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결혼생활(1)
1978년 6월 제대한 그는, 입대전부터 안면이 있었던 경음악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원래 스크랩이나 앨범정리 등을 좋아했던 그는 자신이 만든 노래를 차곡차곡 모아 두었는데,
그 중 몇곡을 뽑아 취입을 한 것이다.
그의 첫 음반의 출반이 그해 11월이었으니까 제대하자마자
출반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은 순조롭게 풀려 나갔다.
첫 음반은 반응이 좋았고, 음반사에서는 매달 생활비를 지급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돈 많이 벌어 부유하게 살고 싶은 욕심은 애초에 없었던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조촐한 자취방에서 살 수 있을 정도의 생활에 만족했다.
또한 1978년 그와 비숫한 처지의 신인 가수였던 박은옥과
만나 연애를 시작하였다.
원래 연애라는 것이 사람을 적잖이 괴롭히는 것이어서 약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그런 갈등을 빼놓고서는 모든 것이 편안했다.
그의 삶에서 가장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시기였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촛불)을 수상했다.
궁핍한 결혼생활 (2)
그는 드디어 1980년 5월 박은옥과 결혼한다.
주위와 음반사에서는 너무 이르다고 충고했지만 그들은 결혼을 강행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는 새로운 고민에 봉착한다.
그는 차츰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인기 연예인 노릇이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쇼맨쉽도 길러야 하고 오락프로그램에도 나가야 했다.
그런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 자신과는 너무도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그의 아내 박은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방송출연을 그만둔다면 그들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1980년 1월, 결혼하기 몇 달 전에 출반된 두번째 음반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는 첫 음반처럼 반응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첫음반보다 그의 특성은 잘 드러나 있는 노래들이 모아져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잘 팔리는 음반은 아니었다.
인기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당장 생계의 문제로 닥쳐왔다. 그가 별다른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음반사도 경영이 어려워지자 음반사가 그동안 대주던 생활비 지급이 중단되었다. 결혼까지 하고서 경제적 궁핍을 겪게 된 것이다.
궁핍한 결혼생활 (3)
이런 상태에서 만든 세번째 음반 「우네」 역시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딸 새난슬이 태어나서 식구는 늘었는데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포장마차를 할까, 뭐를 해서 먹고 살까, 별 생각을 다 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이 그를 매우 어지럽고 복잡한 고민으로 빠뜨렸다.
인기를 위해서 내키지 않는 노래를 만들 수는 없었고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길래 이렇게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을 풀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러나 고민이 그렇게 시원스레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그 이전 시기에 비해서 삶과 사회에 가까워진 성숙함과 절실함을 보이고 있었다.
더 이상 사춘기식의 사치스런 고민은 아니었다.
경제적 궁핍을 견디지 못해 불리한 조건으로 지구 레코드에서 네번째 음반을 내게 되었다.
그것이 「떠나가는 배」였다.
이 음반은 잘 팔렸고 그의 경제적 궁핍은 어느 정도는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모든 고민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는 그 이전의 몇 년 동안의 활동의 공백을 깨고 활동을 재개하는 것을 의미했다.
궁핍한 결혼생활 (4)
1985년 1월부터 시작하여 1987년 10월까지 계속된 '정태춘, 박은옥의 얘기 노래마당'으로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공연의 규모는 크지 않았으며 대개 소극장이었다.
3년에 걸친 소극장 공연은 그의 활동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이제까지 방송이나 음반으로만 대중을 만나왔기 때문에 대중과의 만남은 항상 간접적이었던 것에 비해 이 공연은 전국 각지의 관객들과 만나 아주 가깝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고 대중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자리를 통해 음반이나 방송에서는 할 수 없었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구와 미국 지향의 음악문화 풍토, 방송 체계 자체의 문제, 전통문화의 문제 등 평소 그가 단편적으로나마 뚝심있게 생각했던 문제들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또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머릿속에서만 엉켜있던 문제들을 하나씩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또한 그 동안 심의에 걸려 음반으로는 발표할 수 없었던 노래들도 공연을 통해 부를 수 있었다.
그의 활동은 한동안의 침체를 극복하고 완전히 본 궤도에 오른 셈이었다.
민중의 곁으로 (1)
'얘기 노래 마당'을 하고 있었던 3년 동안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민중의 힘으로 87년 6월 투쟁이 일어났고 제5공화국이 무너졌다.
이러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사회와 정치를 보는 의식에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그도 이러한 사회변화 속에서 자신의 고민들을 보다 구체화하기시작했다.
88년에 출반한 6집 「무진 새노래」에는 그동안 심의를 의식하여 발표하기 힘들었던 노래들이 실려있다.
그로서는 이전에 만들어 놓았던 작품을 다듬어 발표한 것이었으며, 단지 6월 투쟁으로 가시화되었던
민중의 힘이 공연윤리위원회로 하여금 일시적이고 부분적으로나마 심의 기준을 완화하게끔 함으로써 비로소 음반의 발표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이은 상당한 변화로 받아들여졌고, 실제로 이 음반의 출반을 계기로 작품 창작이나 활동의 새로운 변화를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87년 이후에 창작한 다시 가는 노래,권주가, 아가야 가자,버섯구름의 노래, 어허 배달나라 광영이여는 이전 작품에 비해 보다 뚜렷하게 사회적 현실에 대한 형상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국악이 가지고 있는 힘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민중의 곁으로 (2)
87년 이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경향의 노래들은 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노래극 대본에 의해 진행되는 공연으로서 노래와 사설, 슬라이드 등의 구성으로 일관된 주제의식을 관철시키고 있는 공연이다.
88년 12월 부산을 출발하여 89년 3월 서울, 진주, 대구,
광주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얘기 노래 마당'과 6집 음반을 통해 드러내 보였던 그의 변화된 모습을 가장 뚜렷이 확인시킬 수 있는 계기였다.
그의 변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88년 청계피복노조 주최의 집회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여 대중집회의 단골 손님이 되었다.
그의 감수성은 이제 내적으로 침잠하는 폐쇄적 자기고백의 정서를 넘어서서 탁 트인 광장에 모인 집단화된 대중의 아우성 같은 정서를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는데에 이르게 되었다.
80년대 초반 그의 고민과 방황은 사회의식과 한국적 힘의 정서를 받아들이면서, 보다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 속에서 나름대로의 해결의 방향을 찾은 셈이다.
물론 이러한 해결은 완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결의 시작이고 새로운 고민의 출발이라는 편이 옳을 듯하다.
민중의 곁으로 (3)
여태까지의 활동은 단지 서막이었다.
그는 더 큰 일을 저지를 구상을 하고 있었다.
전국 각 대학의 총학생회와 결합하여 전교조 지지 무료 야외공연을 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올바른 교육의 자리매김을 위한 기획공연'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전교조 지지 공연은 단순한 공연을 넘어선 대형집회였다.
89년 9월부터 한 달 동안 전국적인 대형 대중집회가 이루어졌다.
공연의 내용도 전교조 이야기를 담은 짧은 마당극을 만들어 삽입하였고, 본 공연 전에는 총학생회에서 마련한 프로그램과 교육운동 담당자들이 직접 나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대중과 호흡하는 공연의 분위기는 실내공연의 폐쇄적 정서를 청산하고 야외공연에서의 대중의 진보성을 흡수하면서 놀랄 만큼 건강하게 바뀌었다.
무료공연을 하느라 개인적인 재정문제도 있었지만
사회현실과 사회운동, 예술운동, 음악운동에 대해서 새롭게 눈뜨게 되었다.
노래운동, 음악운동이라는 것이 독자적 유통구조와 수용자층, 역사를 가진 독자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끼게 되었고, 그도 이미 그 안으로 한걸음 들어섰음을 알게 되었다.
민중의 곁으로 (4)
89년 가을 '한돌 정태춘 노찾사'라는 합동공연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음악운동권의 사람들과 공연을 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전노협 건설을 위한 '꽃다지' 서울공연, 90년 들어서서 이루어진 많은 수의 대형 합동공연에는 거의 참가하였다.
대학이나 재야단체의 집회에 참가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이러한 공연들을 통해 이제는 그러한 성과를 모은 새로운 음반을 생각한다.
이전에 공윤심의에 걸려 음반화하지 못했던 곡들을 다시 심의에 넣었다.
많은 작품중에서 심의에 통과된 것은 고작 황토강으로 뿐이었다.
공윤의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윤이 가진 지배 이데올로기 수호라는 본질은 이전보다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각오를 했다.
즉 불법음반을 내는 것이다.
이것이 「아! 대한민국」과 「92년 장마, 종로에서」이다. 이 일로 그는 94년 불구속기소되기도 했지만 96년 '가요 사전심의 제도 폐지'라는 알찬 열매를 맺는다.
음악인생 20년이 넘은 그는 이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앞으로 노래를 외치는 투사로서 우리 대중음악의 잣대를 제시하기를 기대해 본다.