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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믿음 (히11:6-7절)
여러분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빌 게이츠처럼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입니까. 그도 아니면 공부를 잘 해서 최고의 과학자나 의사가 되는 것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작성된 소요리 문답 제 1문에서는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만을 우리 인생의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고 그를 우리의 삶의 목적으로 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쓰고 힘쓰는 것이 우리 삶의 최고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런 소망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즐거움이나 사람의 기쁨을 위해 눈치를 보며 아부하는 열정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주관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한 간절한 열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소망에서부터 하나님의 기쁨은 시작되고 우리의 행복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지방을 떠난 후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다른 복음 즉 이단의 사상과 유대교를 전했습니다. 성도들은 영적 분별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복음에 속히 미혹되었고 그로 인하여 예수의 복음은 변질되고 무시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혹시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 자신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믿음에 대하여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실존을 믿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요 근본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만 존재하셨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현재 이 시간에도 살아서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도 창조주가 계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분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시는지,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각 종교마다 창조주가 있고 그 창조주에게 모든 헌신과 충성을 다 바칩니다. 엊그제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창조주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축제를 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화산의 신 브라흐마를 창조주라고 믿고 있는데 그 창조주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하여 수천 명이 모여 불타오르는 화산을 찾아갔습니다. 그 영향으로 코로나 환자가 세 배로 급증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가 계신 것과’ 라고 하는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사탄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도 아는 지식입니다.
*약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로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신으로서 하늘에 계시고 복과 화를 내리시는 그런 하나님의 존재를 종교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언약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셨던 하나님, 그 언약에 신실하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역의 땅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 실수투성이요 살인자요 간음자였던 다윗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에게 영원한 왕위를 약속해 주셨던 그 인격의 하나님이 이 순간 나와 함께 하시며 나에게 말씀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시고 마지막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오신 실존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는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실존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둘째,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신들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그 신들이 세상 이외의 공간에서 살고 있으며 인간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고 인간에게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에게만 만족하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 신들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는 정도에 따라 복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신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입니다. ‘상’에 해당하는 말 ‘미스다포도테스’는 ‘보상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 즉 영혼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스스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아무리 궁구하고 참선하고 도를 닦아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문제를 청산하기 이전에는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복을 알 수도 없으며 복을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유함을 받고 죄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시43;3-4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 역사의 저편에서 관망만 하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특별히 자기를 찾는 성도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역사하고 게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해 계시면서도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사랑하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고, 자신의 영을 보내어 성도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지금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늘 처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결코 등을 돌리지 않으시며, 그의 영광을 가리우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들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내용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마7: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렇듯 자신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소유할 때에 하나님은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으로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인물인 노아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노아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의로운 자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입니다. 그로 인하여 ‘의인’이라는 단어는 노아의 통상적인 이름이 되었습니다.
*벧후2: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노아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을 홍수로 멸망시키겠다고 했을 때 그 말씀을 믿고 큰 방주를 준비함으로써 가족과 함께 홍수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노아의 믿음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노아의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을 신뢰했던 믿음이었습니다.
*히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노아가 살았던 시대에는 세상이 육체적으로 타락했던 시대였습니다. 셋 계통의 경건한 아들들이 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딸들의 사치와 향락의 아름다움을 보고 정신이 현란하여 저들을 좋아하면서부터 인류의 타락은 급속히 진행되어 극도에 달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경건하다고 자부했던 셋의 후손들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고 숭배하는 거룩한 종족이었습니다.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기도했고, 주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않고 주의 사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신앙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고 대대로 이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에녹의 시대에 이르러 셋의 후손들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에 미혹되어 신앙생활의 선한 행실을 버리고 인간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버린 채 외모에만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에 온 사회가 타락 일변도로 흘러갔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 신령함을 버리고 육신의 쾌락을 좇았고 자신들의 안목의 정욕을 따라 불신앙의 여성들과 결혼했던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여자들도 족보에 그 이름을 기록했는데 이 이름들은 외적인 매력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장식이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아다’ 여자의 탐스러운 머리채를 의미하는 ‘씰라’ 즐겁게 한다는 의미인 ‘나아마’ 등입니다. 이 이름들은 불신앙의 자손 즉 가인의 여인들이 값진 옷으로 몸을 치장하고 교태를 부리고 사치한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셋의 후손들 사이에는 불신앙이 홍수처럼 범람하였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마치 아담이 하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과 같이 셋의 후손들의 가인의 후손 여인들의 말을 듣고 영이 육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이 절정에 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 이후에 노아의 시대까지 하나님의 영이 셋의 후손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은 불행 중 다행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의 후손들을 다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시대는 죄의 영향으로 인해 모든 인간이 사악하게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셋의 후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선포된 후 120년이 지나면 대홍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선포된 지금부터 그들의 수명은 120년 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심판을 유예하시고 120년이라는 기한을 주신 것은 당시의 타락한 인간들에게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은혜의 기간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당시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는데 ‘네피림’이라는 말은 ‘떨어지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하늘에서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즉 신체적 특성상 장부나 거인으로 불리는 사람을 의미하며 주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세상의 딸들이 결혼하여 낳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의 신체적 특성은 대체로 ‘훼방꾼’ ‘무법자’ ‘난폭꾼’ ‘가해자’ 라는 속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홍수 이전 시대의 타락의 주역들이었으며 세상을 지배하던 자들로서 힘이 세고 강한 영웅이었거나 많은 하수인을 거느린 압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전쟁과 약탈, 방종과 사치를 난무하게 했으며 시대의 악명을 날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홍수 이전의 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타락하고 죄악이 관영하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마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습니다. 그 결과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여기 ‘죄악’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어기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인간의 모든 악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죄악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깊이 뿌리를 박은 지속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소위와 그 생각하는 바를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적으로, 자세히 살펴보셨습니다. 그 결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셨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쓰리고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극심한 슬픔으로 근심하신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결심하셨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고 인간에게 부속된 동물이나 식물까지 모두 멸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시대에 노아는 홀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호와께’라는 말을 직역하면 ‘여호와의 눈에’라는 말인데 노아가 여호와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경건한 자, 고생하는 자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합니다.
*창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가 ‘의인’이라고 할 때에 노아가 ‘무흠한 자’ 라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래도 경건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그의 ‘의’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노아는 ‘의인’ ‘완전한 자’라고 인정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온 땅이 하나님을 버리고 배역하고 배반하여 패괴했을 때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뜻을 따라 말씀을 순종하고 말씀을 지키며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넘치는 광영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향하여 ‘내가 온전한 것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전심전력하여 삶의 진보를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홍수 이전의 시대는 영적으로는 타락의 시대요, 도덕적으로는 풍기가 문란했던 시기요, 사회적으로는 파괴적인 시대였습니다. 사회는 언제든지 진리에서 멀어질 때 이기주의가 성행하며 타인의 권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힘이 있는 사람은 폭력이나 권력으로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를 압제하는 것입니다. 자유가 박탈당하고 인권이 유린되며 칼이 난무하고 살상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온 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패괴하며 강포가 심했습니다. 이 모든 부패와 폭력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해진 피의 축제였습니다. 마치 로마 제국이 원형 경기장에서 행하던 검투사들의 살인극과 같았습니다. 노아는 당시 사람들이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타락한 관습에 동참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경고하심’이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혹은 신탁을 말하는데 노아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통해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신다는 계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노아는 그 계시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노아가 가졌던 믿음은 우리가 흔히 관념적으로 알고 있던 자기 확신의 믿음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죄악을 보고 그것이 악한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 노아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임했던 것입니다.
*창6: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2. 노아의 믿음은 사람에게 어리석게 보이는 것을 실천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히11:7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을 알려 주셨던 것처럼 노아에게 장차 있을 대홍수 심판에 대해 알려 주시고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을 계시하신 후에 그에게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잣나무로 방주를 짓는데 그 길이가 137m입니다. 상중하 삼층으로 짓고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창문을 만들어야 됩니다. 노아의 식구 8명, 그것도 남자는 겨우 4명인데 이 사람들만으로 쉽게 지을 수 있는 크기의 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친 순종도 대단한 일이지만 500세가 넘은 노아가 어린 아들 세 명을 데리고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같았으면 아예 시작도 못했을 것입니다. 노아 500세 이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고 노아 600세에 홍수 심판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셈은 노아 502세에 태어났습니다. 홍수 2년에 셈이 100세가 되었고 그의 아들 아르박삿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창11: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셈이 아버지를 도와 방주를 지을 수 있는 나이는 당시 연령을 계산하면 50세 정도이거나 아니면 그 이상의 나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방주를 지은 기간은 최고로 잡아 50년 정도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아가 세 며느리와 함께 방주를 지었다면 이보다도 훨씬 짧은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낙심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오직 믿음과 인내로 전력을 다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마도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당시 사람들에게 갖은 조롱과 희롱을 당하고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사람들의 조롱이나 희롱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경고하심을 받고 난 후 자신이 생각해도 어리석은 일 같았지만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노아는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자신의 귀에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액면 그대로 믿었으며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경외함으로’라는 말 율라베데에스‘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참으로 미련스럽게 보이는 행동을 오직 하나님께 대한 공경과 신뢰로서 묵묵히 실천한 것입니다. 모든 일을 이성적 판단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3. 노아의 믿음은 의의 후사가 되게 했습니다.
*히11:7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의 믿음은 온 세계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는 중에 그와 그의 집을 구원하였습니다. 노아의 가족 8명만이 모든 생명체가 다 죽는 사망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참으로 기적 중의 기적이요 부활 중의 부활이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 중에서 노아 단 한 명만이 은혜를 입고 구속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던 바울의 외침이 생각납니다. ‘단 한 명의 의인만 있으면 이 성의 죄를 사하리라.’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진 자만이 누리고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류 종말의 때 역시 이와 같은 믿음을 지닌 자만이 자신과 가정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노아의 믿음은 세상을 정죄하였습니다.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을 때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그의 믿음은 옳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모두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불신앙이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노아의 믿음은 세상을 정죄하는 행동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 경고를 비방하고 멸시했습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만일 홍수가 나면 노아의 행동과 믿음은 바른 것이고, 이 세상 사람들은 악한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홍수가 나지 않으면 노아가 미친 것이고 이 세상은 정당하다는 논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후자의 편에 서서 노아가 내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홍수가 났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죄에 빠졌는가를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방주를 짓는 동안 노아가 행한 행동은 사실 불신앙하는 자들을 정죄하는 판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노아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방주를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동안 그 많은 셋의 후손들이 단 한 사람도 그 일에 참여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노아는 아담의 후손 중에서 오직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믿음을 좇는’이라는 말 ‘카타 피스틴’은 노아의 의가 실현되는 방법과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 노아가 믿음이라는 규례를 따라 하나님에게서 의를 수여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노아의 믿음은 노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노아는 믿음을 따라서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는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수여한 의를 공유하고 상속했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부패한 인간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행할 수가 없습니다. 노아 역시 하나님께서 영세 전에 선택하셨고 때가 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의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요 역사입니다. 노아가 받은 은총은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한 완전한 구원까지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처럼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온전히 구원을 얻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속자가 됩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에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비난과 조롱을 받게 되지만 그러나 육과 영이 온전히 구원을 받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받은 의의 상속은 노아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에게도 전가되어 의의 상속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혼탁한 오늘 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이 문제의 결론을 내려 주었습니다.
*고후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
이 세상의 종말의 때가 되면 노아의 때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과 연애하여 영이 육체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성도들이 보기에도 이 세상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답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합니까. 아파트 값이 날마다 치솟고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뉴스에 보니까 다단계를 하는 사람들이 가짜 코인을 만들어 영업을 했는데 무려 4조원이나 모았다고 합니다. 그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 수 만 명이 되는데 이제는 그 돈이 모두 허공에 날아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부요하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타락이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독소가 들어 있습니다. 영혼을 죽이는 독소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갈지라도 우리는 좁은 길로 가야할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협소하고 좁은 길입니다. 생활이 어렵고 힘이 들어도 노아의 믿음을 본받아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고 승리하여 가정을 구원하고 믿음의 후사, 의의 후사가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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