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편 - 천상병 - 들국화
170편 - 이제니 - 밤의 공벌레
171편 - 한기팔 - 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172편 - 조정권 - 몰소리
173편 - 최정례 - 길에 누운 화살표
174편 - 정지용 - 옛 이야기 구절
175편 - 김정란 - 나의 시(詩) ―약한 너에게 기대어
176편 - 허형만 - 뒷굽
177편 - 감태준 - 흔들릴 때마다 한 잔
178편 - 정래교 - 늙은 소
179편 - 이사라 - 얼룩
180편 - 윤성택 - 오늘의 커피
181편 - 김상미 - 겨울 이야기
182편 - 니카노르 파라 - 주님의 기도
183편 - 최동호 - 정릉 산보
184편 - 김주대 - 형편대로
185편 - 정용주 - 비밀정운
186편 - 박주택-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187편 - 김갑수 - 겨울이 오면
188편 - 김명인 - 은혼
189 편 - 아르튀르 랭보 나의 방랑(환상)
190편 - 손택수 - 녹슨 도끼의 시
191편 - 강 정 - 아픔
192편 - 함성호- 바다 속 마을
193편 - 황학주 - 풍선
194편 - 윤명수 - 하루
195편 -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 니에 대한 칭찬의 말
196편 - 장정일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197편 - 윤병무 - 인성의 비교급
198편 - 김종해 - 인사동으로 가며
199편 - 이상교 - 봉숭아 꽃물
200편 - 도종환 - 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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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강으로 나간 사람
―조용미(1962∼)
아무 일 모르고 강가로 가는 사람은
흰 아그배꽃 핀 걸 알게 되고
바람부는네시를모르고강가로가는사람은
바람 많은 다섯 시를 가지게 되고
거북한 속을 달래려 강가로 나가는 사람은,
아무 일 모르는 흰 아그배꽃은
강가 걷는 걸음걸일 알게 되고
바람 많은 강은 바람 많은 다리를 만들고
물무늬를 그리고,
흰 아그배꽃을 피우고 강은
찬바람을 줄이느라 강물은
깊어 혼자
아무 일 모르고 강으로 나간 사람을
세워 두고, 세워 두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1』(동아일보. 2013년 05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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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잔
―이경례(1962∼)
접동길 산 번지에 때죽나무 칵테일바,
쏙쏙 입점하였네 느티나무 상호야
느티나무 독서실 느티나무 식당
느티나무 슈퍼, 나무에
잎사귀 달리듯 하지만
바람의 기척에도 철렁,
가슴 쓸어내리는 꽃숭어리 잔들이
물구나무서기로 매달린
때죽나무 스탠드바에 앉아
이국 향기 물씬한 칵테일, 치치,
바랄라이카, 모스코 뮬을 거푸
마시는 오후
가장 향기로운 한때를 채웠다
비운 잔들의, 하얀 꽃무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2』(동아일보. 2013년 0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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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이력서
―오은(1982∼)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3』(동아일보. 2013년 0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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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오래간만이다 522번
―김영승(1958∼ )
오래간만이다 522번
이 겨울비 내리는 밤
나는 실내(室內)에서
밖의 너를 본다
비 맞는 마을버스를
오래간만이다 522번
우중(雨中) 마을버스는
비행기 같고
포장마차 같고
선술집 같고
선실(船室) 같다
17년 전에 처음 타봤지만
이번엔 정말 오래간만이다 522번
마을버스야
입김에
성에에
착하게만 흘러내리는
네온 간판
명성치과도 김재준 약국도 안녕?
나는
고공(高空) 비행기 객실 같은
실내에 앉아
몇 년 전
어느 벚꽃 만발한 날
벚꽃 사이를 뚫고 달리는 너에게
손짓을 한다
오래간만이다
나의 522번 마을버스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4』(동아일보. 2013년 0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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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푸른 도화선 속, 꽃을 몰아가는 힘이
―딜런 토머스(1914∼1953)
푸른 도화선 속, 꽃을 몰아가는 힘이
푸른 내 나이 몰아간다, 나무뿌리 시들리는 힘이
나의 파괴자다.
하여 말할 수 없구나, 허리 굽은 장미에게
내 청춘도 똑같은 겨울 열병으로 굽어진 것을.
바위틈으로 물 몰아가는 힘이
붉은 내 피를 몰아간다, 요란한 강물 말리는 힘이
내 피를 밀랍처럼 굳힌다.
하여 말할 수 없구나, 내 핏줄들에게
산(山) 샘물에 똑같은 입이 빨고 있는 꼴을.
웅덩이 휘젓는 손이
뻘모래를 움직인다, 부는 바람을 얽매는 손이
나의 수의(壽衣) 돛폭을 감는다.
하여 말할 수 없구나, 매달린 사람에게
형리의 회무덤이 내 진흙으로 만들어진 꼴을.
시간의 입술이 샘 머리에 거미처럼 빨아댄다.
사랑은 뚝뚝 흘러 모인다, 그러나 떨어진 피가
그녀의 상처를 달래리라.
하여 말할 수 없구나, 기후의 바람에게
시간이 별무리 둘레에 하늘을 재깍거려 놓은 꼴을.
하여 말할 수 없구나, 애인의 무덤에게
내 홑이불에 꼭 같은 굽은 벌레가 기어가는 꼴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5 (동아일보. 2013년 0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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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백주대낮에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이유
―문성해(1963∼ )
이 시절에는요
여자들이
시렁 위에 얹힌 작지만 앙칼진 칼 하나씩 손에 들고 나오는데요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쳐도 암말 못하는 건
지천에 내걸린 풋것들을 오살지게 베어다
서방과 새끼들을 거두기 때문인데요
이 시절에는요
세상 모든 여자들은 코밑이 거뭇해지고
팔뚝 속에 알이 차올라서는
지천에 돋는 풋것들이 아까워라, 아까워라
저도 모르게 들판과 한판 엉겨붙게 되는데요
난생처음 억세디억센 수컷이 되는데요
가끔씩 그 독한 칼날에
논배미가 잘리고 칡뿌리가 잘리고 수맥이 잘리기도 하는데요
이 시절 여자들은요
푸줏간 안주인이 내걸린 고기들을 슥슥 잘라가듯
이 나무 이 바람 이 구름을
훌훌 베어 망태기에 담아서는
종다리처럼 지저귀며 언덕을 넘어가는데요
하늘도 암말 못한다는데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6』(동아일보. 2013년 0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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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문태준(1970∼)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
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7』(동아일보. 2013년 0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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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길
김기림(1908∼?)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 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 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8』(동아일보. 2013년 05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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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보름
―장승리(1974∼)
설익은 감이 옥상 계단 위로 떨어진다
쿵, 쿵쿵 누가 누굴 때리는 소리 같다
자고 있던 강아지들이 벌떡 일어나
동시에 짖어댄다
썩은 과즙이 누렇게 변색된 감 주위를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다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일까 저 달은
썩는 순간부터 눈부셔지는 달빛을 뭐라고
부르나요 당신은
자고 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
컹컹 짖게 만드는
그 옛날 끝없는 계단으로 떨어진
오늘 밤 저 달은
누가 누굴 계속 때리는 소리 같은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9』(동아일보. 2013년 0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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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없는 나라
―함기석(1966∼ )
없는 초원에서
없는 말들이
없는 갈기를 휘날리며
없는 꿈길을 달려 내게로 온다
없는 안장에 나를 태워
없는 나라로 간다
없는 나라에 도착해 보니
없는 사람들이 보인다
없는 길들이 보인다
없는 시계들이 걸어다닌다
없는 거울들이 나무들이 걸어다닌다
없는 시인들이 없는 시를 쓴다
없는 화가들이 0차원 그림을 그린다
없는 영화관에선 없는 영화가 상영되고
없는 개들이 없는 담배를 피며 내게 묻는다
없는 당신!
없는 삶을 끌고 왜 여기까지 왔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0』(동아일보. 2013년 0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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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기차표 운동화
―안현미(1972∼)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이
휘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 날
언니 따라 시집 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1』(동아일보. 2013년 0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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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지붕 아래의 잠
―백현(1946∼)
언덕 위에 서서 재개발지역 끄트머리에 남아있는
기와지붕을 인 한옥들을 본다
부신 봄볕 아래 소멸을 예감한 듯
검은 지붕들이 어둡다
기왓골에 한 뼘 넘게 풀들이 자라고
아직은 그 아래 깃든 삶을 덮어주는 온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 한 대가 낙타처럼
꾸부정하게 좁은 길을 내려간다
남은 사람들도 곧 묵은 살림살이를 모아
오랜 터전을 떠날 것이다
잠 속으로 부드럽게 스미던 빗소리와
꽃밭과 장독대가 있는 작은 마당을 두고
사막처럼 퍼져 있는 길을 지나
해가 들지 않는 공동주택에서
천장을 지나는 물소리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2』(동아일보. 2013년 06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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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여름의 자세
―김성대(1972∼)
여름, 물속에서 안고 있던 자세를 어느 날, 기억해 냈다
여름, 물속에서 안고 있던 자세로 잠이 들었다
모래알이 물결에 씻기는 여름,
잠 속으로 떠내려온 모래알
따뜻한 물결 위를 떠다녔다
발이 닿지 않았지만
많은 여름은 놓아두고
잠깐 동안의 자세가 여름으로 떠오르는지
하나의 해바라기를 위해 모두가 푸른
여름,
오래전 빛 속에서
물결 가득한 빛 속에서
잠시 그가 되는 일
모래는 하나의 여름을 향하여 흐르고
그 여름의 나는 오늘을 이해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3』(동아일보. 2013년 06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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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이것은 사람이 할 말
―김소연(1967∼)
늙은 여가수의 노래를 듣노니
사람 아닌 짐승의 발성을
암컷 아닌 수컷의 목울대를
역류하는 물살
늙은 여가수의 비린 목소리를 친친 감노니
잡초며 먼지덩이며 녹슨 못대가리를
애지중지 건사해온 폐허
온몸 거미줄로 영롱하노니
노래라기보다는 굴곡
노래라기보다는 무덤
빈혈 같은 비린내
관록만을 얻고 수줍음을 잃어버린
늙은 여가수의 목소리를 움켜쥐노니
부드럽고 미끄러운 물때
통곡을 목전에 둔 부음
태초부터 수억 년간 오차 없이 진행되었던
저녁 어스름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여자의 노래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사람이 할 말
그래서 이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우노니
우리가 발견한 당신이라는
나인 것만 같은 객체에 대한 찬사
살면서 이미 죽어본 적 있었다던
노래를 노래하노니
어차피 헛헛했다며
일생이 섭섭하다며
그럴 줄 알았다며 그래서 어쩔 거냐며
늙은 여가수의 노래에 박자를 치노니
까악까악 까마귀
훌쩍훌쩍 뻐꾸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4』(동아일보. 2013년 06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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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동해남부선
―백무산(1955∼)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역에 기차는 서네
이제 막 다다른 봄볕을 부려놓고
동해남부선은 남으로 길게 떠나는데
방금 내 생각을 스친, 지난날의 한 아이가
바로 그 아이가, 거짓말처럼 차에서 내려
내 차창을 지나가고 있네
아이를 둘씩이나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양손에는 무거운 짐을 들고
내가 오래전 이곳 바닷가에서 일하던 때
소나기에 갇힌 대합실에서 오도 가도 못할 때
우산을 씌워주고 빌려주던 저 아이
작은 키에 얼굴은 명랑한데
손은 터무니없이 크고 거칠었던 아이
열일곱이랬고 고무공장에 일 다닌댔지
우산을 돌려주려 갔다 빵봉지를 들려주다
잡고 놓지 못했던 손
누가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기차는 떠나는데
봄볕이 저 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데
누가 제발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5』(동아일보. 2013년 0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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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날마다 설날
―김이듬(1969∼)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定義)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뜻한 바는 뺨에서 흘러내리고
뜻 없이 목 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무모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셔보자고 다시 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6』(동아일보. 2013년 0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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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꽃싸움
―김요일(1965∼)
달빛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당신을 안고 붉은 밤을 건너면,
곱디곱다는 화전(花田)엘 갈 수 있나요?
화전(花田)엘 가면
노랗고 파란 꽃그늘 아래 누워
지독히도 달콤한 암내 맡으며
능청스레 꽃싸움할 수 있겠지요?
당신은 새벽 별보다 찬란하게 웃고
나는 밤새 문신(文身) 그려 넣으며
환장할
노래를 부를 테지요
화전(花田)이면 어떻고, 화전(火田)이면 어때요
아침가리 지나 곰배령이면 어떻고,
별꽃 피는 만항재면 또 어때요
잃을 것 뺏을 것도 없는 빈 들에 가서
꽃집 지어 벌 나비 들게 하고
수줍은 미소에도 찰랑거리는 도라지꽃처럼
속살속살 지저귀며
하루만, 하루만 더 살아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7』(동아일보. 2013년 0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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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내가 바라보는
―이승희(1965∼)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탁 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 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8』(동아일보. 2013년 0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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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시상식 모드
―박상수 (1974∼)
처음 만났지만 차라리 고백을 해버린다면 어떨까? 블랙 미니 드레스에, 펄 립글로스를 바르고는
예전부터 당신을 존경해왔어요
샹들리에 불빛 속에서, 당신은 짓밟혀왔고 평생 자신과 싸워왔군요, 그래요, 알아요, 당신이 내게 오신다면 척추가 무너진 것처럼 인사할 거예요
하지만 상이라는 것은 이제 너에겐 내리막길만 남았다는 저주일 텐데
내내 눈감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네요, 무례하군 참으로 마이너한 에너지다, 오늘 이 자리는 묘하게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있어서, 모아놓으면 병이 돌 것 같은데, 나무들은 비틀립니다 새들은 낮게 날아요 비바람 속 미친 노파가 욕을 해대지만 여기는 스카이 그랜드볼룸
나에 대해 좀더 얘기해주겠어요?
사람들과 손키스를 나누며 당신, 드디어 당신! 녹음한 내 목소리를 억지로 들은 것처럼 벌써 오줌이 마려워, 나는 힙을 조금 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대만족해주겠다는 표정으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9』(동아일보. 2013년 0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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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외계(外界)
―김경주(1976∼)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 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0』(동아일보. 2013년 0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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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바다 등나무
―데릭 월컷(1930∼)
내 친구의 반은 죽었다
네게 새 친구를 만들어 주지, 땅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옛 친구들을 그 모습대로 돌려주오,
결점이랑 모두 함께. 난 외쳤다.
오늘 밤 나는 등나무 숲을 스쳐 오는
희미한 파도 소리에서 친구들의
말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달빛 어린 수없는 잎새 같은 바위 위를
걸어서 저기 하얀 길을 혼자 갈 수도 없고,
지상의 짐을 벗어나는 부엉이의
꿈꾸는 동작으로 떠다닐 수도 없다.
아, 땅이여, 네가 가두어 둔 친구들이
내 사랑하는 이승의 친구보다 많구나.
절벽 옆 바다 등나무는 푸른빛 은빛으로 번득인다.
이 나무들은 나의 신앙을 지켜주는 천사의 창이었다.
그러나 상실 속에서 더 굳건한 것이 자라나서
그건 돌 같은 냉철한 광채를 띠어,
달빛을 견뎌내고, 절망보다 더 멀리,
바람처럼 굳세어져 바다와 경계를 이루는 저 등나무
숲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옛 모습대로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니,
결점이랑 모두 함께, 옛날보다 고상하진 않아도,
그냥 그대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2』(동아일보. 2013년 0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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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단 하루라도 좋으니
―박영희 (1962∼)
단 하루라도 좋으니
형광등 끄고 잠들어봤으면
누군가와 밤이 새도록 이야기 한 번 나눠봤으면
철창에 조각난 달이 아닌 온달 한 번 보았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따뜻한 방에서 한숨 푹 자봤으면
탄불 지핀 아랫목에서 삼십 분만 누워봤으면
욕탕에 들어가 언 몸 한 번 담가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흠뻑 비에 젖어봤으면
밤길 한 번 거닐어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잠에서 깨어난 아침 누군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그리운 이의 얼굴 한 번 어루만질 수 있었으면
마루방 구석에서 기어 나오는 벌레들 그만 죽였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딸에게 전화 한 통 걸어봤으면
검열 거치지 않은 편지 한 번 써봤으면
접견 온 친구와 한 시간만 이야기 나눠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단 하루라도 좋으니
내 방문 내 손으로 열 수 있었으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2』(동아일보. 2013년 0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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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슬픈 로오라
―이문재(1959∼)
길을 바다의 끝까지 데려다 주고 교실로 들어선다
오전에 읽던 죽은 사람들의 책은 아직 열려 있고
칸나는 한 발짝도 여름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봉화촌의 아이들
산에서 멀거니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아이들
오늘은 굿당이 조용하고
수평선은 일전의 자리로 돌아가 있다 소나무 숲이
아주 많은 날들을 매어 달고 외로움에 지친
여자들의 헝겊을 아직 매달아 주고
달을 바라보는 칸나
분교의 지붕에는 소금기가 많이 남아 있다
방금 바다에서 올라간 구름들이 서성거리고
가까운 집에서 기침소리가 난다
깨진 유리창으로 들어서는 바다는 발이 퉁퉁 불어 있고
선착장까지 데려다 준 길들이 고개를 들어 힐끗
교실을 바라보고 있다
칸나의 뿌리 속으로도 해풍에 녹스는
어둠이 자리잡고
이곳을 떠나면 죽음의 나라
나는 낡은 풍금의 페달을 밟으며 로오라를 이름
부른다 낮은 구름들이 웅성거리며
섬의 주위로 내려온다
풍향계를 바라보면 바람은 나에게 들키고 페달을 밟고 있는
나의 리듬이 자꾸 어둡고 깊어질 때
바다는 잠시 그의 품안에 들어서는
물고기나 여름의 난류를 허락하고 있는 것 같다
로오라 나는 언제 온몸의 외로운 이끼를 씻고
그대의 낯익은 고장으로 달려갈 것인가
봉화대는 늘 어둡고
어두워져 있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3』(동아일보. 2013년 0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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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1967∼)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4』(동아일보. 2013년 0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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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그저 그런
―백상웅(1980∼)
가방이 뜯어졌다.
속에 든 모든 게 쏟아졌다.
언제 집어넣었는지도 잊은 영수증, 책, 동전,
너무나도 익숙한 흔들림이나 덜컹거림까지도
쏟아졌다.
게을러서 여태 내가 기대고 살았다.
장대비에 젖고 눈발에 얼고 한 날은 햇볕도 쬐고
하면서, 가방은 울상이었다가 펴지기도 하면서.
연애도 하고 이별도 했다.
이력서도 쓰고 면접에서 떨어져도 봤다.
인조가죽이라 망조가 오래전부터 보였다.
짐승이 되려다가 만 가방, 짖다가 그만둔 가방,
소처럼 여우처럼 악어처럼 고래처럼
착하지도 나쁘지도 못하는 가방.
가방이 제 밑바닥으로 입을 벌렸다.
찢어지면서 이빨의 형상까지 만들었다.
이제 이 가방의 시대는 끝났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5』(동아일보. 2013년 0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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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너바나
―리산(1966∼)
언덕을 넘어 외곽으로 가는 마지막 전차의 종소리도 그친 자정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입술을 가진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손톱을 가진 여자가 모여드는 자정 너머 술집에 불이 켜지지
누군가와 어깨를 걸고 먼 곳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은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남자와 금이 간 청동의 술잔에 제 손금을 비추어 보는 여자가 있는 그곳에는, 유효기간이 지난 달력을 찢어 불이 꺼진 화덕에 불씨를 살리고 밀봉된 병 속의 시간을 헐어 작고 단단한 주전자 가득 끓여내는 뜨겁고 진한 국물이 있지
지금 막 일인분의 따뜻한 음식을 사기 위해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와 뜨거운 김이 오르는 노점 식당 앞에 서서 청어 향수가 뿌려진 손수건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마의 허기를 닦는 여자
멀리 가는 밤새들 울음 우는 긴 모퉁이 지나 자정 너머 술집에는, 낡은 앨범 속 램프에 그을린 가수의 목소리 흥얼흥얼 타오르는 자정 너머의 화덕, 오래도록 식지 않을 한 스푼의 온기가 있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5』(동아일보. 2013년 0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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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그리며 사색하는 이 순간
―월트 휘트먼(1819∼1892)
홀로 앉아 그리며 사색하는 이 순간
다른 나라에도 그리며 사색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만 같다.
멀리 바라보면 도이칠란트,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혹은 더 멀리 중국, 러시아, 일본에서 그 나랏말을, 지껄이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만약 그들을 알 수만 있다면 내 나라의 비슷한 사람들에게 끌리듯이 그들에게 끌릴 것만 같다.
아 우리는 형제가 되고 애인이 되리라
그들과 함께라면 나는 행복하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7』(동아일보. 2013년 0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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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차단기 기둥 곁에서
―서대경(1976∼)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가는 풀, 어두워져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8』(동아일보. 2013년 0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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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버스에서 자는 어머니
―고형렬(1954∼)
흰 양말에 남자 고무신을 신었다.
통치마 아래 반들거리는 정강이
항포돛색 보자기로 네 귀를 묶고
풀다라를 안고 졸고 있었다.
엷은 구름에 바다는 훤한 새벽
불켜고 버스는 북쪽으로 간다.
자식들의 늦은 등교 찻간에서
나는 동해안 어머니를 자주 보게 된다.
옆구리에 혹마냥 불거진
흔들리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보고
나는 해송 달아나는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관광 여름 한철을 따라서
어머니는 주문진으로 나가시는가 보다.
언덕바지나 동구에 삑 설 때마다
찰싹찰싹 어린 파도 소리 들린다.
저러고 눈만 감은 어머니를
나는 바람결에 알고 있다,
어머니는 해변가 여자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 조으는 6척 어머니
짚또아리 드신 장사 같은 어머니는
아무 표정도 없이 자고 계신다.
더 위로 위로 오늘은 가시나 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9』(동아일보. 2013년 0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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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강가
―이용악(1914∼1971)
아들이 나오는 올 겨울엔 걸어서라도
청진으로 가리란다
높은 벽돌담 밑에 섰다가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찾아오리란다
그 늙은인
암소 따라 조밭 저쪽에 사라지고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췬지
그슬린 돌 두어 개 시름겹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0』(동아일보. 2013년 0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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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것들
―이하석(1948∼ )
바다는 우리의 것들을 밖으로 쓸어낸다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
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
되치운다
우리가 버린 것들을 바다 역시 싫다며 고스란히 꺼내놓는다
널브러진 생각들, 욕망의 추억들, 증오와 폭력들의 잔해가 바랜 채 하얗게 뒤집혀지거나
검은 모래 속에 빠진 채 엎어져 있다
나사가 빠지고 못도 빠져나가 헐겁지만
그것들은 우리 편도 아니다
더욱 제 몸들 부스러뜨릴 파도 덮치길 겁내며
몇 번이나 우리의 다리를 되걸어 넘어뜨린다
여름 홍수에 그런 것들 거세게 바다 파고 들지만
바다는 이내 그 모든 것들을 제 바깥으로 쓸어 내놓는다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
우리 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
되치워야 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1』(동아일보. 2013년 0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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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상수리나무들아
―이은봉(1953∼)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너희들이 좋구나 너무 좋아 쓰다듬어도 보고, 끌어안아도 보고, 그러다가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나, 너희들 들쳐 업는구나 너희들, 나 들쳐 업는구나
우거진 잎사귀들 속, 흐벅진 저고리 속
으흐흐 젖가슴 뭉개지는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그렇구나 네 따뜻한 입김,
부드러운 온기 속으로
나, 스며들고 있구나 찬찬히
울려 퍼지고 있구나
너희들 숨결, 오래오래 은근하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껍질들아
껍질 두툼한 네 몸속에서 작은 풍뎅이들, 속날개 파닥이고 있구나 어린 집게벌레들, 잠꼬대하고 있구나
그것들, 그렇게 제 몸 키우고 있구나
내 몸에서도 상수리나무 냄새가 나는구나
쌉쌀하구나 아득하구나 까마득히 흘러넘치는구나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2』(동아일보. 2013년 0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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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파리
―장석주(1955∼)
비굴했다,
평생을
손발 빌며 살았다.
빌어서 삶을 구하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끝끝내 벗지 못하는
이 남루!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3』(동아일보. 2013년 0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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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가족의 힘
―류근(1966∼)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을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4』(동아일보. 2013년 0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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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떨어뜨린 것들
―김행숙(1970∼)
여름 과일은 물주머니지
겨울에 물은 얼지
강물이 단단해지고 있어
10센티쯤……
내 얼굴에도 눈이 쌓였으면……
나의 시체처럼
그것은 내가 볼 수 없는 풍경이겠구나
아이들은 흙장난을 하다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곤 하지
어느 날은
야구공이 굴러간 곳에서 이상한 것을 줍지
손을 잃어버린 손가락 같은 것
뭐지?
찾았니? 저쪽에서 한 아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어
과일을 깎다가 둥근 과일을 떨어뜨리지
향기로운 벌레가 기어 나왔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5』(동아일보. 2013년 0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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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환상의 빛
―강성은 (1973∼)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6』(동아일보. 2013년 0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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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탱자는, 탱자가 아닙니다
―장옥관(1955∼)
탱자는, 탱자가 아닙니다
탱자처럼 올라붙은 불알 가진 수캐가 아닙니다 꽃핀 암캐 항문이나 쫓는 수캐가 아닙니다
갓 피어난 채송화 꽃밭 휘저으며 나비를 쫓다가도
눈동자에 뭉게구름을 담아냈지요
비록 늘 굶주렸지만, 이웃의 후한 대접에는
밭고랑에 숨은 생쥐 잡아 현관에 갖다놓는 염치도 있었어요
장맛비에 허적이며 온 동네 쏘다니는 그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
앞산 능선이 완만한 것은 개의 등이 굽었기 때문이며 그의 등이 굽은 것은 사무침 때문입니다
탱자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이불 홑청 빨다가 구름에게 손등을 깨물린 날
마을 뒷산 오르는 이웃들 따라 올라가 영영 내려오지 않았어요
주머니에 든 돈과 입은 옷으로 대문 나서서
몇 년째 돌아오지 않는 제 주인처럼
사무침이 구름을 피우고 사무침이 방금 다렸던 와이셔츠를 다시 다리게 만듭니다
한번 흩어진 구름은 왜 다시 뭉쳐지지 않을까요 한번 지나간 물소리는 왜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요
푸른 가시마다 총총한 흰 꽃
탱자 울타리에 탱자가 올해에도 걸어와 매달리는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7』(동아일보. 2013년 0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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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음악들
―박정대 (1965∼)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8』(동아일보. 2013년 08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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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바람
―다카하시 아유무(1972∼)
나와 사야카 그리고 바테루텐(홈스테이 집의 아들)
세 사람이 양을 몰고 초원을 한없이 걸었다.
나는 하모니카로 밥 딜런의 ‘바람의 소리’를 불었다.
장난을 좋아하는 바테루텐이 내 손에서 하모니카를 뺏는다.
“하모니카 불 줄 알아?”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젓는다.
그는 내 하모니카를 바람에 맡겼다.
후∼ 후∼ 화∼ 화∼
바람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다.
강하게 가늘게, 미세한 비브라토를
주면서바람은 절묘한 톤으로 하모니카를 불었다.
인간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소리…
열 개의 음이 동시에 울리는 소리…
1분 정도 바람의 연주를 들려준
뒤바테루텐은 살짝 웃으며 나에게 하모니카를 돌려준다.
‘바람의 연주가 어때?’라는 듯.
맞아, 네가 이겼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9』(동아일보. 2013년 08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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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근황
―김남호(1961∼)
요즘은 자꾸 웃음이 나
달리던 타이어에 펑크가 났는데도 웃음이 나고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면서도
보험회사 직원이 지금, 거기가
어디쯤이냐고 묻는데도 웃음이 나고
도대체 여기가 어디쯤이지?
웃음이 나고,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도
장례식장이 어디냐고
발인은 언제냐고 웃음이 나고
얌마, 너 왜 그래?
엄마가 치매라는데도 웃음이 나고
누구세요, 나를 못 알아보는데도 웃음이 나고
울고 싶은데도 웃음이 나고
여보, 나 이러다 미치는 거 아냐?
무서워 죽겠는데 웃음이 나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0』(동아일보. 2013년 08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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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나의 빈티지
-박도희(1964~)
나쁘지 않은 시
늦가을을 닮고 싶은 의자
배터리가 다 된 시계
죽은 매미들이 새 배터리를 만들고 있다는 상상
장난의 운명을 믿는 헝겊 뼈다귀를 물고 오는 강아지
제 속도감을 즐기는 햇살
50% 세일 아이스크림
각종 펜 사랑
시선이라는 행위 예술을 위하여
막대사탕을 물고 타는 버스
모자란 슬픔
현혹=과제
패, 경, 옥 같은 택배물
늙기로 한 터널
오후 찻잔에 담는 비
기어코 찾으려고 하는 눈물에 관하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1』(동아일보. 2013년 08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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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섬진강변에서
―천금순(1951∼)
비로소 강물은
지리산 고원분지 운봉 땅에 고리를 박고
줄을 매달아 동편제 판소리 한가락으로 흐른다
내가 발자국으로 걸어온 몇 백리 길
거대한 동그라미 하나 그리며 흐르고 흐른다
산내, 운봉, 주천, 구례, 하동으로
싸리꽃 찔레꽃 흐드러지게 핀 산속
막걸리주막의 외롭기만 하다는
할머니의 긴 넋두리도 흐른다
쌍계사 화개장터를 내려와
막차표를 끊어놓고 잠시 남도대교 아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은피라미떼를 본다
강 건너 초록의 대숲 시퍼런 낫으로 산죽을 치는
소리 휘어 활시위소리 내며 흐른다
강물에 뜬 둥근 낮달에 늙은 내 얼굴을 비추어본다
멀리 있는 그대에게 흐르는 물로 초록의 편지를 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2』(동아일보. 2013년 08월 0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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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그 여자의 남편
―테드 휴즈(1930∼1998)
일부러 석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집에 돌아와
싱크대와 수건을 더럽히며 그 여자로 하여금
빨래솔과 빨래판으로써
돈의 완강한 성질을 알게 한다.
또한 어떤 종류의 먼지 속에서
갈증이 생겼고 그것을 풀 권리를 얻으며
어떤 땀을 그가 돈과 바꿨고
돈의 피나는 무게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한다. 그는 그 여자의 의무를
새삼 일깨워 그 콧대를 꺾으리라.
오븐 속에 두 시간을 데운 튀겨진 나무쪽 같은 감자튀김은
그 여자의 대꾸의 일부일 뿐.
나머지 대꾸를 마저 듣고 그는 불 속에 내팽개치고는
울리는 함석판 같은 목청으로
<돌아오라 쏘렌토로>를 부르며
집 모퉁이를 돌아가 버린다.
모욕 때문에 그녀의 등은 구부러져 혹이 생긴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겐 자기네의 권리가 있을 테니까.
배심원들은 작은 검댕부스러기들로부터
소집될 것이다. 그들의 소장(訴狀)은 곧장
하늘로 올라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3』(동아일보. 2013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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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기하학적인 삶
―김언 (1973∼)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구이고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피부가 만들어내는 대지는 넓고 멀고 알 수 없는
담배 연기에 휘둘린다. 감각만큼 미지의 세계도 없지만
삼차원만큼 명확한 근육도 없다. 우리는 객관적인 세계와
명백하게 다른 객관적인 세계를 보고 듣고 만지는 공간으로
서로를 구별한다. 성장하는 별과 사라지는 먼지를
똑같이 애석해하고 창조한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나왔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자연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메바처럼
우리는 우리의 반성하는 본능을 반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결된 집이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우리의 주변 세계와 내부세계를 한꺼번에 보면서 작도한다.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 거기
누가 있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점을 찾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3』(동아일보. 2013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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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10개의 강아지 인형을 지키는 옷장 속의 인간
―박상순(1961∼)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가슴에 있네요.
문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발 아래 있네요.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등 뒤에 있네요.
문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나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나는, 열 개나 있네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5』(동아일보. 2013년 0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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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삼 분 전의 잠
―이장욱(1968∼)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발밑으로 흘러내리는 모래들 내 잠 속에 쌓이고 있었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잠을 추억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잠을 추억하는 자
그때 그 오래된 눈빛은 우연한 것이었으나 아, 이런 바람은 괜찮은데, 모든 우연을 우리는 미리 알고 있었네 삼 년 전의 문 열리고 삼십 년 전의 그대, 마른 등 보이네 눈뜨면 그때인 듯 상한 눈발 날리고 모래처럼 우연한 노래들 내 잠 깊은 모래산, 모래산에 쌓이네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그곳에 오래 앉아 있었으나 깔깔한 모래들 아직도 내 잠 속 떠나지 않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기슭을 배회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독백을 기억하는 자 그리고 모래산 바람 부는 그대의 모래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6』(동아일보. 2013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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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구름에 대하여
―엄원태(1955∼)
이 가을엔 구름에 대해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구름에 대해서라면 누가 이미 그 불운한 가계의 내력과 독특한 취향까지 세세히 기록한 바 있고 심지어 선물상자라며 하늘수박을 제멋대로 담아본 이도 있다지만, 구름은 뭣보다도 오리무중에 암중모색이 본색이자 기질이다.
그래선지 구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물론 양떼구름이니 새털구름이니 뭉게구름이니 하는 종류는 조금 안다. 하지만 그것들 또한 다만 형상일 뿐 구름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내가 아는 것은 또 한 가지, 구름이 환절기를 틈타 내 무릎이며 발목, 손가락 마디에까지 들어왔다. 산이마에 걸린 안개구름 속을 오래 걸었던 탓인지, 구름께서 친히 내게 왕림하셨다.
구름은 역시 가을 하늘이 제격이다. 허공이 모태이자 고향이며 무덤이기 때문이다. 서리 내린 가을 하늘만큼 새파랗게 쓸쓸해지면, 누구나 구름의 심정을 약간은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7』(동아일보. 2013년 0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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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소매의 자세
―이제야 (1987∼)
지내려다가
지나는 때가 있다
너와 지내려다
너를 지날 때,
심장으로 손을 뻗었다가
계절 속으로 너를 집어넣기도 했다
새벽과 지내려다
새벽을 지날 때,
망각을 위한 노래를 부르다
선명해진 악보를 다시 읽기도 했다
한사코 지내려던 것들이
스르르 지나는 때가 있다
여름아, 부르면
소매 밖으로 팔이 나오듯
나와 지내려다
나를 지날 때,
물음표들을 수없이 피우다
마침표 없이 문장을 닫기도 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7』(동아일보. 2013년 0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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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끈질기게 나를 찾아다니는 전화
―고옥주(1958∼)
몇 개의 숫자 속에서 나는 숨지 못한다
무수한 기억을 뚫고 네가 나를 추적해 올 때
뇌세포보다 더 많이 입력된 정보와 영상 사이로
나는 아무 기억도 상상력도 없다
파묻힌 찬 세월 속에
얼음공주 미이라 손가락의 문신처럼
움찔거리며 살아나는 네 그리움을 이해할 수 없다
죽었던 모기가 다시 살아난다면
해체된 지뢰가 다시 폭발한다면
끝난 사랑이 다시 불붙는다면
나는 갈갈이 찢어지고 말리
날 찾지 마
빠득빠득 잊혀지고 싶어
부족함이 가득한 이 세상
지난 시간을 내게 남겨 줘
묻힌 인연들이 제가 세운 둥지를 틀어 안고
흘러간다
흐르는 대로 흘러가면 좋으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9』(동아일보. 2013년 0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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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토끼
―유홍준(1962∼)
커다란 귀때기 두 개를 말아쥐고 들어올린다 빨간 눈알 두 개를 들여다본다 하얀 눈밭에서 토끼를 움켜잡은 사람이, 두 귀를 붙잡힌 토끼가, 버둥거린다 허공중에 버둥거리며 네 발을 휘젓고 있다
오오, 누가 귀때기를 움켜쥐고
저울질하듯
한 생명의 전부를 들어올리는가
오오, 이 세상 어떤 영혼 또 어떤 영혼의 전부가 저렇게 꼼짝없이 붙잡혀 들어올려져 버둥거리는가
두 눈 가득 빨갛게 피가 몰린 토끼의, 생명의, 무게의
눈알이여
커다란 귀때기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0』(동아일보. 2013년 0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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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가을의 노래
―폴 베를렌(1844∼1896)
가을날
비올롱의 가락
긴 흐느낌
하염없이
내 마음 쓰려라
종소리
가슴 메여
나 창백히
지난날 그리며
눈물 흘리네
쇠잔한
내 신세
모진 바람 몰아치는 대로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낙엽 같아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1』(동아일보. 2013년 09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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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전어
―김신용(1945∼)
참, 동전 짤랑이는 것 같기도 했겠다
한때, 짚불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구워지던 것
비늘째 소금 뿌려 연탄불 위에서도 익어가던 것
그 흔하디흔한 물고기의 이름이 하필이면 전어(錢魚)라니―
손바닥만 한 게 바다 속에서 은빛 비늘 파닥이는 모습이
어쩌면 물속에서 일렁이는 동전을 닮아 보이기도 했겠다
통소금 뿌려 숯불 위에서 구워질 때,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그 구수한 냄새가 풍겨질 때, 우스갯소리로 스스로 위로하는
그런 수상한 맛도 나지만, 그래, 이름은 언제나 상형(象形)의 의미를 띠고 있어
살이 얇고 잔가시가 많아 시장에서도 푸대접 받았지만
뼈째로 썰어 고추장에 비벼 그릇째 먹기도 했지만
불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냄새는, 헛헛한 속을 달래주던
장바닥에 나앉아 먹는 국밥 한 그릇의, 그런 감칠맛이어서
손바닥만 한 것이, 그물 가득 은빛 비늘 파닥이는 모습이
그래, 빈 호주머니 속을 가득 채워주는 묵직한 동전 같기도 했겠다
흔히 ‘떼돈을 번다’라는 말이, 강원도 아오라지쯤 되는 곳에서
아름드리 뗏목 엮어 번 돈의 의미를, 어원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바다 속에서, 가을 벌판의 억새처럼 흔들리는 저것들을
참, 동전 반짝이는 모습처럼 비쳐 보이기도 했겠다
錢魚,
언제나 마른 나뭇잎 한 장 같던 마음속에
물고기 뼈처럼 돋아나던 것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2』(동아일보. 2013년 09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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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당신의 차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심재상(1955∼)
헐떡이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기어 올라온 관광버스들이 줄줄이 휴게소로 들어온다. 그늘 한 점 없는 마당 한복판 펄펄 끓는 콘크리트 위에서 그만, 혼절해버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 안의 좁은 통로에 몰려나와 팔뚝을 걷어붙인 채 겅중겅중 뛰고 있는 중년의 아낙네들. 대체 무슨 힘이 닫힌 차창을 꿰뚫고
빤짝, 빤짝, 이느은 희미이한 기어억 속에
한번 보라니까 저 아래
8월의 햇살 폭포처럼 쏟아져내리는
막무가내의 오르막길 저속 차선도 없는
속수무책의 내리막길 이날 이때껏
칡넝쿨이 되어 호박덩굴이 되어
휘감으며 매달리며 기어온 내 인생
용서 못해 절대로 용서 못해
이날 이때껏
그 무슨 낙으로
그 무슨 열병으로
옘병할
말해보라니까 대체 무슨 수로
오늘 미소 지을 줄도 모르는 당신이
내일 앞산이 출렁이게 웃을 수 있겠냐구
만날 수 없어도 잊지는 말아욧
당신을 사랑했어욧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3』(동아일보. 2013년 09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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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검색
―오성일 (1967∼)
벌들도 가끔 부부 싸움 하는지
꽃들에게 물어보렴
어떤 감자는 왜 자주꽃을 피우는지
농부에게 물어보렴
바람도 잘 때 잠꼬대를 하는지
떡갈나무 잎들에게 물어보렴
예쁜 아가씨를 지나칠 땐 새들도 날갯짓을 늦추는지
구름에게 물어보렴
해가 바다에 잠길 때 신을 벗는지 안 벗는지
노을에게 물어보렴
비 오는 날 그림자들은 어디 선술집에라도 몰려가는지
빗방울에게 물어보렴
겨울밤 지하철 계단 할머니의
다 못 판 채소는 누가 사주는지
별들에게 물어보렴
궁금한 것 죄다 인터넷에 묻지 말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4』(동아일보. 2013년 09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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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물방울
―오두섭(1955∼)
시작은 모른 채
여기까지 달려온 길
소매 끝 꽉 붙잡았다
숨죽이며 벼랑 떠받는 바람
시간이 잠시 숨쉬기를 멈춘다
더 이상 터질 곳 없는
꽃의 절정인 듯
절체절명인 듯
빌 공!
사이 간!
목까지 올라온 숨
놓치지 않고 머금고 있다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만들고 있는 듯이
깜짝 순!
틈 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5』(동아일보. 2013년 0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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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공터의 사랑
―허수경(1964∼)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6』(동아일보. 2013년 09월 13일)
―시집『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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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번역의 유토피아
―김재혁 (1959∼)
이곳엔 사랑이 넘실대지요.
고통도 바지를 걷고 함께 개울을 건넙니다.
수초들은 뒤엉켜 있고,
가끔 미끄러운 돌이 딛는 발을 밀쳐 내는군요.
모두 사연을 갖고 사는 세상입니다.
사연들은 글자로 서서 머릿속을 헤맵니다.
글자들에게 사연을 물으면
모두 담배나 피워 물 뿐,
수초 속에 숨은 그리움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건넌다는 것은
늘 실패한 첫사랑입니다.
그래서 아쉽지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6』(동아일보. 2013년 0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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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초저녁 달
―박형준(1966∼)
내게도 매달릴 수 있는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침에는 이슬로
저녁에는 어디 갔다 돌아오는 바람처럼
그러나 때로는
나무가 있어서 빛나고 싶다
석양 속을 날아온 고추잠자리 한 쌍이
허공에서 교미를 하다가 나무에 내려앉듯이
불 속에 서 있는 듯하면서도 타지 않는
화로가의 농담(濃淡)으로 식어간다
내게도 그런 뜨겁지만
한적한 저녁이 있었으면 좋겠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8』(동아일보. 2013년 0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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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월부 장수
김사인
진눈깨비는 허천나게 쏟아지고
니미
욕만 나오고
어디로 갈까
평촌을 거쳐 옥동으로 가볼까
코흘리개 새끼들이 아슴아슴 눈앞에 밟혀오는데
즈어매는 이제쯤 돌아왔을지
빈 속에 들이부은 막걸리 몇 잔에
실없이 웃음만 헤퍼지누나
어디로 가서
몇 개 남은 밥솥을 마저 멕이나
바람은 바짓자락을 붙잡고 핑핑 울어쌓는데
저무는 길가에 철 놓친 수레국화 몇 송이
꺼츨하게 종아리 걷었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9』(동아일보. 2013년 0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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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가을나무의 말
―김명리(1959∼)
맹세는 깨어졌다
그해 가을이 다 저물도록
오마던 사람 오지 않았다
멍투성이 핼쑥한 가을하늘이
기다리는 사람의
부러진 손톱 반달 밑에 어려서
반 남은 봉숭아 꽃물이
버즘나무 가로수
단풍진 잎자락을 좇아가는데
붉디붉은 붉나무
샛노란 엄나무
그 물빛에 엎어지는
저 또한 못 믿겠는 사람 심사를
목마른 가을나무들이 맨 먼저
눈치 채지 않겠는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0』(동아일보. 2013년 0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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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미라보 다리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늘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저렇듯 천천히 흐르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들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1』(동아일보. 2013년 09월 27일)
미라보 다리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 내린다.
내 마음 속에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언제나 괴로움에 이어옴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면
우리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저렇듯이 천천히 흘러 내린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사랑은 흘러간다 이 물결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쩌면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한가
희망이란 왜 이렇게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네 사랑은 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김희보 편저『세계의 명시』(종로서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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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마흔 살
―송재학(1955∼)
미나리와 비슷하게 습지 따라가거나
잎과 줄기를 삶아 먹기 때문에 나온
미나리아재비란 이름에는 마흔 살의 흠집이 먼저다
제 이름 없이 더부살이한다는 의심이 먼저다
다섯 장의 꽃잎이 노란 것도
식은 국물같이 떠먹기 쉬운
약간은 후줄근한 아재비란 촌수 탓이다
저 풀의 독성이란 언젠가 다시 켜보려는 붉은 알전구들
돌아갈 수 없는 열정이
저 풀을 이듬해에 또 솟구치도록 숙근성으로 진화시켰다
노란 꽃 찾는 꿀벌의 항적(航跡)도 명주나비 얼룩무늬도
미나리아재비 살림의 쓴맛 단맛
막무가내 번식하는 미나리아재비 군락을 지나간다면
일장춘몽 쓸개는 곰비임비 햇빛에 널어라
양지에 피어난 것이 어디 미나리아재비뿐이냐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누군가 다가오지도 않는
마흔 살 너머!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2』(동아일보. 2013년 0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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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그 창
―양애경(1956∼)
그대 살았던 집 근처를 지나면
눈은 저절로 그 쪽으로 쏠려
귀도 쫑긋 그 쪽으로 쏠려
이 각도에선 그 집 지붕도 보이지 않지만
그 창도 물론 보이지 않지만
온몸이 그 쪽으로 쏠려 세포 하나하나가 속삭여
온몸의 솜털이 일어서 나부껴
이제 그대 거기 살지도 않는데
그런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길들여지지 않는 눈은… 보고 싶은 것을
보게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립다고 날마다 말할 수 있었으면 안 그랬을까?
아침마다 밤마다 살 부비며 살았으면 안 그랬을까?
그리워라… 이제는… 다른
사람이 사는… 그 창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3』(동아일보. 2013년 10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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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혼자
―이병률(1967∼)
나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
나무 이파리처럼 한 몸에 돋은 수백 수천이 아니라 하나
파도처럼 하루에도 몇백 년을 출렁이는
울컥임이 아니라 단 하나
하나여서 뭐가 많이 잡힐 것도 같은 한밤중에
그 많은 하나여서
여전히 한 몸 가누지 못하는 하나
한 그릇보다 많은 밥그릇을 비우고 싶어 하고
한 사람보다 많은 사람에 관련하고 싶은
하나가 하나를 짊어진 하나
얼얼하게 버려진, 깊은 밤엔
누구나 완전히 하나
가볍고 여리어
할 말로 몸을 이루는 하나
오래 혼자일 것이므로
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
스스로를 닫아걸고 스스로를 마시는
그리하여 만년설 덮인 산맥으로 융기하여
이내 녹아내리는 하나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5』(동아일보. 2013년 10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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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혼자
―이병률(1967∼)
나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
나무 이파리처럼 한 몸에 돋은 수백 수천이 아니라 하나
파도처럼 하루에도 몇백 년을 출렁이는
울컥임이 아니라 단 하나
하나여서 뭐가 많이 잡힐 것도 같은 한밤중에
그 많은 하나여서
여전히 한 몸 가누지 못하는 하나
한 그릇보다 많은 밥그릇을 비우고 싶어 하고
한 사람보다 많은 사람에 관련하고 싶은
하나가 하나를 짊어진 하나
얼얼하게 버려진, 깊은 밤엔
누구나 완전히 하나
가볍고 여리어
할 말로 몸을 이루는 하나
오래 혼자일 것이므로
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
스스로를 닫아걸고 스스로를 마시는
그리하여 만년설 덮인 산맥으로 융기하여
이내 녹아내리는 하나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5』(동아일보. 2013년 10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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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폐결핵
―박후기(1968∼)
날은 어둡고,
가는 비 내리고 가는귀먹는다
무심결에 뒤척이는 젖은 꽃잎,
골방의 한숨 섞인 수음처럼
납작 엎드린 채 부란(腐爛)하다
음란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비 내리는 날
아무도 없는 집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6』(동아일보. 2013년 10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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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폐가 노래한다
―하야시 후미코(1903∼1951)
새가 빛난다.
도시 위에서도 빛난다
새가 하얗게 빛난다
거리엔 꽃가루가 흩날리고, 전신주의 꼭대기가
흔들려요 흔들리고 있어요
머물 곳이 없다.
폐가 노래한다, 짧은 경치 노래인 걸.
갈색 빗속을
나는 귀를 막고 걷는다
귀가 아파, 아파요
빗속에서 새가 빛난다
발버둥치면서 난다
아득한 황야에 바람의 꿈
폐가 노래한다, 짧은 경치 노래인 걸.
나는 무엇 때문에 걷는 걸까
새의 운명이다
새처럼 어딘가에서 나는 태어났다
머물 곳이 없는 밤
반짝이며 난다
내가 빛나는 것이 아니다
사방의 광선이 와아 하고 웃는 것이다
나의 폐가 노래한다 그뿐인 거다….
혼자 사는 고양이, 혼자 사는 개
아무도 없는 길의 자갈돌
이슬이 사라진다
새의 하늘, 빛나는 새
못을 빼듯 매끄러운 빛
비틀거리며 비틀거리며 다만 빛나는 새
폐가 노래한다. 폐만이 노래할 뿐이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7』(동아일보. 2013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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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달콤한 인생
―권현형(1966∼)
이마 흰 사내가 신발을 털고 들어서듯
눈발이 마루까지 들이치는
어슴푸른 저녁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마루에 나앉아
밤 깊도록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설탕을 타 마신 막걸리는 달콤 씁쓰레한 것이
아주 깊은 슬픔의 맛이었습니다
자꾸자꾸 손목에 내려 앉아
마음을 어지럽히는 흰 눈막걸리에 취해
이제사 찾아온 이제껏 기다려 온
먼 옛날의 연인을 바라보듯이
어머니는 젖은 눈으로
흰 눈, 흰 눈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초저녁 아버지 제사상을 물린 끝에
맞이한 열다섯 겨울
첫눈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며
나는 다가올 첫사랑을 기다리며
첫눈 내리는 날이면
댓잎처럼 푸들거리는 눈발 속에서
늘 눈막걸리 냄새가 납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8』(동아일보. 2013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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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들국화
―천상병(1930∼1993)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쳐진 이 순간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9』(동아일보. 2013년 10월 16일)
들국화
천상병
산등성 외따론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시집『천상병 전집』(평민사, 2007)
■
·70. 6.『창작과 비평』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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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밤의 공벌레
―이제니(1972∼)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0』(동아일보. 2013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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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한기팔(1937∼)
사면이 유리(琉璃)의 벽(壁) 같은
깊은 고요 속
낮은 산자락에
푸른 대문이 있는
그 집
빨랫줄엔
빨래가 다 마르고
바지랑대 높이
구름 그림자 지나가니
하늘은
그대로 환한 거울 속인데
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온종일
사람이 그립습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1』(동아일보. 2013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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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물소리
―조정권(1949∼)
“그럼 저녁 6시 마로니에에서 보십시다”
퇴근 후 식어가는 찻잔을 앞에 두고
두 시간 여를 기다리다가
한 시간을 더 기다려보다가
어둠 속으로 나와 전철 타러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그 밤 어둠 속 마로니에 나무 밑에. 아!
이성선 시인이었다.
“조형이 마로니에라 하기에 이 나무 아래서 만나자
는 줄 알았지요.”
속초에서 예까지 짊어지고 온 몸이
계곡물소리를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 물소리가 나를 씻어주고 있었다.
그 밤, 몸은 내게 무슨 말을 전하려고 했을까
갯벌처럼 무겁게 누워 밤새도록 뒤척이다 그냥 간
몸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2』(동아일보. 2013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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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길에 누운 화살표
―최정례(1955∼)
네 비행기 날아가고
지금쯤 구름 속에 있겠다
바다 위에 떴겠다
드디어 땅바닥에 닿았겠다
그러나 생각 않기로 한다
대신 네 호흡인 구름에게
푸른 사과와 붉은 사과가 있다고 전한다
좌판에 푸른 사과와 붉은 사과
서로의 볼을 맞대고 있다고
내 앞에 트럭이 지나간다고
굵은 대파가 책처럼 높다랗게 쌓였고 밧줄에 묶였고
뿌리는 뿌리끼리 푸른 잎은 잎끼리
서로가 서로를 꽉 채우고 빈틈 하나 없이 저렇게
묶여 실려간다고
허공 속의 공책에
사과를 사과나무를
다 마셔버리고 싶다고 쓴다
사과나무 한 채를 다 마시고
지금쯤은 구름 속인지 바다 위인지 땅바닥인지
길바닥에 누운 화살표에게 묻는다
좌로 꺾인 하얀 화살표 따라간다고 쓴다
희망은 난폭해서
날마다 쫓기며 가보게 한다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3』(동아일보. 2013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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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옛 이야기 구절
―정지용(1902∼1950)
집 떠나가 배운 노래를
집 찾아오는 밤
논둑길에서 불렀노라.
나가서도 고달프고
돌아와서도 고달펐노라.
열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펐노라.
나가서 얻어 온 이야기를
닭이 울도록,
아버지께 이르노니-
기름불은 깜박이며 듣고,
어머니는 눈에 눈물을 고이신 대로 듣고
니치대든 어린 누이 안긴 대로 잠들며 듣고
웃방 문설주에는 그 사람이 서서 듣고,
큰 독 안에 실린 슬픈 물같이
속살대는 이 시고을 밤은
찾아온 동네 사람들처럼 돌아서서 듣고,
-그러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어떤 시원찮은 사람들이
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간 이야기어니
이 집 문고리나, 지붕이나,
늙으신 아버지의 착하디착한 수염이나,
활처럼 휘어다 붙인 밤 하늘이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전하는 이야기 구절일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4』(동아일보. 2013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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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나의 시(詩)
―약한 너에게 기대어
―김정란(1953∼)
그가 왔다. 살금살금, 자신없어하며, 나의 눈치를 보며. 얘, 하고 그가 불렀다, 얘, 나 좀 볼래? 내가 말했다. 넌 누구니, 주눅 들어 있는, 영양실조의 너는?
그애는 정말로 고개를 떨구고, 쩔쩔매면서, 손을 쥐어뜯으며, 땀을 뻘뻘 흘리며, 금방 눈물이 터질 듯한 눈으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
“하기는 말이지”
나는 너의 자신 없음을 지킨다, 아,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나의 짝궁이여.
늘상 어쩌면 이렇게 해거름의 시간에 우리는 외로이 한 의자에 앉는 것일까. 쓸쓸하게, 그 쓸쓸함으로 서로를 알밖에 없는 것처럼.
“얘 하지만 얘”
우리는 가만히 서로에게 기댄다. 세상은 빛으로 빛나는 것을, 눈뜨는 법만 배우면, 우리의 시간은 신나게 번쩍이는 강인 것을,
나는 그애를 토닥거려준다, 자, 배워야지, 안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말이야. 다행히도 살아 있는 동안 말이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5』(동아일보. 2013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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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뒷굽
―허형만(1945∼)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비스듬히 닳아 기울어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6』(동아일보. 2013년 11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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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흔들릴 때마다 한잔
―감태준(1947∼)
포장 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 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7』(동아일보. 2013년 11월 04일)
흔들릴 때마다 한 잔
감태준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수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몸 바뀐 사람들』.일지사. 1978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빨갛색 부분이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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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늙은 소
―정래교(1681∼1759)
힘 다해 산밭 갈고 난 뒤에
나무 그루터기에서 외로이 우네.
어떻게 해야 개갈(介葛)을 만나서
네 뱃속의 말을 할 수 있을거나.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8』(동아일보. 2013년 11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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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얼룩
―이사라(1953∼)
검버섯 피부의 시간이 당신을 지나간다
시간을 다 보낸 얼룩이 지나간다
날이 저물고 아픈 별들이 뜨고
내가 울면
세상에 한 방울 얼룩이 지겠지
우리가 울다 지치면
한 문명도 얼룩이 되고
갓 피어나는 꽃들도 얼룩이 되지
지금 나는
당신의 얼룩진 날들이 나에게 무늬를 입히고
달아나는 걸 본다
모든 것을 사랑하였어도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진 문명이 돌연 찾아든 것처럼
내 벽에는 오래된 당신의
벽화가 빛나겠지
천년을 휘돈 나비가 찾아들고
다시 한바탕 시간들 위로 꽃잎 날리고
비 내리고 사랑하고 울고 이끼 끼고
나의 얼룩도
당신처럼 시간을 지나가겠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9』(동아일보. 2013년 11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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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오늘의 커피
―윤성택(1972∼)
갓 내린 어둠이 진해지는 경우란
추억의 온도에서뿐이다
커피향처럼 저녁놀이 번지는 건
모든 길을 이끌고 온 오후가
한때 내가 음미한 예감이었기 때문이다
식은 그늘 속으로 어느덧 생각이 쌓이고
다 지난 일이다 싶은 별이
자꾸만 쓴맛처럼 밤하늘을 맴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우리는
각자의 깊이에서
한 그루의 플라타너스가 되어
그 길에 번져 있을 것이다
공중에서 말라가는 낙엽 곁으로
가지를 흔들며 바람이 분다
솨르르솨르르 흩어져내리는 잎들
가을은 커피잔 둘레로 퍼지는 거품처럼
도로턱에 낙엽을 밀어보낸다
차 한 대 지나칠 때마다
매번 인연이 그러하였으니
한 잔 그늘이 깊고 쓸쓸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0』(동아일보. 2013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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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겨울 이야기
―김상미(1957∼)
천 년 전 겨울에도 오늘처럼 문 열고 있었다
문 밖 짧은 해거름에 주저앉아 햇빛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는 북향,
쓸쓸한 그 바람소리 듣고 있었다
어떤 누구와도 정면으로 마주보고 싶지 않을 때
문득 고개 들어 바라보는 창
나뭇잎 다 떨어진 그 소리 듣고 있었다
세상 모든 추운 것들이 추운 것들끼리 서로 모여
내 핏속 추운 것들에게로 다가와
똑 똑 똑
생의 뒷면으로 가는 문
두드리는 소리 듣고 있었다
물결치는 겨울 긴 나이테에 휘감긴 울창한
숲 향기와 지저귀는 새소리와
무두무미한 생의 입김들이
다시 돌아올 봄 문턱에다 등불 환히
켜는 소리 듣고 있었다
마치 먼 길 혼자 달려온 천 년 전 겨울
천천히 가슴으로 녹이는 것처럼
내 몸 안의 겨울 이야기들이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에 실려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기억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듣고 있었다
천 년 전 겨울에도 오늘처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1』(동아일보. 2013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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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주님의 기도
―니카노르 파라(1914∼)
온갖 문제를 짊어지신 채
세속의 보통사람처럼
오만상을 찌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더는 저희를 생각하지 마소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괴로워하시는 걸 이해합니다.
당신께서 세우시는 것을 부수면서
악마가 당신을 괴롭힌다는 것도 압니다.
악마는 당신을 비웃지만
저희는 당신과 함께 눈물 흘리오니
낄낄대는 악마의 웃음소리를 괘념치 마소서.
불충한 천사들에 둘러싸여
어딘가에 계시기는 하는 우리 아버지
진심으로, 더는 저희 때문에 고통 받지 마소서.
당신은 아셔야 합니다.
신들도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며
저희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것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2』(동아일보. 2013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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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정릉 산보
―최동호(1948∼)
새벽 언덕길,
사지가 굳어 거동이 불편한 아들에게 아침체조를 가
르치는 젊은 어머니가 있다
좁은 산길,
중학생 영어를 암기하다 얼른 등 뒤에 책을 감추고
내려오는 중년여성이 있다
봄 언덕길,
꽃아 예쁘다 새야 반갑다 손뼉 쳐 햇빛 가르며 올라
가는 꼬부랑 할머니가 있다
점심 산보길,
소풍 온 유치원 아이들 새처럼 포르르 날아오르는 노
랫소리가 있다
저녁 산보길,
빛나던 대낮의 햇살들 다 서풍에 실어 보낸 나뭇잎들
이 실개천에서 반짝이며 놀던 물비늘 찾아오라고 초
저녁 하늘 멀리 있는 별들을 부르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3』(동아일보. 2013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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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난 몰상식한 시가 좋다
이승훈
20년이 넘는다. 똑같은 방에서 똑같은방을 보며 똑같은 방과 함께 웃으며 담배 피우며 똑같은 책상 똑같은 의자 아아 얼마만이야? 벽에 걸린 거울도 똑같고 거울 보는 나도 똑같고 20년 20년 아니 백 년이다. 스탠드 재떨이도 똑같지. 이 방에서 이 방을 먹으며 똑같은 저녁이면 똑같은 방을 목욕시키고 똑같은 옷을 갈아입혔지. “그렇고말고요.” 방이 말하고 난 “잠자코 있어!” 소리친다. 이 방이 아프리카인지 모른다. 난 몰상식한 시가 좋다. 백년 동안 목마른 방에게 물 한 컵 주며 살았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4』(동아일보. 2013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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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비밀정원
―정용주(1962∼)
다래 덩굴처럼
산속으로 이어진 오솔길
죽어 쓰러진 나무들 스스로 껍질을 벗겨내고 있다
엉킨 덩굴에 매달려 쪼그라든 몇 개 산열매처럼
지워져가는 길의 가지 끝에서
돌무더기 쌓아놓은 흔적만 남아 있는
화전민들의 옛 집터
증거해야 할 아무 자랑도 없이
부서져 내리지 못하는 이끼 덮인 돌 위의 돌
언제부터 자란 오미자 덩굴이
쓸쓸한 흔적의 정원에 공중 그물을 엮었다
스웨터를 장식하는 구슬 같은
오미자 송이가 주렁주렁 열렸다
햇살의 정적을 빨아먹으며 몸을 붉혀가는 오미자 열매
스스로 제 고독을 완성시켜가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5』(동아일보. 2013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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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박주택(1959∼)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었다 작은 저녁이었다
우유를 먹은 배가 슬슬 부글거릴 때쯤
부딪쳐서 돌아올 것이 없는 초원이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날짜는 돌아온다
벌레들이 풀과 풀 사이를 건너뛰고 개 짖는 소리는
어디에서나 같다는 사실
(듣기를 달리 들을 뿐이지!)
작은 저녁이, 노을이 파고든 자리 어둠이 파고들어서
사람들이 자신 속으로 걸어가 자신이 되는 저녁
여기에도 사람이 살아 긴 옷을 끌며
맨발로 흙 위를 걸으며 돌아가는 법을 배우지
초원을 건너오는 멀리 기차 지나가는 소리
딱 하고 옆방에서 커피포트 멈추는 소리
벌레들의, 까마귀들의, 목구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불안도 잠자지 않고 순간에 부딪치는 말처럼
생각들이 칼칼하게 치뜨고 있는데
불안과 불안이 부딪치는 불꽃들
겨우 요양하는 기분인데 날이 갈수록 유배되는 기분
그러나 이곳 날씨는 여름, 꽃들과 함께 놀아, 무엇을 하든
어른이잖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6』(동아일보. 2013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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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겨울이 오면
―김갑수(1959∼)
겨울이 오면 맑은 얼음장 지쳐가는
낮은 햇살, 겨울이 오면 배달해주게
지난여름에 다 못 쓴 편지, 우연한 사건들과
몇몇의 사람, 오 겨울이 오면
내게 말해주게 사람과 사람이
어긋난 흔적, 몸부림 따위들, 오래
예정된 결말의 느릿느릿한 진행에
끝끝내 겨울이 오면 그 황황한 뒷모습
서둘러 부려놓는 필연의 짐짝에
겨울이 오면 지친 나뭇가지의 손짓으로
헐겁게 흔들리는 약속들과 다만 몇몇의 사람
어떤 일도 체념하기 위하여 겨울이 오면
맑은 얼음장 지쳐가는 운명의 낮은 햇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7』(동아일보. 2013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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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은혼
―김명인(1946∼)
바닥의 무료까지
지치도록 퍼낼 생(生) 거기 있다는 듯
모든 풍경들 제 색깔을 마저 써버리면
누런 햇빛 알갱이들 강을 싸안고 흩어지는 것 같아
물소리 죄다 흘러 보내더라도
더는 못 가게 마음 방죽 쌓아 너를 가둔다
잎들을 얽으려 할 때 햇살들이 마구 엉겨 붙어서
초록 기억으로 흠뻑 젖었던 적은 없느냐?
그때에도 사나운 이목, 다리 아래 격랑보다 더 두려웠다
나는 무슨 워낭으로도 네 베틀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어서
갈바람 낙엽 행낭에 담아 세월이라 부친다
받아 보거든 은하 물살 거세었음을 알리라
머리 위로 깃털 빠진 까막까치들 날아간다
길 아닌 길도 땅 위의 것이라고
이제 내가 겨우 깨쳐서 놓고 있는 징검다리,
저문 혼례 그 언저리나 맴도는
이 가을날 꿈같이, 빛같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8』(동아일보. 2013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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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나의 방랑(환상)
―아르튀르 랭보(1854∼1891)
나는 쏘다녔지, 터진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내 외투는 닳아빠져 관념이나 다름없었지.
창궁 아래 걷는 나는, 뮤즈여, 그대의 충복이었네.
오, 랄라, 나는 눈부신 사랑을 꿈꾸었노라!
내 단벌 바지엔 커다란 구멍이 나고,
나, 꿈꾸는엄지동자,걸음마다각운(脚韻)을떨어뜨렸지.
내 여인숙은 큰곰자리,
하늘에선 내 별들이 다정하게 살랑거렸네.
나는 길가에 앉아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였지.
멋진 9월의 저녁나절, 이슬방울들을
기운을 북돋우는 술인 양 이마에 느끼면서
환상의 그림자들 가운데서 운(韻)을 맞추며
나는 한쪽 발을 가슴까지 들어 올려,
해진 구두의 끈을
리라 타듯 잡아당겼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9』(동아일보. 2013년 1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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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도끼의 시
―손택수(1970∼)
예전의 독기가 없어 편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날카로운 턱선이 목살에 묻혀버린
이 흐리멍텅이 어쩐지 쓸쓸하다
가만히 정지해 있다 단숨에 급소를 낚아채는 매부리처럼
불타는 쇠번개 소리 짝, 허공을 두 쪽으로 가르면
갓 뜬 회처럼 파들파들 긴장을 하던 공기들, 저미는 날에 묻어나던 생기들,
애인이었던 여자를 아내로 삼고부터
아무래도 내 생은 좀 심심해진 것 같다
꿈을 업으로 삼게 된 자의 비애란 자신을 여행할 수 없다는 것,
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
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녹스는 순간들을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을까
혼자 있을 때면 이얍 어깨 위로 그 옛날 천둥 기합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피시식
알아서 눈치껏 소리 죽인 기합 소리는 맥이 빠져 있기 마련이다
한번이라도 꽉 짜인 살과 살 사이의 틈에 제 몸을 끼워 맞추고
누군가를 단숨에 관통해 본 자들은 알리라
나무는 저를 짜갠 도끼날에 향을 묻힌다
도끼는 갈고 갈아도 지워지지 않는 묵향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흙이 된다
뒤꿈치 굳은살 같은 날들 먼지 비듬이라도 날리면
온몸이 근질거려 번쩍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고 싶은 도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0』(동아일보. 2013년 12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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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아픔
―강정(1971∼ )
계절을 잊은 눈비가
땀구멍마다 들어찬다
몸 안에 잠자던 운석이 눈을 뜬다
목탁 구멍 같은 뼈마디 사이로
이승이 밀려 나간다
구름들의 뒤 통로에
짓다 만 집 한 채 스스로 불탄다
마지막 입술이 한참동안 떨린다
나부끼는 재(災)
누군가 텅 빈 문을 열고
타다 남은 햇살을 주워 담는다
뜻 없이 불러본 이름들이 마음보다 길게 늘어서
지나온 이승에서 즐겁게 눈물겹다
보이는 것들은 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된다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어느덧 새 이름을 얻는다
계절이 빠르게 바뀐다
숨을 쉬니 한 세상이 저만치
다른 상처에 다 닿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1』(동아일보. 2013년 1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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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바다 속 마을
―함성호(1963∼)
눈이 내리는 속초는 바닷가 덕장에 널려 있는, 푸른 명태의 아가미 근처에 있다 아― 하고 벌린 입 미세한 이빨들 사이로 눈이 쌓이고, 그런 날 겨울 바다는 적막이다 명태 아가리에 소복이 쌓인 산송장 같은 눈을 훔쳐 먹으며 아이들이 빈 그물을 흔들고 있다 무너져 내리는 함박눈 맞으며 누군가 환난의 호루라기를 불어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온다 사르락사르락 눈 내리는 소리가 낮은 파도 소리와 같이, 얼어붙은 모래사장에서 살을 섞고 있다 긴 목도리를 눈 밑까지 두른 옆집 누나가 슬리퍼를 끌며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다 궂은 날이나 마음 다친 날은 만(灣)을 건너는 사람 없어, 갯배에서 바다로 내린 밧줄 위로도 흰 눈은 쌓이고, 그런 날 속초는 지상에 없는 마을 같다 누군가 아주 멀리서 누군지 모르는 흐린 이름 부르는 소리 들린다 저 배 위로 아무 울림도 없이 흰 눈은 쌓여 바닷가 모래밭과 흰머리 무거운 송림 사이에서 붉은 해당화도 서럽게 설핏, 피다 만 것 같은…… 그런 날 속초는 아가미 호흡을 하는 슬픈 생선 같기도 하다가, 아무래도 그물에서 잘못 건져 올린 죽은 시계 소리 같기도 하다 등대는 뚜우 뚜우 배들을 부르고, 안개등을 흔들며 호응하는 목선이 들어오는 세상의 바다
바다 속 마을에는 흰 눈이 내려, 깊은 바다 속 골짜기에도 하염없이 눈은 내리고,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유물처럼―눈白은 내리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2』(동아일보. 2013년 12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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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풍선
―황학주(1954∼)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날이 있다
아이에게 풍선을 불어 묶어주려다
갑자기 바람구멍이 열리자
풍선이 갯벌 위로 끌려 날아간다
무슨 말을 저리 온몸으로 하나싶어 문득 소름 돋는다
간간이 대화를 하며 뭔가 부풀리다
열려버리는 바람구멍
묵은 굴레를 하나도 풀지 못한 채
입김처럼 그것이 사라지는 날이 있다
그 사이 나는 얼음장처럼 얼다 녹는다
색색의 풍선이 떠있는 바다
또 하나 풍선이 터지면
부끄러운 입술 하나가 다물어지는 걸까
풍선 속에 하나 둘씩 별을 묶던
여기, 마음은 그때 가난한 밤을 위한 묵념으로 흐른다
말이 나를 끌고 멋대로 날아가도
기절할 정도로 좋았던 시절은 이미 끝난 지 오래인데
아직도 풍선을 불고 있는
슬픈 입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3』(동아일보. 2013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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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하루
―윤명수(1941∼ )
신대방 전철역 아래 도림천 고수부지에는 매주 월요일 새벽이면 뱀이 기어가듯 인간 띠가 늘어선다 꼬부라진 지팡이들이 급식 순번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더러는 노숙을 해가면서 새벽안개로 아침을 때우고 하품을 입에 문 채 시멘트 바닥을 긁고 있다 오늘은 선착순 오백 명까지다 순번표를 받지 못한 빈손들은 돌계단에 지팡이를 내려놓고 널브러져 있다 이글거리는 햇살만 한입 가득 물고 먼 하늘만 쳐다본다 순번표 속에는 단팥빵 세 개, 이백 밀리리터 두유 한 팩, 현금 천 원이 들어 있다 어떤 이는 빵 한 봉지와 두유를 그 자리에서 천 원을 받고 되팔기도 한다 그 돈으로 라면을 사들고 휘적휘적 허기진 쪽방으로 지팡이에 끌려간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3』(동아일보. 2013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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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언니에 대한 칭찬의 말
―비스와바 심보르스카(1923∼2012)
우리 언니는 시를 쓰지 않는다.
아마 갑자기 시를 쓰기 시작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시를 쓰지 않았던 엄마를 닮아,
역시 시를 쓰지 않았던 아빠를 닮아
시를 쓰지 않는 언니의 지붕 아래서 나는 안도한다.
언니의 남편은 시를 쓰느니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할 것이다.
제아무리 그 시가 ‘아무개의 작품’이라고 그럴듯하게 불린다 해도
우리 친척들 중에 시 쓰기에 종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언니의 서랍에는 오래 된 시도 없고,
언니의 가방에는 새로 쓴 시도 없다.
언니가 나를 점심식사에 초대해도
시를 읽어 주기 위해 마련한 자리는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끓인 수프는 특별한 사전 준비 없이도 그럴싸하다.
그녀가 마시는 커피는 절대로 원고지 위에 엎질러질 염려가 없다.
가족 중에 시 쓰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그런 가족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결국 시인이 나왔다면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는 법은 없다.
때때로 시란 가족들 상호간에 무시무시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세대를 관통하여 폭포처럼 흘러간다.
우리 언니는 입으로 제법 괜찮은 산문을 쓴다.
그러나 그녀의 유일한 글쓰기는 여름 휴양지에서 보내온 엽서가 전부다.
엽서에는 매번 똑같은 약속이 적혀 있다.
돌아가면
얘기해 줄게.
모든 것을,
이 모든 것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5』(동아일보. 2013년 12월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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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인성의 비교급
―윤병무(1966∼)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낫고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하지만
사상체질(四象體質)도 두 가지쯤 섞여 있듯이
인성(人性)도 짬짜면이라 탄식이 이어진다
정의롭지 못한 영리함의 저속함이여
영리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허망함이여
착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역겨움이여
정의롭지 못한 착함의 막연함이여
그럼에도 굳이 하나만 골라 비교하자면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
보는 것이 진실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7』(동아일보. 2013년 12월 20)
―시집『고단』(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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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인성의 비교급
―윤병무(1966∼)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낫고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하지만
사상체질(四象體質)도 두 가지쯤 섞여 있듯이
인성(人性)도 짬짜면이라 탄식이 이어진다
정의롭지 못한 영리함의 저속함이여
영리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허망함이여
착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역겨움이여
정의롭지 못한 착함의 막연함이여
그럼에도 굳이 하나만 골라 비교하자면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
보는 것이 진실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7』(동아일보. 2013년 12월 20)
―시집『고단』(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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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인사동으로 가며
―김종해(1941∼)
인사동에 눈이 올 것 같아서
궐(闕) 밖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퍼다 버린 그리움 같은 눈발
외로움이 잠시 어깨 위에 얹힌다.
눈발을 털지 않은 채
저녁 등이 내걸리고
우모(羽毛)보다 부드럽게
하늘이 잠시 그 위에 걸터앉는다.
누군가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를
눈 속에 파묻는다.
궐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내 생의 그리움
오늘은 인사동에 퍼다 버린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8』(동아일보. 2013년 12월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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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봉숭아 꽃물
―이상교(1949∼)
봉숭아 꽃물
빨강 꽃물
콩콩 찧어
손톱 위에 두고
열 손가락 끝
호호
무명실로 묶어두었다.
밤사이
꿈속에서 꿈을 깨어
풀어볼 때마다
그대로 흰 손톱
안타까운 흰 손톱.
눈뜨자 곧
풀어보았다.
손톱에 핀 봉숭아 꽃물
바알간 봉숭아 꽃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9』(동아일보. 2013년 12월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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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악기
―도종환(1954∼)
언덕 위에서 누군가 트럼펫을 분다
그때 우리가 불었던 악기도 저런 소리를 냈었다
서툴지만 뜨거웠던 소리
열정이 아니면 음악이 아니라고 믿었던 소리
미숙하지만 노래 한 곡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던 소리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소리
몸속으로 악기소리만을 서둘러 채우고는
민망하여 허겁지겁 악기를 챙겨 넣으며
지퍼를 올리던 날들
너무 이르거나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아
스쳐가고 만 사람들
저 악기소리 속에는
그런 순간 그런 얼굴이 들어 있다
이제 나의 악기소리는 매끄럽지만
열정의 뜨거운 숨소리는 없다
내가 뿜어내는 음표들은 세련된 활이 되어 날아가지만
그때 그 풋풋함은 없다
언덕 위에서 누군가 젊은 트럼펫을 분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0』(동아일보. 2013년 12월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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