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길을 잃자-지브리 뮤지엄
노정애
키치조지역 남쪽 출구로 나와 이정표를 따라가니 이노카시라공원이 나왔다. 넓은 호수위에는 오리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날씨 덕분에 초록의 나무들이 우리를 반겼다. 동물원까지 있는 큰 공원이었다. 숲의 냄새도 향기롭고 새소리도 들렸다. 두 딸도 함께 걷고 있는 남편도 즐거워 보였다. 뉴욕에서 일하는 큰아이가 연말에 들어와서 8년 만에 함께 새해를 맞았다. 2주정도 머물기에 시간이 많지 않아 도쿄로 3박 4일의 자유여행을 떠났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르는지 벌써 3일차다.
40여분 걷다보니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건물이 시선을 끈다. 완만한 곡선의 건물은 흰색과 노랑, 연초록과 연분홍색인데 담쟁이 넝쿨로 뒤덮여 초록의 옷을 입었다. 밝은 색감과 건물의 형태가 독특하고 귀엽다. 도쿄 서부 미타카에 있는 ‘지브리 뮤지엄(GHIBLI MUSEUM, MITAKA)’이다. 다카히타 이사오와 미아자키 하야오가 ‘스튜디오 지브리’ 라는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사를 1985년에 공동 설립했는데 그 이름을 따서 만들었단다.
이곳은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는데 하루 4회, 2시간 간격으로 일정 인원만 관람객을 받는다. 방문을 원하면 그 전 달에 미리 예약해야한다. 이런 불편함에도 한해 70만 명 이상이 찾는다고 한다.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등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미야자키 하야오가 계획하고 설계해서 2001년에 개장한곳이다. ‘잘난 미술관, 사람보다 작품을 아끼는 미술관, 재미없는 것을 의미 있게 늘어놓는 미술관은 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생각이 담긴 미술관이다.
안내서에 Let’s lose our way, together.(함께 길을 잃자)라고 적혀있다. 이곳에서 만큼은 아이나 어른 모두 길을 잃어도 좋다는 의미란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통층 구조로 되어 있고 각 층에는 2개의 전시공간이 있다. 6개의 공간을 정해진 동선 없이 볼 수 있다. ‘만지지 마시오’ 같은 경고문도 없다. 무엇을 하든 어디를 보든 상관없는 곳이다.
지하 1층에는 ‘토성극장’과 ‘움직이기 시작하는 방’이 있다. 극장에서 단편 애니메이션을 관람했다. 3번째 은퇴선언을 했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복귀 작인 14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애벌레 보로(Boro The Caterpillar)>. 풀숲에서 깨어난 송충이가 살아가는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는데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모든 소리를 더빙한 음향이 독특했다. 같은 층에 있는 그림을 움직이게 하는 신기한 장치들을 모아둔 ‘움직이기 시작하는 방’에 들어갔다. 오두막극장처럼 꾸며 놓은 이곳은 애니메이션의 원리를 재미있게 설명해 놓았다. 돌리고, 눌러보고, 만지면서 놀 수 있다. 신나게 놀다보니 식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로 흩어져 각자의 놀이에 빠졌나보다.
1층에는 ‘기획전시실’과 ‘영화가 탄생하는 곳’이 있다. 기획전시실에 ‘영화를 칠하는 일’ 이라는 주제로 만화그림들이 벽면을 따라 촘촘히 붙어있었다. 하나의 그림에 여러 가지의 색감을 입히고 움직이게 만들어 영화가 되기까지 모두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한다. 한편의 만화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1년 정도 걸리는데 대부분의 작업이 사람들의 정성과 땀으로 만들어졌나보다. 기계가 하는 일들이 많아진 요즘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 모든 작업들에 한 없이 애정이 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업실을 그대로 재현해둔 ‘영화가 탄생하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5개의 작은 방으로 되어있는데 작업 중인 듯 보이는 어수선한 책상, 많은 책과 별별 신기한 잡동사니, 일러스트나 스케치가 빈틈없이 붙은 벽면, 커다란 유리에 넘치도록 담긴 몽당연필과 색연필, 재떨이에 수북이 담긴 담배꽁초, 현상도구, 물감과 각종 붓등이 진열되어있었다. 창작의 세계가 결코 쉽지 않음을 그 방만 봐도 알 것 같았다.
방을 나오는 출구 쪽에 몇 컷의 만화가 그려진 도화지가 수북이 쌓여있는 유리관이 있었다.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만든 작품들을 모아둔 것 같았다. 제일 위에 있는 그림 하나가 내 시선을 잡았다. 다카히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의 한 장면이었다. 내가 몇 달 전에 봤던 영화다. 우리나라에서는 가해자가 왜 피해자 행세냐며 논란이 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다카히타 이사오는 <알프스소녀 하이디> <빨강머리 앤> 등의 TV 만화 시리즈를 감독한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사람이다. 그는 도에이 영화에서 일하던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공동으로 영화 제작사를 만들 만큼 마음이 잘 맞았다. 지난해 4월 다카히타 이사오가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좋은 벗이면 동료였다고 한다. 다카히타 이사오는 소설 《반딧불 묘지》(노사가 아키오게)를 극장용 만화영화로 제작해서 1988년에 개봉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해 미아자키의 <이웃집 토토로>도 함께 개봉되었는데 토토로팀과 반딧불팀이 나뉘어서 1년간 경쟁하듯 그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 6월에 개봉했다.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에는 참패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14살인 주인공 세치타와 네 살짜리 여동생 세츠코의 삶을 보여주는 <반딧불이의 묘>. 잠시 친척집에 의탁했다가 방공호에서 단 둘이 살게 되는 남매는 반딧불로 불을 밝히고 개구리를 잡아먹으며 힘들게 살아간다. 결국 여동생 세츠코가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고 세치타도 그 뒤를 따른다. 잠시 불을 밝히는 반딧불처럼 어린남매의 생명도 이내 꺼져 버린 것이다. 지옥 같은 전쟁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려 했던 남매의 짧은 삶을 보여주면서 전쟁이 파괴한 일상을 고스란히 담은 만화영화였다.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좀 놀랐었다. 소풍을 다녀온 듯 웃으면서 차에서 내리는 가족들이 나온다. 전범들이 종전 후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이었다. 그리고 남매가 죽었던 곳을 보여준다. 마치 감독이 너희들이 저지른 짓을 똑똑히 보라는 듯 일침을 놓는 것 같았다. 침묵하고 있는 전쟁의 희생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일본의 시각으로 전쟁을 그리고 있지만 남매의 시각을 통해 과거를 잊고 있는 일본인들의 자각을 촉구하는 영화 같았다. 어쩌면 <반딧불이의 묘>가 흥행에 참패한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2013년 미야자키 하야오는 칼럼에서 “일본은 변명의 여지없이 주변국들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을 했다. 역사 의식이 없다는 언론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주변국들의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일본이 어떻게 든 해야 한다.’등의 소신 발언을 이어갔다. 몇 해 전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식 있는 그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에 신뢰가 갔었다. 그의 생각이 담긴 뮤지엄도 보고 싶어졌다. 도쿄 여행을 계획하며 지브리 뮤지엄을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전시실을 나오니 저만치 앞서 걷고 있는 딸들이 보였다. 예쁘게 생긴 문을 열었더니 야외였는데 들어오는 문을 못 찾아 진짜 길을 잃을 뻔 했단다. 함께 2층으로 갔다. 그곳에는 ‘트라이호크스’와 ‘고양이 버스 룸’이 있다. 그림책과 추천 아동도서가 있는 도서열람실 ‘트라이호크스’에서 책들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반대편에 유독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커다란 고양이버스 인형에 열 명도 넘어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마음껏 올라타고 뒹굴면서 놀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 가득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갔다.
야외로 나왔다. 그곳에서 쉬고 있는 남편을 만났다. 이곳저곳을 모험하듯 다녀서 힘들었다며 쉬는 중이란다. 흩어졌던 가족이 이제야 모두 모였다. 길을 잃어 같은 곳을 두 번 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무넝쿨로 쌓인 원형계단을 올라갔다. 멋진 옥상 정원이 펼쳐졌다. 이노카시라공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5미터 높이의 로봇병사가 우리를 기다렸다. 《천공의 섬 라퓨타》에 나오는 로봇병사를 실물크기로 제작한 모형이란다. 실내 사진 촬영은 금지였지만 야외 촬영은 가능해서 로봇병사와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줄은 길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본다. 곳곳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만화영화의 한 장면을 옮겨놓았다. 수도꼭지, 작은 맨홀 뚜껑, 구석구석에 놓여있는 소품들에도 캐릭터를 입혔다. 놀이하듯 그들의 작업실로 영화관으로 도서관으로 향한다. 우리 가족은 ‘문을 열고 한 발 들어서면 그곳은 신비의 세계입니다.’ 라는 안내처럼 신비의 세계에서 모험을 했다. 가끔 길을 잃기도 하고 되돌아가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웠다. 짧은 모험을 아쉬워하며 나오니 후문에 있는 매표 카운터 안에 커다란 토토로 인형이 있었다. 토토로와 기념사진 몇 장을 찍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가족이 함께한 첫 자유여행이었다. 특별한 준비 없이 떠났다. 이 또한 모험이었다. 한 달에 10일 이상 비오는 날이 많은 도쿄, 겨울은 4, 5일 정도만 내리는데 날을 잘 택해서인지 여행 내내 날씨는 청명하고 공기도 좋았다. 다행이 다툼 없이 잘 다녔다. 무엇을 보고, 느끼고, 경험했던, 황당하고 기분 나빴던 그 순간까지도 자유여행의 재미였다. 그러니 함께한 모든 시간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으리라. 우리가족에게 소중한 추억 하나가 더 생겼다.
한국산문 2019년 4월
노정애
부산 출생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 문학상 수상
남촌문학상 수상
수필집 《나의 소확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