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구한말, 조선의 운명과 함께 걷다 (1891~1900년) - 2 《찬양가》 편찬 1893년 2월 귀국한 직후부터 그해 여름까지 언더우드가 집중했 던 일은 바로 찬송가를 편찬하는 것이었다. 선교 초기 조선의 교회에서는 중국 만주(지금의 둥베이)에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또 그 책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도 활동을 펼친 서상륜과 백홍준이 성경 반포와 더불어 가르쳐준 중국의 찬송을 부르곤 했다. 백홍준이 개척한 의주교회나 서상륜이 개척한 소래교회 모두 예배에서 중국어 즉 한자로 적혀 있는 가사를 한글식으로 음역해 부르고 있었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오늘날에도 한국 교회에서 널리 불리고 있는 ‘예수 사랑하심을’이라는 곡의 후렴구 ‘날 사랑하심~’의 부분이다. ‘솔~ 미솔 라도~’의 음에 중국어 가사는 ‘主耶 愛我’이다. 중국 발음으로 하면 ‘주~ 예수아이워~’인데, 그것을 한글 독음인 ‘주~ 야 소애아~’로 부르는 식이었다. 백홍준의 딸 백관성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가 새벽이면 “주 애워, 주 애워”라고 읊조리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 경우는 중국 발음과 한글 독음이 섞인 형태였다. 하지만 중국어 가사를 중국어 그대로, 혹은 한글 독음으로 부르는 것으로는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한편, 조선식 가사 문학을 차용하여 선교사들과 조선 동역자들이 4·4조의 가사를 지어 거기에 조선의 전통 가락을 붙여 부르는 방식도 있었다. 예를 들어, 언더우드가 초기에 번역한 교리서 중 하나인 《삼요록》을 보면, 맨 뒤에 부록처럼 ‘십신가’와 ‘십계가’라는 두 편의 찬송시가 덧붙여 있는데, 그중 첫 몇 소절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전통적인 4·4조의 가사 형식 안에 십계명이나 기본 교리의 내용을 집어넣은 시다. 운율이 잘 맞고, ‘나는 믿네 나는 믿네’ 등의 동일 어구를 반복시킴으로써 리듬감을 높이고 있다. 초기에는 서양 음악을 생소해하는 조선 교인들에게 이런 시를 지어 민요조나 낭송조 등의 가락에 맞춰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미국식 예배 형식에 익숙하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한 19세기의 구미 선교사들은 점차 서양의 찬송가를 번역해 들여오고자 했고, 그러한 찬송가를 통해 서양의 음악이 조선에 처음 전래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찬송가의 편찬은 감리회와 장로회에서 모두 시도되었는데, 가장 먼저 발간되어 나온 것은 감리회의 《찬미가》로서, 1892년이었다. 《찬미가》는 인천에서 활동하던 미북감리회의 존스(G. H. Jones)와 이 화학당 2대 교장이었던 로드와일러(L. C. Rothweiler)가 서양의 찬송가 중 27편을 선곡해 번역했다. 다만 서양식 5선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조선 신자들을 위해 악보 없이 가사만 실었다. 이후 감리회와 장로회에서 합동 찬송가를 편집·간행키로 결정하고, 감리회에서는 존스 선교사가, 장로회에서는 마펫 선교사가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우선 50곡을 골랐는데, 그중 절반이 언더우드가 번역한 노래였다. 하지만 존스 목사가 도중에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간 뒤 찬송가 편찬이 지지부진해졌고, 이후 언더우드가 책임을 맡게 된 뒤 예배 음악이 절실하다는 생각에 언더우드가 혼자 서둘러 찬송가를 편찬해냈다. 언더우드의 《찬양가》 초판(좌)과 1장(우)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그것이 바로 1893년 귀국 후 언더우드가 출판한 《찬양가》였다. 《찬양가》에는 무려 117곡이 수록되었는데, 악보도 함께 수록된 첫 찬송가였다. 곡 가운데 7곡은 조선인이 작사를 했다. 7곡을 제외한 110곡은 영어 찬송을 번역한 것인데, “곡조를 맞게 하려 한 즉 글자가 정한 수가 있고, 자음도 고하 청탁이 있어서 언문자 고저가 법대로 틀린 것”이 있는 등 음률에 맞는 한글 가사를 만드는 데 애를 먹었다. 1894년 정식으로 출판이 이루어졌는데, 그러나 이 《찬양가》는 감리회에서는커녕 장로회에서도 공식적인 찬송가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언더우드가 가사에 사용한 신의 호칭이 문제가 된 것이다. 당시 조선 선교사 가운데에서는 지금은 ‘하나님’으로 개신교 성 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의 호칭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놓고 팽 팽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었다. 헬라어 성경 원문에서 ‘ ’로 표기 된 단어가, 라틴어의 ‘Theos’를 거쳐 영어의 ‘God’로 번역되어 이어 졌는데, 이 단어를 만주의 존 로스는 ‘하느님’으로, 일본의 이수정은 ‘신’(神)으로 번역했다. 로스와 이수정이 어째서 이렇게 다르게 신의 호칭을 번역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에서 발생한 신의 용어 논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헬라어의 ‘ ’는 ‘신’을 의미하는 일반명사다. ‘철수’나 ‘영희’ 같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이나 ‘어린이’ 같은 일반명사 말이다. 라틴어와 영어의 ‘theos’와 ‘god’도 일반명사다. 그러나 유럽에 서는 글자의 첫 자인 ‘T’와 ‘G’를 대문자로 표기하면서, 일반명사와 구분하여 기독교의 고유한 신의 의미를 갖게 만들어놓았다. 중국에서 처음 신의 이름을 번역한 16~17세기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유학 경서를 10년 넘게 탐독한 끝에 ‘신’을 의미하는 일반명사인 ‘신’(神)은 중국에서 잡신이나 귀신의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발견하여 사용을 거부했고, 대신 고대 유학 경서에 유일신의 개념으로 등장하는 ‘상제’(上帝)와 ‘천’(天)을 기독교의 신의 자리에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보수적인 다른 수도회 선교사들이 이방 신의 이름을 기독교의 신 이름에 사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면 서거의 한 세기에 걸쳐 논쟁이 이어졌는데, 결국 교황이 나서 ‘안 됨’ 으로 정리하면서 논쟁이 끝난 역사가 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인 19세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한 뒤, 같은 논쟁이 재현되었다.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결국 같은 역사가 반복되고 마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일어난 것이다. 중국의 첫 개신교 선교사였던 로버트 모리슨은 성경을 번역하면 서 ‘God’을 ‘신’(神), ‘천’(天), ‘상제’(上帝), ‘주’(主), ‘신천’(神天) 등 여러 조합의 20여 개 단어를 사용했다. 이 가운데 영국 선교사들은 ‘상제’를, 미국 선교사들은 ‘신’을 지지했다. 그러던 중 마테오 리치 이후 최고의 중국학자로 지금까지도 평가받고 있는 영국 런던선교회의 제임스 레그(James Legge)가 유교 경전을 연구한 끝에 마테오 리치 와 똑같은 이유로 ‘신’의 사용을 거부하고 ‘상제’를 채택하면서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괴리는 더욱 깊어졌고, 결국 성경도 ‘상제본’과 ‘신본’으로 나누어 출판되었다. 존 로스는 스코틀랜드 선교사로서 영국의 ‘상제파’ 라인에 서 있었는데, 조선 고유의 신개념을 연구한 끝에 ‘하느님’이 중국의 ‘상제’ 와 같이 유일신에 가까운 개념임을 발견하면서 ‘하느님’을 사용했다. 반면 이수정은 일본의 미국성서공회의 제안으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미국이 지지한 ‘신’을 사용한 것이다. 언더우드는 이후 조선에서의 용어 논쟁을 야기한 주인공이기도 했는데, 그는 지속적으로 ‘하님’의 사용을 반대했고, ‘상제’, ‘여호와’, ‘참신’, ‘천주’, ‘상주’(上主) 등을 사용했다. 1887년에 이수정 역본 《마가복음》을 개정한 가장 큰 이유도 이수정 역에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되어 있는 첫 구절이, 조선인들에게는 ‘귀신의 아들’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언더우드-아펜젤러 역본 《마 가복음》(1887)에는 “상제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수정되었다. 1894년 《찬양가》에서도 언더우드는 ‘야화화’(여호와), ‘상주’, ‘주’ 를 사용했는데, 장로회의 대다수 선교사들이 ‘하님’을 지지하는 상황이었던지라, 《찬양가》의 공식적인 채택이 끝내 거부된 것이다. 1893년도의 장로회 선교사 결국 언더우드는 여러 조선의 경서들을 연구한 끝에 1904년 무렵 ‘하님’의 사용을 수용하면서 이후 한국의 모든 성경과 찬송에서 ‘하님’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고, 용어 논쟁도 종결되었다. 오랜 연구 끝에 언더우드 스스로 납득할 만한 결론에 이르자, 자신이 20년이나 고집을 부리며 사용을 거부했던 ‘하님’을 받아들인 것인데, 이것은 언더우드가 완고한 가운데에서도 합리성과 논리성에 비추어 합당하다면,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상대의 의견을 수용할 줄 아는 포용력을 보여준 사례로 볼 수 있다. 비록 《찬양가》가 장로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수요가 많아 1895년 2판, 1896년 3판, 1898년 4판을 내리 찍었는데, 2판에서부터는 오선 악보를 빼고 가사만 남겼다. 악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선교사 빼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결과였다. 가사만 세로쓰기로 남긴 대신, 글자 크기를 키워 가독성을 높였다. 이후 언더우드의 《찬양가》는 1908년 공식 개신교 연합 찬송가로서 《찬숑가》(262곡)가 나올 때까지 약 10여 년간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북장로교회 및 전라도 지역의 남장로교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연합 찬송가가 나온 이후 언더우드는 《찬양가》를 더 이상 출판하지 않았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개척자 언더우드" 내용입니다. #풀가스펠뉴스 #한교총 #언더우드 #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