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56
2월4일[연중 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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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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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Xn2ki8xbfQ
[서울대교구 정태영 멜라니오 신부님 집전(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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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이 혼돈의 시대, 우리는 얼마나 자주 봐왔습니까? 지혜가 결핍된 지식, 겸손이 사라진 학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극단적으로 양분화되고 복잡다단한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 정말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혜로움을 바탕으로 한 균형 잡힌 식별력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인들, 그중에서도 지도자들, 나이 든 사람들은 얼굴에는 자애로운 미소를, 가슴에는 지혜를 품고 살아가며, 이 무분별한 시대 균형추 역할에 충실해야 할것입니다.
이 혼돈의 시대, 우리는 얼마나 자주 봐왔습니까? 지혜가 결핍된 지식, 겸손이 사라진 학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나라의 이 슬픈 현실을. 좋은 머리에, 강한 학구열, 그에 못지않은 출세욕에, 줄까지 잘 서 승승장구하며, 그래서 이 나라 전체를 쥐었다 놨다 하는 집단 권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집단 지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기본적인 양심이나 상식, 예의범절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자신들의 견고한 성을 지키기 위해 파렴치한 일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마치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 떼처럼 전락해버렸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선왕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는 솔로몬이 보여준 태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간 솔로몬의 꿈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실 기세입니다. 만일 제가 솔로몬이었다면,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주변 강대국들에게 당당히 맞설 강력한 군사력, 이를 바탕으로 한 천년 왕국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왕으로 살아가는 동안 백성들 모두 굶주리지 않고, 전쟁도 겪기 않고 평화로운 태평성대를 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대답을 보십시오.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솔로몬의 대답이 너무나 마음에 흡족하셨던 주님께서는 더 큰 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오늘 이 땅의 지도자들과 너무나 달라 슬픈 마음까지 듭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주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 깊이 깊이 성찰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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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또 다시 길을 떠나며>
수도회 인사발령에 따라 최근 새로운 소임지로 옮겨오게 됐습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나는 생활에 익숙하다 보니 홀가분하기도 하고, 또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솔직히 '짠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진하게 정을 주고받았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하는데서 오는 안타까움은 정말 큰 것입니다.
함께 동고동락했던 형제들, 선생님들, 후원자들, 지인들과 이별도 아쉽기만 합니다. 그간 정들었던 삶의 터전을 바꾸는데서 오는 부담감 역시 큰 것입니다.
그래도 '떠남'을 통해서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지난 6년간 사목을 정리하면서 저는 다시 한 번 제 삶을 정돈할 수 있습니다.
결국 떠남의 순간은 영원한 떠남인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행위이기에 삶의 여러 순간 가운데 아주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떠남은 슬픔과 아쉬움의 순간이기보다는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자주,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에게 있어 삶은 언제나 경이로움이며 새로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떠남은 하나의 축복입니다. 만일 우리가 언제까지나 한 자리에 집착한다면, 언제까지나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언제나 제자리일 것입니다.
떠남의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보다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안주와 편리에 길들여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금 과감히 길 떠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매일 작은 희생과 양보, 기쁘게 물러남, 십자가의 수용 등을 통한 일상적 떠남에도 더욱 익숙해지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 역시 '길 떠나는' 구도자이자 선교사로서 예수님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들었던 어제와 결별하고, 익숙한 곳과 작별하고, 조금이라도 더 어려운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일손이 필요한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낮은 곳으로 떠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을 치유하셨고, 악령 들린 사람을 구해주신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순식간에 갈릴래아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안식일이 지나면서 '안식일 규정'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수많은 환자들, 악령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밤새 대대적인 치유활동이 이뤄졌습니다. 하느님 은혜가 풍성하게 내린 이 호숫가 작은 마을의 밤은 감사와 환희, 기쁨과 설렘과 함께 그렇게 깊어갔습니다.
먼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피곤에 지친 제자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자 어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 모습이 안보이자 사람들은 그분이 어디 계시냐고 다들 아우성입니다. 어쩔 수 없이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아룁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준비가 덜 된 복음 선포자였다면, 덕이 덜 닦인 선교사였다면 우쭐하는 마음에 사람들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자신을 열렬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음껏 능력발휘를 해보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단호하십니다. 일어나셔서 홀연히 앞장서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온 것이다.”
카파르나움 외에도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많은 고을들이 있었습니다. 종려나무와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조용한 마을들이 많았습니다. 그곳 사람들도 예수님께는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모습은 오늘날 우리 모든 선교사, 복음선포자들의 모범이십니다. 자신의 인기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느님 일을 하실 뿐이지 자신은 조금도 챙기지 않으십니다. 오직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많은 사람들의 몸값을 치루려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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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x9prDB77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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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의미나 목적을 꼭 찾아야만 하는가?>
저는 한창 일할 나이입니다. 그러나 은퇴하고도 죽을 때까지 일을 할 생각입니다. 사실 아무 하는 일 없이 건강만 챙기고 놀거나 쉬며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인생을 즐기다 오라고 창조하셨다고도 하고 그런 삶의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도 말합니다. 인생은 그냥 소풍이고 즐기다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이유 없이 태어나 우연히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먼저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에 늦게서야 삶의 의미나 목적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는 창조자를 배제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존재가 삶의 의미보다 앞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대표적인 철학자가 니체입니다. 그렇더라도 삶의 의미는 찾고 싶었습니다. 이전에 신에 의해 규정된 삶이 감옥처럼 느껴져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목적이 없는 삶은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통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은 대부분 ‘소속감’을 위해 살고 있었습니다. 관계 맺기 위해 타인의 시선이 삶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니체는 신에게 휘둘리나 사람에게 휘둘리나 같은 것이라 여겨 고독한 초인이 되라고 권합니다. 주체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이 맞는다고 여기며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니체는 삶의 의미는 있는 게 좋지만, 결국 신은 부정하고 싶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수영 회장은 카이스트에 766억 원을 기부하였습니다.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때 나이가 87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기부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실 때는 전혀 자신의 그러한 결정에 후회가 없어 보이고 당당해 보입니다.
이수영 회장은 기자였습니다. 1970년대에 일본산 카메라를 메고 이탈리아 소렌토 지방에 취재하러 갔을 때 일본 관광객들이 자기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 회장은 본능적으로 옷으로 자기 카메라를 가렸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니 우리나라 기업들의 광고판이 외국에도 붙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국력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신문사를 나와 소와 돼지를 키웠고 그 종잣돈으로 부동산에 투자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그러한 좋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경희대 한의과에 1,300억을 기부한 분도 있습니다. 이란 왕실 주치의로 있었던 이영림 한의사입니다. 이분은 당시 자신을 가르쳤던 신상주 교수님과 우리나라에도 노벨상 의학상이 나올 연구소를 설립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의사로 버는 돈으로는 충분할 수 없었습니다. 우연히 이란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왕실 한의사가 되었으며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설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궁즉통이라 바라는 게 있으면 길이 뚫리는 법입니다. 물론 그 돈을 기부하기 전에 신상주 교수님이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이분은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다가 새벽에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로 가자.”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당신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목표지향적이십니다. 돌아가실 때도 “다 이루었다.”라고 하십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이뤄야 할 사명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갇혀 살던 부족이 있었습니다. 급격한 사막화로 더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걸어서 사막을 빠져나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길을 잃고 죽거나 되돌아왔습니다. 우연히 그곳을 여행하던 영국인 켄 리먼은 길을 찾지 말고 하늘의 북극성을 바라보며 갈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원고를 다시 쓰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러나 실상 삶의 의미나 목적을 찾음은 창조자를 인정하는 행위이고 찾지 않는 것은 무신론과 같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녀가 그렇듯이 모든 만들어진 것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창조자에 의해 의미와 목적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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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9년 8월 21일에 서울에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교구에서 저를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로 파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뉴욕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소셜넘버(SSN)를 받고, 운전면허증을 땄습니다. 말 그대로 따는 것입니다. 뉴욕은 한국에서의 운전면허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필기, 실기 시험을 보아야 합니다. 은행 계좌를 열면서 뉴욕에서의 첫 출발은 순조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전임 신부님의 열정적인 홍보 덕분에 신문사의 재정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2020년을 준비하면서 야심차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볼리비아에 ‘봉사활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LA에 있는 여행사 대표와도 일정을 조율하였습니다. 2달에 걸친 신문홍보 일정을 만들었습니다. 사순특강과 신문홍보를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버지니아, LA, 밴쿠버를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LA에는 한인성당이 많기에 세 성당에서 홍보와 강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꿈에 부풀어 2020년을 시작하였습니다. 장밋빛 인생이 제게도 시작되는 것 같았습니다. 뮤지컬도 보고, 박물관도 가고, 센트럴파크도 걸었습니다. 뉴욕이 저를 환영하는 것 같았고, 저도 뉴요커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욥은 이렇게 자신의 신세를 이야기합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하느님께 충실했고, 가족을 사랑했고, 이웃에게 기꺼이 나누었던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시련은 스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리고, 건강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누가 보아도 하느님께 버림받은 사람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음에 감사드렸다면,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부푼 꿈을 안고 2020년을 시작한 제게도 시련이 스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중국에서 시작한 코로나의 스나미입니다. 2020년 2월 한국은 코로나가 열병처럼 퍼져나갔습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미국에 있는 저를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발 없는 코로나는 1달이 못 되서 뉴욕으로 건너왔습니다. 2020년 3월 13일 미국은 사회가 문을 닫았습니다.(Lockdown) 박해의 시기에도 계속되었던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신문홍보와 사순특강도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그해 9월 10일 어머니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멀리 뉴욕에서 어머니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며 기도해야 했습니다.
교황님은 3월 27일 사순 제4주일 금요일 저녁, 코로나19 대유행의 시기에 특별 기도를 주례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도록 인류를 초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구원자이신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없도록, 우리가 치유되고 그분의 품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황님의 기도를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이,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코로나의 스나미도 지나가리라 믿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지만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개발, 발전, 성장, 자본’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인류가 잠시 멈추어 있는 동안 공기는 깨끗해졌고, 더불어 사는 생명은 풍부해졌고, 자연은 회복되었습니다. 일상의 소중함과 일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가족과 친구와 차 한 잔 마시면서 대화하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었습니다. 동료사제들과 함께 하면서 코로나의 스나미를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할 수 없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브루클린 한인성당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2020년 8월에 브루클린 한인성당에서 주일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함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브루클린 한인성당 공동체와 함께한 시간들은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5년 동안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브루클린 한인성당 공동체의 기도와 사랑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립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미사를 끝으로 댈러스 한인성당으로 갑니다. 어디에 있더라도 브루클린 한인성당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함께해서 행복했습니다. 사랑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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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9-39: 병자들의 치유와 예수님의 전도 사명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의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것을 명백하게 밝히는 것 같다. 욥기는 병으로 인해 육체적 고통을 당한 욥의 체험을 묘사해주고 있으며, 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 사랑과 연민으로 다가가 치유해주시는 분으로 연결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한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치유해주신다. 이 모습은 구원과 사랑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불행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사람들 가운데 현존해 계신다는 사실과 이미 하느님 나라의 권능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징표이다.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1절) 시중은 봉사를 통한 따름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 시중든다는 것은 마르코 복음에서나(15,41) 루카 복음에서나(8,3) 자신들의 재산까지도 바치면서 부인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이다. 베드로 장모의 행동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봉헌된 사랑과 헌신의 행위이다.
참된 기적은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두 번째 장면에서 나타나는데,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34절) 여기서 당신이 베푸시는 기적을 통하여 이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고, 정치 선동적인 모습이 나타났기 때문에 말하지 말라고 하시고, 마귀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신다. 마귀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고 예수님을 현세적 메시아로 이끌려 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마르코의 메시아의 비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고통, 자아 포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 비밀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함구가 필요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가 가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활동의 열쇠가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그분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고, 그것으로 힘을 얻으며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신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5절). 이 기도는 예수님의 업적을 보고 그 업적을 현세 정치적으로 이해하려는 위험한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이다. 이 유혹은 공생활 시작에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것이다. 외딴곳에서 기도하셨다는 것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당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얻고 빛을 구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부와 더불어 머무셔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활동 계획을 하느님 아버지 앞에 다시 한번 점검하고 계획하기 위해 머무르심이다. 즉, 기도는 당신의 활동과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기도이며, 도피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의무를 다하기 위한 기도이다.
많은 사람이 그분을 찾기 때문에 더 머물러 계셔달라고 청하는 시몬과 그 일행에게,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38절) 주님이 복음을 선포하시는 곳이 그분에 관한 호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카파르나움에 국한될 수 없다. 더 큰 희생이 요구된다 해도 다른 곳에도 구원의 복음을 선포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이 예수께서 외딴곳에서 홀로 바치는 기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되찾고 성부와 자신을 연결해주는 신비롭고도 유일한 관계 안에서 당신의 사명을 더 깊이 깨달았다. 그래서 그분은 제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계속 수행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복음 선포이다. 구원은 하느님의 복음을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복음화 사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39절) 우리도 역시 어떤 활동보다도 복음화가 우선적이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께서 당신의 공생활 중 그렇게 많은 업적과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쳤어도 항상 기도로써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시며 모든 것을 이루어 가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행동주의에 잡혀서 기도를 게을리하며 자신의 모든 활동이 기도라고 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가 동반하지 않는 활동은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없어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활동에 있어서 예수님과 같이 기도로써 시작하고 기도로써 마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고 도우심을 구하여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열정적인 선교 활동의 비밀을 말한다. 바오로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중에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가 체험했던 무한한 빛과 구원에 대한 감사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그러면서도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포는 거창한 말로써 이루어지는 소리 보다 자기의 생활 자체로써 하고 있음을 말한다. 우리의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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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우리의 삶을 묵상하도록 이끕니다. 제1독서에서 시련에 부딪힌 욥은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임을 선언하며 비탄에 잠겨 있습니다.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전형적인 하루는 노고와 헌신으로 가득 찬 우리의 하루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지쳐 쓰러지기도 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며 허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이 고역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 내야 하는지 그 실마리를 던져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의무”라고 여기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불행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따로 “삯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받는 “삯”이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주어진 무거운 의무를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불행하게 되는 행복의 원천으로 여깁니다.
삶은 우리가 반드시 살아 내야 하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와 같습니다. 이 의무에는 어려움과 고통이 따르지만, 그 이면에는 기쁨과 행복이 자리합니다. 삶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기에,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선물이자 보상이 됩니다. 삶 속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 이웃과 주고받는 따뜻한 사랑, 세상의 아름다운 인물들과 아름다운 사건들은 삶이 주는 행복이고, 이 행복은 수고스러운 삶을 살아 내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과 같은 “삯”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삶 속에서, 이 삶을 통해서만 행복과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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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5-39)
여기서 ‘시몬과 그 일행’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은 이른 아침부터 병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병자들이 치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원한 것은, 예수님께서 계속 카파르나움에 머물러 계시면서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사람들이 아직 모르던 때의 모습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던 때의 모습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바란 대로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머물러 계시면서 병자 치료만 하셨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을 기반으로 해서 교회를 세우셨다면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이비 종교들이 처음에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예수님의 형제들’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2-5)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은 당신 자신의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인간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다녔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 했던 여자들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3-5) 예수님을 찾아다닌 일 자체는 잘못이 아닌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이유로만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살아계시는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그것만을 받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는 것, 영혼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몸의 치유만을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기만을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는 것, 그런 일들은 모두 살아 계시는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나의 신앙도 살아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얻기만을 바라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신앙, 즉 ‘죽은 신앙’입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라는 예수님 말씀은 “내가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라는 뜻인데,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들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 치유를 거절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을 떠나시기 전에, 치유를 기다리고 있던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다른 이웃 고을들’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뜻인데, 사실상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그곳에도’ 라는 말에는, ‘이곳에서 한 것처럼’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병자 치유는 복음 선포의 한 방식이었고,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준 일이었습니다. <병자들에게는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병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말씀의 은총’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당신의 활동의 목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병을 없애신 것은 아닙니다. 또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은 세 번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도, 또 승천하신 뒤에도,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하느님 나라로, 죽음이라는 것이 없고 영원한 생명만 있는 그 나라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분입니다. 어떤 중병에 걸렸을 때, 병고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주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해서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도 있고, 기도의 응답을 얻지 못하고 그냥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쪽 세상에서 얼마나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느냐?”입니다. ‘몸의 치유’와 건강은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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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신희준 루도비코 신부님(양천성당 주임신부 겸 제18양천지구장)]
<주저앉아 있지 말고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납시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영화 <기생충의 명대사 혹 시 기억하시나요? 이 대사를 떠올릴 때마다 참 모든 게 계획 대로 순조롭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 다. 우리 삶에는 언제나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 이니까요.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난 몇 년간 코로나 때문에 미사가 중단되고 성당 문이 닫힐 줄을 말이죠? 좋아하는 부 모 형제와 자녀들을 몇 년이나 만나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들 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될 줄을요, 또 사랑하는 이들이 투 병 중에 있는데도 찾아가지 못하게 될 줄 누가 미리 알았겠 습니까?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오는 외로움 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을 누가 알 수 있었 을까요? 하지만 우리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생각지 못한 긍정적인 일들 도 일어나니까요. 예를 들자면, 교우들과 매일 미사를 바치 지 못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져 매일 미사에 소홀했던 저자 신을 반성하고 미사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다가 병 이 나으면서 바로 봉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 고 안주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 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도 온갖 일에 힘들거나 실망해서, 혹은 분노하거나 아파 서,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더러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예레 1,17)라고 하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 본당에서 새신부님들의 첫 미사가 봉헌될 것 입니다. 새롭게 사제 생활을 시작하는 그분들이 주님은 총으로 언제나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 든 일이 그렇듯이, 언제나 꽃길만 걷는 삶이란 없지 않을 -까 싶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새신부님들이 가는 길에 서 발목을 잡는 일이 간혹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럴 때 실의나 분노, 절망이나 슬픔에 빠져 주저앉아 있지 말고, 오늘 복음 말씀의 예수님처럼 분연히 일어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그래서 사제의 신분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동반 (件)의 입장에서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문득 시몬의 장모가 되어 봅니다. 앓고 있던 열병에서 낫자마자 예수님 일행의 시중을 든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하였을까요? 한동 안 앓아누워 있었던 그녀가 조금 더 누워 쉰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시 각으로 본다면, 일어나 봉사하면서 그녀는 아팠던 기억을 뒤로 하고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맛보고 싶지 않았을까 싶 습니다. 우리도 어떤 일로 주저앉아 있다면, 그녀처럼 분 연히 일어나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해야 할 것입 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갈 그날까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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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제가 항상 떠올리는 것은 초기 불교경전의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가라.
하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하느님을 선택하고 홀로 걸어가는 길, 이별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순간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주일학교의 어린 아이들의 마음을 마주할 때 그렇습니다. 저의 손을 꼭 잡으며, 도대체 왜 떠나느냐고 묻는 아이들의 말을 들을 때면 새삼 제 마음이 무너집니다. 이별은 당연한 순리임을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아이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있는 애정이 저를 뒤 흔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별을 앞두고 저는 하느님께 질문합니다.
이별을 앞두고 저는 하느님께 질문합니다. “재미있고 행복한 것은 도대체 왜 끝이 있는 것입니까?” “기쁘고 즐거운 것은 왜 언제나 끝나기 마련인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답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 끝나는 이유는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들 역시 끝나야 하기 때문인 듯 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태양이 계속 떠 있다면 찬란한 빛이 세상에 가득할 것이며 추운 겨울도 없을 것입니다. 한가로이 공원에 나가 태양빛을 쐴 수도 있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태양이 하루 종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면 밤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시간에 우리는 쉬어야 하고 아이들은 성장합니다.
혹은 낮보다 밤에 더욱 원활히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모두에게 어두운 밤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해가 져야 밤이 오고 밤이 지나야 다시 해가 떠서 아침이 오듯, 즐거운 일 역시 끝이 있어야 그 다음에 더욱 즐겁고 행복한 일이 또 다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기적처럼 질병을 앓는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 선포에는 반드시 뒤따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앞서 말씀드린 이별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유난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분이었습니다. 이 모든 과업을 온전히 지켜 본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떠나는 모습을 보기 싫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어디 가지 말고 그냥 우리 곁에서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호소한 사람들 역시 많았을 것입니다. 계속 우리 곁에 머물며 병든 이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별의 아쉬움은 뒤로 미루고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또한 이 복음 선포의 사명은 지루한 생활에 지쳐있는 우리들에게 나날이 주어지는 새로운 사명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 선포, 즉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하는 우리들의 일상은 과연 어떠합니까?
주변의 익숙한 사람들, 나와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에게만 마음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랑을 드러냄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하는 사명은 쉽게 잊어버리고 그저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분명한 것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고을을 찾아 나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같이 기쁜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하고, 그것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좋고 완벽한 분이라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주변인들에게 알려져야 마땅하며 주님이 그것을 원하십니다.
이러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오늘의 제 2독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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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경진 베드로 신부님(한마음청소년수련원)]
예수님의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환자방문을 갈 때 제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같기 때문에 그 발걸음이 기도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모에게로 향한 발걸음처럼 지금 고통과 시련으로 아프고 힘들고 지쳐있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우리에게 내미십니다. 예수님께서 손 내밀고 일으켜 주시는 힘은 바로 영적인 힘입니다.
내 마음 상태가 아직 새벽이고 어두캄캄하면 나는 아직도 아픈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곳이라도 정해진 장소 외딴곳으로 가야 됩니다.
외딴 곳에서 새벽이 지나야 밝은 서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안에서 참 자유와 참 해방을 맛볼 수 있습니다.
외딴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을 뻗고 계신 에수님께 제 손도 뻗어 맞닿도록 뻗어보겠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오늘 하루도 저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저를 낫게 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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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엄기영 안드레아 신부님]
<기도와 섬김의 삶을 통한 복음 선포의 여정을...>
찬미 예수님!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밤늦게까지 당신께 몰려드는 많은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오늘 본기도의 내용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주님, 주님의 가족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고, 천상 은총만을 바라는 저희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소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언제나 자애로운 모습으로 은총을 베푸시며 섬김의 모범을 보여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께서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켜 열이 가시자마자 그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처럼 섬김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입술로는 천상 은총을 바라지만 마음으로는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의 것들만 추구하는 사람은 주님의 은총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합니다.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피곤할 법도 할 텐데 이른 새벽 캄캄할 때 홀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바쁘고 피곤하다며, 마음이 괴롭고 힘들다는 이유 등으로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쁘고 피곤할수록, 마음이 괴롭고 힘들수록 우리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며, 기쁨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외면한 채 내 뜻만을 고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참된 기도와 섬김의 삶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삶을 닮은 복음 선포의 여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와 섬김의 삶을 통한 복음 선포의 여정은 우리를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며,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참 기쁨의 신앙을 살아가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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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한주환 스테파노]
<포기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는 것이 힘에 부치지요? 이 험난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은 더더욱 힘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살아가시느라 정말 고생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고달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고달픈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척 바쁘게 움직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일은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 까지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 다시 말해 시몬의 장모를 비롯해 병든 이, 마귀 들린 이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 우리를 옭아매었던 모든 것에서 해방시켜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 미시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서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 그만 힘들어하고 예수님께서 내민 그 손을 잡으십시오. 아직까지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성당을 나오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 가서 이 사실을 전해 주셔야 합니다.
이제 그만 힘들어하고 용기를 내어 주님을 만나야 한다고, 이제 너를 위해서 그분을 만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너를 향해 내민 그 손을 이제 잡으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가 본이 되어 더욱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도록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 찾아 나설 때가 되었습니다. 멀리서 찾을 필요 없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찾으십시오. 먼저 여러분 가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성당에 나가자고 하십시오. 말로만 성당 가라 하지 말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성당에 같이 나오셔서 그 아이 옆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시고 귀한 그 아이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 아이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도록 그리하여 그 아이가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깨닫도록 하십시오. 같은 의미로 우리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제일 힘들고 지치기 쉬운 나를 위해서도 두 손을 모으십시오. 처음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지치지 않고 꾸준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많이 지치셨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셔야 했고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하나하나 만져 주시고 치유해주셨고 마귀들을 쫓아 내셨습니다. 제대로 주무시지도 잡수시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거침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 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코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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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남자가 약속 장소를 향해 서둘러 운전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의 차가 거의 거북이 수준입니다. 경적을 울리고 헤드라이트를 깜빡여도 속도를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려는 순간, 차 뒤에 부착된 작은 스티커가 눈에 띄었습니다.
‘장애인 운전자입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이 문구를 보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조급함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화냈던 것이 미안했고, 그래서 오히려 그 차의 운전자를 보호해 주고 싶어졌습니다. 이제는 약속 시간에 조금 늦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각자 나름의 이유가 담긴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고 말입니다. 앞선 이야기의 남자도 가까이 다가선 다음에야 뒤에 붙인 스티커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다가가야 그 마음의 스티커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전에 운전 면허를 취득한 뒤, 동창 신부 차로 운전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창 신부는 운전 전에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서 무언가를 가지고 왔습니다. A4용지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글씨 ‘왕초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종이를 눈에 잘 띄는 청색 테이프로 돌려 붙였습니다. 창피하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하니, 그래야 다른 운전자들이 배려해 준다는 것입니다. 초보운전인 줄 모르고 “왜 저렇게 운전하는 거야?”라며 화를 낸다면, 그를 죄짓게 하는 것이 아닐지 싶어서 창피해도 붙이고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한다고 화낼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마음의 스티커를 봐야 하고, 동시에 나의 감정 스티커를 상대에게 보이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함께 사는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찾아가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니 열이 가십니다. 사위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돌고 있으니, 화병이 날 만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바로 장모의 마음을 보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 역시 예수님 앞으로 나옵니다. 그들 마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즉, 병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이렇게 전하셨습니다. 마음을 보고 함께하면서 기쁜 소식이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에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합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요. 복음 선포만이 주님의 마음을 보고 주님과 함께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와 같이 우리 역시 복음에 동참해야 합니다.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의 마음에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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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루면 넉넉하다>
마르코 1,29-39 (시몬의 병든 장모와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전도 여행을 떠나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하루면 넉넉하다>
하루면 넉넉하다
오롯이 기도하고
기쁘게 찾아가고
반갑게 맞이하고
해맑게 어울리고
기꺼이 내어주고
따뜻이 품어주고
마음껏 사랑하고
하루면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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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음 선포의 소명을 인식해야 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리고자 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병에 시달리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셨는데 ‘고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원어 ‘테라퓨오(therapeuo)’는 ‘존중하다. 사랑하다. 돌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보다는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존중해 주고 사랑해 주고 돌봐줬다는 의미입니다.(홍승모)
몸이 약해지면 마음까지도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또한 병이 깊거나 길어지면, 신앙마저 흔들리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라고 한탄과 원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 주님께서 사랑으로 함께 아파하시면서 이겨내길 바라신다는 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열병은 우리말로 홧병, 울화병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해서 가슴에 응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정신 불안과 소화불량,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쓰리고 울렁거리는 등 여러 반응이 다양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성 암 환자 85%가 화병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ㅣ 그런데 이것은 마음에 쌓인 것을 풀지 못하면, 비우지 못하면 정신적 장애는 물론 육체적인 장애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응어리를 풀어야 합니다. 먼저 주님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이뤄야 가벼워집니다.
사실 모두가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더 많이 지배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자기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것이 생각처럼 보상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열병을 앓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남한테 더 많은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엄격한 환경에서 늘 통제받고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남을 지배하고 과시하려는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앓고 있는 열병입니다.
이 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명의이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능력을 지니신 주님,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으시고 섬기러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면서도 못 박는 원수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겉모양을 다스리지 않고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근원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면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남 탓을 멈추고 내가 변합니다.
열병이 인간을 괴롭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병에서 구원에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이들, 귀찮고 짐스럽게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인근 마을로 널리 퍼졌습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만하거나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으시고 이른 새벽 홀로 외딴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조금 잘 나가면 자신이 무슨 큰 능력이 있는 양 으스대기 쉽습니다.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능력의 원천인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공을 돌리고 오직 그분께 의지하십니다. 파견받은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하신 행동이 외딴곳을 찾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외딴곳으로 가서 한참 기도하고 계실 때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께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 1,37)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알아주는 추종자들 곁에 머물길 좋아합니다.
요즘도 우리는 패권 정치니, 팬덤 정치니 하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물론 팬덤은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것들에 연연해하지 않으시고 다른 곳으로 떠나십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 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9)
예수님 삶의 중심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바로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있었기 때문에 인기나 유명세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길을 떠나 복음 선포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것은 명성이 아니라 자신이 이루어야 할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 즉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신 까닭입니다.
기도함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뜻에 맞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항상 일깨우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삶이 곧 우리의 삶이기를 기도해야 하고 또 행함으로써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행했듯이 우리도 이런저런 일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곳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알고 일어서서 모두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가신 기적을 보여 주시기 전에도 산 위에 올라가 기도하셨고(마르6,46), 수난을 앞두고 게쎄마니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간절히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습니다.(마르 14,32-39)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을 때에도 먼저 산에 들어가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루카 6,12) 기도는 우리를 안주하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가게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16. 19.22)
그야말로 바오로는 예수님의 삶을 사셨습니다.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되고, 약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기도하며 자신의 소명을 확인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기도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앞길을 예수님의 길로 가꿀 수 있길 희망합니다. 멈칫거리지 않고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당당히 걸어야 합니다. 쉬고 있는 동료를 찾고,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주님을 알릴 수 있는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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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이 평생 아끼던 책 한 권이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어려움을 대면할 때마다 방문을 꼭 걸어 잠근 채 그 책을 읽곤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책의 내용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제일 먼저 그 책을 꺼내 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책엔 이렇게 단 한 줄만 씌어 있었습니다.
“껍데기와 알맹이를 구별하라”
주님 앞에서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껍데기인지 알맹이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알맹이를 만드는 한 주간 되시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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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찬미의 전사, 복음의 전사, 기도의 전사-
우리나이로 저보다 13세 많은 89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결같은 열정적인 사목자로의 청년같은 모습은 늘 신선한 감격입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늘 맨먼저 열어보는 교황님 홈페이지입니다. 교황님에게 참 놀라운 것은 사적인 시간이 없이 늘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적인 시간이라는 것이며 날마다 찾는 모든 이들에게 참 적절한 삶의 지침이 될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매달리고, 그의 백성들을 섬겨라.”교황님을 방문한 스페인의 마드리드 교구 신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진리의 연인들이 되고 변화에 마음을 열라.” 역시 교황님을 만난 이탈리아 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새벽 카톡을 열어보니 수도원에 피정왔다가 갑작스런 대모의 죽음으로 장례미사차 돌아간 자매로부터 받은 메시지도 새로운 감동이었습니다. 특히 수녀님이 그 자매에게 주었다는 위로의 글이 저에게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신부님, 선종하신 대모님, 하늘나라 가는 길 많은 교우분들과 잘 바래다 드리고 왔습니다. 슬퍼하고 있을 때 수녀님께서 보내주신 말씀이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죽음은 하느님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으니까요.
잠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건너감이듯,
죽음은 우리의 시간에서
하느님의 영원으로 옮아가는 건너감이지요.
희망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영원까지 함께 가자 하시는 주님 손 꼭 잡고,
오늘도 빛과 생명을 활짝 피우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걷는 인생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가톨릭 평화신문’(2024.1.4.21쪽 하단부) 두 기사 내용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1월24일 서품 받은 살레시오회 세 사제와 한 부제의 사진이 있었고, 바로 그 옆에는 1월28일 향년 43세로 선종한 서울 대교구의 젊은 사제의 사진과 더불어 1월31일 명동대성당에서의 장례미사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참으로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물음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때때로 떠오르는 물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루하루가 하느님 주시는 참 좋은 선물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살아온 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 살 날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불문에 붙이실뿐 결코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의 삶을 주목하십니다.
그러니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불행이 아닌 행복을,
어둠이 아닌 빛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빛이신,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요 행복이신 주님을 결연히 선택하는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 절망의 어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의 샘이신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요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전사로서 삶의 현장에서 영적전투에 최선을 다해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아니라 전사란 말마디가 적절하고 좋아 전사란 말마디를 씁니다.
오늘 제1독서 욥기의 분위기가 칠흑같은 절망의 어둠입니다. 희망이 빛살이 보이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때로 이런 극한 상황을 겪기도 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욥의 실감나는 적나라한 넋두리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날들을 나누어 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가는 구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욥같은 현실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꿈과 희망이 사라진곳이 지옥입니다. 이런 절망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자발적 결연한 선택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화답송 시편을, 제1독서의 바오로를, 복음의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시편 저자처럼 찬미의 전사로, 예수님과 바오로처럼 복음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이보다 좋은 선택은 없습니다. 바로 무지와 허무, 절망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쳐주신다.
우리 하느님을 찬송하니 좋기도 하여라.
마땅한 찬미를 드리니 즐겁기도 하여라.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니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이 없네.”
화답송 시편은 얼마나 좋습니까? 시편의 하느님 찬미의 찬란한 빛이 지옥의 어둠을 환히 밝힙니다. 그러니 욥의 절망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찬미의 희망과 기쁨을 선택해 찬미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처럼 불퇴전의 ‘복음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으로 무지와 허무, 절망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은 얼마나 멋집니까! 욥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무리 주님이 못마땅하고 불만족스러워도 욥을 선택하지 마시고 참으로 멋진 주님의 용사 바오로를 선택하세요.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의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그러니 욥이 아니라 복음의 전사, 바오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처럼 복음의 전사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복음의 무엇입니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복음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생명을 주는 복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복음,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복음,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는 복음, 신망애의 삶을 살게하는 복음, 진선미의 삶을 살게 하는 복음입니다.
얼마나 좋은 복음입니까! 새삼 예수님 자체가 참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의 삶을 삽니까? 바로 오늘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하루 삶을 압축 요약합니다. 얼마나 영적전투치열한 예수님 하루하루의 삶인지요! 지칠줄 모르는 예수님의 열정이 놀랍습니다.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시고 이어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이 너무 생생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장면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고 우리 안의 마귀를 쫓아내실 분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모두인 예수님뿐입니다. 복음 선포에 저절로 따라 오는 치유이적이요 구마이적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라 복음 선포에 충실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영육의 치유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생기를 잃고 빛을 잃고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지요.
병든 이들도 많고 온갖 종류의 마귀들에 사로잡힌 이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영적건강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입니다.
답은 복음선포뿐입니다. 참으로 복음을 사랑하고 받아들여 모두가 불퇴전의 복음의 전사, 주님의 전사, 빛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 선포의 원천은, 분별력의 지혜의 원천은, 이런 복음 선포자로서의 사명감을 확인할 수 있는 원천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삶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외딴곳에서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기도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함께 바치는 찬미기도와 더불어 외딴곳에서의 개인 관상기도도 필수입니다. 참으로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를 이뤘던 예수님의 밤기도였습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외딴곳에서의 깊은 관상기도를 통해 영육을 충전시키고 사명감을 새롭게 확인한 후, 다시 홀가분하게 성과에 집착하거나 “모두 스승님을 찾는다”는 말에 현혹되지 않고, 자유롭게 복음 선포에 여정에 오른 예수님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에서 얼마나 복음 선포의 사명감에 충일한 예수님의 삶인지 잘 드러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 복음 선포와 더불어 영육의 치유요 자유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4년 올해를 기도의 해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시편 저자처럼 찬미의 전사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예수님처럼 복음선포의 전사가, 복음의 전사가, 기도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외딴곳 성전에서 거행되는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육의 건강과 더불어 당신의 일당백의 주님의 영적전사, 찬미의 전사, 복음의 전사, 기도의 전사로 만들어 주시고 우리 모두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마태8.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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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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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1,34)
<치유 기적!>
오늘 복음(마르1,29-39)은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변에 아픈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병은 선천적인 유전병으로 올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병은 후천적으로 온다고 생각합니다.
'치유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치유 기적이란? 말 그대로 병이 낫는 것입니다. 그것이 맞지만, 병을 대하는 나의 생각이 바뀌고, 그래서 나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치유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뀌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이고, '복음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했던 바오로 사도가 '어찌할 수 없는 의무로 받아들이면서 세상에 전하고자 했던 복음'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부활, 나의 부활을 방해할까?'
하나는 '나 자신'이고, 또 하나는 '너'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자들 개개인의 약한 믿음 때문이고, 사목을 하고 있는 사목자들이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방식으로 사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9)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예수님을 닮는 것이고, 내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간절한 희망도 없고, 내가 예수님이 되지 않으면, 곧 믿음이 없으면, 우리 안에서 어떠한 기적들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욥이 하느님께서 시험으로 주신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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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fPM8_sVu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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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마르 1, 34)
벌써
봄의 문턱에
들어서는
입춘입니다.
그래서
분주한
생명의 만삭
2월입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존재하기에
하느님의
간절한 치유를
필요로합니다.
치유하여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묻습니다.
치유를 받아야 할
우리가 있습니다.
허약한
우리 영혼을
자주 만납니다.
우리의 삶이란
치유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질병과
욕망을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한
치유가 있기에
행복을 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자신으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삶의 질서를
깨뜨린
우리의 교만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하느님을
인정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사람의
모든 생애를
보살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삶을 놓치고 있는
우리자신을
고쳐 주십니다.
치유의 손길을
따라가다 보면
온전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중한
한 사람을
고쳐 주시는
사랑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치유는
예수님과의
만남이며
우리를
살게하는
복음이며
우리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하는
가장 소중한
사랑의
체험입니다.
우리를
고쳐 주시는
주님을
맞아들이고
주님을
모시는
행복한 주일
되십시오.
치유가 필요한
우리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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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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