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69]동학혁명의 마지막 유산 ‘원평집강소’
동학농민혁명의 거의 유일한 유산이라 할 ‘원평집강소’를 아시겠지요? 1894년 전봉준 장군이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주화약全州和約를 맺은 후,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됐습니다. 획기적인 사실입니다. 당시 집강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의(농민? 공무원?) 신바람을 상상해 봅니다. 하루가 짧다며 보람되다며 죽기살기로 일을 했겠지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이 행정권을 장악하여 직접민주주의의 ‘본때’를 보인, 집강소는 그야말로 우리 근대사의 새 장을 연 역사적인 행정기관이었습니다. ‘집강’은 동학의 대접주(전봉준, 김덕명, 김개남 등)가 공무를 집행한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53개 집강소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게 ‘원평집강소’입니다. 역사적인 가치를 따지자면 일러 무삼할 정도로 어마무사한 곳이지요. 일제강점기에는 면사무소가 쓰였다가 원불교 교당으로, 그리고 개인주택이 되었던 것을, 2014년 문화재청이 매입하고, 2015년 김제시에서 원형을 복원했다지요. 마당 옆 장승에 쓰인 “평등한 세상” “동록개의 꿈”이라는 2개의 문구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동록개’는 이름없는 백정의 별명(‘동네개’를 달리 부르는 호칭)으로, 대접주 김덕명 장군에게 “신분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어달라”며 그의 유일한 재산이었을 4칸 초가를 헌납했다는군요. 동록개의 꿈을 아시겠지요? 정답은 ‘평등한 세상’입니다.
어제 오후, 막역한 지인 세 분(임실엉겅퀴왕 친구, 전 대학 한문학과 교수 친구, 임실 딸기왕 성님)과 그곳에 처음으로 가 그 실체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언제나 그렇듯 또 놀랐습니다. (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최고원 님으로부터 친절한 설명도 들었습니다. 김제의 향토사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최순식(崔洵植, 1933-2009) 선생의 따님이더군요.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한 정읍의 향토사학자 최현식(1922-2011) 선생과 이름 한 자만 달라 놀랐습니다. 대청마루에 놓인 방명록에 “동록개 만세!” “동학혁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현재 복원한 집강소는 정말 초라했습니다. 집강소 뒤에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어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집강소의 규모가 무척이나 궁금하지만 알 도리가 없는 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전라도의 다른 집강소들은 왜 흔적이 하나도 없을까요? 모두 일제가 일부러 없앤 때문일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유네스코가 2023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면서 비로소 명칭이 100여년만에 확정됐습니다)의 마지막 전적지를 아시는지요? 흔히 ‘원평전투’(1894년 음력 11월 25일, 양력 12월 21일)를 일컫지만 ‘원평 구미란龜尾卵전투’라 해야 합니다. 거북은 알을 한번에 수 백개 낳는다지요. 그 구미산에서 동학군 7000여명이 관군-일본군과 하루종일 싸우다 패배한 것이 마지막 전투입니다. 당시 관군자료에 기록된 빼앗은 군수품 목록(화룡총 10자루, 조총 60자루, 탄환 7점, 화약 5궤짝, 칼과 창 200자루, 쌀 500섬, 돈 3000냥, 면포 10동, 소 2마리, 말 11필 등)을 보니 가슴이 마구 아려오더군요. 전투에서 패한 전봉준-김덕명 장군은 피신하다 지인의 밀고로 체포됩니다. ‘우리편’은 그때 몇 명이나 죽었을까요? 기록에는 ‘37명’이라 돼 있지만, 3700명도 더 되는 수천명이 구미산에서 죽었겠지요. 피신에서 돌아온 주민들이 이곳저곳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구미산 주변에서 살았던 아이들은 인골人骨을 장난감으로 놀았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이에 기념사업회에서는 해마다 12월 21일이면 합동위령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너른(넓은 들)’이라는 뜻의 원평院坪에 그런 아픈 역사가 130여년에 '분명히' 있었습니다. 지난해 정읍의 황토현전적지에서 느낀 애통하고 분노하는 마음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나마 녹두장군의 부릅뜬 눈을 어느 조각가가 잘 표현한 것에 안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위정자爲政者들은 농업이 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을 입에 침이나 바르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때의 ‘위정’는 아무래도 ‘僞政’일 듯싶습니다. 농심農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참을 때까지 참다가도 도저히 못참을 것같으면, 쇠시랑도, 트랙터도, 조선낫도 들고 상경을 할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더 무섭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쌀의 수확량이 많다며 신동진벼를 덜 심으라고 하는 정부의 그 ‘깊은 뜻’을 일개 농사꾼이 어찌 알겠습니까만, 커피값보다 못한 쌀값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나이 먹도록(칠십이 내일모레) 모를 일입니다. 도무지 아지 못하겠습니다. 방명록에 “동학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쓴 까닭입니다.
아아-, (그 무수한 농학꾼들을 생각하며) 한없이 뿌듯했으나, 이것이 ‘슬픈 역사’가 아니면 그 무엇이 슬픈 역사이겠습니까? 허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은 이제야 조금씩 기지개를 펴는 듯했습니다. 문광부나 문화재청 그리고 지자체와 학계에서 지대한 관심과 후원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사단법인 지원예산이 연 810만원이라는 말을 듣고는 또 경악했습니다. ‘이래서야 어찌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가겠는가’라는 어줍잖은 생각도 했습니다. 종로 1가 영풍문고 입구에 세운 전봉준 장군의 형형한 눈빛을 보신 적이 있는지요? 이이화 선생이 서두르고 서울시의 협조도 중요하지만 이름없는 국민들의 후원이 없었다면, 지금도 그곳에 좌상이 서있을까요? 5천년 역사를 봐도 언제나 국민(백성)이 일어섰습니다. 토착왜구와 밀정이 판을 치는 세상이 도래한 듯한 오늘날이 한심지경입니다. 녹두장군의 눈물을, 찢어지는 가슴을 달래고 위로해줄 날은 언제나 올까요? 과연 오기는 올까요? ‘아지 모게라’입니다.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