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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주님, 제가 당신 불멸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소서!
오늘 축일은 맞이하시는 아가타 동정 순교자는 체칠리아, 루치아, 아녜스 성녀와 더불어 로마 교회의 네 동정 순교자로 널리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아가타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시절, 이탈리아의 최남단 시칠리아 섬 카타니아 지방 명망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다방면에 출중했던 그녀는 당시 총독의 눈에 띄게 됩니다.
아가타에게 완전히 빠져 제 정신을 못 차리게 된 총독은 그녀가 싫다는 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청혼을 거듭합니다.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청혼을 거부하자 심기가 완전히 불편해진 총독은 그녀가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알고 법정으로 넘깁니다.
재판정에서 아가타는 갖은 잔혹한 형벌을 다 받지만 꿋꿋하게 견뎌냅니다. 한 차례 끔찍한 고문을 잘 견뎌낸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다시 옥으로 돌아갈 때마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만면에 희색을 띤 채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으며, 고문으로 인한 처절한 고통을 기도로써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통을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다음날 다시 재판정으로 끌려 나온 아가타의 태도는 더욱 의연했었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형리들은 빨갛게 달군 쇠로 그녀의 가슴을 도려냈지만 그 끔찍한 고통 중에서도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정결에 대한 사랑으로 이와 같은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제 구세주 하느님, 이 고통을 잘 참아 이기도록 도와주소서.”
다시 감방으로 돌아온 다음 날 베드로 사도가 치료 약을 가지고 나타나자 아가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님! 저는 세상의 약으로 제 육신을 고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아가타의 의연한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총독은 날카로운 유리 파편과 불타고 있는 석탄 위에 아가타를 뒹굴게 했다고 합니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 숨을 거두어가던 그녀는 이윽고 마지막 순간이 오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착한 스승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제가 박해자의 고통을 이기게 하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주님, 제가 당신 불멸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소서.”
오직 주님과 온전히 일치해 있었던 아가타였기에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고통에도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두려운 것 오직 한 가지는 주님과 멀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코 6,1-6
“너를 안다.”라는 말은 “너를 무시해.”라는 뜻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방식은 ‘안다’라는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유년기와 가족 등을 다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다고 말할 때 이미 모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하고 그 고을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다라는 말은 “더는 믿고 희망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는 것을 믿고 희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면 그 누군가를 창조했다는 뜻입니다.
스마트폰을 아는 것은 다른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 스마트폰을 만든 당사자뿐입니다.
스마트폰끼리 서로 상대를 안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개와 고양이가 서로 상대를 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을 보는 인간으로선 얼마나 웃길까요?
우리는 결코 남을 안다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교만이 그 사람을 가두고 그 사람과의 더 친밀관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전에 말씀드린 예화지만 이 내용과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기에 한 번 더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 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사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규정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토마스의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 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14살 때 놀자고 말하는 토마스를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며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이후 토마스가 노동으로 돈을 벌어 열일곱 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돈을 버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모아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는 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돈을 줄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토마스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에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혼자 야근을 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정말 성실한 친구네. 이렇게 열심히 일해주어서 고맙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약간 당황하면서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자네 좋아하는 사람 있는가?”
“예? 아, 예. 한 명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요.”
“그렇군, 혹시 존경하는 이유가 있나?”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 그렇다면 임무를 주겠네.
오늘부터 길을 걷거나, 일하거나,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라는 말을 500번 반복하게.”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한 번도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가슴이 북받쳐 눈물이 났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지역 최고의 부동산 중개인이자 비즈니스맨이 되었습니다.
목표를 이룬 지금은 ‘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을 쉼 없이 반복하며 또 한 번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당신의 인생을 180도 뒤집는 방법’, 체인지 그라운드, 유튜브]
락 토마스에게 “난 널 알아.”라고 말하는 아버지와, “넌 뭐든지 될 수 있어.”라고 말하던
직장 상사 중 누가 토마스를 진정으로 안 사람일까요?
토마스를 안다고 규정하지 않은 직장 상사입니다.
안다고 할 때 모르는 것이고, 모른다고 할 때 아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우주에 관한 책을 본 기억이 납니다.
아주 어렸을 때라 광활한 우주의 흑백 사진만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우주의 끝이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답은 “모르겠다.”였습니다.
우주도 하나의 물체인데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한 사람이 우주보다 더 신비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주도 모르는데 한 인간을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안다고 할 때 그 사람에 대한 더 이상의 믿음이나 희망, 더 나아가 사랑이 커질 수 없습니다.
믿음과 희망, 사랑은 그 사람을 마치 새장에서 밖으로 새를 풀어놓는 것처럼 내가 그 사람을 규정하지 않을 때 훨훨 날아가 더 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 백종원 씨하면 떠오르는 것이 ‘설탕’이었고, 음식이 맵고 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선입관이 있는 사람들은 골목 식당에서 그의 레시피와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다시 손님이 떨어지고 장사가 안되며 그 탓을 백종원 씨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백종원 씨는 남이 자신을 안다고 할 때 거기에 갇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규정하는 사람만 피해를 봅니다.
절대 내가 인간을 안다고 규정하여 그 인간을 안 하느님까지 안다고 규정하는 교만의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 하느님까지도 내가 만들어낸 한계에 가둬버릴 수 있습니다.
또 남이 나를 안다고 말할 때 그 말에 갇히지 맙시다.
“당신이 나를 만들었습니까?”라고 반문하십시오.
나를 아시는 분은 나를 만드신 하느님뿐입니다.
나를 안다고 나를 규정하는 사람을 벗어나야 하늘 높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존재입니다.
사람을 모른다고 할 때 그 사람을 만든 하느님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믿고 희망할 수 있게 되며 그래야 사랑이 증가합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그는 자신도 자리에 멈춰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남도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6,1-6: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다섯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2-3절).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사이에 목수로 통했다. 그리고 한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고 있다. 관례에 따르면 “요셉의 아들”(마태 13,55 참조)이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3절)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수님은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신다. 예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한 예언자들과 당신을 비교하시면서(4절) 당신 자신도 결국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5절) 나자렛에서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6절 참조). 치유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치유하는 분에게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기적이란 신앙이 있거나 적어도 믿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 신앙이라는 배경이 없으면 기적이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의 혜택도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나, 내적인데 볼 줄도 모르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외적인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멋대로 판단하는 것이 문제이다. 외모로만 판단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 좀 더 이웃의 장점을, 내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제 우리 아들이 제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제 남편은 제가 너무 예뻐서 걱정된대요. 누가 훔쳐 갈까 봐요.”
“아빠가 저에게 믿는다고 했어요. 감동이었어요.”
여러분 가정은 이런 말이 빈번하게 나올 수 있는 곳인가요? 아니면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인가요? 사랑한다는 말, 믿는다는 말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까울수록 이런 말이 자주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를 헤아리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가까우니까 나를 잘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에게 상처 되는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듣게 되면 어떨 것 같습니까? 예의 없다는 말, 무식하다는 말, 상식에 벗어난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서로 머리카락 잡고 싸울지도 모르겠네요.
상대방이 상처받는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자기 마음대로 하면 속은 시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어떨까요? 여과 없이 하는 말이 화살처럼 직선의 말이 되어 나가게 됩니다. 상대의 마음속을 헤집어서 상처를 입고 계속 아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약간의 사랑만 있어도 쉽게 감동합니다. 그런데 쉽게 아파하는 것도 우리입니다. 그래서 말에 조금 더 신경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말에 과연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 점만 기억한다면 예쁘고 감동적인 말을 하는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직업과 그 가족을 모두 잘 알고 있음도 말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과 책망을 하는 고향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명망과 권위를 가진 예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을 보고도 못마땅해하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믿지 않으니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항상 사랑을 담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어지면 당연히 믿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 예수님은 함께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마음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사랑을 담으려는 노력이 먼저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주님을 초대할 수 있고, 주님과 함께하면서 사랑이 충만한 믿음의 관계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은 고통받는 이들로 넘쳐나지만, 고통을 극복하는 이들 또한 세상에 가득하다(헬렌켈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내십시오.”(히브12,7)
시련은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분명하게
선을 그어주는
말씀의 훈육이라네.
시련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고향과 친척과 집을 떠나
말씀이 이끄시는
영적인 여정을
믿음으로
걸어가게 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2,4-7.11-15
형제 여러분,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14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또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하나라도 솟아나 혼란을 일으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