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500년 전 흑해 북방에는 얌나(Yamna)문화라고 하는 문화가 출현했다. 이 문화를 향유한 자들은 인도유럽어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늦은 기원전 2300년 경에는 카타콤 문화가 출현했다. 카타콤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문화는 이 시기 초원지대에서 자주 발견되는 무덤들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리고 후기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볼가강 하류를 중심으로 하는 스루브나 문화가 탄생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 스루브나 문화와 킴메르족이 관련이 깊다고 보고 있다. 킴메르. 지금부터 가장 먼저 다뤄볼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최초의 유목민족. 킴메르족>
킴메르 족에 대해서는 자료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애초에 그들은 너무 일찍 나타나 상세한 기록이 남을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헤로도투스나 아시리아의 기록, 학자들의 연구 결과 등을 통해 그들의 역사는 나름대로 유추할 수 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나 현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킴메르는 기원전 1200년 경 우크라이나 일대에 출현한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들이다. 청동기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이 지역에서 동물문양의 장식품 등을 만들면서 문화를 발전시켜나갔다.
이런 문화는 중국 상나라나 시베리아지역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이들은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켜나갔지만 기원전 8세기 경에는 철도 어느 정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할슈타트 문화(1)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비슷한 시기 동쪽에서 밀려 온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스키타이족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당시 킴메르족 내부의 상류층들은 스키타이와 싸울 것을 주장했고 백성들은 피난갈 것을 주장했는데 왕족들이 스키타이족과 싸우다 전멸하자 백성들이 왕족들을 묻어주고 남쪽으로 도주했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도주했다. 그들은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갔고 길목에 있던 우라르투 왕국을 공격했다. 아시리아를 상대로 오랫동안 열심히 싸워왔던 우라르투지만 남쪽과 북쪽 양방향에서 밀려오는 적들을 당해내지 못한 우라르투는 결국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방향을 서쪽으로 튼 킴메르족은 아나톨리아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들은 프리지아를 파괴하고 리디아를 공격, 사르디스를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킴메르족을 본 아시리아는 그들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였고, 마침 킴메르족을 추격하기 위해 스키타이족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오자,(2) 아시리아는 스키타이와 연합, 킴메르족을 협공하여 격파하였다. 이후 킴메르족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의 베히스툰 비석에서 언급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들은 딱히 유명하지는 않고 역사에서 단지 최초의 유목민족 정도로 언급된다. 다만 하워드의 소설을 기반으로 1980년대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으로 만들어졌다가 다시 리메이크되어 2011년 개봉된 미국 영화 코난 더 바바리안의 주인공 코난이 킴메르족이라는 설정이 붙어있다고 한다.
- 어? 잠깐? 코난? 지금 나 불렀어요?" by 사신 탐정 에도가와 코난 군-
- "어. 저기. 절 부른 건가요?" by 미래소년 코난 -
- "아니다! 바로 나를 부른거다!" by 코난 더 바바리안 -
- "아니다! 바로 나를 부른거다!" by 코난 더 바바리안 -
<스키타이. 공포의 존재.>
- 오스프리에서 묘사한 기원전 4세기경 스키타이족 그림. 1번은 스키타이 왕. 2번은 스키타이 왕비와 왕자, 3번은 왕실 근위대 -
스키타이족은 기원전 8세기경 유럽의 초원지대에 그 모습을 드러낸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물론 이후 등장할 대다수의 다른 유목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인도-유럽어 계통의 언어를 쓰는 비슷비슷한 유목민족들을 아울러 통칭하는 명칭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투르키스탄 지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아시리아인들은 이들을 아슈크자이라고 불렀고, 페르시아는 사카, 그리스는 스키타이라고 불렀다. 현대의 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우랄산맥 서쪽의 사람들은 스키타이, 우랄산맥 동쪽. 즉 중앙아시아에 살던 사람들은 사카라고 부르는 편이다. 여기서는 우랄산맥의 서쪽, 즉 유럽에서 살았던 스키타이족 위주로 다루는 바이다.
뛰어난 기마궁수들인 이들은 도시를 세우지 않고 이곳 저곳을 방랑하며 목축을 생업으로 하였다. 다만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크게 4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농경 스키타이, 농민 스키타이로 불리는 부류는 농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이들은 자신들이 재배한 곡식을 먹지 않고 흑해 남부에 있던 그리스인들에게 판매하였다고 한다. 이 4부류의 스키타이 중 왕후 스키타이라고 불려지는 부족이 가장 힘도 세고 규모가 크기에 스키타이를 지배했다고 전해진다.
스키타이인들은 고기를 좋아했는데 그 요리법이 특이했다고 한다. 고기를 익힐 때 그들은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발라낸 후 가마솥에 집어넣은 후 뼈를 태워 익혔으며 가마솥이 없을 때는 동물의 위를 대용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양, 말 등을 키웠지만 돼지고기는 좋아하지 않아 돼지는 키우지 않았다.
- 술잔 재료를 얻은 스키타이족. 모두 기원전 4세기경을 묘사한 듯 하다. 1번은 젊은 스키타이 전사. 2번은 스키타이 왕. 3번은 귀족이다. -
또한 이들은 매우 호전적이고 잔인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적의 머리를 취하면 머리 가죽을 벗겨 손수건처럼 만들고 고삐에 매달며, 두개골은 소가죽이나 금박을 입혀서 술잔으로 썼다고 전해진다. 가난한 사람들은 소가죽을, 귀족들은 금박을 입혔다고 전해진다. 물론 두개골을 술잔으로 쓰는 것은 훗날 흉노나 불가르족, 페체네그족(3) 역시 마찬가지였을 만큼 유목민족들한테 자주 보이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현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매우 잔인한 풍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 불운한 트라키아인을 죽인 스키타이족. 1번은 6세기 후반~5세기 초엽의 스키타이 전사. 2번은 4세기 경의 스키타이 전사. 3번은 기원전 4세기 경의 불운한 트라키아 전사. -
이들의 호전성은 술자리에서도 알 수가 있다. 이들은 1년에 1명이라도 죽이지 않은 남자는 따로 앉혀서 술을 마시게 하여 모욕을 주었고, 대신 적을 많이 죽인 자는 술잔을 더 주어 우대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적의 피를 술과 섞어 마시는 한편 적의 머리를 얻어야 전리품을 분배받을 자격을 주었다고 한다.
- 그리스풍 투구를 쓴 스키타이인. 1번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식 투구를 쓴 스키타이 왕. 2번은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의 중무장한 귀족 -
스키타이족은 이 시기 다른 곳에서도 흔히 나타난 문화적 공통 현상이기는 하지만 순장의 풍습이 존재했으며, 그리스와의 교류하며 어느 정도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스키타이인의 현자 한 명이 그리스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고도 하며, 스키타이와 그리스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며 무역을 통해 서로 이득을 보기도 했습니다.<스키타이. 중동에서 전설이 되다.>
이런 스키타이인들은 기원전 7세기 경 중동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이들은 킴메르족을 추격하다가 실수로 길을 잘못 들면서 아시리아와 접촉하였다고 한다. 스키타이의 여러 부족장 중 한 명이던 이샤파카이는 아시리아와 충돌했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다른 부족장 바르타투아는 아시리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같이 킴메르족을 섬멸하였다.
그리고 바르타투아의 아들 마디에스는 아시리아의 요청을 받고 메디아를 급습, 정복하는 한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진격하여 약탈하면서 이집트 국경까지 육박하였다. 그들의 약탈이 엄청난 수준이었기에 이스라엘의 예언자 예레미아가 이들과 관련된 기록을 남기고 이집트는 스키타이에 싹싹 빌어서 겨우 그들의 약탈을 피했을 정도였다.
다만 이들의 메디아 지배는 20년 넘게 지속되었지만 메디아인들의 반란으로 스키타이인들이 쫓겨나는 결말을 맞이했다. 참고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이후 다시 돌아온 스키타이인들은 현지에 놔두고 온 처들과 노예들이 바람펴서 낳은 자식들과 한동안 전쟁을 치뤄야 했다는 상당히 재미있는 기록을 남겼다.(4)
이후 기원전 6세기 경 페르시아를 통치한 왕중왕. '나는 관대하다'를 외친 크세르크세스의 아버지였던 다리우스 1세는 무엄하게도 한창 잘 나가는 페르시아를 따르지 않는 스키타이를 정복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페르시아에서 스키타이의 본거지 우크라이나로 가는 방법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번째는 지금의 그루지아를 거쳐 로스토프 방향으로 가는 방법이었다. 스키타이족이 이 경로를 통해 중동으로 내려온 적도 있었고, 거리 상으로 볼 때 이 경로를 통해 우크라이나로 가면 페르시아의 중심 지역이었던 수사, 바빌론과의 거리가 상당히 짧아졌기에 얼핏 보면 이 길로 가는 것이 상당히 현명한 선택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프로메테우스가 간을 독수리한테 쪼이던 카프카스 산맥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대 페르시아 속담에 '왕이 미치면 카프카스로 전쟁하러 간다.'(5)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카프카스는 험하기 짝이 없었다. 대군이 기동하고 보급을 하는 데는 아주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다리우스는 이 경로를 배제했다.
두번째 경로는 아나톨리아를 지나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현재의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거쳐가는 방법이었다. 거리가 끝내주게 멀기는 하지만 적어도 코카서스 산맥을 지나는 것보다는 편안하게 갈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다리우스는 이 경로를 거쳐 스키타이를 치기로 결정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당시 다리우스의 군대는 70만에 달했고 동원한 선박이 600여척에 달했다고 한다. 페르시아군은 보스포로스 해협에 거대한 부교를 놓고 기세좋게 스키타이를 치기 위해 행군하기 시작했다.
스키타이족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이들은 근처의 몇몇 민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일부는 이들의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자 스키타이는 우물을 메우고 곡식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청야전술을 전개하는 한편 미끼부대를 통해 스텝 지역의 상황을 잘 모르는 페르시아군이 자신들의 지원 요청을 거부한 민족들의 땅으로 진격하도록 유인했다. 정작 미끼부대는 페르시아군과 싸우지 않고 후퇴하기만 했으며 덕분에 페르시아군은 스키타이가 아니라 엉뚱한 민족들만 짓밟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꼴이 된 해당 민족들만 안습....
결국 이렇게 엉뚱한 민족들만 밟아버리고 정작 목표인 스키타이와는 한번도 싸워보지 못한 다리우스는 화가 단단히 나서 정면대결을 신청하는 편지를 그들에게 보냈다. 이에 대한 스키타이의 답변은 "이게 우리 방식이다. 꼬우셔? 아. 니들이 조상님 무덤을 훼손하면 또 모르겠는데 한 번 우리 조상님 무덤 잘 찾아봐."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게릴라전으로 페르시아군의 후방을 괴롭히며, 페르시아의 기병대를 패주시켰다.
이런 식으로 피해가 누적되자 다리우스는 이 싸움이 무익함을 깨닫고 후퇴를 결정한다. 스키타이군은 이들을 추격하지만 길이 엇갈린데다가 이오니아인들이 스키타이측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의 편에 서기로 결정함으로써(6) 페르시아군은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
<스키타이의 쇠락>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후로도 스키타이는 한동안 번영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중반 스키타이어 비스무리한 사투리 같은 걸 쓰는 역시 비슷한 인도-유럽어계통의 유목민족 사르미타아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7) 더군다나 기원전 339년 스키타이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와의 전쟁에서 대패하여 아테아스 왕이 전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거기에 310년 경에는 타티스 강에서 보스포루스 왕국(8)군에게 괴멸적인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
- "흐흐흐. 이제 스키타이의 시대는 끝났다!" 1번은 기원전 4세기 경의 불운한 스키타이 경기병. 2번은 기원전 4세기 경의 초기 사르마티아 전사. 3번은 기원전 5세기 경의 사르마티아 여전사. -
이후 사르마티아의 압박이 거세지고 서방에서는 다키아인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스키타이는 영원히 유럽 스텝 지대에서의 패권을 잃고 만다. 이들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기원전 110년 경 보스포루스 왕국을 스키타이인인 사우마코스가 반란을 일으켜 전복하지만, 얼마 안가 폰토스 왕 미트라다테스가 사우마코스를 제압하고 보스포루스 왕국을 정복한 것이었다.
다만 우랄산맥의 동쪽에 살고 있던 동족 사카족은 이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중국에 새(塞)로 알려진 이들은 대월지가 나타나기전까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였고 이후 이란과 인도로 피신했다. 이란에서는 한때 파르티아를 위협하였고 인도에도 몇 개의 왕국을 세웠지만 최후의 사카족 왕국인 서부 총독령이 서기 395년 굽타 왕조의 공격으로 멸망하면서 영원히 사라지게된다.
<스키타이의 유물>
스키타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반드시 넘어가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스키타이의 유물들이다. 스키타이의 유물 특징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아르케나스식 검, 마구, 시베리아 남부에서 기원한 동물 양식이 새겨진 장식품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들 중 동물 장식이나 황금으로 만든 유물들이 가장 유명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스키타이 황금유물전에서 알 수 있듯이 스키타이의 황금 유물들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있다. 어느 스키타이 무덤에서는 황금 왕관, 황금 장신구, 황금 팔찌 등이 여러 점 발굴되었다고 하며 헤로도토스 역시 이들이 황금을 좋아하고 많이 가지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금을 좋아하고 많이 가지고 다닌 이유는 그리스인들과 교역을 할 때 금이 가지고 다니기도 쉽고 가치도 보장받으면서 거래가 원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런 황금을 그리스나 스키타이의 장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장신구나 장식품으로 만들게 하였다.
그외에도 스키타이는 청동 거울 등으로도 유명하며 토기 등도 많이 출토되었다. 이런 스키타이 문화는 초원길을 유라시아 각지로 퍼져 스텝 전체에 걸쳐 유사한 문화가 널리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이 또 더 퍼져서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특히 대구 비산동 유적과 천마도, 동물형 띠고리 등이 이런 스키타이의 영향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시로 알려져있다.
이들이 이렇게 금을 좋아하고 많이 가지고 다닌 이유는 그리스인들과 교역을 할 때 금이 가지고 다니기도 쉽고 가치도 보장받으면서 거래가 원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런 황금을 그리스나 스키타이의 장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장신구나 장식품으로 만들게 하였다.
그외에도 스키타이는 청동 거울 등으로도 유명하며 토기 등도 많이 출토되었다. 이런 스키타이 문화는 초원길을 유라시아 각지로 퍼져 스텝 전체에 걸쳐 유사한 문화가 널리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이 또 더 퍼져서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특히 대구 비산동 유적과 천마도, 동물형 띠고리 등이 이런 스키타이의 영향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시로 알려져있다.
- 스키타이 문화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동물형 띄고리. 출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
(1)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유적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럽의 초기 철기시대 문화이다. 켈트족과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2) '중앙 유라시아 역사'에서는 스키타이의 남하는 킴메르족과 별 연관성이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3) 흉노는 대월지의 왕을, 불가르는 비잔틴의 황제를, 페체네그는 키예프 루스의 대공을 죽인후 두개골을 술잔으로 만든 적이 있다. 여담으로 오다 노부나가 역시 아사이 부자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두개골에 금박과 은박을 입혔다고 전해진다.
(4) 웬만하면 유머로 넘기고 받아들이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5) 다만 이 속담은 현재 한국에서는 체첸 반군 간부였던 샤밀 바사예프가 스웨덴 언론과 2005년에 한 인터뷰를 제외하고는 관련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진위여부는 불분명하다. 다만 '코카서스의 늑대'에서 한 번 인용된 후 상당히 널리 퍼진 말이기는 하다.
(6) 대다수 이오니아인들은 페르시아 편을 들기로 했을 때 딱 한 명만이 끝까지 스키타이의 말을 듣자고 주장했는데 그가 바로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밀티아데스다.
(7) 사르마티아의 경우 꽤 오래전부터 존재하였고 헤로도토스의 시기에 이미 상당한 세력을 자랑했던것 같다.
(8) 기원전 5세기 경 크림반도 지역에 세워진 그리스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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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기황후 '
몽골에서 고려 여인들을 많이도 데려간 이유가 뭘까요?
그 역사적 배경을 징기즈칸의 뿌리를 통해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몽골제국의 황실사서인 [몽골비사]에서
징기즈칸을 고리KOREA군장이라고 기록하고 있지요
분열된 몽골초원을 대통합한 후
유라시아를 제패한 징기즈칸은
친부가 말갈족이고, 양부인 에수게이가
코리아족이죠..모두 북만주에서 나온
고리족(부여.고구려.대진국)이라는 의미지요.
징기즈칸의 선조들은 북만주 흑룡강지역에서
수렵.어로생활을 하다가 광개토태왕 시기에
고구려의 지배를 피하여 흑룡강을 따라 오논강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요..
동부여에서 망명한 고추모가 부여왕에 즉위하여
국호를 고리로 바꾸자, 권력과 국호를 상실한
부여잔존집단이 부여왕 구태를 중심으로
고구려에 대적하면서 남하하여 온조 십제를 통합하여
구태백제를 세운 것 처럼 징기즈칸의 선조들은
고구려에 대적했던 부여집단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 발해는 말갈(메르케르)족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지요. 대진국 발해가 거란(요)에게
망한 후에 몽골초원으로 이주하여 몽골세력에서
가장 큰 부족집단인 케레이트(고려=고구려)족을
형성하게 되는데, 예수게이가 죽은 후 케레이트족의 옹칸은
징기즈칸을 양아들로 삼아 몽골 대제국을 건설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지요.
유럽으로 이주한 케레이트족을 켈트족이라고 불리우죠..
켈트족의 십자가문양은 고구려문양으로 유럽의 기독교집단이
수용하게 되고, 켈트족은 기독교를 수용하게 되죠..
부여 해모수의 선조나라가 바로 고리(코리아)국이죠.
그래서 부여에서 나온 고구려.백제.사로.몽골.불가리아는
고리(코리아족)족의 나라가 되는 거죠
고추모도 부여왕에 즉위한 후에 국호를 고리(코리아)로
바꾼 이유가 선조나라를 계승하겠다는 목적이였죠.
해모수-고추모의 선조나라 고리국은 단군한국의 봉후국으로
1대왕은 단군왕검 천왕의 차남인 부소 황태자였습니다.
단군한국 시기에는 서요하 내몽골지역(임황)에 위치하고 있었지요..
위만집단과 한나라의 침략으로 만주지역으로 이주했지요.
고리족의 나라들이 바로
부여.동부여.고구려.백제.사로.몽골.불가리아가 되는 거죠
그래서 몽골에게 코리아 한국은 모국(솔롱고스)이 되는 겁니다.
징기즈칸 어머니도 코리아족이고
징기즈칸의 황후도 코리아족이였지요.
그래서 몽골남자들의 꿈이
한국 여성들하고 결혼하는 겁니다..
몽골에서 고려 여인들을 데려간 이유는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고 봐야 합니다...
통일한국은 몽골을 동족국가로 삼고
만주를 회복하면 연방국가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코리아 대칸 -
첫댓글 니 글은 다 읽을 필요없고... 띄엄띄엄 읽으면 돼... 여하튼 고맙다... 킴메르족이 한반도를 떠난 한겨레라고 했지?... 맞아!... 그게 김씨야!... 킴=KIM=김... 맞지?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임마 슈메르.이집트문명이 한국문명이듯이 중앙아시아-중동으로 이주해 간 유목민족은 한반도-만주에 뿌리를 둔 한국의 갈래야...너 배두인이 누군지 아냐? 자신들이 백두산지역에서 왔다해서 백두인(베두인)이라고 한 거다..몰랐지? 시내산.아모리.이집트 등 중동지역의 족속명이나 지명.나라명들을 보면 한국 분국수준이다....쥐뿔도 모르면서 까불고 있어..ㅋ...니가 연구한 건 그냥 줄기연구하는 거야...이 형아는 뿌리를 알려 주쟎아..뿌리도 모르고 줄기만 만지면 그게 역사연구라 하겠어?
@나는 나였다 이 인간은 단어하나만 비슷하면 갖다붙이는구나....그러고 보니 보켜니식으로 해석 할만한게 있네....미국에서 엿먹어라 를 빠큐 라고 하는건 알고있지? 그게 바로 복현=보켠=뽀켠=뽀켜=빠켜=빠큐 로 이어져온것이 아니겠니...결국 니네 조상이 너의 탄생에 대해서 엿먹어라 라는 저주를 내린 증거가 되는것이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