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기춘(26·양주시청)은 악동인가, 아니면 철부지인가. 2008베이징 올림픽 남자 유도 73㎏급 은메달리스트 왕기춘이 또 구설에 올랐다. 지난달 논산에 있는 육군 훈련소에 입소한 상태에서 몰래 휴대전화를 쓰다 걸려 8일간 영창 처분을 받았고, 교육시간이 모자라 강제 퇴소 조치를 당한 것이다.
올
림픽 입상자인 왕기춘은 병역특례 혜택 대상자다. 훈련소에서 4주간 기초 군사교육을 받고 30개월 동안 체육 분야에서 활동하면
병역의무를 마친다. 그는 지난달 10일 입소하면서 휴대전화 두 대를 가져온 뒤 한 대만 반납하고, 나머지 한 대로 통화를 하다
23일 적발됐다. 훈련소에선 정보 보안 때문에 휴대전화 사용이 금지된다.
런던올림픽 당시 왕기춘이 2012년 7월31일 영국 런던의 엑셀 런던 사우스아레나에서 열린 대회 남자 73㎏급
8강전에서 니컬러스 델포폴로(미국·랭킹 12위)와의 경기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육군 측은 휴대전화를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왕기춘에게 통화명세까지 제시했다고 알려졌다. 결국 왕기춘은 영창에서 새해를 맞아야 했다. 그는 앞으로 병무청의 입영통지 절차를 거쳐 육군훈련소에 재입소해 4주 훈련을 다시 받아야 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직후 “광복절 태극기 거꾸로 달면 MB됩니다”며 이명박 조롱
왕
기춘은 그동안 몇 차례 말썽을 일으킨 전력이 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2위를 하고 나서 며칠 뒤인 8월15일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페이지에 ‘광복절, 오늘 태극기 다는 날~ 태극기 거꾸로 달면... MB 됩니다! 실수하지 마세요’라고 적었다.
앞
서 한국 여자 핸드볼 경기를 응원하던 이명박 대통령이 태극기를 거꾸로 들고 흔든 장면을 비꼰 것이었다. 그러자 왕기춘은 하루 만에
미니홈피에 ‘광복절날 (이 대통령이) 거꾸로 든 태극기가 재미있단 생각에 제가 공인임을 망각하고 글을 올렸다’면서 ‘저를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과 대통령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 전 홈피에 여성 가수 뒷모습 사진과 올린 뒤 “이것이 나이스 엉덩이” 그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 보름 전쯤 미니홈피에 한 여성 가수의 뒷모습 사진과 함께 ‘이것이 나이스 히프(엉덩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은메달을 따면서 뒤늦게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12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왕기춘이 영국 런던 엑셀노스 아레나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 유도 남자
73kg이하급 32강전에서 리낫 이브라기모프(카자흐스탄)를 연장전 끝에 누르기로 꺾고 16강에 오를 당시 경기 장면.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베이징 올림픽 당시 왕기춘은 만 20세가 되지 않은 젊은이였다. 부모님, 세 살
터울의 쌍둥이 누나를 둔 가정에서 외아들로 자란 그는 중·고교 시절부터 유도에 두각을 나타냈다. 엘리트 선수로 기대를 모으다
보니 운동에만 매달려야 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은 또 다른 부담이었다. 그는 서울체고 시절부터 개인 후원금이 생기면 집안 살림에
보태곤 했다.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성숙한 인격 형성에 필요한 환경을 접할 기회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유도 실력 탁월한 왕기춘, 이원희 김재범 제압… 한국 역대 최연소 우승자
유도 실력만큼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왕기춘은 용인대 신입생이었던 2007년 3월에 열린 국가대표 2차 선발전에서 2004 아테네 올림픽 챔피언인 이원희, 이원희의 라이벌이었던 김재범을 차례로 누르며 우승했다.
왕
기춘은 그해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선 1위를 했다. 한국의 역대 최연소 우승자(19세 3일)라는 영예까지
안았다. 하지만 기대를 모았던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선 결승전 시작 13초 만에 한판패로 졌다. 8강전서 다친 갈비뼈 부상의
후유증이 컸다. 결승 상대는 2007년 세계선수권 때 물리쳤던 선수(엘누르 맘마들리·아제르바이잔)라 아쉬움이 더 컸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세계선수권 정상에 올랐던 왕기춘은 정작 꿈의 무대로 삼았던 올림픽에서 좌절을 맛보면서 정신적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주변엔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을 해줄 인생의 ‘멘토’가 없었다.
2009년 세계선수권 직후 나이트클럽 갔다 여성 뺨 때려 또 입건
왕
기춘은 2009 네덜란드 로테르담 세계선수권에서 1위를 하며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하필 이때 또 사건에 휘말렸다.
세계선수권에서 돌아와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한 여성과 시비가 붙었다. 그는 몸가짐을 조심하지 못하고 이 여성의 뺨을 때렸다가 경찰에
입건됐다. 왕기춘은 “유도를 그만두겠다”면서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11일 만에 용인대에 복귀한 그는 유도회
차원의 징계로 사회봉사활동(두 달간 동호회 무료 강습)을 했다.
폭
행 사건 이후 왕기춘은 한동안 정체기에 시달렸다. 2010 도쿄 세계선수권에선 3연속 우승에 실패하고 동메달에 그쳤다. 그해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선 2위를 했다. 그는 2011년엔 용인대를 졸업하면서 포항시청으로부터 역대 유도 선수 최고 계약금인
3억원(연봉 7500만원)을 받았다. 그 해 아시아선수권에선 1위를 하며 자존심을 세웠는데, 파리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에선
16강에서 탈락했다. 왕
기춘은 2012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6개 국제대회에서 연속 1위를 하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4년을 별렀던 런던 올림픽 역시
운이 따르지 않았다. 32강전에서 오른쪽 팔꿈치 인대가 끊어진 것이다. 부상을 무릅쓰고 투혼을 발휘했지만, 준결승이 한계였다.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2012년 7월 런던올림픽 당시 왕기춘이 런던의 엑셀 런던에 위치한 올림픽 유도 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73kg급 동메달 결정전에서 우고 르그랑(프랑스)에게 패한 뒤 씁쓸한 인사를 남기고 퇴장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작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세계선수권에선 2회전에서 일본 선수에게 지도 4개를
뺏겨 반칙패하고 말았다. 1회전이 부전승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첫 판 탈락이었다. 왕기춘은 세계선수권 이후 체급을 81㎏급으로 하나
올렸다. 평소 체중이 80㎏이 넘어 대회 때마다 73㎏급에 맞추느라 몸무게를 많이 빼야 했고, 이 탓에 경기력이 떨어졌다고
판단했다. 작년 대표선발 탈락한 뒤 자비로 태릉선수촌 입소… 인생의 멘토가 없어 안타까워
81
㎏급으로 올리고 나선 의욕을 보였다. 작년 11월 열린 국가대표 1차전 선발전에 81㎏급으로 출전해 16강전에서 탈락하자 자비로
태릉선수촌에 들어와 대표선수들과 훈련했다. 미뤄왔던 기초 군사 교육도 받기 위해 논산훈련소에 들어갔다. 그런데 성실하게 훈련을
받지 못하고 ‘전화 사용’이라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대한유도회 측은 “왕기춘을 징계할 규정은 없다”고 밝혔다. 왕기춘이 국가대표가 아니고, 개인 신분으로 훈련소 입소 중에 벌어진 일이 유도와는 관계가 없다고 봤다.
물
론 왕기춘을 보는 유도계의 시선은 곱지 않다. 유도회의 한 관계자는 “왕기춘이 아직 자신을 공인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면서 “앞으로는 유도회 차원에서 선수 인성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