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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8월26일 금요일 [(녹)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수도회] 말씀의 등잔에 사랑의 불꽃을 피우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코린 1,17-25
† 복음 마태 25,1-13
◈ 오늘의 묵상
예수님 당대 팔레스티나에서는 결혼식을 대개 밤에 신부의 집에서
올렸습니다. 신랑은 축하를 많이 받으려고 먼 길을 택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행렬해 갑니다. 그러다 보니 신랑이 언제 도착할지
예측하기 어려웠지요.
한편 신부는 자신의 방에서 기다리고, 대신 신부의 친구들이 마을
어귀에 나가 신랑과 그 일행을 맞이하는데, 언제 올지 모르기에 밤새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러다 신랑의 친구 하나가 먼저 와서 “저기 신랑이
온다.”라고 외치면, 그제야 등에 불을 밝히고 나가 신랑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이지요. 복음을 통해 몇
가지 점을 함께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삶에 있어 갑자기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이지요. 날마다 우리 생활 속에서 조금씩 닦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남에게 빌릴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처녀들의 경우가 이에 해당하지요. 미련한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 달라고 하였지만, 거절당하지
않았습니까? 언뜻 보면 사랑의 정신에 어긋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지요. 나눠 주고 빌려 줄 수 있는 것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것 역시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재물은 빌려 주고 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빌려 줄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언제 어디서 뵙게 될지 모르는 주님을
영접하고자 하루하루 온 힘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슬기로운 처녀들의 모습
2016년 다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제1독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17-25
복음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1-13
일 년 중에서 성지의 한가한 기간을 뽑는다면 여름인 7월과 8월,
그리고 겨울인 1월과 2월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기간에는 상당히
많은 분들이 성지를 방문하시고 기도하십니다. 그렇다면 순례객이
없는 이 기간 동안 성지는 한가할까요? 아니면 바쁘고 분주할까요?
순례객이 없으니 당연히 한가할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게 이렇게들 많이 이야기하십니다.
“요즘 한가하죠?”
그러나 남들의 생각과는 달리 바쁘고 분주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성지 곳곳에 대한 공사를 이 기간 중에 해야 합니다.
그래야 순례객에게 피해가 덜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순례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즉, 순례객들을 위한 프로그램
준비를 이 기간 동안에 모두 마쳐야 많은 분들이 방문하시는 9월부터
정상적으로 프로그램을 돌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다음 주부터는 신학교 강의가 시작되기 때문에 방학 기간이
7월과 8월 동안 강의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보냈던 7, 8월 중에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처럼 아주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면 어떨까요? 9월부터 시작되는 바쁜 일정들을 제대로 소화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리우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큰 감동을
전해주었지요. 그런데 그러한 감동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올림픽
경기를 위한 준비기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올림픽 당일에 한 번의 시합으로 그런 감동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엄청난 땀방울이 흐르는 준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큰 박수로
격려하고 응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삶 안에서 준비라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준비는 어떨까요? 우리들의 최종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역시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님께서는
오늘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통해 전해주십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주님의 오심이 시작될 순간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게으르고 부주의한 이들입니다. 그들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 당장만 생각하고 앞날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장의 것들에만 마음을 쓰며, 하느님의
말씀은 잊어버리고, 부활을 고대하며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잔칫상에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되었고,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 어리석은 처녀들의 모습으로 오버랩 되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까요? 지금 당장만을 생각하면서 앞날을 대비하지
않는 어리석은 처녀의 모습이 아니라,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바쁘게 늘 깨어 있는 슬기로운 처녀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톨스토이).
어제는 수원교구 상촌성당에서 특강이 있었습니다.
마음 가지치기(‘좋은 생각’ 중에서)
외진 절에 한 스님이 왔다. 스님은 절 뒤편 숲을 발견했다. 오래도록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스님은 시간 날 때마다 가지치기했다.
반년쯤 지나자 어지럽던 나무들은 깨끗이 정리되었다.
어느 날, 소문난 부자가 절을 찾았다. 그가 스님에게 물었다.
“마음의 욕심을 없애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스님은 그를 숲으로 데려가 가위를 건넸다.
“가지치기하다 보면 없어질 것입니다.”
한참 가지치기한 부자가 말했다.
“몸은 가뿐해졌지만 욕심은 그대로입니다.”
“처음엔 다 그렇습니다. 자주 하면 좋아질 겁니다.”
부자는 틈틈이 나무를 가꿨다. 석 달 후, 스님이 물었다.
“이제 욕심이 좀 사라졌습니까?”
“이곳에서 가지치기할 때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욕심이 고개를 듭니다.”
스님이 말했다.
“가지치기해도 가지는 다시 자랍니다. 욕심도 그렇습니다.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단지 최선을 다해 가꿀 뿐이죠. 그대로 두면 어지럽지만,
자주 가지치기한다면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가지치기 하는 것이 바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우리의
미래를 잘 준비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지금 내가 쳐야 할 마음의
가지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저분하게 놔두지 말고 과감하게
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직접 만들어주신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말씀의 등잔에 사랑의 불꽃을 피우며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마태 25,1-13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마태 25,4)
The parable of the ten virgins
말씀의 등잔에 사랑의 불꽃을 피우며
오늘 복음에서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로 묘사됩니다.”(25,1) 여기서 신랑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요
(9,15), 열 처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슬기로운 이들도 있고, 듣고도 지키지
않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습니다(7,21-27).
선인들과 악인들이 함께 사는 불완전한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내림을(24,48) 안타까움 속에 기다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밤중,
뜻밖의 시간에 오실(25,6.13) 주님을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기다리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준비하고 있다가 마중 나가야
할 것입니다(1테살 4,17).
이렇듯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늘 깨어(24,42; 25,13) 준비하고 실행한
이들은 마지막 날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이들은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25,11) 하고 청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7,21-23. 24-27).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오시는 분이 누구이시며
기다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식
차원만이 아니라 주님을 맞기에 합당한 삶을 포함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 내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여야겠지요.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잠들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깨어 기다리며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돈으로 살 수 없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올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자가 책임져야 할 신앙의 문제요,
하느님과의 고유한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등과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한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일까요? 등은 주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과
주님의 영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인 깨끗하고 순수한 내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름이란 인내와 희망 가운데 주님을 기다리는
몸짓이요, 그분을 갈망하는 거룩한 열정이며,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실행하는 태도입니다.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은 말씀의 실행을 말합니다. 곧 가장 작은 이,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주님으로
모시는 사랑의 실천을 뜻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기도요, 선이신
주님의 사랑과 정의 안에 머무는 행실을 말합니다. 사랑의 불꽃은
나의 어두운 영혼과 세상의 어둠을 밝힐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언제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있도록 합시다. 등도 기름도 준비하지 않은 사람, 곧
말씀을 듣지도 실행하지도 않는 사람이 될 수야 없겠지요. 또
어정쩡하게 등은 준비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곧 말씀을 듣기는
하나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겠지요.
오늘도 불현 듯 나를 찾아오실 주님을 사랑으로 기다리는 가슴 설레는
행복한 날이 되도록,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하고,
주님의 영 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의 모닥불을
피웠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1코린 1,25)
아마추어와 프로는 급이 다릅니다.
아마추어에서 아무리 날고 긴다 하여도
프로에게는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하수들의 세계와 상수들의 세계는 이처럼 급이 다릅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하여도
하느님 보시기에는 애들 장난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똑똑하고 지혜로운들 얼마나 그럴까요?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까요?
인간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어찌 하느님의 권능에 비할 수 있으리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알기를 우습게 알고
자신의 지식이 대단한 양 떠들고 자신의 힘이 얼마나 센 지
힘 자랑하는 인간은 제 꼬라지를 모르는 우매한 바보들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의 지혜와 권능이
아무리 약해 보여도 우리 인간의 그 어떤 지혜와 권능보다
더 위대함을 태생적으로 고백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보잘것 없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하느님의 지혜를 배우고 히느님의 권능을 입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 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 6)
우리의 삶이란 생명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깨어있음의 목적은 오시는 신랑을
잘 맞이하는 데 있습니다.
잘 맞이하는 삶이란 잘 준비하는 삶입니다.
잘 준비한다는 것은 소중한 기름처럼 소중한 시간을
하느님께 바치는 진실된 마음입니다.
신랑을 맞이하러 나가는 모든 시간은 분명 은총입니다.
우리를 향한 신랑의 진실된 사랑을 절실히 깨닫게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의 기름은 결코 누구에게도 나누어줄 수 없습니다.
그 고유한 시간들을 통해 저마다 우리는
신랑이신 예수님을 끝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셨는지요.
그 여정의 끝에는 오히려 신랑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맞이하여 주실 것입니다.
신랑을 끝까지 신뢰하는 이들만이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신랑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한 없이 겸손해야 되요.
2016년 다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한 없이 겸손해야 되요.
대 우주엔 이러면 살고 저려면 망한다는 룰이 가득 내재돼 있습니다.
생물은 약육강식 만사는 흥망성쇠 소우주 인간은 두 가지 다 있고요.
게다가 우주계를 넘어 초월계소속형 영혼까지 있다는 데 왜 거부하죠?
식물은 생혼 동물은 각혼 사람은 영혼이 있다는데 포기하면 동물인데?
웃어넘길 맹~한 인간들이예요. 맹~한 두뇌로 살면서 잘났다고들 하니!
한 없이 겸손해야 되요. 주님이 나를 거부하시면 난 망하게 되거든요.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오 25,11~12)”
자식이 부모를, 학생이 스승을, 사원이 사장을 거부하는 건 있을
수없어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거부하면서 살겠다는 건, 영원히
망하겠다는 꼴이지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십자가 어리석음의 복음
2016년 다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독서: 코린토 1서1,17-25
한 직장인 남자가 퇴근하다 길거리 떡볶이 집에서 떡볶이를 먹으려고
주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꾀죄죄한 남자 아이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슬쩍 봐도 온전한 가정에서 자란 것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꼬마 아이에게 떡볶이 같이 먹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아이는 멈칫 했지만 아저씨 나쁜 사람 아니라고
설득하고 나서 시킨 것이 많아서 나눠먹자고 했다고 하니 순순히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떡볶이 2인분, 그 속에 만두 2인분을 넣어
음식이 나왔으나 아이는 먹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아이는 “동생...”이라고 처음 입을 열었습니다. 아저씨는 동생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역시 흙을 잔뜩 묻히고 놀이터에서 뛰어온 여자
아이. 남자아이는 7살, 여자 아이는 5살.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데 그분들은 버려진 박스를 주우러 나가셨다고
했습니다. 한 번 술을 마시면 몇 만원어치 먹으면서도 이렇게 굶는
아이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과자를 사서 들여보내고
그 집으로 20킬로 쌀을 사서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가 바라는 것은 부모 당사자밖에는 없습니다. 부모를
대신해 줄 누구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모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목말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참 기쁜 소식은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복음이란 사랑밖에는 없고, 그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으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십자가밖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 내용의 핵심이 바로
십자가가 되어야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여기서 유다인들은 교만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자신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랑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십자가의 희생 같은 것은 필요 없고 자신이 믿을 수 있도록 놀라운
이적을 행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요나의
기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기적이란
당신이 돌아가신 뒤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끝까지 자신만 믿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은 현세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현세에 이익이 되는
지혜가 아니면 믿지 않겠다는 부류입니다. 하느님은 자신들을 위해
이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주는데 도움을 주어야지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게 만드는 신이라면 믿지 못하겠다는 부류인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었던 것처럼 자신들이
주인이 되고 하느님은 자신들의 뜻을 따라주기를 바라며 세상에서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그렇게 지금도 그렇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복음을 변질시키는 선포자들이 있습니다.
나주에서처럼 기적이나 표징으로 사람을 끌어들이게 하거나, 혹은
하느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우환이 없고 집안이 잘 된다는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예수님께 표징만 요구하다가 결국 자신이 신이 되고픈 마음이
폭로되어버린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그분이
자신들의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인 이들에게는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켜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당신 십자가를 매일 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많지는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십자가가 참
복음임을 깨닫고 그 사랑 앞에 무릎 꿇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을
위해서만이라도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을
얻는다는 명목으로 없는 표징을 만들어가며 보여주려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어떤 종파들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복음을 선포해서도 안 됩니다. 바오로는 무엇이 참
복음인지 알았고 어떤 방향으로도 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란
기적신앙도 아니고 기복신앙도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런
십자가신앙이 주는 기쁨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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