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말(淸末) 서화가 오대징(吳大澂)의 전서(篆書) <낙지론(樂志論)>
낙지론(樂志論)
凡遊帝王者는 欲以立身揚名耳로되
而名不常存하고 人生易滅하니
優遊偃仰하여 圖以自娛其志하리라.
대체로 제왕의 문에 노니는 자는 입신양명하고자 하기 때문일 뿐이나,
이름은 항상 남는 것이 아니고 인생은 쉽게 없어지니,
여유롭게 노닐며 편안히 즐기면서 그 뜻을 스스로 즐겁게 함을 꾀할 것이리라.
使居有良田廣宅이 背山臨流하여
溝池環匝하고 竹木周布하여
場圃築前하고 果園樹後라.
만약 거처하는 곳에 좋은 밭과 넓은 집이 있다면
산을 뒤로 하고 물은 앞으로 한다.
연못을 삥 둘러 만들고, 대나무를 두루 심으며
채마밭은 앞에 만들고 과수원은 뒤에다 만든다.
舟車足以代步涉之難하고
使令足以息四體之役이라.
배와 수레가 걷고 물 건너는 어려움을 대신할 수 있고,
심부름하는 아이는 육체의 노역을 쉬게 할 수 있다.
養親에 有兼珍之膳하고 妻孥無苦身之勞하여
良朋萃止則陳酒肴以娛之하며
嘉時吉日則烹羔豚以奉之하고
躕躇畦苑하며 遊戲平林하며 濯淸水追涼風하며
釣游鯉하며 弋高鴻하며 諷於舞雩之下하고
詠歸高堂之上이라.
맛있는 반찬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처자식은
몸을 고생시키는 수고로움이 없다.
좋은 벗이 갑자기 오면 술과 안주를 내어 그를 기쁘게 하고,
좋은 때와 길일에는 염소나 돼지를 잡아 대접한다.
동산을 거닐다가 숲에서 놀고 맑은 물에 몸을 씻고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헤엄치는 잉어를 잡고
높이 나는 기러기를 잡는다. 기
우제 지내는 제단 아래(너른 언덕)에서 바람을 쏘이고
집으로 노래 부르며 돌아간다.
安神閨房하여 思老氏之玄虛하고
呼吸精和하여 求至人之彷佛이라.
깊숙한 방에서 정신을 편안하게 하여 노자의 현묘하고
허무한 도를 사유하고, 정신을 호흡하여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 닮기를 추구한다.
與達者數子로 論道講書하여 俯仰二儀하고
錯綜人物하여 彈南風之雅操하고 發淸商之妙曲이라.
도에 통달한 몇 사람과 함께 도를 논하고
책을 강론하여 하늘과 땅을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고,
고금의 인물을 한 데 모아 평론하여서
남풍(南風: 순임금이 지은 시)의 아정(雅正)한 곡조를 타고,
청상(淸商: 맑은 상(商) 음(音))의 신묘한 곡을 연주한다.
逍遙一世之上하고 睥睨天地之間하여
不受當世之責하고 永保性命之期라.
한 세상을 소요하면서 천지를 아래로 본다.
현 시대의 책임을 맡지 않고, 본래의 이름을 길이 보존한다.
如是則可以凌霄漢하여 出宇宙矣리니 豈羨夫入帝王之門哉아?
이와 같이 한다면, 하늘의 은하수를 건너서
우주로 나아갈 것이니, 어찌 제왕의 문에 드는 것을 부러워하겠는가.
* 이 글은 전체적으로 ≪후한서(後漢書)≫ 권(卷)49,
중장통(仲長統) 열전(列傳)의 일부 내용을 쓴 것이라고 합니다.
※ 중장통(仲長統, 179∼220): 후한(後漢)시대의 학자이자
고사(高士). 환로(宦路)의 길을 마다하고 포의(布衣)로 일생을 마쳤다.
평소 "무릇 帝王을 따라 노니는 자들은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자 해서이나,
이름은 항상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한가로이 노닐며 자유롭게 기거하여 진실로 그
뜻을 스스로 즐길 뿐"
(凡遊帝王者 欲以立身揚名耳 而名不常存
人生易滅 優游偃仰 固以自娛其志)이라 하였다.
※ 場圃(장포): 남새밭/霄漢(소한): 하늘.
창천(蒼天)/舞雩(무우): 기우제 또는 기우제 지내는 제단을 뜻한다.
여기서는 '너른 언덕'으로 해석했다.
華山에 새겨진 오대징(吳大澂)전서(篆書) ㆍ蓮峰(연봉)
개설
오대징은 30대의 나이에 관직에 진출하여 1870년대, 1880년대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직후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청일전쟁(淸日戰爭)에 참가하였으나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복귀하지 못하였다. 퇴직 이후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였으며,
청나라 말기 고문자(古文字) 및 금석문(金石文)의 대가이자
예서(篆書)에 능한 서예가로 유명하였다.
활동 사항
오대징의 본명은 오대순(吳大淳)이었는데, 1861년 동치제(同治帝)의 휘(諱) 재순(載淳)을
피하기 위하여 개칭하였다. 1868년 진사(進仕)에 급제한 뒤 한림원(翰林院) 편수(編修),
섬감학정(陝甘學政), 하남 하북도(河南河北道), 태부시(太仆寺) 경(卿),
좌부도어사(左副都御史) 등의 관직을 지냈다. 섬감학정으로 재직 시
조정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자희태후(慈禧太后)의 원명원(圓明園) 중건 명령에 대하여
중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로 강직한 성격이었다.
1884년 흠차회판북양사의(欽差會辦北洋事宜)에 임명되어
북양통상대신(北洋通商大臣)이홍장(李鴻章)과 함께 수도 북경(北京) 및
청의 북부 지역 안보를 책임지게 되었다. 같은 해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이홍장은 오대징과 4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고(『고종실록』 21년 11월 16일),
오대징은 한 달 넘게 조선에 체류하면서 갑신정변에 대한 조사, 조선 정부 및
일본 정부와의 교섭을 진행하였다(『고종실록』 21년 12월 24일).
1880년 처음 길림(吉林)에 파견된 오대징은 길림장군(吉林將軍)과 함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황무지 개간, 이민(移民) 정책 등을 추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885년에는 청 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이 지방에 재차 파견되어 러시아와
동부 지역 국경 담판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훈춘(琿春)의 흑정자(黑頂子) 지방을 회수하고,
두만강(豆滿江)에 출입하는 중국 선박이 러시아 측의 저지를 받지 않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1886년 광동순무(廣東巡撫), 1888년 하도총독(河道總督),
1892년 호남순무(湖南巡撫) 등의 중책을 거쳤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자청하여 30,000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으나,
일본군에게 빼앗긴 요동(遼東) 해성(海城) 지역을 탈환하는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결국 패배의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영원히 관직에 임용하지 않는다는
‘혁직영부서용(革職永不敍用)’의 처분을 받았다. 이후에는 평소 소장하던
서화 및 골동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다 1902년 사망하였다.
그는 금석문에 관한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예서체에 능한 서예가로도 유명하였다.
저술 및 작품
『각재시문집(恪齋詩文集)』·『각재집고록(恪齋集古錄)』·『고옥도고(古玉圖考)』·
『고자설(古字說)』·『권형도량시험고(權衡度量試驗考)』·『길림감계기(吉林勘界記)』·
『설문고주보(說文古籀補)』·『십육금부재인존(十六金符齋印存)』·『자설(字說)』·
『긍헌소견소장길금록(恆軒所見所藏吉金錄)』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