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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성경 - 톨스토이가 이야기체로 쉽게 풀어쓴 복음서 - 레프 톨스토이 지음/강주헌 옮김
서문 복음서는 네 개의 복음서를 정리한 것이다. 나는 복음서의 원래 순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해주었던 가르침의 의미를 기준으로 복음서를 재정리하고자 한다. 따라서 복음서를 모두 12장으로 나누어 정리한 것은 가르침의 의미에 따른 것이다. 각 장이 지닌 의미는 목차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 또한 나는 각 장이 서로 인과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
나는 복음서에 담긴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정통으로 인정하는 복음서를 나름대로 해석한 이 책에서 약간의 모순이 발견되더라도, 네 복음서 자체를 오류가 없는 성서로 인정하는 관습 자체가 커다란 오류라는 사실을 독자는 잊지 말아야만 한다. 예수는 플라톤이나 필로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는 달리 어떤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쳤고, 사람들은 그가 죽고 난 후에야 예수에 대해 들었던 바를 기억하여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나는 기독교 정신을 포괄적인 신의 계시로 해석하지도 않으며, 역사적 현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주었던 가르침으로 해석할 따름이다. 내가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바로 이런 해석 때문이었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은 네 복음서에 담겨 있었다. 네 복음서에서, 나는 진실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을 인도해주는 성령의 설명을 발견했다.
과거에는 그런 성령의 빛을 알지 못했고, 우리의 삶에서 진리의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사람이 그 빛에 의존하며 살아간다는 확신을 얻은 후, 나는 그 빛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복음서에서 그 근원을 찾았다. 그 빛의 근원에 이르렀을 때, 내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이 지닌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미에 완전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따라서 독자가 기독교의 믿음 속에서 자랐지만 상식과 과학에 어긋났던 까닭에 그 믿음을 포기했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담긴 사랑과 존중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거나, 아니면 벼룩을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워버리듯이 모든 기독교 교리를 불필요한 미신으로 생각하던 간에 -, 그를 기독교에서 멀리하게 만들고 미신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부분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의 가르침을 짜깁기하여 만들어낸 괴물 같은 전통을 기독교 교리라고 내세우는 현재의 기독교에 그리스도가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다. 또한 편견에 찬 기독교 교리도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르침에는 모순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런 방향에서 다시 읽어보면, 독자는 기독교 교리가 저급한 것과 고상한 것을 뒤섞어 놓은 것이나 미신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너무도 순수하고 정확하며 완전한 형이상학과 윤리를 담고 있음을 몸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제1장 하나님의 아들 - 하나님의 자손으로서, 인간은 육신으로는 연약하나 영혼으로는 자유롭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는 광야로 나가 인간의 삶이 지닌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또한 하나님이라 불리는 모든 것의 무한한 근본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예수는 요한이 하나님이라 부르는 모든 존재의 무한한 근본을 그의 아버지로서 받아들였다.
광야에서 금식하며 며칠을 보낸 후, 예수는 배고픔의 고통을 이겨내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도 그 분만큼이나 전능해져야만 한다. 그러나 당장 무엇인가를 먹고 싶고, 배고픔을 채울 빵 조각조차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전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의 생각은 계속되었다. ‘그래, 나는 돌로 빵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배고픔을 이겨낼 수는 있다. 따라서 내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전능하지 못하더라도, 정신으로는 전능하여 육신의 고통을 억누를 수 있다. 결국 나는 육신이 아닌 정신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성령의 아들이다. 따라서 육신을 포기할 것이며, 육신을 버릴 것이다.” “나는 성령으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다. 그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나는 육신의 욕망을 채울 수 없으며, 육신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그러나 내 생명은 내 아버지의 성령이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사람의 몸으로 성령을 섬겨야만 하고, 오직 아버지만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이렇게 사람의 참된 생명이 하나님의 성령에만 있다는 확신을 얻은 후, 예수는 광야를 떠나 사람들에게 그런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이렇게 가르쳤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속에 계시고, 이제부터 하늘의 문이 열렸으며, 하늘의 권세가 사람들을 찾아오면서 자유롭고 무한한 생명이 사람들을 위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사람이 비록 육신에서는 불행할지라도, 하늘의 왕국에서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가르쳤다.
제2장 하나님을 섬기는 법 - 그러므로 사람은 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분이시여!”
올바른 믿음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피상적인 하나님을 숭배할 따름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숭배한다면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라 약속했던 피상적인 하나님이었다. 그런 약속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달리 말했다. “안식일은 사람이 만든 제도일 따름이다. 사람이 성령으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어떤 외형적 제사보다도 중요하다. 종교의 모든 외형적 형식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잘못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너희는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금한다. 그러나 선한 행동은 때를 가리지 말고 행해져야만 한다. 만약 안식일이란 이유로 선한 행동을 금한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잘못이다.”
유대의 바리새파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과의 약속에는 또 다른 조건이 있었다.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피하라는 것이었다. 그런 조건에 대해서 예수는 “하나님은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사람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약속의 조건에는 몸을 깨끗이 하라는 것도 있었다. 예수는 이 조건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겉으로 깨끗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다.”고 말했다.
덧붙여 예수는 외형만을 따지는 율법은 해로운 것이며 교회의 관습 자체가 악이라고 말했다. 교회의 관습은 부모에 대한 사랑과 같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고, 그런 관습을 전통이란 울타리 속에서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또한 사람을 스스로 더럽혔던 존재로 생각하게 만들던 옛 율법의 법규에 대해서도, 예수는 “너희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밖에서 비롯되는 것은 어떤 것도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 오직 생각과 행동만이 사람을 더럽힐 따름이다.”고 말했다.
그후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곳은 성지로 여겨지던 도시였다.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라 생각하던 성전으로 들어갔다. 성전에서 예수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은 불필요한 짓이며, 성전보다 사람이 더욱 중요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의무는 이웃을 사랑하며 돕는 것이라 말했다.
덧붙여 예수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니며, 성령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성령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며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깨닫는 것에서 주어진다. 성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참된 성전은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겉으로 섬기는 것은 거짓일 뿐 아니라 나쁜 결과를 낳게 되므로 해로운 것이라 말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형벌이란 핑계로 살인을 저질렀고, 부모를 무시하도록 부추겼다. 겉만 화려한 제사를 행하는 사람은 스스로 정의로운 사람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사랑이 요구하는 것을 행해야 하는 의무마저 잊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는 선한 것만을 추구하고, 선한 행동만을 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불완전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선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러나 외형적 믿음은 거짓된 자기 만족을 안겨줄 따름이다. 외형적 믿음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외형적 믿음을 버려야만 한다. 사랑으로 충만한 행위는 제사란 형식과 양립될 수 없다. 선을 그런 식으로는 이룰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인 아들이므로, 성령으로 아버지를 섬겨야만 한다.
제3장 생명의 원천 - 우리 모두의 생명은 하나님의 성령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찾아서 “하늘의 왕국”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예수는 그들에게 “내가 가르치는 하늘은 요한이 가르쳤던 하늘과 똑같다. 이 땅에서 비록 가난했던 사람이더라도, 하늘의 왕국에서는 모두가 행복하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예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이 외부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 속에 있는 것이라 가르쳤던 최초의 예언자였다. 바라새파 사람들도 요한의 설교를 들었지만,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외형의 하나님에 대해서만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외형적인 것만을 가르치면서, 아무도 그들의 가르침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에 놀라워한다. 하지만 요한은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 안에 있다는 진리를 가르쳤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전의 어떤 예언자보다 많은 일을 해냈다. 그의 가르침이 있었던 까닭에, 하나님의 왕국이 사람의 영혼 안에 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사람의 영혼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이다. 사람들은 육신의 아버지에 의해서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임신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자유롭고 지적이며 육신과는 독립된 성령이 그의 안에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야만 한다.
무한한 공간에서 비롯된 영원한 성령은 모든 것의 근본이며, 우리가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 세계에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 성령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다. 우리는 성령을 무엇보다 높이 두어야 하며, 성령으로써 살아야만 한다. 성령을 우리 삶의 근본으로 삼을 때, 우리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아버지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런 성령을 주신 것은 우리를 속이기 위함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의식하면서 그런 생명을 잃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이처럼 무한하신 성령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성령을 통해서 사람이 무한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이 성령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무한한 생명을 갖게 되겠지만, 그 성령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참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생명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과 육신에서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선이고 빛이다. 그러나 육신의 삶은 악이고 어둠이다. 성령을 믿는다는 것은 선한 행동을 한다는 뜻이며,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악을 행한다는 뜻이다. 선은 생명이며, 악은 죽음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시작 중의 시작이지만, 우리는 그 분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 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렇다. 밭에서 씨뿌리는 사람이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 씨를 뿌리듯이, 하나님도 사람들에게 성령을 뿌리셨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자라겠지만, 척박한 땅에 떨어진 씨앗은 죽고 말 것이다. 성령만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다. 성령을 보존하느냐 잃느냐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렸다.
성령 앞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삶의 망령이다. 이 세상에는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이 있을 따름이다. 세상은 이렇게 사람들 앞에 주어진다. 모두가 자신의 영혼 안에 하늘의 왕국에 대한 깨달음을 간직해야 한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냐, 아니냐는 누구나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생명을 믿어야만 한다. 그런 생명을 믿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제4장 하나님의 왕국 -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생명이요, 우리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당신의 왕국이 오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이 참된 행복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불쌍히 여겨 가르침을 주었다. “재산과 명예가 없는 사람들, 그런 것들을 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으리라! 재물과 명예를 탐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리라!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안에 있지만, 부자와 명예를 가진 사람은 짧은 삶 속에서 사람들에게 보상을 탐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가난하고 경멸받는 것을 두려워 말라.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라.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다섯 가지 계명을 지켜야 한다. 첫째, 누구에게도 욕하지 말라. 이는 화나게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악은 악을 낳기 때문이다. 둘째, 여자를 탐하지 말며, 한번 결혼한 여자를 내쫓지 말라. 아내를 내쫓고 바꾼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방종을 일으키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셋째, 어떤 종류의 맹세도 하지 말라. 사람은 어떤 약속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맹세는 나쁜 목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넷째, 악에게 저항하지 말며, 남을 심판하지 말며, 법정으로 달려가지 말라. 나쁜 것은 참아 넘기고, 사람들이 요구하는 이상의 것을 해주어라.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며, 다른 사람을 끌어갈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복수를 하게 되면, 당한 사람도 우리에게 똑같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내 이웃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말라. 모두가 한 하나님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거나 금식하지 말라.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신다.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 안에 있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누구에게도 증오심을 품지 않는 것이다. 금식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 위해 금식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살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육신의 일로 걱정하는 사람들은 하늘의 왕국에 들어올 수 없다. 사람은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아버지께서 생명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현재의 시간에 아버지의 뜻 안에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성령의 힘을 주시기를 원하라. 5계명은 하늘의 왕국으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 그 좁은 길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줄 것이다.
양의 탈을 쓴 거짓된 선생들을 조심해라! 거짓된 선생들은 선의 이름으로 악을 가르치기 때문에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폭력과 형벌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거짓된 선생들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아버지의 뜻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선한 것을 행하는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5계명을 행하는 사람은 그에게서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는 안전하고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5계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는 불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제5장 진실된 삶 - 사람의 뜻을 만족시키면 죽음에 이를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키면 진실된 삶을 얻을 것이다.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생명이 아버지의 성령에서 비롯된다고 깨닫는 것에 지혜가 있다. 사람들은 육신적 삶의 목표를 세우고, 그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괴롭힌다. 그러나 그들이 육신의 삶을 이겨내고 극복하며 성령의 삶을 택한다면, 그들을 위해 예비된 삶-성령의 삶-에서 충만한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사람을 위한 참된 양식은 아버지 성령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 성취는 언제라도 가능하다. 우리의 삶은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뿌리신 성령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그 열매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행하는 선한 일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선행을 베풀어야 하며,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아야 한다.”
그 후 예수는 예루살렘에 있게 되었다. 아픈 사람이 누워 있는 호수에 가게 되었다. 그는 기적이 일어나 치유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가 그를 보고 말했다. “기적으로 치유되기를 바라지 말라. 네가 가진 힘으로 살아라. 생명의 의미를 곡해하지 말라.”
환자는 예수의 말에 순종했다. 그는 곧바로 일어나 호수를 떠났다. 그것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안식일에 환자를 치료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행한 일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 성령이 하신 대로 했을 따름이다. 누구나 생명을 선택할 자유뿐만 아니라, 생명을 거절할 자유도 있다. 생명을 택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생명을 거절하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주인이 나누어준 소중한 재산은 아버지 성령의 아들로서 사람에게 주어진 생명의 성령이다. 이 땅의 삶에서 생명의 성령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은 그에게 주어진 것조차 잃게 된다. 참된 사람은 개인의 삶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삶이다. 각자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서 일해야만 한다.“
그 후 예수는 광야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왔다.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이 예수를 찾아와 물었다.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겠습니까?” 모인 사람들 중에는 먹을 것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떡과 물고기를 가진 사람도 있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떡을 나에게 가져오너라.” 예수는 떡을 여러 덩이로 나누었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었다. 제자들은 그것을 또 나누어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들도 똑같이 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나눈 것을 먹었고,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그때 예수가 말했다. “너희도 언제나 이렇게 행동해야만 한다. 모든 사람이 혼자 힘으로 먹을 것을 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 너희 마음속에 있는 성령이 원하는 것을 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예수는 몇몇 제자를 택하여 성령의 생명이란 가르침을 전하도록 멀리 보냈다. 그들을 보내면서 예수가 말했다. “너희는 성령의 생명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육신의 모든 욕망을 버려라. 너희에게 어떤 것도 가지지 말라. 박해받고, 궁핍하고, 고통받을 각오를 해라. 육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고, 너희를 고문할 것이고, 너희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면, 너희는 성령의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성령의 생명은 누구도 너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을 것이다.”
제자들은 길을 떠났다 돌아와서 자신들이 모든 곳에서 악의 가르침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에게 말했다. “당신의 가르침이 비록 악을 이겨내긴 했지만, 당신의 가르침이 바로 악이요. 따라서 당신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예수가 대답했다. “악으로 악을 이길 수는 없다. 악은 오로지 선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 선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아버지 성령의 뜻이다. 모든 사람들은 선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게 된다. 따라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에게 죽음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아버지 성령의 뜻을 행하는 것이 바로 선이다.”
제6장 거짓된 삶 - 진실된 삶을 얻기 위해서, 이 세상의 사람은 육에서 비롯된 거짓된 삶을 버리고, 영적인 삶을 살아야만 한다.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예수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어머니와 형제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특별할 사람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모두에게 함께 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이 권리를 갖는다고 말했다. 예수는 사람의 생명과 은총은 가족관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생명에 달린 것이며 “아버지를 깨달은 사람에게 축복이 있으리라. 성령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집이 없다. 성령에게는 일정한 집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예수는 자신에게도 일정한 거처가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가능하다. 아버지의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린 사람에게는 육신의 죽음조차 두려울 수 없다. 성령의 생명은 육신의 죽음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성령의 생명을 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두려울 수 없다고 말했다.
마리아가 마르다를 돕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만 듣고 있는 것을 보고, 마르다가 혼자서 저녁을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불평하자 예수가 대답했다. “마리아를 그렇게 욕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네가 하는 일의 결실을 원한다면, 그 일에 전념해라. 육신의 즐거움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생명을 위해 진실된 것에 힘쓰도록 도와주어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에 있는 참된 생명을 얻고 싶은 사람은 무엇보다도 사적인 욕심을 버려야만 한다. 그런 사람은 사적인 욕망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계획하지 않으며, 어떤 순간에도 고통과 박탈을 기꺼이 이겨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적인 욕망에 따라서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는 참된 삶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육신의 삶에서 어떤 이득을 얻더라도 그런 이득이 성령의 생명을 멸망시킨다면, 그것이 어찌 이득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성령의 멸망을 초래하는 가장 큰 악은 사적인 이득을 꾀하고 재물을 탐하는 마음이다. 사람들은 어떤 재물과 재화를 얻든지 간에, 그들은 빈손으로 죽게 될 것이란 사실을 잊고 있다. 재산은 생명의 본질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임박해 있다. 우리는 질병, 살인, 사고로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 육신의 죽음은 우리가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따라서 생명이 있는 동안, 우리는 매순간을 누군가의 친절로 허락된 죽음의 연장이라고 보고 이런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그런 사실을 모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땅과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으며 예측한다. 그러나 매 순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죽음만은 잊고 있다. 우리가 죽음을 잊지 않는다면, 육신의 삶에 의지하지도 않을 것이며 굴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뜻에 따르며 육신의 삶을 섬기는 이점과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점을 비교해 보아야만 한다. 그런 비교를 분명히 해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런 계산을 정확히 해낸 사람은 참된 선과 참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거짓된 행복과 거짓된 삶을 버렸던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참된 생명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며, 그들은 참된 생명을 알고, 참된 생명의 부름을 듣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앞의 걱정에 사로잡혀 참된 생명을 빼앗기고 있다. 참된 생명은 부자가 열었던 잔치와도 같다. 부자는 잔치를 벌리고 손님들을 초대했다. 아버지 성령의 목소리가 사람들을 불렀듯이, 부자도 손님들을 불렀다. 그러나 초대받은 손님들은 장사로, 농사로, 집안 일로 바빴다. 그들은 잔치에 오지 않았다. 세상 걱정이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만이 잔치에 참석해서 행복을 얻었다.
결국 육신의 삶을 위한 걱정 때문에 한눈을 팔았던 사람들은 참된 생명을 얻지 못했다. 육신의 생명의 이득과 걱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과 하나님을 조심씩 나누어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의 삶을 섬기는 것이 나은지, 그리고 우리의 삶을 적당히 조절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우리 것이 아닌 재산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된 재산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거짓된 생명과 성령의 생명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하나를 섬겨야 한다.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 사람들이 보기에 소중한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추악한 것일 수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재물은 악이다. 부자는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지만, 그의 집 앞에 있는 거지는 굶주리고 있다는 점에서 부자는 죄인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지 않은 재물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지 않은 것이란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선은 측정될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더 많은 선을 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남은 푼돈마저 헌금함에 넣은 과부가 1천금을 넣은 부자보다 더 많은 것을 냈다고 말할 수 있다. 선은 그 효율성의 가치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던 여인을 귀감으로 삼도록 하자. 유다는 향유의 값으로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여인더러 어리석게 행동했다고 꾸짖었다. 그러나 유다는 도둑이고 거짓말쟁이였다. 또한 유다는 물질적 이점에 대해 말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행동의 효율성이나 선물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매 순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제7장 나와 하나님은 하나이다 - 영생을 얻는 참된 양식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그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증거를 요구했다. 예수는 그들의 요구에 대답하며 말했다. “내 가르침이 진리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내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에서 비롯된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내 가르침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옳은 것이다. 내가 가르친 것을 행하라. 5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내 가르침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5계명의 실천은 이 세상에서 모든 악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5계명은 더할 나위 없는 진리이다. 또한 하나님이 나를 보냈으므로, 나는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결국 진리를 가르친다. 모세의 율법은 인간 욕망의 성취를 가르친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내 가르침은 아버지의 뜻으로 가득하며, 따라서 모순이 없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가 예언에서 언급된 그리스도라는 외적인 증거를 요구했다. 그런 요구에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누구이고, 너희의 예언이 나를 두고 말하는 것인지 의문을 갖지 말아라. 대신 내 가르침을 경청하고, 내가 우리 모두의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귀담아 들어라.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형식적인 문제로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내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참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내 가르침이 진리라는 증거가 있을 수 없다. 내 가르침은 빛 자체이다. 빛이 다른 것으로 밝혀질 수 없듯이, 진리도 진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내 가르침은 빛이다. 그 빛을 보는 사람은 빛과 생명을 가지며,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빛으로 나와야만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시 예수에게 육신적 신분으로 누구냐고 물었다.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했듯이, 나는 인자이고 생명의 아버지의 아들이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르치는 진리이다. 오로지 그런 사람만이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참된 삶으로 받아들이는 착각으로 노예가 되었다. 주인의 아들 이외에 어떤 하인도 주인의 집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듯이, 육신의 노예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아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영혼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너희 아버지는 육신의 신이지만, 내 아버지는 생명의 성령이시다. 너희가 신이라 부르는 너희 아버지는 질투하는 신이며, 사람을 살육하는 신이며, 사람을 처형하는 신이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생명을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아버지의 자손들이다. 너희 신은 악마이며, 악의 근원이다. 그런 신을 섬김으로써, 너희는 악마를 섬기는 것이다. 내 가르침은 우리가 생명의 아버지의 아들이란 것이다. 내 가르침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면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물었다. “어떻게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셨던 아브라함조차도 죽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당신과, 당신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들의 질문에 예수가 대답했다. “내가 내 권한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가 하나님이라 부르며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 계시는 생명의 근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 근원을 알고 있으며, 알 수밖에 없다. 또한 나는 그 분의 뜻을 알고 있으며, 그 분의 뜻을 이루고 있다. 내가 말하는 생명의 근원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 생명의 근원 덕분에 죽음마저도 없다.
내 가르침이 진리라는 증거를 요구하는 것은,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시력을 되찾았을 때 그에게 보이는 것이 빛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시력을 되찾은 맹인은 과거와 다름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맹인이었지만 이제서야 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삶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이제야 깨달은 사람도 똑같이 말할 뿐, 달리 말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과거에 삶의 참된 선을 알지 못했지만, 이제 참된 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시력을 회복한 맹인이 올바른 방법으로 치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달리 말해서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준 사람이 악을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치료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나는 내 치료의 온당함이나 나를 치료해준 사람의 죄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또한 더 나은 방법으로 치료받을 수 있었다는 것도 모른다. 다만 내가 맹인이었지만, 이제 볼 수 있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된 행복을 가르치는 의미와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의미를 깨달은 사람도 그 가르침이 온당한 것인지, 그 가르침을 주었던 사람이 죄인이었는지, 훨씬 큰 행복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다만 “내가 전에는 삶의 의미를 몰랐지만, 이제 나는 그 의미를 깨달았고,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내 가르침은 생명이 잠든 순간에도 깨우는 것이다. 내 가르침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눈뜨는 것이며, 죽은 다으에도 사는 것이다.“
그 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인자에 대한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했냐고 묻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선생님이 생명의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생명입니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말했다. “시몬아, 너는 다행히도 내 가르침을 이해했구나. 사람이었다면 너에게 그런 가르침을 깨닫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네 안의 하나님이 너에게 깨달음을 주셨기 때문에, 너는 내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의 참된 생명은 그런 깨달음 위에서 비롯된다. 참된 생명에는 죽음이 없다.”
제8장 생명은 한때의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참된 삶은 현재에 사는 것이어야만 한다. “언제나 다름없이”
육신의 삶을 포기하는 대가에 대해 제자들이 의심스러워하자, 예수가 그들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서 말했다. “내 가르침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보상을 두고 궁금해하지 않는다. 첫째로 내 가르침을 위해서 가족과 친구와 재물을 포기한 사람은 백 배가 넘는 친구와 재물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보상을 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에 반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왕국에는 더 크고 더 작은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똑같다. 선의 대가로 보상을 바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주인과 처음에 약속한 것 이상을 요구하는 일꾼과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높거나 더 중요할 수 없다. 모두가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고, 더 중요하고,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왕들과 그런 왕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을 높이려는 생각을 버릴 수 있을 때, 생명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될 것이다. 생명의 의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아버지에게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양 떼를 떠나는 것처럼, 한 여인이 잃어버린 한 푼을 찾기 위해서 온갖 곳을 헤매고 다니는 것처럼, 아버지는 원래 그 분에게 속했던 것을 되돌리려 하신다. 그래서 아버지의 끊임없는 작업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참된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아야만 한다. 참된 생명은 잃어버린 것이 원래 속해 있던 것으로 회복되는 것에서 나타난다. 잠들어 있던 사람이 깨어날 때 참된 생명이 있다. 참된 생명을 얻어 그들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세속의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들을 더 낫거나 또는 더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생명을 나누어 갖게 된 사람은 잃었던 것을 아버지에게 되돌려주면서 즐거워할 수 있을 따름이다. 길을 잃었던 아들이 회개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올 때, 같은 아버지의 다른 아들들이 어떻게 아버지의 즐거움을 시샘할 수 있겠으며, 형제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그 가르침을 행하면서 삶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서, 외적인 증거나 보상의 약속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생명의 완전한 주인이라 생각하고, 생명이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라 믿는다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하는 희생은 보상을 바라는 행위로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보상이 없다면 그들은 어떤 희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선을 섬기기 위해서 육신의 삶을 포기한다면, 감사와 보상을 바라고 일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주어진 의무와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선한 행동이란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삶을 그런 식으로 이해할 때에만, 사람은 진정으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믿음을 얻게 된다.
하늘의 왕국은 삶을 그렇게 이해하는 데 있다. 하늘의 왕국은 사람의 깨달음에 있다. 온전한 세상은 예로부터 있었다. 사람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장사를 하고, 죽는다. 이런 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영혼에 하늘의 왕국이 살고 있다. 봄이 되면 싹이 제 스스로 돋아나듯이, 생명에 대한 깨달음도 성장하게 된다.
참된 삶은 아버지의 뜻을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행하는 것이다. 참된 삶은 우리 각자가 바로 이 순간에 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한눈 팔지 말아야 한다. 과거나 미래의 삶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삶을 지켜야만 한다. 따라서 사람은 현재의 시간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며 축복이다. 선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런 생명을 얻는다. 바로 현재에 있는 사람에게 베푼 선행이 우리를 아버지와 하나로 맺어주는 생명이다.
제9장 유혹 - 순간적인 삶의 기만으로 우리는 현재의 진실된 삶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에 있는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알면서 태어난다. 어린아이는 그것을 알고 살아간다. 어린아이에게서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린아이의 삶을 깨닫고 어린아이를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린아이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살아간다. 5계명을 범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잘못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5계명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어른들은 어린아이에게 5계명을 어기도록 인도함으로써 그들을 파멸시킨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사람의 목에 맷돌을 묶고 강에 던지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다. 사람들이 유혹에 굴복하기 때문에 세상은 불행할 따름이다. 유혹이 없다면, 세상은 행복할 것이다. 유혹은 짧은 생명에서 헛된 이득을 꾀하기 위해서 사람을 악하게 행동하게 만든다.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 사람을 파멸로 이끈다. 따라서 유혹에 빠지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낫다.
첫 계명을 범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자기만이 옳고 다른 사람들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아버지에게 무한한 빚을 지고 있으며, 이웃들을 용서함으로써 그 빚을 탕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따라서 사람은 어떤 모욕을 받더라도 용서해야만 한다. 욕하는 사람이 우리를 거듭해서 모욕하더라도 맞상대해서는 안 된다. 몇 번이고 모욕하더라도, 용서해야만 한다. 욕한 것조차 기억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용서만으로 하늘의 왕국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며, 용서받기를 바란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겠는가? 우리는 스스로 두려워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행복이다. 악은 우리를 아버지에게서 떼어놓은 것이다. 악이 우리를 파멸시키고 우리에게서 생명을 빼앗는 것이라면, 어떻게 잠시라도 빨리 악을 억누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악은 우리를 육신의 파멸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런 유혹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생명을 얻고,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사랑으로 맺어진다.
사람에게 둘째 계명을 범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여자가 육신의 쾌락을 위해 창조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원래의 아내를 버리고 다른 아내를 취하면 더 많은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여인의 미색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아내를 선택한 남자는 그 아내와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남자가 한 아내를 갖고, 모든 아내가 한 남편을 갖는 것이다.
사람에게 셋째 계명을 범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일시적인 삶의 이득을 위해서 제도화된 권력을 만들고, 그런 권력이 요구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맹세로 서로를 얽매는 것이다.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그들의 생명을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권력의 요구는 폭력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악에도 저항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권력이 선을 요구하던 힘든 노동을 요구하던 간에 사람은 순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맹세함으로써, 행동이 얽매이게 만들지 말라. 왜냐하면 강요된 맹세는 반드시 악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넷째 계명을 범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분노와 복수를 꾀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못된 짓을 한다면, 그런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며, 정의가 인간의 심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남을 심판하기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서로를 구원하기 위해 부름 받은 것이란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 자신이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남의 잘못을 심판할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정결함과 용서와 사랑의 표본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사람에게 다섯째 계명을 범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자기 민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민족에 대항하며 그들을 물리쳐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모든 계명을 “차별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라.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행복을 주셨던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라고 요약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자신의 조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의 사람에게도 선행을 베풀어야만 한다.
참된 생명에 눈뜬 사람들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살게 된다. 그곳에는 공간도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버지와 더불어 살게 된다. 우리 때문에 죽게 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간다. 따라서 모든 계명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각자가 마음속에 생명의 근원을 간직해야 한다.”고 집약할 수 있다.
제10장 유혹과의 싸움 - 그래서 유혹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과 하나됨을 잊지 말 아야 한다. “우리를 유혹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의 종교와 민족을 파멸시키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예수의 결백과 정직함 때문에 예수를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수에게는 아무 죄도 없었지만,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예수를 죽일 구실을 생각해냈다. “예수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우리가 예수에게 생명을 허락하여 죽이지 않는다면, 유대민족은 멸망할 것이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는 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예수가 예루살렘에 나타나는 즉시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예수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유월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거나, 어떤 사람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를 위한 진리를 바꿔놓을 수 없다. 나는 빛을 보기 때문에, 내가 어디에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될지 알고 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만이 두려워하거나 의심을 갖는다.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넘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베다니라는 마을에 들렸다. 그 마을에서 마리아가 소중한 향유를 예수에게 부어주었다. 제자들을 값비싼 향유를 낭비했다고 마리아를 나무랐지만, 육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안 예수는 마리아의 행위가 그의 장례를 위한 준비라고 말했다.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뒤를 따랐다. 그런 모습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죽여야한다는 결심을 확실히 굳혔다. 그들은 예수를 붙잡을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예수는 율법에 어긋나는 자그마한 말실수도 그를 죽일 핑계가 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성전으로 들어가, 제물과 제주로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의 관습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가르침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예언에 근거했던 그의 가르침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의 명백한 위배를 찾아낼 수 있었고, 그것을 문제삼아 예수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편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던 이교도가 있었다. 제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교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예수가 본마음을 드러내어 사람들을 흥분시키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이 예수와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제자들은 그 사람이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로 결정했다.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이교도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것으로 유대의 율법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고,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그를 단죄할 구실을 제공하는 셈이었다.
유월절 첫날, 예수는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켰다. 가롯 유다는 예수가 그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 일행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유다가 그를 팔아 넘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자들 모두가 식탁에 앉았을 때, 예수는 떡을 들고 12조각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한 조각씩 나누어주었다. 다른 제자들에게 주었듯이 유다에게도 주며 말했다. “떡을 집어라. 내 몸을 먹어라.”
그런 다음 예수는 포도주로 잔을 채웠다. 유다를 포함해서 모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분명한 이름을 거론하지 않으며 말했다. “너희 중 하나가 내 피를 흘리게 할 것이다. 내 피를 마셔라.” 그리고 나서 예수는 식탁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나서, 예수가 말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신하여 죽게 할 것이며, 내 피를 흘리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마실 것을 주었다. 또한 발까지 씻겨주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너희를 해치려는 사람들에게 너희도 그렇게 행동하라고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내가 한 것처럼 너희도 행동한다면, 너희에게 축복이 있을 것이다.”
그러자 모든 제자들이 배신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그 사람에게 눈총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었을 때, 예수는 유다를 가리키며 즉시 떠나라고 말했다. 유다는 식탁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때 예수가 말했다. “인자를 높인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인자를 높이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심지어 우리를 해치는 사람에게도 아버지처럼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 가르침을 두고 논쟁하지 말라.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랬듯이, 내 가르침을 조각 내어 해석하지 말라. 내가 언제나 목숨을 다해 너희를 사랑했듯이, 너희도 언제나 목숨을 다해 서로를 사랑해라. 그렇게 해야만 너희가 영광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갔다. 예수는 한적한 곳을 찾아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 아버지 성령이시여! 이 유혹과의 투쟁을 저로서 끝나게 해주시옵소서. 당신의 뜻 안에서 저를 확인시켜 주시옵소서. 제 육신의 생명을 지키고 싶은 욕심을 이겨내고 싶나이다. 악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당신의 뜻대로 하고 싶나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의 간구를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육신을 생각지 말라. 오로지 너희 안에 있는 성령을 높이도록 애써라. 힘이 성령 안에 있기 때문이다. 육신은 약하다.” 예수는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오, 아버지시여! 고난이 있어야만 한다면, 속히 오게 하시옵소서. 하지만 그 고난 속에서 제가 원하는 것이 하나 있나이다.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저에게서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제자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는 다시 유혹과 싸웠고, 마침내 유혹을 이겨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이제 결심이 섰다. 너희는 안심해도 좋다. 나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의 손에 내 몸을 던질 것이다.”
11장 이별의 말씀 - 사사로운 삶은 육의 환상이며, 악이다 그러나 진실된 삶은 모두가 공유하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한 예수는 자신의 육신을 버리러 갔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멈추어 세우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예수가 대답했다. “네가 갈 수 없는 곳으로 간다. 나는 죽을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너는 아직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베드로가 말했다. “저도 선생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대답했다. “사람은 어떤 것을 두고도 맹세할 수 없다.”
예수는 이렇게 베드로에게 말한 후,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명을 믿기 때문에 죽음마저 두렵지 않다. 내 죽음으로 불안해하지 말라. 생명의 아버지이신 참된 하나님을 믿어라. 그러면 내 죽음이 결코 너희에게 두렵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명의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면, 나는 생명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에게 죽음 후에 내 생명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희에게 참된 생명의 길을 알려주었다. 내 가르침은 너희에게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참된 생명으로 가는 진실된 길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생명의 근본이시다. 내 가르침은 사람이 아버지의 뜻 안에서 살아야만 하며, 모든 사람의 행복과 생명을 위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네가 떠나고 나면,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너 자신이 너의 선생이 될 것이다. 내 가르침을 행한다면, 너희가 진리 안에 있으며 너희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언제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너희 안에 있다. 너희 안에서 생명의 아버지를 깨닫게 될 때, 어떤 것도 너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너희가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산다면, 내 죽음이나 너희 죽음도 너희를 두렵게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독립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착각이다. 참된 생명은 아버지의 뜻을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하는 깨달음이다. 따라서 사람은 아버지 된 나무에서 자라는 나뭇가지처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살아야만 한다. 자기의 뜻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찢겨 나간 나뭇가지처럼 죽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선한 일을 하도록 나에게 생명을 주셨다. 나도 너희에게 선한 일을 하라고 가르쳤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킨다면, 너희에게 축복이 있을 것이다. 내 모든 가르침을 요약하는 계명은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이다. 사랑은 또 다른 생명을 위해서 육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다. 다른 정의는 모두 거짓이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서로 미워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세상이 나를 미워했듯이 너희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내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은 너희를 박해할 것이고, 너희를 못살게 굴 것이다. 세상은 참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너희를 박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진리를 확신해야만 한다.
내가 육신의 생명으로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있지 않더라도, 내 성령은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너희도 너희 안에서 항상 성령의 힘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때때로 너희들은 약해질 것이고, 성령의 힘을 잃어 유혹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참된 생명에 다시 눈뜨게 될 것이다. 너희에게도 육신에 구속되는 시간이 닥칠 것이다. 그러나 일순간일 따름이다. 너희는 고통받겠지만 다시 성령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박해와 내적인 갈등과 성령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너희 안에 살아 있다.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은 내가 드러내 보였던 아버지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성령을 외쳐 부른 후, 예수는 기도를 시작했다. “당신이 저에게 명하신 것을 저는 다 했습니다. 당신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 말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무한한 생명의 근원에서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그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제 안에 있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저와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그들을 세상에 보내셨듯이, 그들도 세상을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제12장 물질에 대한 정신의 승리 -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사로운 삶보다는 모두를 위한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다. 그들의 육체적 죽음은 하나님과의 하나됨일 따름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끝내고 일어섰다. 멀리 달아나거나 몸을 감추려 하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다가오는 유다를 향해 걸어갔다. 예수는 유다를 보고, 무슨 이유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유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많은 군사들이 예수를 에워쌌다. 모든 제자들이 달아났고 예수만이 남게 되었다. 그때 장교가 군인들에게 예수를 결박하여 안나스에게 끌고 가라고 명령했다. 안나스는 예수가 죽지 않는다면 온 유대백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뜻이 함께 한다고 느낄 수 있었던 예수는 죽음을 준비했고, 그들이 그를 잡아가는 순간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를 안나스에게 끌고 갔을 때에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가 처형당하러 끌려가는 것을 보았을 때, 베드로는 그들이 자기까지 죽이지 않을까 두려웠다. 문지기가 그에게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예수를 부인했고 예수를 떠나버렸다.
잠시 후 닭이 울었을 때에야, 베드로는 예수가 그에게 말해 주었던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육신의 유혹에 두 가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두려움과 싸움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그에게 경고해주었던 두 유혹에 베드로는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악에 저항하려 했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려 하면서 동시에 유혹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육신의 고통에 두려웠던 까닭에, 베드로는 그의 스승을 부인했던 것이다.
예수는 가야바 앞에 끌려갔을 때에도 싸우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가야바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야바가 그의 가르침에서 잘잘못을 찾아내기 위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예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아무 것도 감추지 않았고, 지금도 감출 것이 없다. 내 가르침이 무엇인지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면, 내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에게 물어라.”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다시 물었다. “말해라, 네가 그리스도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냐?” 예수가 대답했다.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지금 너희는 나를 고문하면서, 인자가 하나님과 얼마나 닮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대제사장은 예수의 그런 대답을 듣고 즐거워하며, 다른 제사장들에게 말했다. “방금 한 대답으로 그를 벌주기에 충분하지 않소?”
제사장들이 대답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누구도 사형에 처할 권한이 없었다. 사형을 시키려면 로마 총독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들은 법정에서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뭇사람이 예수를 모욕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 다음에야 그들은 예수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 예수의 사형을 간청했다.
빌라도는 그들에게 예수를 죽이려는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예수가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빌라도는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법에 따라 예수를 심판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대답했다. “저희는 당신이 예수를 죽여주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로마의 가이사에게도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유대인의 왕이라 불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불러들인 다음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체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느냐?” 예수가 말했다. “내 왕국이 무엇인지 네가 진정으로 알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형식적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냐?” 빌라도가 대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네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건 말건 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너는 누구냐? 왜 그들이 너를 왕이라 부르느냐?” 예수가 대답했다. “내가 스스로 왕이라 불렀다는 그들의 말은 사실이다. 나는 왕이다. 하지만 내 왕국은 이 땅에 있지 않다. 내 왕국은 하늘에 있는 왕국이다. 나는 하늘의 왕이며, 내 힘은 성령에 있다.”
빌라도가 말했다. “결국 네가 스스로 왕이라 생각한 것은 사실이구나?” 예수가 대답했다.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다. 나는 성령으로만 살아가며,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살 때 자유롭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가르칠 뿐이다.” 빌라도가 말했다. “너는 진리를 가르친다고 하지만, 누구도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모두가 자기만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한 후,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지은 것을 찾아낼 수 없소. 당신들은 왜 이 사람을 죽이려 하는 거요?” 대제사장이 말했다. “그는 사람들을 선동했기 때문에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제사장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것도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예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빌라도가 말했다. “내가 그를 처벌할 수는 없소. 그를 헤롯에게 보내시오.” 헤롯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도, 예수는 제사장들의 거센 비난에 대응하지 않았다. 예수를 하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헤롯은 예수를 조롱하려, 예수에게 붉은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빌라도는 예수를 불쌍히 생각해, 유월절 축제까지 들먹이며 예수를 용서하도록 제사장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따랐던 사람들까지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 빌라도는 예수를 방면하도록 그들을 거듭해 설득해 보았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사람들은 예수가 사형되어야만 한다고 소리쳤다. 그들은 이렇게 소리쳤다. “예수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한 죄를 범했다!”
빌라도는 예수를 다시 불러들인 다음 물었다. “너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대체 너는 누구이냐?” 예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왜 너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느냐? 나에게 너를 죽일 권한도 있지만 살려 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예수가 대답했다. “너는 나를 지배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모든 힘은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빌라도가 세 번째로 유대인을 설득하며 예수를 방면하려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말했다. “우리가 가이사를 모반한 반역자로 고발한 사람을 사형시키지 않는다면, 당신도 가이사의 편이 아니라 적이 되는 것이요.” 그들의 협박에 빌라도는 굴복하고 말았다.
마침내 빌라도는 예수를 사형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예수의 옷을 벗기고 매질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예수에게 다시 붉은 옷을 입혔다. 그들은 예수를 때리고 욕을 퍼부었다. 예수를 조롱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에게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고, 처형장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조롱했다.
그들의 조롱에 대답하듯, 예수는 기도를 드렸다. “아버지, 그들이 조롱한다 해서 그들을 벌하지 마시옵소서. 그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죽음이 가까웠음을 깨달은 예수는 마지막으로 기도를 드렸다. “아버지시여! 제 영혼을 아버지의 품안에 맡기나이다!” 그리고 예수는 고개를 떨구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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