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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답사 교과교육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양주석
예산 남연군 묘, 보덕사 - 2006. 07. 22
남은들 상여 보호각
이곳에 있던 남연들 상여는 2년전에 중요한 장식품들을 누가 훔쳐가 없었는데, 지난 3월에 문화재청에서 찾아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상여 전체를 보관하고 있다.
2003년 1월에 보호각에 있을 때 찍은 사진
경기도 연천에 있는 남연군 묘를 이장할 때, 상여는 한 지방을 지날 때 마다 지방민들이 동원되어 옮겼는데, 맨 마지막에 운구를 한 '나분들(남은들)' 사람들에게 상여가 기증되었다.
예산의 고건축박물관장인 전흥수 목수가 똑같이 제작한 상여가 남연군묘의 보호각에 있다.
서쪽의 주산 가야산 석문봉은 두 바위가 문기둥처럼 서 있다.
남연군 묘가 있던 곳은 수덕사 보다 더 큰 가야산 제일의 사찰 가야사 금탑자리다.
장명등과 석양 망주석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로 이 남연군묘가 위치한 자리는 본래 가야산 일대에서 제일 큰 절인 가야사(伽倻寺)는 99개의 암자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큰절이었던 가야사를 불사르게 하고 금탑을 허물게 하여 이 묘자리를 차지하였다. 풍수지리설의 좌청룡, 우백호가 웅장하게 뻗어있던 “이대천자지지”즉 2대에 걸쳐 왕위에 오를수 있는 곳이라 하여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부친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묘를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것을 1846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왕권에 야심을 품고 안동 김씨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어 오던 터라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 묘자리에는 뒷날의 도굴을 염려하여 철 수만근을 붓고 강회로 비벼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잡고 있으며 앞으로 석조물 2조의 석양과 2기의 석주를 묘의 좌우에 세우고 있으며 묘 앞에 석등이 위치하고 있다.
이장 후 예언대로 철종 뒤를 이어 12세로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순종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남연군묘 도굴사건
역사적으로는 1868년 흥선대원군 시절 유태계 독일인인 오페르트(Oppert)가 차이나호를 이끌고 서해대교 중간에 있는 섬 행담도에 북독일 연방의 기를 게양, 정박하고 상륙한 다음 여기서 그들은 그레타호를 옮겨 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현 예산군 덕산면 구만포에 상륙하여 러시아군병을 자칭하며 가야산 자락 아래 덕산 가동에 있는 남연군묘를 도굴하여 통상문제를 흥정하려고 하였으나 덕산 군수와 주민들의 저항으로 도굴이 실패로 끝나고 퇴각하였다. 이러한 비행은 국내외의 비난을 받았으며 이 일로 말미암아 흥선대원국의 쇄국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 후 전주 이씨가 멸망한 후 묘소는 황폐화되었으나, 왕실묘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잘 보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망주석의 동물은 다람쥐도 아니고 쪽제비도 아니고 세호(細虎)입니다. 세호가 뭔지는 아직 모릅니다. 다른 망주석에는 내려가는 놈이 있었습니다.
상가리 미륵불
남연군 묘 앞 길건너에는 돌아서있는 미륵불이 있다.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사르고 금탑을 깨부순 데 대해 괘씸하다며 항의조로 돌아서버렸다는 설과 풍수지리설상으로 기운을 조화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는 설이 있다. 문화재 자료 제182호. 일반적으로 미륵불로 불리나 학명으론 관세음보살이다.
남연군 묘를 돌아선 돌부처
1. 조금 비어 있는 골짜기로 빠져나가는 기를 막으려고 부처를 세웠다.
2. 돌부처가 거기에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에 의해 가야사가 불타 버리자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돌아섰다.
탑을 부수고 절을 폐한 것이 마음에 걸린 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한 몇 달 뒤에 가야골 아래 상가리에 한양에 서 목수를 보내어 은덕을 보답한다고 지은 절이 보덕사이다.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소금을 은박지에?
가야사의 깨진 석등
보덕사 마당으로 옮겨진 석등의 화사석에는 천의 자락을 휘날리며 귀신을 밟고 있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화사석의 몸둘레만도 87CM나 되니 가야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백합, 비구니 사찰이라 꽃을 잘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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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 묘
南延君(남연군 ? - 1822)의 이름은 球(구), 고종의 부친인 이하응(흥선 대원군)부친인, 인평대군의 6世孫 병원의 아들이며, 장헌(사도)세자의 서자로 은신군에 입양되어 南延君(남연군)에 봉해졌다.
이하응은 12세에 모친을, 17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당시에는 안동 김씨들이 정권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잘못보이면 역모로 몰려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던 시절이라 흥선군은 한편으로는 파락호로, 또 한편으로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속으로는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를 굳건히 하려는 야심을 품고 오랜 계획을 실천에 옮긴 교두보가 바로 아버지 南延君 墓(남연군 묘)를 이곳으로 옮긴 일이다.
1822년 南延君(남연군)이 돌아가고 난 뒤 어느 날 한 地官(지관)이 찾아와 明堂(명당) 자리를 알려주었다. 한편에서는 흥선군이 정만인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地官(지관)은 가야산 동쪽에 2대 천자지지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萬代榮華之地(만대영화지지)가 있다고 했다. 흥선군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야산의 天子之地(천자지지)를 택했다.
그러나 가야산 明堂(명당)에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屍身(시신)을 모셔야할 자리에는 금탑이 있었으나, 야심에 사로잡힌 흥선군은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墓(묘)를 임시로 탑 뒤의 산기슭으로 옮겼다.
그 땅은 영조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賜牌之地(사패지지)로 그 후손에게 자리를 빌려서 移葬(이장)을 했다.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오백리 길을 상여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옮겼는데, 마지막으로 운구를 한 광천리(나분들, 남은들) 주민들에게 상여를 선물로 주었는데, 이곳 마을의 상여로 사용하다가 1974년 중요 민속자료 31호로 지정되어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다. 그 다음 흥선군이 재산을 처분한 2만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어 중들을 쫓아내고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하고, 충청 감사에게 중국의 명품 단계 벼루를 선사하여 가야사 중들을 쫓아내고 마곡사의 중들을 불러다가 강압하여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탑을 헐기 전날밤 흥선군의 4형제는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에 수염이 흰 노인이 나타나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 만약 일을 벌인다면 4형제가 모두 폭사하리라”고 하는 것이다.
깜짝 놀라 깬 형들이 꿈 이야기를 하니, 흥선군은 그렇다면 이곳이 진짜 明堂(명당)이라며 사람의 운명을 어찌 탑신이 관장하겠느냐고 하며 형들을 설득했다.
마침내 탑을 부수자 바닥에 바위가 드러나며 도끼가 튀었다.
그러자 흥선군이 “나라고 왜 王(왕)의 아버지가 되지 말란 말이냐”하고 하늘에 소리를 친후 도끼를 내리치자 바위가 깨졌다고 한다. 그 다음해인 1845년 뒷산에 임시로 모셨던 곳에서 이곳으로 墓(묘)를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뒷날 도굴의 일을 염려하여 철 수만근을 붓고 강회로 비비고 封墳(봉분)을 했다고 한다. 南延君 墓(남연군 묘)에서 보아 왼쪽 산기슭에 돌부처가 한 분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골짜기 앞쪽이 아니라 골짜기를 향해 있는데, 그 내력에는 두 가지의 일화가 전한다.
南延君 墓(남연군 묘)에서 보면 그쪽이 좀 虛(허)하여 虛(허)한 곳을 비보 하느라고 부처를 세웠다고 하고, 또 하나는 흥선군에 의해 가야사가 불타 버리자 그 모습이 보기 싫다고 돌아섰다고도 한다.
흥선군은 이곳에 墓(묘)를 쓴지 7년만에 둘째 아들 재황(명복)을 얻었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1863年 高宗(고종)을 등극 시켰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을 밀사로 파견한 사건에 연루되어 高宗(고종)이 물러나고 손자인 純宗(순종)이 황제로 등극되었으니 2대 天子(천자)를 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두 임금을 끝으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없어지고 南延君 墓(남연군 묘)는 오페르트라는 독일 상인에 의해서 비록 도굴은 되지 않았지만 파헤쳐졌으니 과연 그러한 수난을 당하고 二代 天子의 결말이 그렇게 난 자리가 明堂(명당)인지 생각해 볼일이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두 번이나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자 高宗(고종) 5년(1868) 미국인 자본가 잰키스의 도움을 받고 프랑스 선교사 페롱을 앞세워 상해에서 차이나호를 타고, 덕산군 고덕면 구만포에 내린 그들은 천주교인들을 앞세워 南延君 墓(남연군 묘)를 파헤쳤다.
밤중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막을 틈이 없었는데 날이 밝아오고 썰물 때가 다가오자 도굴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 사건은 墓(묘) 속에 부장된 유품을 도굴해 통상 약속을 얻어내려는 수작이었으나 이 사건 후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천주교인들을 박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물의를 일으켜 자본주 잰키스는 불법 파렴치죄로 기소됐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 버렸다.
南延君 墓(남연군 묘) 아래의 절터는 논밭으로 변하고 군데군데 깨진 석등 부도 탑비 조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다.
이곳에 있던 석등 화사석은 보덕사에 옮겨져 있다.
탑을 깨고 절을 폐한 것이 마음에 걸린 흥선대원군은 高宗(고종)이 즉위한 몇 달 뒤 가야골 아래 상가리에 은덕에 보답한다고 장남 재면의 이름으로 지은 절이 보덕사이다.
이 절은 왕실의 원찰이 된 셈이다. 규모는 작아서 옛 가야사의 영화를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이 절에 있는 가야사 석등 화사석은 그나마 가야사가 어떤 절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이 가야사 석등의 운명만 보아도 과연 가야사가 陽宅(양택)으로 明堂(명당)인지도 의심스럽다. 二代 天子가 나올 자리라는 말도 흥선대원군의 아들과 손자까지 왕이 되었기에 붙은 후대의 해석일 수 있다.
그러나 南延君 墓(남연군 묘)에 얽힌 이야기들은 우리 근대사의 아픈 한 구석으로 남아있다.
남연군 墓(묘)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기슭에 있다.
흔히들 남연군 墓(묘)를 天下(천하) 大地(대지)라고 이야기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주위의 局勢(국세)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게 보인다.
主山(주산)은 廉貞火山(염정화산)으로 主山(주산)에서 훌륭하게 開帳(개장)을 하여 좌우에 靑龍(청룡) 白虎(백호)를 웅장하게 거느리고 중심으로 出脈(출맥)한 龍(용)이 마지막 脈盡處(맥진처)에서 자신의 할일을 다한 듯 쉬고 있는 모습이다.
또한 주위에는 뛰어나게 솟은 봉우리들이 沙要秀(사요수)를 하였다. 그러나 주위를 세밀하게 둘러보니 실망을 금할 길 없다.
이곳을 거의 모든 風水師(풍수사)들이 天下大地(천하대지)라 하나 오히려 소지만도 못한 느낌이 든다.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자리는 조그만 담장 정도면 만족하지 큰 성곽이 필요하지는 않다.
주체자인 내가 튼실하고 객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穴場(혈장)보다 주위의 護從沙(호종사)들이 지나치게 높아서 奴强主弱(노강주약)에 해당한다.
현재의 자리는 전체적인 局勢의 중심에서 앞으로 너무 나갔다.
즉 天心十道(천심십도)를 벋어났다고 봐야한다.
入首龍(입수룡)을 살펴보니 過峽處(과협처)에서 훌륭하게 起頭(기두)를 하여 到頭(도두)를 만들고 左旋(좌선) 으로 入首(입수)하였으나 현재의 到頭(도두)는 人作(인작)이 많이 가해졌다.
左旋(좌선)으로 入首(입수)한 龍이 다시 右旋(우선)으로 돌아서 우측이 背(배)가되고 좌측이 面(면)에 해당한다.
즉 우측에 있는 암반을 보면 우측이 背(배)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入首龍(입수룡)이 左旋(좌선)으로 돌았기 때문에 穴場(혈장) 뒤가 虛(허)하여 坐(좌)를 얻지 못했다.
外靑龍(외청룡)과 外白虎(외백호)는 장엄하나 穴場(혈장)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本身龍(본신룡)에 붙은 좌우 角(각)이나 靑龍(청룡) 白虎(백호)가 없다.
白虎沙(백호사)는 우뚝하게 솟아 뛰어난 氣運(기운)은 있지만 穴場(혈장) 앞으로 내려오면서 反背(반배)하여 入懷案(입회안)이 되어 反弓水가 되고, 靑龍은 멀리까지 내려갔으나 무정하다.
또한 白虎 쪽에서 오는 물은 저수지를 막아서 정확하게 보이지 않지만 穴場으로 衝(충)하고 있다. 穴場(혈장) 앞으로 오는 물은 右水(우수)가 先到(선도)하여 左水(좌수)와 만나서 나가지만 좌측의 물이 더 깊고 長大(장대)하다.
破口(파구)는 蕩然(탕연)하여 水口(수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하여 氣乘風散(기승풍산)에 해당하여 穴場(혈장)에 氣運(기운)이 편안하게 머물지 않는다.
즉 局勢(국세)는 잘 만들어졌으나 대문이 열려있다.
양균송 선사가 “穴場(혈장)에 부는 바람은 도적을 피하듯이 하라”고 하였는데 이곳은 바람의 영향이 너무 크다.
그러므로 破口(파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으로 후손들이 풍파를 당한다고 봐야 한다.
만약 이곳이 明堂(명당)이라면 후손들이 편안한 삶을 살아야 하나 그렇지 못하다.
비록 2대에 걸쳐 天子(천자)는 나왔지만 이곳으로 移葬(이장)을 한 후 오페르트 사건으로 인하여 도굴을 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나고, 곧바로 왜놈들의 침략을 받아 조선이 망하고 국모마저 왜놈들에게 시해당하고,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의 영향으로 2대 天子(천자)가 나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곳을 天子之地(천자지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墓(묘) 살펴보기 때문에 정확하게 보지 못한다고 봐야 ?磯?.
氣運(기운)을 살펴보면 水脈(수맥)과 氣脈(기맥)이 혼합되어 있다.
坐向(좌향)은 乾坐巽向(건좌손향)이고 破口(파구)는 乙辰(을진)이므로 向法(향법)으로는 借庫消水絶處自生向 (차고소수절처자생향)에 합법하나 右水(우수)보다는 左水(좌수)가 더 長大(장대)한 것도 흠이 된다.
靑烏經에 “山來水回하면 逼貴豊財하고 山囚水流는 虜王滅侯라”(산래수회하면 핍귀풍재하고, 산수수류하면 노왕멸후니라, 산이 내려오고 물이 산을 돌아서 감싸주면 귀함이 빨리오고 재물의 풍성해진다, 산이 갇히고 물이 산을 따라서 흘러가면 왕이라도 사로잡히고 제후라도 멸망한다) 하였는데 안타까울 뿐이다.
신평 선생님께서는 이곳이 아니라 다른곳에 天下 大地가 있다고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