고 유럽 국가들만 아니라, 아시아의 일본과 몽고, 아프리카의 우간다, 오세아니아의 호주 등 세계 각지의 숙의조사 사례를 포함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숙의조사가 진행된 바 있다. 2011년 KBS 주도로 진행된 숙의조사는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과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및 미국의 스탠포드대 숙의민주주의연구소가 공동으로 ‘One Korea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로 통일정책, 북핵문제, 개성공단 및 금강산관광 등과 남북교류협력에 대해 조사한 바 있다. 2017년에는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공론조사라는 이름으로 숙의조사 실험을 수행한 바 있다. 2017년의 조사는 공론화위원회가 피시킨 방식의 숙의조사를 원용하여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하여 진행하였다.
그러나 피시킨이 강조해 온 소우주 숙의를 통한 숙의민주주의는 아직 갈 길이 먼 것으로 보인다. 소우주 숙의는 여전히 권고적(advisory) 역할에 그치는 것이 현실이다. 피시킨도 지적하고 있듯이, 소우주에 의사결정권까지 부여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장애가 많은 것이다. 다만 이성적 사고, 평등한 토의, 생각의 변화가능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소우주 숙의의 가치와 의미는 계속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J. 번스타인(Richard J. Bernstein)은 정치에 대한 두 가지 접근으로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적 정치와 칼 슈미트(Carl Schmitt)적 정치를 논하고 있다. 아렌트적 정치가 대화와 소통의 정치를 상징한다면, 슈미트적 정치는 경쟁 및 대결, 그리고 적대의 정치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역자가 이 책을 번역하기로 결심하면서 가졌던 희망은, 이 책이 정치에 대하여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현실주의의 압도적 우위 가운데 슈미트적 우적 구분의 정치가 판치는 현실로부터 다른 정치의 모색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지, 정치에서 이성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과연 난망한 일인지, 정치가 단순한 권력투쟁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는 없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싶었고, 이 책이 그러한 질문과 새로운 정치의 모색에 상당한 정도의 답변을 제시해 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었다. 또한 이 책이 공화시민의 양성을 목표로 하는 공화시민교육에 기여할 수 있는 점이 많다는 판단을 내렸다. 역자의 기대처럼 이 책이 한국민주주의 발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유익한 것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아테네 관행은 숙의와 무작위추출법을 결합한 독특한 것이었다. 이 결합은 사회적 규모가 숙의민주주의(이 용어는 정치적 평등과 숙의를 결합시킨 것이다)에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훌륭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숙의민주주의에서는 참가자들이 자신의 의견에 도달할 수 있는 좋은 조건 하에서 모든 사람의 견해를 동등하게 고려한다. 이 과정은, 사람들에게 이슈의 장점에 대해 고려하는 상호존중적 지적 대화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숙의적이다. 이 과정은, 우리가 아래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의 견해가 동등하게 계산된다는 점에서 민주적이다.
물론 많은 것들이, 우리가 ‘좋은 조건’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달려 있는데, 이런 좋은 조건에서 참가자들은 자신의 의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 이 문제는 접어두고, 먼저 숙의를 정치적 평등과 결합하려는 열망이 사회규모의 문제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시민은 합리적 무지를 따르려는 경향이 있지만, 일단 이들이 선발되어 소우주에 참가하게 되면 다른 상황을 마주한다. 그들 한 명 한 명은 소그룹의 일원이 되며 개인적으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숙의조사 참가자 모두는 약 15명 전후로 구성되는 소그룹에서 한 명의 목소리를 갖게 되고, 최종 설문조사나 투표에서는 수백 명 중 한 명의 목소리를 갖게 된다. 일단 선발되면 합리적 무지의 유해한 계산은 소우주의 구성원에게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다. 소우주 내에서는 민주주의가 재구성되어 개인들의 목소리가 더욱 중요해지면서 각자의 노력을 효과적으로 끌어내게 된다.
혹자는 고대 아테네는 다른 상황에 있었고 사회규모의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테네가 도시국가였으며 모두가 민회에 모이는 것이 가능했다고 흔히 언급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시기에 따라 그리고 경합적 계산에 따르면, 시민 숫자는 대개 3만에서 6만 명 정도였다. 민회가 열리던 프닉스(Pnyx)언덕은 6천 명에서 8천 명(8천 명도 확장된 이후의 숫자이다) 정도만 수용 가능하였다. 따라서 고대 아테네도 같은 근본적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즉, 모두가 같이 모여 이슈를 논하기 어려웠고 직접민주주의에 있어서 각자의 몫은 아주 작았다.
하지만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던 민회에서의 직접민주주의는 전체 공중을 포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무작위추출법에 해당되는 추첨에 의한 선발 과정은 참가할 의향이 있는 시민 명부로부터 클레로테리온(Kleroterion)이라는 기계로 작성되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대의제민주주의 형태를 제공하였고 일반시민에게 일단 선발될 경우 주의를 기울일 강한 인센티브를 주었다. 마치 오늘날 개별 시민이 배심원이 아닐 경우 배심원 재판과정의 시시콜콜한 문제에 전혀 관심을 갖기 어렵지만, 일단 본인이 배심원으로 선발될 경우 주의를 기울일 큰 이유가 있는 것처럼, 아테네에서 추첨으로 뽑힌 개인들은 제기된 이슈의 장점에 대해 초점을 맞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차이는 고대 아테네의 배심원과 숙의 그룹의 규모는 수백 명에 달해서, 소우주가 전체 시민 인구의 대표자가 되기에 충분한 크기였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12명 정도로 구성되는 현대의 배심원단은 여러 가지 이유로 표본추출이 제약을 받고, 아테네 경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표성을 주장하기 어렵다. 이해당사자가 관여하는 오늘날의 법적 시스템에서, 배심원단은 규모가 너무 작고 배심원 선발에 있어서 타산적 결정이 너무 많이 작동한다.
그렇다고 고대 아테네민주주의를 이상적인 것으로 미화할 필요는 없다. (비록 오늘날 일부 조사에 의하면 소크라테스가 아마도 일부러 그런 선고를 내리도록 유도한 면이 있긴 하지만) 추첨에 의해 뽑힌 배심원단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거의 2,500여 년이나 민주주의 대의를 막아왔다는 것은 악명 높은 사실이다. 또한 500인 평의회와 달리 아테네 대부분의 하루짜리 숙의제도는 500여명의 사람들이 원형경기장에 앉아서 반대 논변을 들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소그룹토의나 면대면 토의를 결여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무작위추출법의 적용에 있어서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우선 자원하는 사람들만이 명단에 올랐으며, 뽑힐 수 있는 시민의 자격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여성, 노예, 거주외국인은 모두 배제되었다. 그렇지만 아테네인들은 시민들에게 인간적 규모의 숙의민주주의를 제공하는 관념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두 가지 핵심 관념인 무작위추출법과 숙의를 결합하는 독특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이후 (비록 무작위추출법은 전통적 여론조사를 통하여 우리의 비공식적 정치생활에 잔존하긴 하였지만) 민주주의 제도의 설계에서 그 뛰어난 점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 두 가지를 결합한다는 아이디어는 민주주의 실천의 전 역사를 통하여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하려는 관심은 숙의민주주의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관심 속에서 최근에야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결합을 공적협의(public consultation)를 위한 다양한 전략 가운데 위치시켜 살펴보도록 하자. 이어서 이 다양한 전략들 속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가치(values)와 민주주의 이론들을 고찰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