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최북단의 항구도시가 그디니아다. 그단스크~소포트~그디니아를 묶어 트라이 시티(Tricity)라 일컫는다. 소포트에서 기차로 10여분 거리다. 18세기 그디니아는 너무 작았기에 그 시대의 많은 지도에도 표시 되지 않았다. 작은 어촌 마을이었을 뿐이다. 20세기 들어서 항구가 만들어지면서 크게 발전해 현재는 폴란드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었다. 매년 그디니아 영화제, 음악제가 열린다.
그디니아 역.
폴란드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그디니아(Gdynia) 역에서 내리면 뭔가 썰렁하다. 인근에 위치한 소포트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소포트는 유명 관광지답게 아기자기한 아름다움과 볼거리가 많은데 그디니아는 특색 없는 현대적인 건축물이다. 그디니아의 첫 인상은 소포트에 비해 훨씬 뒤처진다.
역에서 항구로 가는 길목(10 Lutego)도 특징은 없다. 여느 도심에서나 볼 수 있는 현대적인 건축물들을 무심하게 쳐다보면서 바다를 향해 일직선으로 난 거리를 따라 걷는다. 바다와 항구에 가까워지면서 건물들도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유럽 시의회 공원(European Council Park)에 이른다. 모습은 그렇지만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없는 도시는 아니다.
그디니아는 폴란드 북부 포모르스키에(Pomorskie) 주에 위치한다. 폴란드에서 12번째로 큰 도시이며 포메라니안 주에서 그단스크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크다. 역사적, 문화적으로 카슈비아((Kashubia)와 동부 포메나리아(Eastern Pomerania)의 일부다. 1926년 그디니아는 도시 권리를 부여받은 후 모더니스트 도시로 개발되었다. 폴란드의 주요 항구 도시이자 관광 도시이며 해변휴양 도시다. 이제는 폴란드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유명하다. 2021년에는 유네스코 영화 창의도시로 선정되었다.
지도에 표시 되지 않은 도시
말 나온 김에 그디니아 역사도 알아보자. 그디니아는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에서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됐다. 그디니아는 독일식 이름인 그딩겐(Gdingen)이었다. 1789년 그디니아에는 스물 한 가구만 있었다. 그 즈음 그디니아는 너무 작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많은 지도에도 표기 되지 않았다. 1871년, 이 마을은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는 독립을 되찾았고 1920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그디니아는 다시 태어난 폴란드 국가와 재통합되었다. 동시에 인근 도시인 그단스크(단치히)와 주변 지역은 자유 도시로 선언되었다. 20세기 초 그디니아는 가난한 어촌이 아니었다. 여러 게스트 하우스, 레스토랑, 카페, 신고딕 양식의 저택 및 소형 무역선이 드나드는 작은 항구가 있는, 인기 있는 관광지였다. 그디니아 최초의 시장은 얀 라트케(Jan Radtke, 1872~1958)로 카슈비안이었다.
발트해에서 가장 크고 현대적인 항구
그디니아의 발전에는 항구 건설이 있었다. 폴란드·소련 전쟁(1919~1920)이 한창이던 1920년 겨울, 폴란드 정부는 그디니아에 주요 항구를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단치히 자유시 당국과 항구 노동자들은 폴란드의 경제적 권리가 전쟁을 돕기 위해 남용되고 있다고 느꼈다. 독일 항만노동자들은 폴란드 군을 지원하기 위해 서방에서 보낸 군수품의 하역을 거부하면서 파업에 돌입했다. 폴란드 당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항구 도시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1921년 그디니아 항구 건설을 시작해 1923년, 550m 부두와 175m의 목재 방파제가 있는 작은 항구가 만들어졌고 그해 4월 23일, 그디니아 항구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8월 13일 그단스크 항구가 공습으로 막히자 이 항구로 프렌치 라인(French Line), 증기선 켄터키(Kentucky)가 도착했다.
1930년 말까지 부두, 교각, 방파제 및 많은 보조 및 산업 설비가 건설되었다. 이때 그디니아는 석탄 수출을 위해 설계된 유일한 환승 및 특수 항구였다. 1938년 그디니아는 발트해에서 가장 크고 가장 현대적인 항구이자 유럽에서 10번째로 큰 항구였다. 환적량은 폴란드 대외 무역의 46%인 870만 톤으로 증가했다. 그해 그디니아 조선소는 최초의 해상 선박인 올자(Olza)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바닷가 조선소.
그디니아 안내 팻말.
끝까지 저항한 그디니아
이 작은 도시 그디니아는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독일의 폴란드 침공 동안 치열한 폴란드 방어 장소였다. 1939년 9월 14일 독일군은 도시 전체를 점령한 후 1945년까지 점령했다. 독일군이 폴란드인을 대거 체포했을 때, 폴란드군은 여전히 그디니아의 켕파 옥시브스카(Kępa Oksywska)에서 전투를 벌였다.
체포된 폴란드인들은 교회, 영화관, 강당에서 구금되어 심문을 받았고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거나 처형됐다. 1939년 11월 ‘피아스니차(Piaśnicy) 숲 학살 사건’은 그 유명한 ‘카틴 숲 학살(1940년)’보다 앞섰다. 이때 독일인들은 이 지역에 살았던 고대 게르만 부족인 고트족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고텐하펜으로 개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그디니아 항구
세계2차대전 때 그디니아 항구는 독일 해군 기지가 되었다. 그디니아는 전쟁터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중요한 기지가 되었고 많은 독일 대형 선박(전함과 중순양함(重巡洋艦, Heavy Cruiser))이 정박했다. 1942년 독일 나치당의 최고선전가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의 지시로 제작된 영화 타이타닉(Titanic, 1943년)의 로케이션 현장이기도 하다.
항구와 조선소는 모두 1943년부터 연합군의 여러 공습에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디니아는 1944~1945년 겨울 동안은 적군에 갇힌 독일군과 난민을 대피시키는 항구로 이용됐다. 일부 함선은 서부 항로의 발트해에서 소련 잠수함의 어뢰에 맞았다. 빌헬름 구스틀로프(Wilhelm Gustloff) 호는 약 9,400명의 승객을 태우고 침몰했다.
이는 해양 역사상 단일 침몰 사고 중 최악의 인명 손실이었다. 항구 지역은 독일군 철수와 포위된 수백만 명의 난민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었다. 1945년, 소련군의 폭격(건물과 장비의 90%가 파괴됨)과 주요 수리를 위해 옮겨온 독일 전함(Gneisenau)에 의해 항구 입구가 막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3월 28일 이 도시는 소련군에 점령되어 폴란드에 반환되었다. 소련은 1989년, 공산주의가 몰락할 때까지 정권을 유지한 공산 정권을 세웠다. 전후 기간에는 독일에 의해 파괴된 바르샤바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했다. 빌노(지금의 빌니우스)와 리부프(지금의 리비우), 그리스 내전의 난민인 그리스인들이 이 도시에 정착했다. 그디니아 항구는 그리스 내전의 피난민들이 폴란드에 도착한 세 개의 폴란드 항구 중 하나였다.
그디니아의 역사의 또 다른 큰 사건은 그디니아 조선소의 노동자 시위 사건(1970년 12월 17일)이다. 18명의 노동자가 숨졌다. 이 사건은 1980년, 그단스크 연대자유노조 운동이 생기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사건은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 감독의 영화 철의 사나이(Man of Iron, 1981년)에서 묘사되었다. 그디니아는 작은 항구가 있는 단순한 바닷가 도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그디니아의 과거의 역사는 깊숙이 숨어 들어가 있지만 세계 2차 대전의 현실은 당시의 해군 구축함이 박물관으로 남아 보여준다.
광장 분수대.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광장
세계 2차 대전의 현실을 보여주는 곳은 그디니아 바닷가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광장(Tadeusz Kościuszko Square) 주변이다. 이 광장은 그디니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소로 멋진 분수대와 대관람차가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푸른 하늘이 관람차 휠 사이를 메우고 있는 모습이 눈부시다. 이 광장에는 ‘폴란드 선원’ 명판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을 기념하는 명판이 있다.
콘서트, 새해 전야, 피크닉 등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일 년 내내 이곳에서 열린다. 그디니아는 폴란드의 주요 영화제인 그디니아 영화제가 1974년부터 열린다. 또 2003년부터는 유럽 최대의 현대 음악 축제 중 하나인 오프너 페스티벌(Opener Festival)이 열린다. 이 축제는 매년 많은 해외 힙합, 록 및 전자 음악 아티스트가 참가한다.
대관람차.
ORP 블리스카비차 군함.
폴란드 군함 박물관
바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해군의 구축함이었던 ORP 블리스카비차(Błyskawica)와 1909년에 건조된 폴란드의 완전한 장비를 갖춘 범선인 다르 포모르자(Dar Pomorza) 두 척의 선박이 있다. ORP 블리스카비차 군함은 세계2차대전 때 실전에 이용되었다. 그디니아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보존된 군함이다. 또 1920년 경 독일에서 건조된 포메라니아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다르 포모르자 범선은 독일, 프랑스 및 폴란드에서 항해 훈련 선박이었다. 그디니아에서 구입해 해군사관학교의 훈련선으로 이용했다. 현재는 그디니아 해양 박물관이 되었다.
폴란드 군함 박물관.
다르 포모르자.
유람선.
조악하게 치장한 유람선(Regina, 라틴어 및 이탈리아어로 여왕)도 있다. 그 외 그디니아 수족관, 실험 과학 센터, 아브라함의 집, 제롬스키의 집, 그디니아 자동차 박물관, 해군 박물관, 그디니아 시립 박물관, 이민박물관 등이 흩어져 있다. 또한 두 개의 전망대가 있다.
조셉 콘래드의 기념비.
남쪽 부두로 이어지는 해안길
코발트 색 바다색을 따라 1.5km의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제법 넓은 항구 쪽으로 조셉 콘래드(Joseph Conred, 1857~1924)의 독특한 화강암 입체 석상과 함께 또 다른 조형물들이 서 있다. 조셉 콘래드의 기념비는 바다의 날과 그디니아 50주년(1976년 6월 19일)에 개막되었다.
기념비에는 콘래드의 가장 유명한 소설 중 하나인 <로드 짐(Lord Jim, 1904)>의 인용문이 부조 아래 새겨져 있다. 콘래드는 폴란드 출신의 영국 소설가로 항해사였다. 부두 끝 왼쪽에는 여객선 거리가 있다. 여객선 해안에서 오른쪽으로 40m 떨어진 바닷가에는 2m 길이의 ‘몽상가 –파도의 지휘자(Dreamer-Conductor Fal) 소년’ 청동 조각상(2009년 제막)이 있다.
남쪽 부두.
그럭저럭 매력적인 해안 길을 걷다가 되돌아 나오면서 또 다른 바닷가를 만난다. 아이들이 수련할 수 있게 시멘트로 공간을 만들어 크게 위험하지 않은 곳이다. 아이들의 해양 수련 학교(Sailing School) 업체가 몰려 있다. 이곳에는 폴란드 요트의 창시자인 마리우시 자루스키(Mariusz Zaruski, 1867~1941)와 자신의 배를 타고 혼자서 지구를 일주한 최초의 폴란드 인 레오니드 텔 리가(Leonid Teliga, 1917~1970) 흉상도 만난다.
마리우시자루스키 동상.
레오니드 텔 리가 동상.
그리고 허름한 식당(Ikra S. C. Smażalnia Ryb Morskich)에서 생선탕을 먹는다. 솔직히 그디니아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생선탕이다. 정말 맛있는 생선 요리다.
맛있는 생선탕.
식당 주변에 있는 폴란드 해군의 초대 총사령관이었던 카지미에시 포렝스키(Kazimierz Porębski, 1872~1933) 동상을 보고 시내의 현대적인 건축물 몇 개를 더 보고 그디니아 여행을 마친다. 비록 짧은 그디니아 여행이었지만 폴란드 최북단 여행을 했으니 만족이다.(계속)
Data
그디니아의 기차역: 그디니아에는 중앙역(1894년 완공)을 비롯해 5개의 다른 기차역이 있다.
바토리 쇼핑센터(Batory Shopping Center) 주소: 10 Lutego 11, 81-366 그디니아 /전화: +48586617558/웹사이트:
InfoBox 주소: Świętojańska 30, 81-372 그디니아 /전화: +48585239769/https://www.gdynia.pl/infobox/
선박박물관(Ship Museum ORP Błyskawica) 주소: al. Jana Pawła II 1, 81-345 그디니아 /전화: +48586201381 /웹사이트: al. Jana Pawła II 1, 81-345 그디니아.
해양박물관(Statek-muzeum Dar Pomorza) 주소: al. Jana Pawła II 1, 81-345 그디니아 /전화: +48586202371 /웹사이트: https://nmm.pl/dar-pomorz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