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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꿈에도 그리던 하이디 만나러 고고고”
5. 패키지 첫날(6월 1일) - 스위스에서 맞닥뜨린 한국 칠공자와 팔선녀
인천국제공항-취리히국제공항-숙소(홀리데이인 익스프레스 취리히 에어포트)
<슈니케플라테 산자락에 핀 야생화. 아래 보이는 호수는 인터라켄 옆의 툰 호수>
드디어 여행 날이 밝았습니다. 오후 2시 20분 출발 비행기여서 오전 11시 20분에 모이기로 했습니다. 저희 집 근처에 사는 정형과 공덕역에서 만나 공항철도 전동차에 오르니 서울역에서 탄 현근이가 보입니다. 공항에 도착해 연락해보니 나머지 친구들도 이미 도착했거나 거의 다 온 모양입니다. 몇몇이 휴대전화 로밍, 어댑터 대여, 환전 등을 하는 사이 저는 나머지 친구들과 함께 여행사 직원에게 항공권, 일정표, 여권 커버, 캐리어에 달 이름표 등이 담긴 키트를 받았습니다.
한데 모여 캐리어 가방도 싣고 보딩패스를 받으러 가니 온라인 예약 줄은 짧고 그냥 줄은 깁니다. 올 1월 출국할 때도 보니 직원이 키오스크에서 보딩패스를 받은 뒤 오라고 안내하더군요. 저희도 키오스크에서 예약번호를 넣고 좌석을 받으려고 하니 6명까지만 됩니다. 이미 온라인 발권한 사람이 많은지 모여 있는 좌석이 드뭅니다. 그런데 갑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전화도 안 받습니다. 기다리는 사이 그나마 붙어 있는 좌석이 점점 사라집니다. 마음이 초조해지는데 나중에 갑표가 나타나 자기는 먼저 짐을 부쳤다고 합니다.
‘아니 벌써부터 이런 일이 생기다니’ 걱정과 짜증이 밀려옵니다. “외국에 나가면 전화도 잘 안될 텐데, 어디 가면 꼭 누구에게 얘기하고 가기로 하자”고 당부합니다. 10여 분 지체한 탓인지 현근과 정형 두 명 말고는 7명 좌석이 모두 떨어져 있습니다. 정형은 가운데 좌석이어서 힘들다며 저와 바꿔 달라고 합니다. 요즘은 항공편을 예약할 때 좌석을 미리 배정받는 사례가 많으니 이번처럼 패키지여행을 떠날 경우 공항에 일찍 도착해 서둘러 좌석을 받아야 합니다.
출국 수속을 하는 곳에도 줄이 많이 늘어서 있습니다. 성수기도 아닌 평일 낮인데도 외국에 나가는 사람이 많은 모양입니다. 얼마 전 대통령이 있는 자리에서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겠다고 약속한 덕분인지 공항 직원들의 표정이 모두 밝아 보이네요. 검색대를 통과한 뒤 일단 면세점에서 술을 5병 샀습니다. 인당 한 병씩 사려다가 “누가 먹느냐” “현지 술도 먹어야 할 것 아니냐” 등의 원성에 떠밀려 줄인 숫자입니다. 가용비(가격 대비 용량)를 먼저 따진 뒤 폭탄주 만들어 마실 것 아니니 블랜디보다는 싱글몰트 위스키로 4병 고르고 중국 백주 좋아하는 태성 총무의 기호에 맞춰 수정방을 한 병 샀습니다. 위스키는 1ℓ짜리가 5만~6만 원인데 수정방은 500㎖짜리가 10만 원이 넘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더니 여기에도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눈치작전으로 7명 자리를 확보하기가 어려워 반대편 식당으로 가서 기다립니다. 여긴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가 자리가 나면 들여 보내는 방식입니다. 전 그 틈을 이용해 아내가 부탁한 화장품도 사고 정관장 홍삼정도 사왔습니다. 돌아와 우리 자리에 가보니 소주가 두 병 놓여 있습니다. 누가 시켰는지 짐작이 갑니다. 출국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술과의 동행이 시작된 겁니다.
비행기에서는 현근이가 창가에 앉고 내가 그 옆에 앉았습니다. 바깥쪽에는 키 큰 서양 남자입니다. 영화 세 편에 방송 다큐 한 편 보니 시간이 훌쩍 갑니다. 두 줄 앞 창가 좌석의 동규를 보니 맥주에 와인에 여러 차례 술을 주문해 마십니다. 비행기 삯의 본전을 뽑으려는 심산인 듯합니다.
12시간 비행 끝에 취리히 공항에 내렸습니다. 지금부터 가슴이 떨리는 순간입니다. 패키지여행은 무엇보다 가이드와 일행을 잘 만나야 합니다. 우리 가이드의 이름은 최명숙. 젊은 여자 이름은 아닌 듯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확인해보니 올해 환갑이고, 미국에서 스위스인 남자와 만나 결혼한 뒤 아이 넷을 키우며 스위스에서 30년째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아쉽지만 팔자려니 해야죠.
패키지 일행 27명 가운데 우리가 7명이어서 최대 계파인 줄 알았는데 8명이 함께 온 여성 팀이 있습니다. 이른바 팔선녀 팀. 경기도 광주에서 온 팀으로 아이가 한 유치원에 다녀 친해진 사이라고 합니다. 평균 나이는 우리보다 좀 많은 듯합니다. 중년 부부가 4쌍, 한 팀은 중년 부부에 아들 하나. 중년 여성 혼자 온 사람도 있습니다. 혼자 온 여성은 내리막길을 뒤로 돌아서 내려갈 정도로 무릎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남편이 여행을 즐기지 않아 가끔 홀로 다닌다고 합니다. 비행기 탈 때는 그런 대로 봐줄 만한 인물도 있고 젊은 여자도 있던데 모두 하나투어나 모두투어로 온 모양입니다. 칠공자와 팔선녀의 밀당 게임은 패키지 일정 내내 계속됩니다.
비행기에서 두 끼에 간식까지 먹었다고 저녁은 안 줍니다. 공항 인근의 호텔로 데려다주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볼 게 없습니다. 공항 이용객을 위한 전형적인 중급 호텔입니다. 우리가 쓸 방 세 곳을 확인한 뒤 곧바로 잠자리 배정을 위한 첫 사다리 게임에 들어갔습니다. 방 전체에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가 놓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전체 여행 기간의 운을 가늠할 중요한 순간입니다. 대부분 친구들은 3인실 보조침대보다 코를 고는 저와 룸메이트가 되는 걸 걱정하는 눈치입니다. 3인실의 보조침대를 보니 매트리스만 바닥에 놓여 있어 데미지가 적지 않을 듯합니다.
첫 불운의 주인공은 정형. 그것도 코골이 저와 룸메이트가 됐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영수입니다. 태성과 동규, 갑표와 현근이 한 방을 쓰기로 정해졌습니다. 정형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짐을 옮기려고 하니 방문이 잠겨 있습니다. 키는 꽂아둔 채 그냥 방문을 닫고 나온 겁니다. 태성이는 호텔에 처음 자보는지 “문을 안 잠그고 나왔는데 왜 잠겼지?”라고 의아해합니다. ‘촌놈 하고는 참.’ 남은 일정이 심히 걱정됩니다.
정형이가 키를 다시 받으러 프런트에 내려갔다가 희소식을 갖고 돌아옵니다. 오늘 운전기사가 집으로 갔다가 아침에 오기 때문에 기사 방이 비었으니 그 방을 우리더러 쓰라고 했답니다. 저보고 대장이니까 독방을 쓰라고 합니다. 대접해준다는 느낌보다 왠지 격리 수용되는 느낌입니다. 잠자리는 정해졌고 갑표와 현근 방에 모였습니다. 먹거리를 정리해 보니 태성이가 봉지라면 10개, 동규가 소주 40팩, 제가 비빔면 6개와 신라면 3개와 볶음김치 24봉과 멸치볶음과 스팸과 깻잎통조림, 갑표가 짜왕 5개(봉지면으로 사오랬더니 컵면을 사왔네요)와 고추장과 각종 통조림과 스팸, 정형이가 큰 컵라면 10개(부피를 줄이기 위해 용기와 면을 분리해 가져왔네요)와 김, 현근이가 육포와 오징어포와 믹스너츠와 껌, 영수가 햇반 20개와 고추장 등을 가져왔습니다.
양주 한 병(매켈란)을 까서 안주와 먹으며 앞으로의 여정을 그려 봅니다. 패키지 일행의 면면을 떠올리며 “팔선녀 가운데 건질 인물 하나도 없더라”라고 누가 말하자 “그쪽에서도 우리 보고 똑같은 말을 하지 않겠냐”고 꼬집습니다. 잠자리 사다리 룰을 얘기하며 두 번 연속 보조침대에 걸리면 다음에는 빼주자는 말이 나왔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복불복 원칙을 지키자고 결론 냅니다.
뱃속이 출출해 라면도 끓였습니다. 전기냄비의 용량이 1.5ℓ짜린데 두 개를 끓이려니 금세 끓어 넘칩니다. 550㎖의 끓는 물에 라면을 넣으라는 용법에 따라 1.2ℓ짜리를 살까 1.8ℓ짜리를 살까 망설이다가 1.5ℓ짜리를 샀는데 잘못된 선택인 것 같습니다. 1개 반이 딱 맞습니다. 혹시 이 냄비를 사실 분이 있다면 1.2ℓ를 사서 하나씩 끓여 드십시오. 1.8ℓ짜리는 높아서 여행용 캐리어에 잘 안 들어갈 겁니다.
6. 둘째날(6월 2일) -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는 곳마다 그림엽서
취리히-베른-인터라켄-아레슐르흐트(아레강협곡)-아델보덴(뷰사이트)
모두 시차 때문에 일찍 잠이 깼습니다. 새벽 3시(한국 시간으론 오전 10시)부터 깨 뒤척였다는 사람도 있고, 저도 새벽부터 자다깨다 하다가 5시에 일어났습니다. 물가가 비싼 탓인지 호텔이 후진 탓인지 조식이 부실합니다. 달걀 프라이나 스크램블도 없고 베이컨도 보이지 않습니다. 동규가 “패키지에서는 음식 기대하지 말래”라고 말합니다. 옳은 얘기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여행입니다. 상쾌한 기분으로 버스에 오릅니다. 첫 행선지는 스위스의 수도 베른입니다. 수도라고 해도 그리 크지는 않아 인구가 13만여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위스는 26개의 칸톤(주)으로 이뤄진 연방국인데 미국이나 독일보다 훨씬 분권형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누군지, 장관이 누군지, 국회의원이 누군지 별 관심이 없고 동네 의원만 잘 뽑으면 나라가 잘 돌아간다고 여긴다고 합니다.
<장미공원에서 내려다본 베른시 전경. 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음.>
장미공원의 길을 따라가자 저 멀리 아레강이 감돌아 흐르고 베른 시가지가 보입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하네요. 이곳의 규모가 좀 크다뿐이지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하회마을과 비슷한 형상입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 요들송을 보급한 김홍철이 불렀던 “아름다운 베르네/ 맑은 시냇물이 넘쳐 흐르네~”의 그 베른이랍니다. 그런데 빙하가 녹은 물이 석회함 지대를 흘러내려 ‘맑은 물’은 아닙니다.
<베른의 어원이 곰에서 나왔고 도시의 탄생도 곰과 관련이 있기에 시내 곳곳에 곰 동물원도 있고 이처럼 곰 모양도 많이 눈에 띈다.>
베른의 어원은 곰(영어로 Bear)이랍니다. 도시 탄생의 전설에 곰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심 한가운데 곰을 키우는 우리도 있고 곳곳에 곰 장식이 눈에 띕니다. 독일의 베를린도 곰의 도시여서 베를린영화제 수상자들에게 황금곰상이나 은곰상을 줍니다. 제가 올 1월에 갔던 스페인 마드리드의 상징도 곰입니다.
<대원들이 학문에 특별히 관심이 많아 20세기 석학 아인슈타인이 살던 집 앞에서 한 컷. 왼쪽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오영수 김태성 김정형 홍갑표 박동규 이희용 김현근>
아인슈타인이 살았다는 아인슈타인하우스, ‘꽃할배’에 등장한 대형 시계탑, 종교개혁 후 교회로 탈바꿈한 대성당 등을 둘러봅니다. 성당 안에도 들어가 보고 첨탑 전망대에도 올라가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는 모양입니다.
가이드가 종교개혁에 관해 간명하게 설명합니다. “종교개혁은 루터만 한 게 아니라 츠빙글리와 칼뱅 등 여러 사람이 한 겁니다. 종교개혁이 가장 잘한 것은 신부만 읽을 수 있던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 등으로 번역하고 당시 보급된 인쇄술을 통해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게 한 겁니다. 종교개혁이 가장 잘못한 것은 성당의 조각을 파괴하고 벽화를 석회로 덮어 위대한 예술품들을 파괴한 겁니다. 성당 안에 들어가도 볼 게 없습니다.” 비전문가 가이드답게 500년 전 종교개혁을 너무 단순화한 설명이지만 그래도 핵심 가운데 중요한 두 가지를 짚기는 했습니다.
<베른시 중심가 건물에 내걸린 각종 깃발>
베른 거리에서 인상적인 것은 깃발입니다. 스위스 깃발, 칸톤 깃발, 동네 깃발, 직능조합(길드) 깃발 등이 가는 곳마다 펄럭입니다. 차 안에서 가이드가 문제를 하나 냈습니다. “패키지 팀이 올 때마다 문제를 내는데 아무도 못 맞히시더군요. 스위스의 영문 약어가 CH인데 ‘Confederation Helvetica’, 즉 라틴어로 헬베티카 연방이라는 뜻입니다(치즈와 초콜릿의 나라란 농담도 있더군요). 그런데 자동차에 보면 CH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은 자동차도 있고 안 붙은 차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행들이 이런저런 추측을 쏟아내는데 가이드가 말한 정답은 ”이 스티커가 3프랑, 5프랑이나 하기 때문에 너무 비싸서 붙인 차도 있고 안 붙인 차도 있다“는 겁니다. 기대한 답이 나오지 않고 허무 개그처럼 느껴져 모두 속았다는 표정입니다.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 졸졸 따라다니는 전형적인 패키지여행을 즐깁니다. 가다가 우리 가운데 가장 통이 큰 ‘만수르’(이 별명은 억수르까지 높아졌다가 다시 천수르, 백수르로 떨어지고 막판에는 발음도 이상한 십수르까지 전락하기도 합니다) 정형이가 산 부침개 같은 길거리음식도 먹어봅니다.
점심은 인터라켄으로 가서 먹습니다. 인터라켄은 융프라우 여행의 관문으로 우리로 따지면 설악산 입구의 속초와도 같은 곳이지요. 두 호수 사이에 있는 마을(영어로 Inter Lake)이란 뜻으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곳 한식당에서 2만5천 원짜리 설렁탕을 먹습니다. 김치를 더 달라고 하면 추가 요금을 받습니다. 스위스가 국민소득이 높고 EU 가입국이 아니어서 물가가 비싸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심했습니다.
화장실 요금도 다른 유럽 도시에서는 50센트(600원)가 보통인데 인터라켄에서는 2프랑(2천300원)이나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가이드가 무료 화장실을 틈틈이 가르쳐주고, 관광지에는 비교적 무료 화장실이 많은 덕분에 볼일 보는 데 돈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돈이 덜 드는 것도 있습니다. 스위스는 수질이 좋아 욕실의 수돗물을 그냥 마셔도 되고 도시 곳곳에 설치된 분수의 물을 받아 마셔도 된다고 합니다. 아무데서나 에비앙이나 볼빅이 콸콸 나온다는 거죠. 그래서인지 호텔 방마다 서비스로 주는 생수병이 없더군요. 물병이 필요해서 첫날 버스에서 생수를 몇 병 샀을 뿐 그 뒤로도 물을 사 마실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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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물이 시원스럽게 흐르는 아레강 협곡>
밥을 먹고 아레슐르흐트로 가 아레강 협곡을 구경합니다. 물이 석회석을 깎아 만든 경치가 일품입니다. 비좁은 틈새 위로 파란 하늘이 보이고 아래로는 녹색의 물이 빠른 속도로 흘러갑니다. 가끔 폭포도 떨어집니다. 유람을 마치고 기념품 가게에서 태성이가 감자 깎는 칼을 삽니다. 가격이 적당하고 어느 집에서나 필요한 물건이이서 선물하기 좋다며 제게도 권합니다. 그 말이 그럴듯해 저도 우산과 함께 감자칼을 샀습니다. 버스에 오르니 가이드가 비싸게 샀다고 말하더군요. 실제로 조금 후에 들른 인터라켄 기념품점에서는 몇백 원 싸게 팔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물건을 마음먹었을 때 사야지 이것저것 따져보고 사려다가 정작 마음에 드는 물건을 놓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해외여행 갈 때 누가 물건을 사면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잘 샀다” “싸게 샀다”고 격려해주지요. 그래야 산 사람의 불안감이 덜어지거든요.
버스는 셜록 홈스가 최후를 맞았던 마이링겐 시내를 지나갑니다.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탄 채 주마간산격으로 훑어봅니다. 곳곳에 셜록 홈스 이름을 딴 식당과 호텔 간판이 보입니다. 셜록 홈스 박물관도 있다고 합니다(코난 도일 박물관이 아니고?). 순수문학 작가를 꿈꿨고 추리작가로 성공한 뒤에도 그 꿈을 버리지 않은 코난 도일은 셜록 홈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설에서 주인공 셜록 홈스를 죽입니다. 이곳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악당 모리어티 교수와 혈투를 벌이다 함께 떨어져 숨지는 것으로 마무리했지요. 그러나 코난 도일의 시도는 실패합니다. 홈스를 살려내라는 팬들의 요구가 빗발친 것이지요. 항의 편지와 방문 공세를 견디다 못한 도일은 홈스가 죽다 살아난 것으로 이야기를 바꿔 셜록 홈스 시리즈를 재개합니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마이링겐이 홈스가 최후를 맞은 곳이 아닌데도 이곳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팔아 셜록 홈스를 좋아하는 관광객을 끌어들입니다.
버스는 인터라켄으로 다시 들어와 주차장에 우리를 내려놓고 기념품을 살 시간을 주네요. 태성이는 감자칼 가격을 다시 확인하고, 정형이는 알프스 지도가 그려진 손수건을 찾고, 영수는 아내에게 줄 시계를 삽니다. 동규는 경제학도 출신답게(지금은 치과의사지만) 우리 멤버가 산 선물의 가격 정보를 수집하며 시장 조사를 합니다. 우리식 슈퍼마켓인 Coop에 들러 저녁에 마실 와인과 안주로 삶아 먹을 소시지도 샀습니다.
보람찬 하루 관광 일정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아델보덴으로 향합니다. 차창으로 보이는 경치가 환상적입니다. 흰 눈을 뒤집어쓴 설산이 줄지어 있고 아래로는 초록 융단을 깔아놓은 듯 예쁜 초원과 언덕이 펼쳐집니다. 아무 데나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도 그림엽서고 액자 속 그림입니다. 연봉 사이로 융프라우가 웅장하게 솟아 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 뒤 그곳을 오를 예정이지만 다른 패키지 일행은 먼발치로만 보고 가야 합니다.
가이드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가까이 있는 산은 높아 보여도 실제로는 안 높고 멀리 보이는 산이 더 높습니다. 그 높이를 어떻게 아는지 아세요? 나무가 없으면 수목 성장 한계선인 2,000m를 넘는 산이고, 만년설이 덮여 있으면 3,000m를 넘는 산입니다. 지금 6월인데도 눈이 있으면 3,000m를 넘는 산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버스가 산길을 올라갑니다. 고도계의 숫자가 계속 높아지다가 네 자리 숫자로 바뀝니다. 산이 높아질수록 골이 깊어지고 하늘은 좁아집니다. 스키와 온천으로 이름난 아델보덴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묵을 숙소 뷰사이트는 스위스의 오두막집 샬레 풍으로 지어졌습니다. 방에도 다락방이 붙어 있습니다. 경치가 정말 끝내줍니다.
<식당 분기기가 좋아 와인을 주문해 건배. 왼쪽부터 박동규 오영수 김정형 이희용 김태성 김현근 홍갑표.>
밖으로 산책을 다녀온 뒤 저녁을 먹으러 호텔 식당으로 모였습니다. 스위스산 송아지 요리라고 해서 스테이크가 나오나 기대했는데 얇게 저민 고기에 소스를 뿌린, 고기덮밥 같은 식사가 나왔습니다. 맛은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 식당 분위기와 창밖 경치가 매력적이어서 총무를 졸라 와인도 두 병 주문해 건배를 합니다. 와인을 따라주는데 서로 더 달라며 보채니 하이디풍으로 차려입은 여종업원이 웃음을 터뜨립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치러진 사다리 타기의 열기가 창 밖 풍경 때문에 높아졌습니다. 운 좋게도 제가 산이 보이는 방의 창가 침대를 차지했고 현근이가 문 쪽 침대에 당첨됐습니다. 영수와 동규는 마을이 보이는 쪽 방의 룸메이트(룸메)가 됐고 태성, 갑표, 정형이 3인실에 뽑혔는데 다행히 보조침대는 없이 태성과 갑표가 싱글베드, 정형이 더블베드를 차지했습니다. 모이는 건 정형 방에서였습니다. 공기도 맑고 풍경도 좋습니다. 이곳은 위도가 높은 데다 서머타임까지 적용돼 9시가 넘어도 밖이 훤합니다. 전망은 좋은데 술을 마시려면 컴컴한 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묵은 방의 베란다에서 바라본 풍경>
오늘은 와인도 따고 양주 듀워(Dewar)를 골랐습니다. 영어 철자를 어떻게 읽는지 몰라 ‘디워’라고 하니 누가 심형래가 만든 영화 제목 아니냐고 합니다. 갑표가 끼어듭니다. “정종처럼 데워 마시라고 ‘데워’라고 쓴 거 아냐?” 모두 배꼽을 잡고 뒤집어집니다.
사실상의 첫날 관광 일정을 마치고 웃음꽃을 피웁니다. 경치 이야기보다 일행들의 용모 평가와 관계 추리 등에 많은 시간을 쏟습니다. 팔선녀와 우리 칠공자가 정분이 날까봐 가이드가 식당 자리를 일부러 띄어 놓는다는 음모설이 제기됩니다. 아레강 협곡에서 우리 중 누가 팔선녀 단체 사진을 찍어주려고 하니 한 여성이 “됐어요”라고 냉정하게 말한 것을 두고 태성이는 “아마도 그 그룹의 리더가 매파(척화파)여서 비둘기파(주화파)가 우리랑 대화를 나누려는 것을 막는 모양”이라는 분석을 내놓습니다. 동규는 “어차피 아쉬울 것 없다. 오히려 가이드가 가장 낫다”며 미련 두지 말라고 일축합니다.
7. 셋째날(6월 3일) - 불운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태성
아델보덴-츠바이지멘-그뤼에르-브베이-몽트뢰-로잔(아고라스위스나이트)
일출을 보려고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직은 시차 때문에 잠이 빨리 깹니다. 하늘이 훤해졌는데도 붉은 기운은 보이지 않습니다. 높은 산이 가로막혀 우리가 기대하는 일출 모습이 연출되지 않습니다. 정작 산허리 옆으로 해가 나타났을 때는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지경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며칠 더 묵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아침을 먹고 츠바이지멘역으로 갑니다. 열차를 기다리기 전에 제가 문제를 하나 냅니다. ‘스위스’처럼 앞뒤가 똑같은 세 글자 단어를 하나씩 말해보라는 거죠. 갑표가 가장 먼저 ‘보노보’라고 합니다. 제가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니 침팬지와 비슷한 원숭이 종류라는군요. 허걱! 문제를 낸 사람이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말하다니. 동규는 치과의사답게 ‘이갈이’를 댑니다. 이것 역시 제가 생각 못한 단어였죠. 오늘은 새로운 사례를 많이 건질 듯해서 기대가 큽니다. 그러나 웬걸. 그 다음부터는 허당입니다. 태성이가 ‘우병우’를 말했다가 퇴짜를 맞고 겨우 ‘기러기’를 말했을 뿐입니다. 누가 ‘좌향좌’를 말했지만 논란의 소지가 있는 단어죠. ‘기레기’를 말하는 친구도 있더군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어떤 단어가 있나. 우리 일행이 스위스를 떠나는 날 대목에서 몇 가지 더 말씀드릴게요.
<스위스 관광열차 내부. 천장 양 옆으로도 유리창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몽트본역까지 파노라마 열차를 탑니다. 창 밖 풍경이 잘 보이도록 천정 옆 모서리 쪽에도 면을 만들어 창을 끼웠습니다.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치즈로 유명한 그뤼에르로 갑니다. 언덕길을 오르니 아담한 광장에 오래된 건물이 둘러쳐진 중세풍 마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고성이 나오는데 중간에 안 어울리게도 에일리언 박물관이 있습니다. 입장료를 받는 고성은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빙 도는데 내려다보는 경치가 예쁩니다. 고성 입구의 기념품점에서 잠시 구경하고 있으려니 경비원이 누구를 급하게 제지합니다. 알고 보니 갑표가 출구를 착각해 입구로 들어가려다 제지당한 겁니다. 이 얘기를 들은 태성이가 “뒤로 걸어 들어가다가 걸리면 나가려는 중이었다”고 변명하라고 쌍팔년도 드립을 칩니다. 일행 중 몇몇은 고성 둘레길에서 다른 길로 빠져 주차장으로 향합니다. 멋진 산을 보고도 본격적인 트레킹을 하지 못해 조바심이 난 모양이네요.
<그뤼에르의 고성>
그 다음 차례는 치즈 공장입니다. 일정표에 적힌 대로 치즈 만들기 체험을 하게 하는 대신 치즈를 만드는 과정을 영상과 유리창 너머로 보게 해줍니다. 시식용 치즈도 나눠주고 치즈도 파는데, 가이드가 “아직 돌아갈 날이 많은데 지금 치즈를 사면 녹을 수 있다. 치즈를 사서 가져가고 싶으면 비행기 타기 직전에 사라”고 충고합니다. 이곳은 아직 가이드와 기념품점, 특산품점과 관광객 돈 빼먹기 묵계가 안 이뤄진 모양입니다. 어제 인터라켄에서도 한 기념품점의 할인쿠폰을 주기는 했으나 양떼 몰아서 우리에 집어넣듯이 특정 가게로 안내하지는 않더군요.
점심 메뉴는 스위스 전통음식인 퐁듀와 라클렛입니다. 퐁듀는 와인을 넣어 끓인 치즈 용액(이렇게 쓰니 무슨 화학 용어 같군요. 근데 국물이라고 하니 어색하고)에 긴 포크로 빵 조각을 찍어 ‘퐁’ 빠뜨린 ‘뒤' 먹는 것이고, 라클렛은 불에 녹인 치즈를 감자에 발라 먹는 겁니다. 저를 포함해 친구들 표정이 떨떠름합니다. 짜고 코리한 냄새가 심하게 풍겨 마음에 안 드는 눈치입니다. 자린고비 태성 총무도 목에 잘 안 넘어가는지 맥주를 주문하자는 제안을 처음엔 거부했다가 나중엔 수락하네요. 근데 맥주도 별 맛이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전 괜찮던데.
<식품박물관 앞 레만호에 꽂혀 있는 높이 7m의 대형 포크>
다음 행선지는 레만호변의 브베이입니다. 네슬레 본사가 있고 식품박물관이 있어 그 유명한 대형 포크가 꽂혀 있는 곳이지요. 찰리 채플린이 만년을 이곳에서 보내 그의 조각 등신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채플린을 등신(병신)처럼 만들었다는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아니네”라고 제가 실없는 농담을 던집니다. 레만호 반대편은 프랑스입니다. 이곳은 불어를 씁니다. 다들 영화 ‘레만호에 지다’를 입에 올리는데 정작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친구는 하나도 없더군요. 나중에 확인해 보니 1979년 KBS로 방송된 이영하-정애리 주연의 특집 드라마였습니다.
tvN '뭉쳐야 뜬다' 멤버들이 파노라마 사진을 찍어 유명해진 시옹성>
레만호를 따라 동쪽으로 더 가니 몽트뢰가 나옵니다. 유명한 시옹성이 있는 곳이지요. ‘뭉쳐야 뜬다’에서는 파노라마로 촬영하는 동안 한 인물이 순간 이동을 해 사진 양쪽에 나오도록 찍었던 장소입니다. 성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주변에서 사진만 찍습니다. 저가 패키지의 한계가 곳곳에서 나타나지만 그렇게 아쉽지는 않습니다.
<프레디 머큐리 동상의 포즈를 따라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찍힌 사진을 보니 딴판>
몽트뢰 시내로 가니 전설적인 록그룹 퀸의 리더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이 있습니다.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 왼손으로는 마이크가 꽂힌 스탠드를 쥔 모습입니다. “위 아 더 챔피언‘을 부르는 건지 ’위 윌 위 윌 락 유‘를 외치는지 모르겠지만 인상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나라도 대중예술인들의 동상을 더 많이 만들면 좋겠습니다. 저마다 머큐리의 모습을 흉내 내며 찍으려 하는데 폭우가 내려 비를 피하러 갑니다.
저녁 메뉴는 일식입니다. 중식과 일식을 함께 파는 식당에 앉았습니다. 생선초밥과 튀김과 우동 등이 나옵니다. 저녁 식사 후 로잔으로 가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를 들를 예정이었다는데 비가 와서 그냥 숙소로 들어갑니다.
사실상 오늘밤 처음으로 보조침대의 주인공을 가리는 사다리 타기가 펼쳐집니다. 태성이가 보조침대에 당첨됐고 저와 동규가 함께 3인실에 배정됐습니다. 403호의 룸메는 현근과 갑표, 405호의 룸메는 정형과 영수로 정해졌습니다. 이틀 내리 양주를 마셨으니 오늘은 중국 술을 마시자고 합니다. 40도짜리 위스키를 마시다가 60도짜리 수정방을 입에 털어넣으니 화공약품을 마신 듯 식도를 거쳐 위장까지 짜르르한 느낌이 전해집니다.
전 잘 때 코를 좀 고는 편이어서 거금 4만 원을 들여 코골이 방지약을 사갔습니다. 그런데 이날까지 사용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태성이는 이튿날 아침 평가를 부탁하자 “너보다 동규가 코를 더 골더라. 넌 좀 잠꼬대를 하긴 하지만”이라고 말합니다. 전날 자보니 현근이도 코를 골던데 왜 저만 코골이의 주범이 돼 기피인물로 찍혔던 거죠? 억울합니다.
첫댓글 마그마, 토마토가 생각났다. 우리말이 찾기 어렵네. ㅎ
역쉬 회장님은 총명하시네
아리아도 있네요. 이 글 중간쯤의 일주일도 ㅎ
우*우에서 빵빵 터졌어요. 제가 일로 아는 후배 중에 이*이 씨도 있는데...ㅎ
야구모자의 힘인가, 희망과용기 형이 젤로 젊어 보이셔요. ^^
프레디 머큐리 만나고 감
내 고딩친구 정상호는 아직...
2부 완독. 전철 내려야합니다. 환승 대기중. 퀴즈 답 투척, 별똥별, 옥상옥.
복불복 아리아 소방소 ㅋㅋ
놈놈놈은 안돼나요?
소방소는 소방서의 잘못 아닌가? 놈놈놈은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오른 한 단어가 아님.
@희망과용기 문제 풀려는 욕심에..ㅎㅎ
들버들 세우세 반의반 기울기 락앤락 도 있네요...아침부터 씨름중
@꿈푸리 많이 나오네. 근데 한 단어가 아닌 건 안된다니까. 자라!자!
진짜 꿈푸리가 묘한 데서 집착의 끝을 보이네. 푸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