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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 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율이 내팽개치듯 신발을 벗어던지고는 뛰어들어왔다. 지은은 허겁지겁 방으로 뛰어들어가는 율의 뒤를 쫓아갔다.
"뭐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하지만 율은 지은이 묻는 말을 못 들은 건지 서둘러 책상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었다. 출판사로 갔던 일이 어찌되었나 궁금하기도 했고, 또 뭐때문에 저렇게 허둥거리는건지 궁금하기도 했던 지은은 가까이로 다가갔지만 율은 자신을 본 척도 않고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출판사 갔던건 어떻게 됐어?"
"..........."
"야! 내 말 안들려?"
"나 바뻐!!! 말 시키지마!!"
"얘가......."
어제밤까지만 해도 넋이 나간듯 내내 울기만 하던 얘가 갑자기 산삼이라도 캐먹고 온 건지 버럭 소리까지 지르고 있다. 지은은 그런 율의 변화가 놀랍기만 하다. 다시 돌아온 이후로 말수도 줄어들고 내내 우울해있었던 그녀였지만, 그전에 있던 율 역시 워낙에 조용하고 말이 없던 터라 지은은 둘이 다시 바뀌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했었다. 헌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율을 보며 다시 이전의 율로 돌아온 거 같아 한편으론 반갑게 느껴지기도 하다.
"뭘 찾는 건지 말해. 또 알아? 내가 아는 건지."
책상 여기저기를 뒤지는 모양새가 심상찮게 느껴진 지은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오늘 나갔던 일이 어찌되었는지 궁금하지만 지금 하는 모양새론 순순히 답이 나올것 같지가 않다. 지은은 그저 알아듣기 힘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여기저기 책상을 뒤지는 율을 지켜 보고만 있었다.
"그냥 결혼 할 리가 없어. 그렇게 쉽게 할 리 없어. 절대........"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분명 돌아오고 싶어 할거야. 분명히......."
"야!! 한 율!!!"
"왜!!!"
보다 못한 지은이 큰소리로 율을 불렀지만 되려 버럭 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지난 몇 달간 이전의 율의 침착함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갑자기 돌변하는 율이 쉽게 적응이 되질 않는다.
"와~ 니네 둘, 진짜 적응하기 힘들다."
"뭐가?"
"아니야."
"빨랑 말해!!!"
"나 진짜 적응하기 힘들어. "
"뭐가 적응하기 힘들다는 거야?"
"아니......걔는 하루 왠 종일 있어도 먼저 말하는 법이 없었어. 말도 조용 조용, 행동도 조심 조심........ 아무튼 너랑은 많이 달랐어. 근데 너, 다시 돌아온 뒤로 내내 말도 안하고 울기만 했잖아. 내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넋나간 사람처럼 눈도 안마주치고 그래서 나는 니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잘 실감이 안 났었는데 지금 너는........이렇게 갑자기 원래 너로 돌아오니깐 좀 당황스러워. 너야 원래대로 돌아온거라 치더라도 당하는 나는 좀 그래. 무슨 오뉴월 소나기도 아니고 이랬다저랬다........"
"그래서 갈려구 하잖아."
"간다니? 어딜?"
이리저리 불만을 늘어놓으며 퉁퉁거리던 지은은 율의 말에 귀가 번쩍 띈다. 간다니, 갑자기 어딜 간다는 건지, 또 그 사람을 찾아 그 무덤에라도 가겠다는 말인지, 게다가 심상찮게 변하는 율의 표정이 내심 불안하다.
"여기서 적응 못했다고 했지. 이곳에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 여겨서 짐이 되기 싫어 돌아간 거라고 했지?"
"누구 말하는 거야? 너 지금 걔 얘기하는 거야?"
"니가 그랬잖아. 걔 없어지기 전 날, 자기가 쓸모없는 존재라고 그랬다면서."
"그야......... 그랬었지. 그 전에 깡패들이랑 패싸움 한 것도 그렇고, 이번 출판사 이중 계약 사건은 완전 쇼킹 그 자체였거든. 그거 때문에 정환 오빠가 많이 곤란해졌다고, 다 자기 때문이라고, 자기는 여기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굉장히 자책했었거든."
"출판사는 해결됐어. 그 쪽에서 고소 취하한다고 했거든."
"그래? 아무 조건없이 그렇게 해준대?"
"계약금 돌려주고 그렇게 마무리 지었어."
"잘됐네. 정환오빠도 그렇고 경우 오빠도 그렇고 진짜 걱정 많이 했었는데."
지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율의 표정은 여전히 어둠기만 하다. 이곳에서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곳으로 돌아갔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려고 할까? 하지만 자신의 추측일뿐 자신은 없다. 과거의 사람이 이 곳에 적응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 곳에서 자신이 그랬던거 처럼. 하지만 돌아간 그 곳에 결혼이라는 커다란 벽이 놓여있다면 마음이 달라지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혼인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마음이 달라지겠지?"
"혼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랑 결혼하라고 한다면 분명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을 거야. 아무리 적응 못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 생각이 들어도, 그래도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랑 결혼하는거보다는........"
"무슨 말을 하는거니? 좀 알아듣게 말해. 누가 결혼한다는 거야?"
"걔 말야."
"걔? 지금 걔가 결혼한다는 거야?"
"걔 정환 오빠 사랑했지?"
"그거야......근데 정말 걔 결혼해? 누구랑?"
"그 사람이랑."
"그 사람? 그 사람이면........니가 사랑한다는 그 사람?"
"걔 그 사람 사랑 안 해. 그 사람도 걔 사랑 안하고."
"그거야 그렇겠지. 걘 정환오빠 좋아했으니깐. 근데 왜 결혼해?"
"거기는 자기가 결혼하고 싶다고 해서 하고,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부모님이 정해주면 죽지 않는 이상은 해야 만 해.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고 해도."
율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사실인가보다. 지은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생각해보니 옛날엔 그랬다고 했다. 혼사는 집안끼리 정하는 것이고 정작 부부가 되는 당사자들은 첫날밤에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고. 그런데 지금 그 곳으로 간 그 얘가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이다. 하긴 17년 전에 정혼을 했다고 했으니 결혼 할 때도 됐다. 하지만 이게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정작 사랑하는 사람은 이 곳에 있는데, 그 곳에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한다니, 더구나 그 상대방 역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리고 그 상대가 지금 이 곳에 있는데......
"평생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옆에서 지내는 거 보다는 그래도 여기 정환 오빠가 있는데 오고 싶어하지 않을까?"
"그거야........그리고 걔 완전히 적응 못했던 건 아니야. 처음엔 좀 많이 놀라고, 당황하고, 그랬었지만 점차 적응하고 있었어."
"그럼 걔가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한 건 순전히 그 사건 때문이네."
"아마 그렇겠지?"
확신이 선 것인지 열심히 책상을 뒤져 율이 찾아낸 것은 데스크 카렌더였다. 그녀는 데스크 카렌더에 적힌 날짜를 확인하고 있었다. 양력이 아닌 음력을.
"초 닷새.....초 닷새.......그 곳은 음력을 쓰고 있으니깐 내 계산이 맞다면 혼례식은....... 바로 내일이야!!"
"내일?"
"내일이 지나면 모든 게 끝이야. 지은아, 차 키 줘!"
"뭐?"
"차 키!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 정환 오빠가 걔 때문에 산거라며."
"그건 맞는데...........근데 너 지금 어딜 가려는 거야?"
"이 곳으로 돌아오고 싶을 거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결혼해서 평생을 사는 것보다 정환오빠한테로 돌아오고 싶을거야. 걔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기 있으니깐, 정환오빠니깐."
"그거야........"
"내가 그 곳으로 가고 싶은 것처럼. 내가 그 사람 곁으로 가고 싶은 것처럼."
"그래서, 너 지금 거길 다시 가겠다는 소리야?"
"갈수만 있다면........그 사람 곁으로 갈수만 있다면 가고 싶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차 키 줘!!!"
지은은 율보다 한발 앞서 뛰어가 책상위에 놓아두었던 차 키를 낚아챘다. 그 곳으로 다시 간다니, 무슨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그대로 두고 볼수만은 없었던 지은은 율을 만류하기 시작했다.
"키 내 놔!!"
"미쳤어? 너 지금 제 정신이야?"
"제 정신이야! 그러니깐 차 키 내놔!!"
"정신차려! 거기는 갈 수도 없지만, 설사 갈수 있다 치더라도 가면 안되는 곳이야!!"
"왜? 왜 안 돼?"
"거기가 어디라고 다시 가겠다는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쩌라구?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깟 남자 하나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그 곳으로 간다는게 말이 돼?"
"돼!! 말 되니깐 키 줘!"
잔뜩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던 율이 휙하니 몸을 돌렸다. 차 키를 뺏앗는다고 못 갈 율이 아니다. 밖에 나가면 택시고 버스고 널린게 차들인데, 가려고만 하면 못 갈 이유가 없다. 지은은 뛰어가 율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택시라도 타고 갈거니깐!"
"핸드폰도 없고, 전기도 없고, 하다못해 친구도 하나 없는 그 곳을 겨우 남자 하나 믿고 가겠다는 게 말이 돼? 사랑이 영원할거라 생각해? 너 없인 못살겠다고 결혼한 부부들도 너 때문에 못살겠다며 이혼하는 세상이야. 아무리 열정적인 사랑이라도 언젠가는 식어버려. 그럼 어떡할건데? 사랑이 식어버리고 나면 그땐 어쩔거냐구?"
"몰라!! 나도 모르겠어. 근데.......내가 죽을 거 같아. 지금 내가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죽을 거 같다구."
"율아....."
"내일이면 그 사람 다른 여자랑 결혼해야해. 지금이 아니면 영영 그 사람 잃어버려."
"조금만, 조금만 진정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시간이 없어. 내일이면 다 끝나."
"니네 엄마 아빠는? 부모님은 아무 상관 없어? 너 없어진 거 알면 부모님 심정이 어떨거 같니?"
"엄마....아빠....."
"그래. 지금 가면 두 번 다시는 부모님 얼굴 못 봐! 그래도 괜찮아?"
엄마, 아빠란 말에 율은 흠짓했다. 그 곳에서 힘든 시간들을 보낼 때면 생각나던 엄마, 아빠..........그 곳으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겠지. 하지만.........
"율아, 잘 생각해 봐. 여긴 너의 모든 것이 다 있어. 부모님과 친구들, 그리고 니가 21년을 살아 온 모든 것들이 다 여기 있다구. 그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갈만큼 그렇게 그 사람이 대단한거야?"
"그 얘가 올거야."
"뭐?"
"내가 가면 그 애가 이 곳으로 올거야. 나 대신에 그 애가 엄마, 아빠를 위해 착한 딸이 되 줄거야. 너도 봤잖아. 엄마, 아빠 나 없어진 줄도 모르셨어. 오히려 내가 많이 차분해지고 철 든 것 같다고 좋아하셨어."
"그건 걔가 넌 줄 아시니깐........."
"나도 잘 할거야. 그 얘가 내 대신 엄마, 아빠한테도 잘 하는 것처럼 나도 잘 할거야."
"그건 니 삶이 아니야. 여기서의 삶이 정말 니 꺼라고! 엄마,아빠한테 잘하는 거, 정환 오빠한테 잘하는 거, 그거 다 니가 여기서 해야 할 일들이야!!"
"알아!!! 아는데.........지은아, 그 사람 없이는 내 삶이 없어."
지은은 율의 두 눈에서 그리움 가득한 눈물을 보았다. 그 곳에서 그 고생을 했으면서도 다시 가고 싶을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가? 엄마, 아빠에 대한 그리움보다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건가?
"니네 부모님!!! 그래 똑같은 얼굴을 한 그 얘를 보면서 너라 생각하신다고 치더라도 너는 어떤데? 너는 부모님 잊어버리고 살수있어? 평생 그곳에서 후회 안하고 살 자신있어?"
"나도 몰라. 어쩌면 니 말처럼 언젠가 후회 할지도 몰라. 그런데, 그거 다 아는데, 그래도 가고 싶어. 언젠가는 후회할지도 모르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고 싶어. 만약에 지금 안 간다면 나 평생 오늘을 후회하면서 살 거야."
"율아......"
"나 그 사람 아니면 안 돼."
"미친........미친 년!"
"후회를 해도 그 사람 곁에서 할래."
누가 그랬던가, 사랑은 위대하다고. 하지만 지은은 이 순간 그런 말을 한 사람의 혀를 뽑아내 버리고 싶다. 사랑은 위대한 것이 아니라 미친 짓이다.
"너 정말 이기적인거 알아?"
"알아. 미안해 지은아."
"그래서!!! 방법은 있는 거야? 지난번처럼 그 무덤이 있는 곳에만 가면 되는거야?"
"아마도 그런거 같아.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그리고....."
율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분명 지은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고 사랑이 식으면 지금의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서 돌아온 그 순간부터 지금껏 일분 일초라도 그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을, 가슴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걸 어쩌랴.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와 결혼을 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심장이 멎어버릴것만 같아 견딜수가 없다. 분명 그녀 역시 그럴것이다.
"분명히, 분명히 걔도 여기로 돌아오고 싶을거야. 그 곳에 있으면 사랑하지않는 사람과 혼인하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야 하잖아. 분명히 올거야. 내일이 혼례식 날이니깐, 기회는 오늘뿐이야."
"나, 지금 너한테 차 키 준 거 두고 두고 후회 할 거야.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지도 몰라."
지은은 율의 손에 차 키를 넘겨주었다. 이 곳으로 돌아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웃는 걸 볼 수가 없었다. 내내 빈 하늘만 쳐다보며 울고 있는 율을 보며, 그녀가 마음을 놓고 그저 몸만 돌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율은 놓고 온 마음을 찾으려 가야하나 보다.
"미친년..........넌 죽을 때까지 미친년이야."
"그래 나는 미친년이야. 그러니깐 그 얘 오면 잘 해줘."
"내가 못해줘서 떠난거 아냐."
"알아, 근데 이번엔 그 얘도 이곳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될거야."
"뭔 소리야?"
"잘 있어. 고마웠어."
"율아, 행복해야 돼."
차 키를 넘겨받은 율은 지은을 힘껏 껴안았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 될 친구와 작별의 인사를 나눈 율은 그렇게 집을 나왔다.
주차장으로 뛰어내려온 율의 심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동을 거는 그녀의 손이 초조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운전을 하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그 곳으로 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제발 그녀가 그 곳으로 와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그리고 같은 목걸이를 가진 그녀가 와주어야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불 꺼진 사무실에 홀로 있는 정환은 아무런 의욕이 없는듯 의자를 젖히고 발을 책상위로 뻗은채 반쯤 누워 있었다. 잠이 든 것인지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만사가 귀찮은 표정이다.
'이대로 잠들어 영영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환은 모든 것이 귀찮다. 내일은, 아니 정확히 오늘은, 부모님께 율과의 파혼을 말씀드려야 한다. 율을 무척이나 이뻐하고 귀여워하셨던 부모님이셨으니 노발대발 하실게 분명하다. 오랜 친구로 지내셨던 율의 부모님에게서 율이 태어날때부터 며느리 삼겠다 어깃장을 부리셨던 아버지는 7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어거지로 빼앗다시피 약혼을 밀어붙이실만큼 율을 이뻐하셨다. 자신 역시 어려서부터 예쁘고 귀엽기만 했던 율과의 약혼이 싫지않았기에 그대로 받아들였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 먹는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더니, 자신의 마음도, 율의 마음도 이미 이곳에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의 약혼은 무의미하기만 하다.
"나도 알고, 율이도 아는데, 우리 노친네만 그걸 모르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쉰 정환은 벌떡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정환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걱정하는것이 파혼에 대한 부모님의 실망이 아니라는 걸, 그는 자신이 영영 그녀를 잊지못할까봐 그것이 두렵기만 하다. 어둠에 휩싸인 빌딩 아래로 생기 잃은 네온싸인만이 도시를 밝히고 있었다. 정환은 불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처음 네온싸인을 보며 눈이 휘둥그래지던 그녀가 떠올라서였다. 네온 싸인뿐 아니라 자동차를 타서도, 지하철을 타서도 참 많이도 놀라곤 했었는데..... ...
정환은 여전히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그녀를 떠올린다. 자신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며 수줍게 미소짓던 그녀의 모습, 첨이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그렇게 밝게 웃어보인것이. 그 웃음에 얼마나 행복한 마음이 되었었는지를 기억한다.
"또........"
무엇을 하든, 무엇을 보든 결국 생각의 끝은 그녀였다. 한숨을 내쉬던 정환은 손가락에 끼여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몇 번을 빼버리려 했지만 차마 빼버릴수가 없었다. 아니 빼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아직은........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잊지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잊혀지겠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깐, 그때까지만.......그때까지만이야."
하지만 자신이 없다. 이후에도 율은 자신의 주위에 있을테고, 그런 율을 보며 같은 얼굴, 같은 모습의 그녀를 잊을 자신이 없다. 차라리 율이 보이지 않는 해외로 나가버릴까하는 생각도 든다. 그때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드르륵 진동소리를 내며 떨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 누구 저리 애타게 자신을 찾는 건지 모르겠지만 별로 받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드르륵 거리는 핸드폰을 보며 경찰서에서 걸려왔던 전화가 생각났다. 그 날 걸려온 전화 한통에 혼비백산하며 경찰서로 뛰어갔던 일, 그리고 그 경찰서 간의 소파에서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던 그녀가 또 다시 떠오르자 정환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새차게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벼댔다.
"어휴~진짜!!! 서 정환!! 언제까지 이럴거야!!!"
자신을 향해 고함을 치던 정환은 액정에 뜬 지은의 이름을 확인하곤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어, 지은아."
<오빠.........>
"이 시간에 웬일이야?"
<율이........갔어.>
"가다니, 어딜가?"
<거기 갔다구.>
"거기라니?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율이랑 같이 있는 거 아냐?"
<아니야. 율이 그 사람한테 갔어.>
"뭐? 그게 무슨.......그 사람이면 그......."
<그래, 그 사람한테 가겠다고 그 무덤으로 갔어.>
"이 밤에 혼자 거길 갔단 말야? 지금 거길 가서 뭘 어쩌겠다고?"
<그 사람이 내일 결혼한대. 그래서 오늘 밖에 기회가 없다면서......>
"그게.......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솔직히 지은 자신도 무슨 뜻인지 다 이해하지 못한 말들이기에 정환이 그 말을 다 알아들을 것이란 기대는 없다. 하지만 이 밤에 혼자 그 곳을 찾아간 율을 그냥 내버려둘 수만은 없었기에 정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율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거지.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그리고 목걸이가 있으면 된다고?"
<나도 걔가 뭔 말을 하는건지 이해가 잘 안돼. 하지만 분명한건 다시 그 상나라로 돌아가겠다고 그렇게 말했어.>
"그게........그게 가능하단 말야?"
<율이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 걔도.......그러니깐 거기로 간 걔도 분명 돌아오고 싶어 할 거라면서, 내일이 혼례식이니깐 오늘 밖에 기회가 없다고.>
"혼례식?"
<그래, 거기서 걔가 결혼을 하는데 그 날이 내일이래.>
"내일?"
<아니, 오늘인가? 아휴!!! 나도 몰라. 걔가 오빠 사랑하니깐 결혼하는 거 알면 여기로 다시 오고 싶어 할 거라고, 자기는 그 사람 사랑하니깐 거기 갈 거라고....... 아무튼 그런 소리를 하고 나갔는데, 나는 오빠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전화한 거야.>
"내일이......내일이 결혼식이고?"
<율이가 그렇게 말했어.>
"아.........알았어. 내가 갈 볼께."
<지금 갈거야? 그럼 나도 같이........>
"아니야! 혼자 갈께. 넌 집에 있어. 혹시 율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정환은 전화를 끊었다. 머리가 멍해지는 것이 생각이 멈춰버린것 같다. 방금 들은 얘기가 뭔지, 자신이 들은 얘기가 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환은 커피숖에서 서둘러 뛰어나가던 율을 떠올렸다.
"같은 목걸이를 가진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게 되면 바뀌게 된다는 건가? "
정환은 카페에서 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원하진 않지만 정해진 혼사이기에 그 사람과 그녀는 혼례식을 올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오늘이었단 말인가? 만일........ 만일 그녀가 그곳에서의 혼례를 원치 않는다면, 그래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고싶어한다면, 율의 말처럼 기회는 오늘뿐이다.
"어쩌면.......어쩌면 돌아올지도 모른다!!!"
정환은 벗어놓은 겉옷을 집어들고는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주차장으로 달려간 정환은 성급하게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마찰음을 남기며 서둘러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첫댓글 다시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4명다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2초동안님! 항상 잊지않고 댓글 남겨주셔 감사합니다. 이제 얼마남지 않았어요. 끝까지 즐감해주세요.^^
현대의 율의 말처럼 다시 바뀔수 있엇으면 좋겟네요~ 서로 행복해야 하잖아요 저렇게 그리워하는데~
사랑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잖아요~흐엉~ 정말 정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요~^*^
미루님! 이야기가 끝나가고 있어요. 끝까지 즐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