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김영도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작은 민들레는 우리를 기쁘게 한다. 어쩌다 저리도 척박한 틈으로 날아들게 되었을까? 제가 자리 잡은 곳이 폭신한 흙 마당이 아니라는 걸 알기는 할까? 한 줌도 안 되는 흙덩이에 뿌리를 내리고 기어코 꽃을 피워 내고야 마는 간절한 발버둥을 보라.
아침 햇살이 창을 두드리면 어린 고양이가 갸릉거리며 대답한다. 앞다리를 늘리고 뒷다리를 쭉 뻗어내고 등을 둥글게 말아 살아있는 기쁨을 온몸으로 드러낸다. 시장통에서 숙식을 구걸하는 어미 길냥이의 삶은 고달팠을 것이다. 내일을 보장받지 못하는 길거리의 치열함 속에서 새끼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어미의 결단. 눈여겨 봐둔 친절한 빵집 주인에게 새끼를 맡기고 갔다. 짐승이라고 어찌 모정이 없겠는가.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안고 돌아서는 어미의 비장한 뒷모습은 처연하도록 아름답다. 때로는 버리는 것이,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어미의 본능은 알고 있다.
떼 지어 지나가는 교복 입은 여중생들의 숨넘어가는 웃음소리는 얼마나 경쾌한가. 사원증을 목에 걸고 엄마라는 옷을 입고 종종걸음으로 슈퍼우먼 행세를 하는 워킹맘도,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며 거울 보기를 멀리하는 중년의 여인도 굴러가는 가랑잎에 웃음보가 터질 때가 있었다. 해거름에 부서져 내리는 맑은 웃음소리는 주름진 얼굴을 교복 입은 갈래머리로 돌아가게 해 주는 묘약.
숱한 세월이 흐른 뒤 문득 발견된 첫사랑의 연애편지. 손만 잡고 걸어도 온몸이 찌릿찌릿, 발바닥이 간질거리던 앳된 연인의 체취가 남아있다. 첫 키스의 설렘도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던 뜨거운 손길도 잊힌 지 오래. 적당히 벗어진 이마와 천둥 같은 코골이로 잠을 깨우는 옆지기에게서 섹시함을 찾으려는 간절한 눈길조차 기쁘지 아니한가.
손때 묻은 오래된 책을 펼칠 때 툭 떨어진 아이의 카드. “엄마, 아빠 사랑해요.” 삐뚤빼뚤한 그림문자 아래 곱게 접은 색종이 카네이션은 가슴을 벅차게 한다. 유치원 선생님이 써준 글을 그대로 따라 그렸던 앙증맞은 손가락은 내 손보다도 훨씬 커버렸다. 자기 길을 찾아 날개를 펴고 날아간 아이가 남겨 둔 깃털 하나를 발견한 기쁨이다.
데뷔 55주년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친 73세의 영원한 오빠 또한 우리를 기쁘게 한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단발머리’ 소녀가 ‘꿈’을 찾아 ‘창밖의 여자’가 되기까지 고비 고비에서 그의 노래는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다. 변함없는 목소리와 열정으로 2시간이 넘는 공연을 홀로 이뤄낸 위대함이라니. 굳건히 무대를 지키고 서 있는 그를 보노라면 내 삶의 무대에서 나도 잘 버텨내고 있다고 위안이 된다.
인사동에서 열린 친구의 민화 전시회. 삶의 바다에서 헤엄치다 뭍에 발을 디딘 오십의 나이, 친구에게 불청객이 찾아왔다. 체력이 떨어져 무균실 입원을 반복하며 간신히 받은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 항암의 괴로움을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를 그리며 이겨냈다는 친구는 갈색의 긴 머리 가발이 잘 어울렸다. 그림이 아니었다면 그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며 환하게 웃었다. 민화의 쨍한 색깔 위로 명치 끝이 아린 기쁨이 내려앉는다.
월급 빼고 모든 것이 다 올랐다는 서글픈 푸념이 발길에 차인다. 턱없이 뛰어버린 가격표를 힐끗거리며 오이를 만지작만지작, 감자를 들었다 놨다 가벼운 장바구니에 어깨는 무겁고. 때맞춰서 들리는 타임세일 안내방송은 마른 논의 단비처럼 반갑다. 눈치 보지 않는 분주한 손놀림에 빠르게 채워진 묵직한 장바구니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가벼운 발걸음에 콧노래가 새 나온다.
노을을 바라보는 나이란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조심스러운 나이. 익숙해진 습관으로 이미 굳어버린 몸과 마음은 견고한 벽을 쌓고 변화를 두려워한다. 하루에 만 보 걷기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드디어 체중계 눈금이 한 칸 내려갔다. 오랜 시간 같이했던 두툼한 뱃살이 탈출의 기미를 보인다. 소소한 변화지만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작은 희망으로 설렌다.
“한 촛불이라도 켜는 것이 어둡다고 불평하기보다 낫다.” 촛불로 이어지는 연대의 함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상식이 무너진 시궁창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깨어있는 의식들이 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위한 촛불공동체의 물결은 잠들지 않을 터이다.
거친 돌 틈에서 민들레가 피어났듯이 더디 가더라도 결국은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리라는 믿음은 우리의 가슴에 스며들어 우리를 더없이 기쁘게 한다.
『한국산문』 202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