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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0일(월)
* 시작 기도
(마 20:12, 15)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님...
천국은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1절).
겨우 한 시간 일을 한 품꾼들에게 주인은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를 본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한 사람은 그들보다는 많이 받을 줄 알고 내심 기대를 하였으나 그들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마음에 불평이 가득하여 자기 연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펼친 논리는, 자기는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뎠는데 고작 한 시간 일한 사람들과 같은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집 주인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데 나의 선함을 네가 악하다고 하느냐며 일갈합니다.
이런 자기 연민에 빠진 자가 여기 또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는 셀 줄 모르며 오직 자기 연민에 빠져 남들과 비교하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는 자입니다.
이런 이 종은 죽기에만 합당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이런 나를 아주 멸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징계를 통하여 구원이라는 한 데나리온을 주셨습니다.
오늘 이런 구원의 데나리온을 받은 나는 그저 감사와 감격할 뿐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이 하루도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6:22-40
제목 :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삭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맏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나의 묵상
벳새다 들녘에서 유대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였다.
집으로 돌아가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는 것과 예수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다.
그날 밤에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로 인하여 고생하였다.
그것을 아신 주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셔서 그들과 함께 배에 타심으로 파도가 잔잔하여져서 그들이 가고자 하는 가버나움에 도착하게 되었다.
한편 전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유대인들은 다음날 다시 벳새다 들녘으로 나온다.
그것은 어제 경험했던 오병이어의 기적을 또 체험하고자 했을 수도 있고 배가 고픈 이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런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가 농후하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벳새다 들녘을 다시 찾은 유대인들은 아무리 눈을 씻고 예수님을 찾아봐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일 밖에.....
밤새 예수께서는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셨기 때문이지.
어제 집으로 돌아갈 때 예수께서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이곳저곳을 다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자, 바닷가에 놓여있는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한 번 가보자고 의기투합하여 가버나움에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이 아닌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난 유대인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예수님을 향하여 “아니 선생님, 도대체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그들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그렇게 찾고 찾던 예수님을 만났으니 말이다.
아마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기서도 우리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겠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찾아온 이들에게 찬물을 쫙 끼얹는 말씀을 하신다.
하지만 그 찬물을 끼얹는 말씀이 곧 하늘의 진리요 영생의 말씀(진실로 진실로)이다.
(26-2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우여곡절 끝에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에 도착해서 예수님을 만난 유대인들은 반색을 하면서 예수님을 맞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혀 뜻밖의 반응을 하시는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참된 표적을 보지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표적 곧 썩을 양식만을 보고 구하기 때문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을 주는 양식을 위해서 일해라.
이 양식은 내가 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인정한 아들이다.
이 때 그들이 묻기를 그러면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이들이 무엇이냐고 하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대답하셨다.
한편 예수님의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또 표적을 요구한다.
그 표적이란 자신들이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말한다.
그러면서 구약성경을 들어서 하는 말이 ‘우리 조상들은 하늘에서 떡을 내려주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는데.....’
이 말을 들은 예수께서 진리를 말씀하신다.
그 만나 역시 모세가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우 모세스’가 문장 제일 앞에 나온다.
‘우’는 ‘아니다’는 부정어로서 이는 너희에게 만나를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는 말이며 곧 모세를 부정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인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모세가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서 준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모세가 너희 조상들에게 만나를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들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신다.
그 옛날 그 조상들에게 주신 만나는 참 떡이 아니다.
그것은 먹고 나면 다시 배고프고 마는 육신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참 떡인데, 만나는 그 참 떡의 모형이며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고 계신다.
(32b)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여기서 ‘주시나니’의 헬라어 ‘디도신’은 현재형으로 지금도 계속 참 떡을 주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떡은 먹고 다시 배고프고 마는 그런 육신의 떡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때 유대인들이 “주여, 그 떡을 우리에게 항상 주십시오.”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참 떡 곧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데, 이들은 예수님과 참 떡을 분리시켜서 이해하여 그 참 떡을 당신이 우리에게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참 떡의 의미를 말씀해 주신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하늘에서 아버지가 내려준 참 떡은 바로 나다.
따라서 내게 와서 나를 먹는 자는 결단코 주리지도 않고 나를 믿는 자(먹는 자,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참 떡인 ‘나’를 보고도 믿지 않았다고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신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며 나 또한 그들을 결단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은 나의 뜻을 행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오직 나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왔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심판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인 ‘나’를 보고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늘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와 사귐 가운데 계신다.
이 교제는 창세전부터 있었고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후에도 늘 그러하셨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무리들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신다.
그들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 말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신다.
“너희들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표적을 본 것 때문이 아니고 단지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어제 이들이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 곧 오병이어를 가지고 성인 남자만 5천 명을 먹인 것이 표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그 표적을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런 그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다니...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표적 말고 또 다른 표적이 있다는 말씀 아니겠는가?
오병이어 표적은 진짜 표적이 아니고 그것 말고 진짜 표적 곧 참된 표적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이제는 썩을 양식(눈에 보이는 표적과 같은)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눈에 보이지 않는 참된 표적)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땅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육신을 가진 이들의 양식이다.
이는 결국 썩어질 것들이다.
언젠가 썩어 없어질 것이라면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지금 현재도 썩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썩어질 양식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곧 참된 표적은 과연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표적을 보여달라고 한다.
(마 12:38-40)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동안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다.
병자를 고치는 것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 그리고 오병이어와 같은 표적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런 표적을 보여주신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요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표적의 목적은 아들을 믿게 하는 것이며 그 아들의 이름을 힘입어 아들의 생명 곧 영생을 얻게 하는데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런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도 믿지 않고 그리스도로 믿지도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믿음의 가장 선두에 있어야 할 자들이다.
그런데 믿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예수를 대적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악하고 음란한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오직 하나, 요나의 표적이다.
그것은 곧 무덤의 표적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곧 무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 중의 복음이며 복음의 진수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복음의 4가지 종류가 나온다.
곧 십자가복음, 장사복음, 부활복음, 현현복음이 그것이다.
(고전 15:3-5)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런데 이 4가지 복음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데 장사복음 곧 무덤복음을 가장 문두에 배치한다.
헬라어의 특성상 한 문장 안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그것이 가장 중요함을 강조하는 의미다.
물론 우리말 성경인 개역개정의 번역은 십자가와 장사 그리고 부활의 순서대로 나오지만 헬라어 원문은 무덤에 장사되심부터 나온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영어성경도 헬라어와 어순이 똑같은데, 영어성경을 보면 장사됨이 맨 앞에 배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롬 6:4, NIV) We were therefore buried with him through baptism into death in order that, just as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through the glory of the Father, we too may live a new life.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십자가복음과 부활복음만 강조하다보니까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 실재가 되지 않았다.
성경이 증거하는 무덤의 표적 즉 장사복음을 통해서만 부활의 생명을 얻을 수 있기에 장사복음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장사복음을 빼버리고 십자가복음에서 부활복음으로 건너뛰면 복음이 실재가 되지 않고 상징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보여주기 원하시는 참된 표적은 다름 아니라 무덤의 표적인 장사복음이었다.
이 무덤을 통해서 나오는 생명은 나의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무덤과 연합하여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우리가 상황적으로나 관계적 그리고 존재적인 무덤에 거할 때가 있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지었던 모든 죄악들을 쓰레기처리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덤의 심판을 주신 하나님의 심판이 옳음을 인정하는 것이 곧 주님의 무덤과 연합하는 것이다.
이처럼 주님의 무덤과 연합한 그 자리에서 의를 기초로 하여 주님께서 성소를 지으시고 그 성소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되신 그리스도의 생명 곧 새 생명이 나오는 것이다.
義란 세상적인 차원에서의 옳고 선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義는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용어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로서 언약의 대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상태가 바로 義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는 모래 위에 집을 지어놓고 그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의 義다.
그래서 이제는 그 무너진 집을 모래 위가 아니라 반석 곧 하나님의 말씀 위에 짓는 것이다(마 7:24-27).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어 우리의 죄를 죄로 드러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며 심판을 통하여 공의가 나타난다.
(시 94:14-15)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주신다.
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장사복음 곧 무덤의 표적을 주시는 것이며 이것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27절).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며(29절), 하나님의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다.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은 다름 아니라 영생이다(요 6:40).
나는 복음을 모를 때는 장사복음만 아니라 십자가복음과 부활복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믿지 않는 자였다.
그러다가 십자가와 부활복음을 알기까지도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복음을 알고 목사가 되어 전할 때도 여전히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무덤의 표적인 참된 표적이 장사복음으로 실재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주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장사복음을 알게 하셨다.
그리하여 목회의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목회를 하다보면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고난의 상황이 닥치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격려해야 할지 몰라서 늘 고민이었다.
그러다가 장사복음을 깨닫고 나서는 그런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에게 다른 것 전하지 않고 무덤의 표적인 장사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이 장사복음을 전할 때 나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깨달아지는데 정작 상황적인 무덤에 들어간 성도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저 지금 당장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이런 성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도 장사복음을 깨닫고 알아 이 복음을 전하였으며 또한 나에게도 이런 상황적인 무덤이 여러 차례 찾아왔었다.
하지만 말로는 그것이 나에게 주신 무덤이라고 고백은 하면서도 나의 영혼은 전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삶 그 자체가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았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나 자신은 속일 수 없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무덤과 같은 광야로 몰아 넣으셨다.
그리고 진짜 광야의 무덤이 무엇인지를 절절이 경험하게 하신다.
복음은 관념이나 지식이 결코 아니다.
이것을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에게 완전하게 경험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셔서 그 복음이 나의 복음이 되게 하셨다.
지금도 여전히 광야의 무덤 가운데 있다.
그리고 이 무덤은 나만의 무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신 무덤임을 인정하며 받아들인다.
따라서 우리 주님과 연합한 무덤이기에 이 무덤의 표적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수종말처리장에서 모든 더러운 물을 처리하듯 나의 더럽고 추한 모든 죄를 이 무덤에서 성령과 주의 보혈로 쓰레기처리 하셨다.
나는 그렇게 주님의 영,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아직 구속받지 못한 육체로 인하여 순간순간 정욕과 탐심 그리고 나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바로 십자가로 달려가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리고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주님이 하셨음을 인정하며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그 품으로 들어간다.
거기만 내가 살 수 있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참된 표적인 무덤의 표적 곧 장사복음은커녕 십자가와 부활복음도 잘 알지 못하는 자였나이다.
그래서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사역하고, 아버지의 뜻도 모르면서 아버지의 뜻을 운운했던 악하고 음란한 자였나이다.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이런 나를 주님께서는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지금의 무덤, 곧 광야의 무덤에 나를 몰아넣으시고 뜨거운 용광로에서 나의 옛 사람을 다 태우셨나이다.
지금도 상황적으로는 여전히 광야의 무덤이지만, 내 영혼은 그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나이다.
죽기에만 합당한 나를 창세전 약속대로 아들을 통하여 대속하시고 당신의 피값으로 나를 사셨사오니 나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소유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며 자기 소유를 외면하지 않으시기에 심판을 통하여 의를 세우셔서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나이다.
정직한 자는 그 심판을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시 94:14-15).
나 또한 정직한 자로 서기 원하여 주님의 심판이 옳음을 인정하며 아멘으로 받아들이오니 이 종을 긍휼히 여기사 온전한 생명으로 날마다 나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정결한 신부 되게 하옵소서.
내 영이 거할 거주지는 오직 주님 품이오니 그 거주지를 잃지 않도록 나를 강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